계절은 카메라의 프레임을 통해 다시 피어난다. '오겡끼데스까'라는 절규가 하얀 설원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우리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겨져 있었을까? 얼마전 종영한 <구르미 그린 달빛>이 청춘 남녀의 사랑을 '엽록소'가 터져나오는 봄을 배경으로 하지 않았다면 그 싱그러움이 한껏 돋보일 수 있었을까? 이렇게 드라마나 영화 속 계절은 그 어떤 등장인물보다 중요한 배역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런데 드라마 속 계절에는 편애가 존재한다. 청춘의 봄이거나, 이별의 가을이거나, 혹은 겨울이거나, '삼복더위'의 그 무더움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그리 흔치 않다.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라면 모를까? 그런데, 여름, 그것도 딴 곳도 아닌 경상분지에 위치한 무더운 안동이라니. 하지만 그 여름엔 무지 덥고, 겨울엔 무지 추운 안동이 <드라마 스페셜-국시집 여자>를 통해 싱그러운 여름의 도시로 거듭 태어났다.
왜 하필 여름이었을까?
드라마 속 안동에서 만나게 된 두 남녀, 좀 더 정확하게 미진(전혜빈 분)의 국시집에 들렀다 첫 눈에 안동 촌구석 국시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도회적 분위기의 미진에게 시선을 빼앗겨 안동에 내려올 때마다 참새가 물레방앗간 드나들 듯 국시집을 들른 진우(박병은 분), 왜 하필 이들은 여름에 안동을 휩쓸고 다녔던 것일까?
두 사람은 국시집에 안동 국시를 먹으러왔다는 핑계로 드나드는 진우와, 그런 진우의 속이 빤히 보이는 추근거림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미진과의 안동댐을 비롯하여, 도산 서원 등 안동의 주요 명소를 연애인지, 동행인지 모를 행보로 돌아다닌다. 그 쨍쨍한 여름날에. 드라마는 '여름'의 햇빛을 화사한 화면에 잔뜩 머금고, 그 빛을 반사해 안동을 비춘다.
그러나 그 쨍쨍한 햇빛 속의 두 남녀의 처지는 그리 밝지 못하다. 일단 유부남인 진우, 아내와 결혼 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이가 없어, 병원을 가보자는 요청을 받는 처지의 그가, 죽은 선배의 원고 정리를 핑계로 주말마다 안동에 내려온다. 그런 그가 들른 국시집 미진도 도대체 이런 곳에서 국시집을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모호한 존재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미진의 이름도 모른 채, 진우의 정체도 모른 채 안동의 여름을 거닌다. 진우가 사준 양산까지 쓰고.
여름은 '욕망'의 계절이다. 봄에 돋아난 새싹은 더운 여름의 열기를 업고 청록빛의 녹음을 발산한다. 온도가 올라가는 만큼 생명력을 그 속에서 저마다 한껏 자신을 열어제친다. 바로 그런 '욕망'의 계절에 미진과 진우는 안동이란 고장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모른 척 방기하며 관계를 지속시킨다.
사랑이 끝난 후 비로소 솔직해진 욕망
하지만 사랑인 듯 불륜인 듯 관계를 이어나가는 두 사람의 존재는 물을 막아선 안동댐의 수문처럼 닫혀있다. 진우가 들려준 선배 도근(김태우 분)의 소설 속 사랑하는 연인의 자살을 목격하고 후각을 상실한 조향사가 미진이듯이, 진우 역시 도근의 소설을 통해 드러나듯 한때 소설을 써보려했던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후각을 잃고 도시의 삶을 포기한 미진과 꿈을 덮은 채 도시에서 살던 진우가 여름의 안동에서 만나, 짖눌렀던 '욕망'의 한 자락을 슬며시 내보이기 시작한다. 병원에 가는 대신 조금 더 노력해보자는 아내의 말에 슬그머니 뒤돌아 눈을 감던 진우가 미진과의 모텔행을 꿈꾸고, 사랑하는 이를 눈앞에서 잃고 사랑을 포기했던 미진이 그와 같은 체취를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아슬아슬하던 욕망인지, 욕정인지, 사랑인지 모를 관계는 유부남이었던 진우, 미진과 상규(오대환 분)의 관계를 오해한 진우를 통해 어긋나기 시작한다. 손 한번 잡지 못했던 그저 흘러오는 체취만으로도 아찔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오해와 어긋남이 드러난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솔직해 진다.
그리고 파탄 이후에 비로소 솔직해진 관계를 통해, 두 사람은 비로소 그동안 억눌러왔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찌질하게 미진 앞에 아내까지 데리고 와서 호기를 부리다 이혼까지 당해버린 진우는 이제 좀 어른이 되어보라는 아내의 말에 비로소 '소설'이라는 진짜 욕망을 마주설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후각을 잃었다는 이유로 안동까지 도망쳤던 미진 역시 진우와의 알듯모를 듯한 관계가 깨진 후 여전히 삶을 내던질 수 없는 자신의 솔직한 욕망을 인정한다.
쨍쨍 내리쬐는 여름의 열기 속을 기꺼이 거닐던 두 사람은 그 여름의 열기만큼이나 여전한 자신들의 진짜 욕망을 마주하게 된다. 비록 이제 거리에서 마주쳐도 그저 스쳐지나갈 인연이 되었지만, 여름, 그리고 안동의 한 시절은 두 사람을 비로소 자신으로 드러내게 만든다.
이렇게 여름이라는 계절과 안동이라는 아름다운 고장을 배경으로 탄생된 <국시집 여자>는 마치 고등학교 미전의 수채화같은 드라마다. 지난 여름의 열기를 망각하고, 여름의 안동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여름이, 그리고 안동이 이렇게 싱그러운 계절이었으며, 아름다운 고장이었는가를 새삼 확인시켜주는 드라마는, 그저 계절과 고장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 배경과 그 배경 속의 이야기를 절묘한 상징의 고리를 통해 설명하고 드러내 줌으로써, 완성도 높은 단막극으로 탄생된다. 특히 빗속에서 안동댐 수문의 방류와, 그런 모습을 보며 삶의 욕구를 되찾는 미진이라던가, 여운을 잔뜩 남긴 두 사람의 재회 장면 등은 드라마 스페셜이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단막극의 묘기를 한껏 풀어낸다. 물론 이런 배경과 서사의 절묘함을 더욱 맛깔나게 만든 건 분위기있는 전혜빈과 모호한 박병은의 안정감있는 조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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