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별2013QR3(이하 감자별)>의 첫째 딸 노보영(최송현 분)은 셜록 홈즈가 저리 가라할 만큼 남다른 관찰력으로 추리의 일가견을 보인다. 남편이 화장실 변기의 뚜겅을 내리지 않은 것도, 큰 아이가 세수를 하지 않은 것도,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척~보면 알아낸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 똑부러지는 주부인 그녀에게 시련이 닥쳤다. 그것은 바로 큰아들 규영(김단율 분)이 반에서 기르는 방울 토마토를 따먹었다는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거짓말을 하면 바로 티나 나는 아들 규영을 붙잡고 추궁해 보지만, 그녀의 예리한 눈에도 아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보인다. 아들의 결백을 믿은 그녀는 아들의 혐의를 풀어주고자 셜록 홈즈의 복장을 한 채 학교에 나타난다. 그리고 세심한 추리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이웃반 토끼가 범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그녀의 말을 아들의 혐의를 덮기위한 무리한 속단이라 치부한다. 그녀 스스스로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에 자신없어 하던 그녀는 돌아서는 아들의 바지에 묻은 붉은 얼룩을 보고 아들이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추리가 틀렸음을, 선생님에게 거짓맛을 하게되어버린 자신을 자책한다. 침대에서 뒹구는 아내의 화면으로 남편(김정민 분)의 나레이션이 흐른다. 그토록 완벽했던 아내가 추리를 틀리게 된 건 바로 엄마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허술한 그녀에게서 사람 냄새가 남다고.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감자별>의 이야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화면은 규영의 반 교실 문쪽으로 바뀌고, 조금 열린 문 사이로 토끼인 듯한 물체가 보인다. 

흔히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고 우리는 긍정적으로 사고하려고 한다. 노보영의 남편이 자신의 아내가 한 첫 실수를 모성의 착시라고 정의내린 것처럼, 하지만, 냉소적 시각의 <감자별>은 아니 오히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지는 '불온한' 역설을 논한다. 사랑하기에 믿을 수 없는 거라고. 

노보영은 평소 자신의 큰 아들을 늘 못미더워 했다. 이성적인 그녀와 다르게 허무맹랑한 별 이야기 따위나 즐기고, 하는 짓이라고는 헐랭이인 규영의 말을 늘 그녀는 '거짓말이지?'하고 의심부터 하곤 했다. 만약 아들의 말을 철썩같이 맏는 엄마였다면 아들의 거짓말을 판별하는 따위의 노하우는 필요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였기에 아들의 결백을 밝히겠다고 했지만, 내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들 녀석의 도발을 의심하는 마음을 저버릴 수 없었다. 자신이 내린 이성적 결론에 그녀 자신도 미덥지 않아했다. 평소같으면 아들의 엉덩이의 붉은 자국을 의심해 볼만도 하건만, 아들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힌 그녀는 대번에 그 자국을 아들이 깔고 앉아 으깬 방울 토마토라 믿어버린다. 사랑이 내지른 정신적 폭력이다. 시트콤 <감자별>에서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마무리되었지만 대부분 자녀들은 성장과정에서 부모가 내지르는 사랑이란 이름의 불신과 정신적 폭력을 감내해야 어른이 된다. 

(사진;따뜻한 말 한 마디; tv리포트)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송미경(김지수분) 말 대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그녀의 남편 유재학(지진희 분)이다. 16일 방송된 5회에서 이 부부의 역학 관계는 미묘하게 변화된다. 남편의 밥상을 쓸어버릴 호기를 부리던, 자는 그의 얼굴에 베개를 덮어 누를 만큼 분노를 발산하던 미경은 당신을 믿었다던 남편의 말 한 마디에 허물어 진다. 비록 자신은 잠시 바람을 피웠을 망정, 그 순간에도 당신을 택했다, 당신을 믿었다고 남편은 말한다. 괴변과도 같은 말이다. 하지만,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남편을 사랑하던 미경은, 남편의 미묘한 변화에 '바람'을 감지하고 남편을 감시하는 흥신소를 붙였다. 평소 자신을 덜 사랑해 준다는 불안이 그녀로 하여금 넘지 말아야 할 부부의 믿음을 깨뜨린 것이다. 

분명 그 선을 먼저 깬 것은 남편이지만, 5회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보면, 부부 관계의 신뢰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다. 물론 작가의 이런 서술이, 바람핀 놈이 나쁜 놈이라는 우리사회의 선험적 명제에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흔히 부부 싸움을 칼로 물베기라던가,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가 필요한가 드라마는 논하고 있다. 이제 5회에 들어선 작가는 묻고 있다. 정말 부부를 이끌어 가는 것은, 한 가정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라고. 그래서 은진(한혜진 분)은 남편에게 선택하라고 말한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진흙탕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인지, 그게 아니면, 막연한 믿음으로 부부 관계를 이어갈 것인지. 하지만, 이미 교통 사고 종료 건으로 은진의 남편 성수(이상우 분)는 판도라의 유혹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사진; 감자별; osen)

16일 <감자별>에서 백설공주가 되어 광고 촬영을 하러 간 나진아(하연수 분)에 대한 노민혁 형제의 반응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이제 막 나진아를 여자로 좋아하기 시작한 노민혁(고경표 분)은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회사 대표의 호의를 빙자해, 첫 광고 현장에서 자신없어 하던 그녀를 북돋아 주고, 자신의 옷을 벗어 어깨에 걸쳐 주는 등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한 이미 산꼭대기 허름한 나진아네 집에서 부터 나진아를 마음에 두고 있던 준혁(여진구 분)은 사랑의 마음을 '못생겼다'는 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더 사랑하지만 더 괴롭히는 사랑의 역설이다. 더 사랑하는 자가 약자라고 하지만, 그 약자가 늘 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기에 의심하고, 사랑하기에 불신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주체치 못해 괴롭힌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by meditator 2013. 12. 17. 10:35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탄광촌의 한 소년이 발레리노가 되어,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11월 26일 방영된, <감자별2013QR3(이하 감자별)>에서, 여주인공 나진아 역시,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처럼 무대 중앙을 향해 드높게 도약하며 시트콤은 끝이 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3년의 나진아는 자신의 꿈을 이룬 발레리노가 아니다. 클럽으로 간 21세기의 '빌리 엘리어트' 나진아는 그래서 더 애잔하다.



대처 영국 총리의 죽음이 알려지자, 영국 탄광 노조는 '대처의 자유주의 시장의 상징이었지만, 그 이익을 취한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며 혹독한 부고의 성명을 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처의 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이 바로 영국의 탄광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바로 그런 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대량 감원과 사업 축소가 휩쓸고 간 영국의 탄광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빌리는 바로 그 마을에서 노조 일을 맡고 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시피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산업 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영국의 석탄 산업이다. 바로 그 석탄 산업이 자유주의란 미명 하에 정리 대상이 되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없는 나진아의 아버지는 삽자루를 타고 놀던 시절의 아이디어를 살려 (주)콩콩의 오늘을 만든 견인차 역할을 한 사람이다. 하지만, 역시 나진아의 아버지 역시 토사구팽의 처지다. 먹고 살 걱정없이 해주겠다는 장담은 겨우 1년에 쌀 한 푸대요, 길거리에 나앉게 된 나진아와 그의 엄마에게 베풀어준 온정이란게, 냉기가 도는 차고요, 노수동네 집의 가정부 몫이다. 

빌리의 아버지이건, 나진아의 아버지이건, 영국과 한국이라는 국적을 달리하건, 상관없이, 그들의 청춘과 아이디어와 노동을 곳감 빼먹듯 한 후에,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식의 처분은 마찬가지이다. 당연히 그들의 자녀들은 가난을 대물림한다. 

(사진; 스포츠 경향)

빌리는 남자라면 축구와 권투만이 최고인 마을에서 발레에 매료되어 아버지의 원망을 산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결국 배신으로 남은 아버지와 같은 '블루 칼라'가 아닌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빌리는, 그런 아버지의 소망은 애저녁에 제껴버리고, 거기서 한 술 더 떠, '게이'라 오해받기 십상인 발레를 택했다. 당연히 아버지는 반대를 한다. 때리기도 하고, 가두기도 하고, 하지만 빌리의 소망을 꺽을 수 없다. 결국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원론에 충실한 영화는, 자식을 위해 노조원들에게 등을 돌리는 아버지를 그린다. 그리고 결국 아들이 자신과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던 아버지의 소망은 성공을 거둔다.

나진아 역시 자신의 이름이 불려진 무대를 향해 도발적 표정을 짓고 달려나간다. 하지만, 나진아는 빌리처럼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섹시 댄스 대회 상금을 위해 나진아는 영화 속 빌리와 같은 혹독한 댄스 수업에 불철주야 충실한다. <감자별>은 빌리 엘리어트을 빌어오되, 빌리가 꿈을 향해 매진하는 상황을 섹시 댄스 대회 출전이라는 상황으로 비틈으로써, 21세기 청춘의 고달픔을 극대화시킨다. 

누구하나 돌보아주지 않는 가정 환경에, 열악한 탄광촌이라는 배경 속에서 그래도 빌리는 '발레'라는 자신의 꿈을 키운다. 그래도 그 무능력해 보이던 아버지는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어 가면서 아들의 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하지만 나진아에겐 그런 아버지가 없다. 노수동네 가정부로 들어간 어머니는 '은혜'를 빙자한 노수동네 식구들의 '홀대'를 감수하기도 바쁘다. 하루 아침에 노수동네 아들이 되어버린 홍버그, 준혁이도 아버지가 준 '골드카드'로 나진아에게 꽃등심을 살 정도가 되었는데, 나진아에겐 그저 얻어먹으며 민망해 할 자유만이 있다. 자신의 꿈은 아버지같은 멋진 아이디어를 내서 (주)콩콩의 일원이 되겠다는 것이지만, 현실은 회사가 '인턴'이란 이름으로 그의 노동을 날로 먹고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진아가 비상할 수 있는 곳은,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클럽 섹시 댄스 대회이다. 그저 돈 300만원을 잡기 위해 날아오른다. 바로 2013 대한민국 청춘의 현실이다. 




by meditator 2013. 11. 27. 09:46

여진구가 분한 홍혜성은 결국 노수동(노주현 분)네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이렇게 최근의 <감자별2013QR3(이하 감자별)>를 한 줄 요약할 수 있겠지만, 들여다 보면, 이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사정이 간단치만 않다. 

노수동의 큰 아들 노민혁은 하~버드를 나온 그의 사진으로 사무실을 도배할 만큼 자부심이 대단한 (주) 콩콩의 새 대표이사였다. 하지만 그는 야심차게 회사를 개혁하려던 차에 그만 불의의 사고를 당해 초딩 수준의 정신 연령에 정체되어 있다. 바로 그 시점에 오이사가 잃어버린 둘째 아들을 찾아냈단다. 바로 홍혜성이다. 
그렇다. 홍혜성은 바로 자신의 비리가 담겨있는 USB를 찾고자 오이사가 들여보낸 스파이다. 지난 번 도우미를 들여보냈다가 실패한 오이사는 이번에는 보육원 출신의 혜성을 유전자 검사까지 조작하며 이 집에 들여보낸다. 결국 홍혜성이 이 집에서 해야할 일은 지속적으로 비리를 저지르며 회사를 말아먹고 있는 오이사를 돕는 일, 즉, 노수동 네 집을 망하게 하는 일이다. 
물론 <감자별>에서 홍혜성은 이 집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모든 가족이 혜성을 준혁이라 한 치의 의심을 가지지 않고 받아들이는데 반해 엄마만이 유일하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 역시, 유전자 검사를 조작했다면서도 복잡한 오이사의 표정을 보면, 반전이 있을 여지를 남긴다. 아니 시청자들은 보면서 저절로 진짜 친아들 아냐를 연상케 한다. 


진짜 아들의 여부와 상관없이, <감자별>에서 여진구가 분한 홍혜성 에피소드의 얼개는 고스란히 영화 <화이>의 그것을 닮았다. 
범죄자인 다섯 아버지에 의해 폭력과 살인의 기계로 길러진 화이, 그리고 비리의 주범 오이사의 끄나풀이 된 화이, 다섯 아버지가 화이에게 시킨 첫 번째 살인이 바로 화이 자신의 친 아버지를 죽이는 것, 그리고, <감자별>에서 혜성이 해야할 임무는 오이사의 비리를 담은 USB를 찾는 것, 그것은 곧 대표이사의 기억 상실로 무주공산이 된 (주) 콩콩을 오이사가 집어 삼키는데 걸림돌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영화 <화이>가 다섯 아버지가 그들의 아버지 세대로부터 받은 정신적 육체적폭력으로 인해 괴물이 되는 것으로 자신을 구원(?)했고, 그 구원의 길을 다시 화이에게 고스란히 전수하고자 했다면, 시트콤 <감자별>은 그것이 경제적인 권력의 시점으로 옮겨온다. 
회사를 가진 자, 회사를 가지려 하는 자, 이미 진행된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노수동이 이루어 놓은 (주) 콩콩은 나진아 아버지의 아이디어로 히트를 쳐서, 노수동의 처 왕유정의 부동산 재테크로 몸집을 불린 기업이다. 노수동은 말끝마다 공치사를 하지만, 기업의 성장에 그의 역할은 미미해 보인다. 그러니, 창업시기부터 공신이었던 오이사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그의 지분을 요구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더더구나, 노수동의 아들 노민혁이 리노베이션을 외치며 오이사 등을 과거의 인물로 치부할 때 오이사의 도발은 더더욱 적극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아직 친아들일 지는 모르지만, 되찾은 아들, 하지만 스파이인 홍혜성의 존재가 필요해 진다. 
<감자별>에서 오이사의 하수인으로 USB를 찾으라는 추궁을 받고, 틈만 나면 집안 곳곳을 뒤지며, 노수동네 가족들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복잡해지는 홍혜성의 표정은 영화<화이>에서 마주쳤던 소년 화이의 그것과 닮았다.

(사진; TV리포트)

이렇게 <감자별>은 시트콤의 가장 큰 장기인 현실에 익숙한 그 무엇을 뒤틀어 냄으로써 빚어지는 불협화음에 충실하다. 
영화 <화이>에서 두 시간 여에 걸쳐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던 '살부'스토리는 그 배경이 (주) 콩콩이라는 회사와, 노수동이라는 전 대표이사의 집이 되면서, 보다 복잡해지고, 상징성조차 교묘해졌다. 오이사 역시 나쁜 놈이지만, 그의 '나쁜 놈'은 영화 <화이>의 다섯 아버지들이 가진 장엄한 상징성과는 류가 달라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시대가 품고 있는 구조적 관계의 상징성은 그것이 정치적 함의의건, 경제적 함의이건 다르지 않다는 공감을 자아내게 만들고, <감자별>판 <화이>가 어거지 같아 보이지 않는다. 외려, 친부를 살해하게 된 화이의 피의 숙청, 즉 또 다른 '살부' 스토리가,시트콤 <감자별>에서는 어떻게 변주되어갈 지 궁금할 뿐이다. 

여진구가 분한 홍혜성의 캐릭터가 시트콤<감자별>의 기본적 동인으로 묵직하게 드라마를 끌고 간다면, 그외 여타 인물들의 전형성 뒤틀기는 시트콤으로써의 <감자별>을 화려하게 치장한다. 
대표적으로는 11월 12일 에피소드에서 드러난 노수동의 캐릭터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노수동으로 분한 노주현 씨는 그의 잘 생기고 중후한 마스크로 인해 젊은 시절 오랫동안 멜로드라마의 멋진 남자 주인공 역할 만 맡아왔었다.  <감자별>은 그렇게 마스크에서 풍기는 중후한 이미지 이면에, 노수동이 지니는 찌찔하고 쪼잔한 이미지를 드러냄으로써, 시트콤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노수동 외에도, 장기하가 분하고 있는 장율 캐릭터 같은 경우가 비슷한 케이스이다. 

주연 배우의 부상으로 인한 방송의 공백, 그리고 분명한 캐릭터와 메시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때로는 그것들이 한 음정 높게, 혹은 한 음정 낮게 조율되어, 말 그대로 불협화음처럼 느껴지던 <감자별>이 조금씩 마치 현대 음악처럼,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저마다 소리만 지르는 것 같던 캐릭터들의 낯섬에 친숙해져 가는 걸지도. 첫 회부터 케이블의 특성을 살린다며 '똥'만 외쳐대던 생경함도 조금씩 다듬어지고, 날선 비난은 있으되,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던 스토리도 홍혜성의 귀환(?)으로 재미를 얹어간다. 
늘 김병욱은 시트콤을 하지만, 그의 장기는, '드라마'인 듯하다. 드라마적 재미가 드러나면서, 그의 생뚱맞은 뒤틀기도 안정감을 얻어 간다. 


by meditator 2013. 11. 13. 10:21

공교롭게도 10월 28일 tvn에서 방영된 두 편의 드라마에는 연달아 '철거'가 등장했다. 

그 하나가 9시15분에 방영되는 <감자별2013QR3(이하 감자별)>이요,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그 다음 시간인 9시 59분에 방영되는 <빠스껫볼>이다. 드라마<빠스껫볼>의 시대 배경은 1930년대요, 시트콤<감자별>은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두 작품에서 모두 주인공, 그리고 그의 가족(그래봤자 엄마뿐이지만)은 '철거'를 당해 거리로 나앉는 신세가 된다. 근, 현대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은 '여전히 철거중'이다. 

<빠스껫볼>의 시대 배경은 일제시대다. 그런데 일제시대에도 철거라니! 
드라마는 주인공 강산이 사는 시대를 마치 '세밀화'처럼 묘사해간다. 그리고 그 묘사의 백미는 바로 강산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사는 움막촌이다. 그저 거적데기 하나 덮은 거 같은 비, 바람이나 겨우 피할 거 같은 움막촌이지만, 강산과 그의 어머니에겐, 그리고 그들과 비슷한 가난뱅이들에겐 그곳이 삶의 보금자리이다. 
일본이 식민지의 토지 정리 사업을 전투적으로 벌이면서, 농촌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남부여대'로 그래도 굶어죽지는 않겠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서울로 밀려든다. 하지만 서울에서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빠스껫볼>에서 묘사된 그대로 허름한 움막촌이다. 그나마 그마저도 도시 개발을 시작한 일본인들과, 그들의 앞잡이에 의해 몽땅 철거되고 만다. 대한민국 철거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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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로등조차 나가 시커먼 골목을 매일 밤 무서워 벌벌 떨며 지나 산꼭대기에 있는 조그만 집은 나진아가 세 살 때부터 살던 집이다. 하지만,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소유였던 집은 전세가 되고, 월세가 되고, 이젠 그마저도 '철거 대상'이 되어 집을 비워줘야 한다. 갈 곳이 없는 나진아 모녀는 가지고 있던 세간 살이를 하나둘씩 팔며 결국은 팔아도 그 누구도 사갈 것 같지 않은 냉장고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마루에서 박스를 엎어놓고 식사를 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그나마도 호사다.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대한민국이 삐까뻔쩍하게 좋아졌다하는데, 여전히 가난한 모녀가 드리울 곳은 없다.  

일제 시대이건, 2013년이건 누군가에겐 감지덕지 삶을 깃들여 갈 소중한 보금자리가, 다른 누군가에겐 '환금성의 투기 대상'일 뿐이다. 그것은 수십년이 흐르고, 세기가 바뀌어도 그 어떤 것보다도 변함없는 대한민국의 진리이다. 그리고 tvn의 두 드라마는 단 두 시간만에 그 '철거사'를 요약한다. 

<빠스껫볼>에서 보여지듯이 폭력적 철거를 통한 원시적 자본 축적의 시작은 일제 시대이다. 일본인들에게 '영혼을 판' 친일 자본가들이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해 거리의 주먹패들을 동원해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확 쓸어버린다. 당연히 저항이 따르지만, 몽둥이를 앞세운 그들의 앞에, 저항은 폭력을 낳을 뿐이다. 결국 <빠스껫볼>에서는 철거 과정에서 다친 노인이 강산의 죄책감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둔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주인공 강산은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게 된다. '그저 농구만 그만 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많은 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드라마에서 '철거'는 주인공의 각성을 위한 유효한 도구이다. 
<황금의 제국>에서 철거민의 아들 장태주가 '황금'에 자신의 영혼을 팔게 된 계기는 바로 아버지가 분신 자살로 가게를 지키려고 했던 '철거'다. <스캔들>에서 강직한 하명근 형사 캐릭터를 설명해 낸 것도 협잡꾼이나 방관자가 되어버린 다른 경찰들과 달리 철거 현장에서도 흔들림없는 정의로움이었다. 

반대의 효과를 낳기도 한다. <스캔들>의 장태하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캐릭터라는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장치도 바로 철거 현장이다. 철거 용역들 조차 주춤거리는 철거민의 저항 앞에 장태하는 직접 포크레인을 밀고 들어감으로써 그가 어떤 '폭력적 과정'을 거쳐 재벌로 성장했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해 낸다. <황금의 제국>의 장태주도 마찬가지다. 철거민의 아들이었던 그가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맞닦뜨리는 건 또 다른 철거민이요, 그들의 저항이었다. 드라마 속 '철거'는 마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넘어서야 할 '통과 의례'처럼 묘사된다. 즉, 대한민국 재벌의 성장사를 단적으로 상징해내는 것에 철거와 건설만큼 도식적으로 명확한 것이 없다. 

<빠스껫볼>과 <감자별>에는 또 한 가지의 묘한 공통점이 있다. 두 작품 다 시대를 막론하고 홀로 된 엄마와 자식의 편모 가정이라는 것이다. <빠스껫볼>의 어머니는 일본인 집에 식모 살이를 하며 아들 하나를 어떻게든 고보나마 졸업시켜 보려고 한다. 하지만 갖은 구박을 다 참으며 돈을 모으지만, 결국 아들은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를 쫓겨난다. <감자별>도 마찬가지다. 나진아의 엄마가 게으른게 아니다. 엄마는 열심히 돈을 벌려고 해보았지만, 집은 자꾸 전세로, 월세로 멀어져만 갔다. 시트콤 속 엄마는 뻔히 보기에도 돈이 될 것 같지 않은 피라미드 판매를 하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진아의 표현대로 남는 건 오히려 빛이다. 수모를 감내해가는 노동이나, 해볼만한 일이래 봐야, 찜질방을 돌아다니며 자석요나 파는 헛발질을 하는 엄마나, 대한민국 엄마들 삶의 조건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자식 건사하며 내 집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좋아졌다. <빠스껫볼>의 거적데기만 두른 집, 한겨울에도 맨발에 신겨진 짚신에 비하면, 어쨋건 물이 콸콸나오는 뜨신 집에, 유행을 따른 그럴 듯한 복색으로 보면 많이 발전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일본인들에 의해 시작된 철거가 2013년에도 지속되는 대한민국은 본질에 있어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듯 보이기도 한다. 어미 혼자 자식 한 명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이라는 것에서는 말이다. 삶의 기본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은 여전히 '원시적'이다. 


by meditator 2013. 10. 29.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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