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 운전사, 집사 등의 파업에 봉착한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한정호는 그들을 '가신'이라 부른다. 집주인 한정호에게 그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받아야 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선조 시절부터 대대로 집안 일을 봐주던 '종'들의 연장선일 뿐이다. 그래서 한정호와 그의 아내 최연희는 그런 그들의 반기에 이유를 살피기 전에 앞서 불쾌함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집안 사람'이라며 정작 그들의 노동자다운 요구에는 인색하다. 부릴 때는 '집안 사람', 댓가를 지불할 때는 '착취', 이것이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속 두 얼굴의 '갑' 한정호의 얼굴이다. 하지만, 이렇게 블랙코미디로 은유되는 '갑'과 '을'의 관계가 비단 드라마 속 뿐일까? 일을 할 때는 '종부리듯' 하며, 정당한 '노동'의 댓가에는 인색한 '갑'과 '을'의 관계를 5월 12일 <pd수첩>은 '점심이 있는 삶을 통해 들여다 본다. 




점심이 없는노동
'점심이 있는 삶'은 '저녁이 있는 삶'을 내걸었던 정치인 손학규의 슬로건의 변형이다. 손학규는 장시간 노동, 연장 근무에 시달리느라 가족과 함께 할  수 없는, 내일의 재생산을 위한 휴식을 제대로 취할 수 없는 현재의 강도높은 노동 현실을 개선하겠다는 취지로 '저녁이 있는 삶'을 내걸었다. 하지만, 현실은? '법적으로 보장된' 근로자의 법정 점심시간조차 그림의 떡인 것이다. 

8시간의 노동과 1시간의 점심 시간은 법률로 보장받은 노동의 조건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고객을 주인처럼 모신다는 백화점, 고객들이 다니지 않는 비상 계단, 거기에서 직원들은 쭈그려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잠시 발을 뻗어 휴식을 취한다. 백화점 꼭대기에 있는 직원용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기에 시간은 너무 빠듯하다. 차라리 이곳에서 편의점 삼각 김밥이나 도시락으로 밥을 때우고, 잠시라도 쉬는 것을 택한다.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녀야 하는 간호사, 그들에게 '점심'의 여유란 없다. 2,3교대의 빠듯한 인력풀에서, 따로 밥을 먹고 쉴 수 있는 여유를 찾기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듯 쉽지 않다. 겨우 시켜놓은 도시락은 식어빠지기 십상이고, 그 마저도 온전히 앉아 다 먹기가 쉽지 않다. 오죽하면 간병인이 바쁜 간호사의 일을 자처할까.
최근 '파업' 등을 통해서 그나마 우리 사회에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 대학 청소 노동자들의 점심 시간은 열악하다. 화장실 한 구석, 혹은 계단 밑 고개조차 들 수 없는 공간에서, 비닐 봉지에 담겨 보온된 밥을 끌러, 각자 가져온 김치 반찬에 더해 한 끼를 때운다. 
포장재 업체에 다히는 노동자들은 점심 시간이 되자, 일을 하던 작업장에 간이 식탁을 펴고, 둥그렇게 둘러서서 가져온 도시락으로 한 끼를 때운다. 이곳 작업장으로 오기 전에는 공장 바깥 아스팔트 주변 농가, 축사에서 바람에 날려온 잔유물과 함께 식사를 했고, 이곳 작업장으로 옮겨온 뒤에도, 사업장 내에서 음식 냄새를 풍기지 말라는 사장의 지시때문에 복도에 쪼그려 앉아 밥을 먹기도 한 상황에 비하면 그나마 나아진 것이다. 


'서비스'가 임무의 핵심인 이들의 노동 과정 중에 '점심 시간'은 왜 사라지거나, 열악해진 것일까?
'법적으로 정해진 점심 시간이 있지만, 쉴 새없이 이어지는 이들의 노동 조건에서 자신의 정당한 '점심' 시간을 찾기가 힘들다. 엄청난 양을 배달해야 하는 우편 집배원은 따로 점심을 먹고 쉴 여유를 차릴 틈이 없다. 백화점 직원, 간호사 등의 업무 여건이 이와 비슷하다. 
거기에 더해 그들의 노동에 주어진 환경이 열악하다. 사례를 찾아보기 위해 간 미국의 대학 캠퍼스, 그곳의 청소 노동자들은 정규 직원이다. 그들은 점심 시간이 되면 당당하게 직원 식당에 가서 학교 직원, 교수, 학생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이후 널찍한 직원용 휴게실에서 여유롭게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이렇게 정당한 권리를 누리는 미국의 직원들과 달리, 대부분 계약직이거나, 설사 정규직이라 해도 우리 나라의 노동자들은 그 권리를 누리기 힘들다. 심지어 백화점 직원들은 고객들이 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걸린다'. 청소 노동자들은 직원 식당은 물론, 값싼 학생 식당을 이용할 수 없다. 무엇보다 한 달의 십만원의 점심값을 지불받는 포장업체 노동자들에게 값비싼 외식은 사치다. 계약직인 우편 배달 노동자에게 오천원이 넘는 점심은 울며 겨자 먹기다. 식당에서 삼삼오오 식사를 함께 하고,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뉴스 속 직장인의 점심 시간 풍경은 이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휴식도 보장되지 않는 노동
하물며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점심시간이 이럴진대, 휴식 시간은 오죽할까? '휴게실' 역시 우리의 근로 조건이 보장한 노동의 환경이다. 미국의 청소 노동자는 상사가 양질의 노동을 위해 오히려 휴식을 권고한다고 한다. '휴식'은 그냥 노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의 노동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다. 

물론 우리도 법적으로 '휴식'과 '휴게실'을 보장한다. 하지만, 정작 그 '휴게실'의 세부 사항은 존재하지 않기에 얼마든지 눈가리고 아웅하게 되는 것이다. 포장업체의 휴게실, 그곳은 겨우 의자 두어 개가 들어갈락 말락하는 구석진 공간에 자리한다. 심지어 하수관이 지나는 그곳에 코를 찌르는 냄새 때문에 들어갈 수 조차 없다. 하지만 '법적으론' 아무 하자가 없다. 병원 한 구석에, 학교 화장실 구석에 마련된 청소 노동자들의 휴게실,하지만 거기선 발을 뻗을 수 조차 없다. 이제 화장실에서 나는 용변의 냄새 쯤은 이골이 났다. 점심 시간도 빠듯한 간호사나, 우편 배달 직원에게 휴식은 사치다. 

이렇게 법적으로 점심 시간, 휴게 시간, 휴게 공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을 이어가는 청소 노동자 등의 현실을 짚어본 <pd수첩>은 그들의 노동 이력을 들여다 본다. 가발 공장의 노동으로 철이 든 시절, 먹지도 못할 시어빠진 김치로 만든 김칫국을 배가 고파 때우듯이 먹어야 했던 그 열악했던 노동은, 이제 식당 일의 거센 노동 강도를 피해 청소 노동자가 된 60줄의 노동자는 가끔 다리조차 뻗을 수 없는 화장실 옆 휴게 공간에서 남의 용변 냄새를 맡으며 한 끼를 때울 때면, 저절로 눈물을 삼킬 수 밖에 없다고 한다. 60줄의 노동자가 처음 가발 공장에서 일하던 그때로 부터 대한민국의 산업은 발전했고, 산업은 고도화되었고, 도시는 발달했다. 하지만, 그런 '선진화'된 대한민국에서, 60이 되도록 노동으로 한 평생을 보낸 노동자는, 자신의 열악한 노동 조건에 눈물 짓는다. 

산업화가 시작되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등장했을 때, 고전 경제학자들이 정의내린 임금은 그들이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다음 날 다시 일터로 돌아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줄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이제 신자유부의 사회가 들어서면서, 노동자들의 노동은, 그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을 보상해 줄 수 있는 댓가가 아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시간당 알바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일은, 하루 여덟 시간, 법적으로 정해진 점심 시간, 휴식 시간이 아니라, 시간당, 분당으로 쪼개어진 일의 참혹한 댓가로 계산되어진다. 그저 최소한의 법적 요건을 갖춘 휴게실로 눈가림을 하고, 그나마도, 윗분들, 고객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을'들에게 '점심이 있는 삶'은 사치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들을 <풍문으로 들었소> 속 '가신'처럼 취급할 뿐이다. 주인과 한 상에서 밥을 먹는 건 언감생심, 수틀리면 밥을 먹을 때 시립을 시키듯, 그들이 한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영양가 없는 반찬으로 끼니를 때우건, 계단 참에서 발을 뻗건 배려하지 않는다. 그저 눈에 거슬리게 띄지 않으면 그뿐. 유산으로 아들의 사랑조차 현혹시키는 한정호이지만, 집사들의 파업을 불쾌해 하듯, '갑'들은 그저 '을'들의 '궁상'(?)이 드러나지 않으면 된다. 

OECD 국가 중 2위의 강고한 노동 시간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하지만, 수치상으로 보여지는 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한 노력만으론 지금의 노동 현실을 개선할 수 없다고 전문가는 주장한다. 점심이 있는 삶, 여유로운 휴식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인간다운 노동을 향한 개선으로 패러다임이 바뀔 때만이, 노동을 통한 행복은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동 조건인간화를 <pd수첩>은 '점심이 있는 삶'을 통해 주장한다. 

by meditator 2015. 5. 13. 1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