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이 세상에 그 실체가 드러난 날부터 인터넷 공간에는 이 영화와 관련된 '스포'들이 발에 채였다. 누가 귀신이라는 둥, 누가 악마라는 둥, 누가 범인이라는 둥, 그리고 어떤 것들이 등장한다는 둥,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영화와 관련된 악의적 스포를 날리는 통에, 다수의 인터넷 유저들이 곤혹스러워했다. 심지어, 자신이 채여 걸린 '스포'로 인해 영화 관람을 주저하는 경우조차도 있었다. 그렇다면 <곡성>의 스포는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같은 것일까? 만약 <곡성>을 보고 위와 같은 '스포'를 날린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영화 <곡성>의 미혹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리라. 그는 아직 영화 속 '미혹'의 세계 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이 진실이라 믿는 것을 '폭로'한다 생각하고 있다. 영화 속 그들처럼.
나홍진, 그 집요함의 끝
처음 <곡성> 시사회가 끝나고 평론가들, 그리고 그 이후에 인터뷰를 한 배우들은 감독 나홍진에 대해 '집요하다', '끝까지 간다'라고 이구동성 입을 모았다. 결국 주인공을 비롯한 마을의 몇 가족을 참혹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만 영화 속 '사건'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 그 보다는 런닝 타임이 마무리되고, 내내 '미혹'되었던 영화 속 내용에서 정신이 들 무렵, 비로소 뒤통수를 치고 들어오는 진실, 결국 거개의 영화가 영화의 클라이막스 즈음에는 진실을 드러내고야 마는 그 지점을 넘어, 심지어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도 깨닫지 못한 그 진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미혹'된 그 무엇에 정신이 팔려, 진짜 '곡소리'를 내야 할 것들을 놓칠지도 모를 관객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 속 종구(곽도원 분)는 런닝 타임 내내 자신이 맞닦뜨린 뜻밖의 사건에 질문을 던진다. 내게, 우리 가족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냐고? 하지만, 그가 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 사건을 보는 '눈'을 잃었다. 동료 경찰이 하릴 없이 풀어놓은 마을에 온 일본 사람의 이야기를 퉁바리를 주며 치워버렸던 그가, 정작 자신이 사건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자, 그 누구보다 먼저 그 '미끼'를 덥석 물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미끼'를 문 것은 종구만이 아니다. 그가 휩쓸려 들어간 '미혹'의 덫에 관객도 동시에 텀벙 빠져들어, 그와 함께, 미로 속을 헤맨다. 그리고 눈 앞의 여인이냐, 무명의 전화 메시지냐에 갈등에 빠진 그 수간,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빠진 '미혹'의 덫을 깨닫지 못한 종구마냥, 영화를 본 사람들도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종구가 되어 버린다.
종구는 경찰이다.
종구는 경찰이다. 비록 정전 된 파출소에 나신의 여성이 등장하자 뛸 듯이 놀라 자빠지고, 살해 현장에 제대로 들이닥치지 못한 채 멀찍이 빙빙 도는 '덜 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그는 경찰이다. 딸내미에게 '아빠가 경찰이니까 걱정하지마' 라고 자부심을 보였던. 그리고, 동료 경찰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제 먼저 '미혹'의 덫에 걸렸어도, 피부과를 조사해 보라거나, 귀신처럼 등장한 여성이 최근 벌어진 사건 가족의 안주인이었음을 깨닫는 등 제법 촉이 밝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그의 경찰 노릇은.
자신이 사건의 소용돌이에 빠지자, 자신의 피붙이가 당사자가 된 이후, 그는 한번도 경찰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번연히 드러난 검사 결과조차 제쳐버리고, 자신이 빠져버린 '미혹'의 실체를 쫓아 비합법적 수단을 불사한다. 어디 경찰뿐인가. 종구의 나와바리의 친구들도, 그리고 그를 돕느라 합류했던 '부사제도', 친구의 일이기에, 친척 형의 일이기에, 스스로 '미혹'의 길을 자초한다. 그들이 스스로 한껏 '미혹의 미끼를 물때, 연신 tv에서는 독버섯으로 만든 음료가 시판되었다는 기사가 등장하고, 종구의 집 문 앞을 비롯하여, 마을 곳곳에서 해골 모양으로 말라가는 그것들이 주렁주렁 등장해도, 그 누구하나 거기에 주목하지 않는다. 대신, 더 분명해 보이는, '미혹'에 빠져든다.
무명=미혹
'미혹'의 뜻을 찾기 위해 검색을 하면 뜻밖에도 '무명(無明)'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바로 영화 속 천우희를 뜻한다. 무명은 불교 용어로 미혹, 어리석음, 무지를 뜻한다. 그리고 미혹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목격자로 부터 시작하여, 무명은 결국 종구를 미혹한다.
4월 22일 <한겨레 신문>의 정재승 칼럼 제목은 <우리는 왜 설현의 손짓과 송중기의 눈빛에 무너지나?>이다. 정재승 교수는 이 글을 통해, '사바나'에 살던 인류의 조상과 동일한 dna를 가진 인류는 그 조상과 동일한 심리적 기제를 가지고 있다거 밝힌다. 즉 사바나 시절 순간순간 생존을 염려했던 시절, 깊은 사고 대신 순간의 반응이 우선이었던 인류는 1만여년 전의 그 dna를 가지고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주도면밀하게 미래를 계획하는 듯하지만, 설현과 송중기의 매력이라는 순간의 쾌락 중추에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21세기의 마을 주민들은 눈 앞의 검시 보고서보다, 그 눈을 가리고 마을을 떠도는 소문, 가상의 신을 만들어 자신의 소망을 투영한 사바나인들처럼, 자신의 두려움과 절망을 '미혹'된 그 무엇에 투영하고야 만다. 왜 자신에게 이런 불행이 닥쳤는지, 그 질문에 대한 불가지성을 불가해한 신비의 영역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뉴욕대 심리학과 교수 게리 마커스는 이런 인간을 두고 서투르지만 세련되지 않은 해결책이란 의미의 고물 컴퓨터 '클루지(kluge)'라 애교스럽게 부르지만, 그것이 아이돌과 배우의 눈빛에 빠져드는 정도를 넘어, 공익을 담당해야 할 자가 자신의 직무를 방기하고, 돈 1000만원 짜리 굿이란 기복적 행위를 마다하지 않고, '사적' 처단과 교통사고 피해자 유기를 서슴지 않는 상황이 되면, 사바나의 부작용 수준을 넘어선다.
거대한 우화 <곡성>
무엇보다, 이런 부작용이 나, 혹은 내 가족의 이익을 전제로, 수단과 방법이 가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곡성>은 '오컬트 무비(occult movie)를 넘어, 그 자체가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징한 '우화'적 성격을 띤다. 하지만 그 '우화'가 일광과 일본인. 무명의 미묘한 정체를 넘어, 해석의 진실까지 어느 만큼 닿을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미지수는 바로 영화의 난해함이 아니라 종구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미혹을 우리 사회 속 부조리한 인간 군상의 모습으로 치환해 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눈밝음 정도와 닿아있다.
표면적으로 '귀신'과의 사투로 보이는 영화는 언뜻 2015년의 <검은 사제들>이 떠올려진다. 편견을 넘어 실존하는 귀신과 싸우는 퇴마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표면적 유사성이 보이는 듯 하지만, 오히려 <곡성>의 내면적 유사함은 2014년 바다 안개에 휩싸인 전진호를 통해 한국 사회를 상징한 <해무>에 가닿는다. <해무>가 그 무시무시한 한국호의 진실을 19금이라는 벽을 넘어 세상에 진솔하게 닿지 못한 것과 달리, <곡성>은 절묘하게 15세 관람가로 대중적 접촉면을 넓힌다. 또한 '밀양'지명을 등장시켜, 밀양에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 거기에 종교적 매개를 얹어 한국 사회를 진단해 냈다는 면에서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굳이 '미혹'의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황정민, 쿠니무라 준, 천우희의 열연으로 오리무중 오컬트 무비로서의 양면성은 묘하게도 상업영화로써 이 작품의 또 다른 흡인력이 될 가능성을 열어둔다. 하지만 정작 관람객의 뒤통수를 치는 건 끝내 관람객과 함께 어수룩하게 당하고마는 곽도원의 종구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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