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제 그의 이름만으로 '영화'를 선택하게 만드는 세계적인 감독이다. 매번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그이지만 고레에다 감독만큼 '일본'의 이야기를, 일본의 정서를 풍성하게 그려내는 감독이 있을까 싶은데.

고레에다 감독의 이야기에는 1991년 <그러나....복지를 버리는 시대로> 등 그가 다큐로 담았던 시대 이래 일본의 그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그늘은 그곳에 드리워져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자발적으로 재현'되어 삶의 현실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복지 사회 일본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연금, 하지만 그와 달리 연금을 받지 못한 채 무능력한 자식 세대라는 전후 일본 복지 사회가 낳은 그늘은 때로는 <어느 가족(2018)>의 서늘한 동화가 되기도 하고, <태풍이 지나가고(2016)>의 페이소스가 되기도 한다. 복지 사각 지대에서 방치된 아이들의 처연한 삶을 그린 <아무도 모른다(2004)>의 충격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고레에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 세계를 삶의 자발적 재현이라 규정한다)

그렇게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현실에서 이야기를 길어내었던 고레에다 감독이 이방의 공간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번째 글로벌 프로젝트이다.  이방의 공간 '프랑스'가 감독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과연 프랑스에서 그가 만난 '삶의 자발적 재현'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까지 고레에다 감독이 해왔던 이야기들 중 상당한 부분이 '가족'에 대한 것이다. 그의 찬란한 데뷔작 <환상의 빛(1995)>은 아들과 함께 홀로 남겨진 유미코에 대한 이야기지만 결국 그건 자신을 남겨둔 채 세상을 저버린 남편 이쿠오와의 완성되지 못한 가족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 속 가족은 늘 이빠진 동그라미와도 같다. <걸어도 걸어도>의 가족은 10년 전 죽은 형이라는 빈틈을 두고 쉽사리 서로에게 다가서지 못한다. 반면, 진짜 가족이 서로에게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사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느 가족>은 사회가 그들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진짜 가족보다 가족같다, 나의 아들이 아닌 내 아들을 받아들이며 비로소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속 가족은 완성된다. 죽은 아버지가 남긴 의붓딸을 자신들의 품으로 안은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그렇다. 그렇게 고레에다 감독은 가장 가족적이면서도, 가장 가족에 대해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현실 속에서 가족을 길어내고 질문한다. 

 

 

회고록, 봉인을 열다. 
프랑스로 온 고레에다 감독은 이번에도 화두를 '가족'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엄마'가 있다. 하지만 엄마라는 호칭보다 여배우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전설적인 여배우 파비안느(까뜨린느 드뇌브 분), 이제 막 그녀는 그 전설의 결과물인 회고록을 완성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살던 딸 뤼미르(줄리엣 비노쉬 분)가 남편과 딸과 함께 그녀의 회고록 출간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찾아온다.   

하지만 '축하'의 시간을 길지 않다. 어쩐지 회고록을 읽어보고 싶다는 딸의 말에 자꾸만 말꼬리를 자르는 수상한 엄마의 태도, 그럼에도 결국 회고록을 읽게 된 딸은 폭발한다. "엄마, 이 책에는 진실이라고는 없네요."

회고록 속 엄마는 당대의 전설이 되어 온 바쁜 배우 생활 속에서도 딸의 학교로 마중을 나가는 자상하고 따뜻한 엄마로 그려진다. 하지만 딸 뤼미르는 반박한다. 언제 엄마가 내가 다니던 학교를 한번 찾아온 적이 있냐고. 그러게 오랫동안 꾹꾹 눌러왔던 부모 자식 관계의 봉인, 그 빗장이 엄마의 회고록을 통해 열려지는 상황,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랫동안 엄마의 일을 돌봐주던 뤼크(알랭 리볼트 분)가 역시나 회고록에 자신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며 당장에 일을 그만둬버리고 집을 나간다. 어쩔 수 없이 혼자서는 차 한 잔 타마시지 못하는 '천상 여배우' 엄마의 뒤치닥거리를 뤼미르가 맡게 되며 엄마의 촬영장에 따라 나서게 된다. 

 

 

엄마는 엄마다 
이제는 회고록을 쓰는 '전설'이 되었지만, 현장에서의 엄마는 세월을 거스르지 못한 채 젊은 여배우의 나이든 역을 맡아야 하는 처지, 그럼에도 여전히 배우로서의 자존심을 접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거나 흡연에 음주에 습이 되어버린 삶의 태도로 인해 촬영은 여의치 않다. 

돈이 떨어져 찾아온 뤼미르의 아버지 삐에르, 그런 삐에르가 영화 속 캐릭터처럼 마법을 걸어버린 거북이의 현신인 줄 아는 순진한 뤼미르의 딸 샤를로트(클레망틴 그르니에 분), 전설인 엄마 앞에서는 배우라 하기에도 겸연쩍은 얼마전까지 알콜릭 치료를 받았던 뤼미르의 남편 등등 영화는 뤼미르가 본의 아니게 함께 한 엄마의 촬영 현장과 파미안느의 집을 배경으로 한 편의 소동극처럼 그려진다. 

또한 영화는 '액자식'으로 파미안느가 노년의 딸로 분한 영화 속 이야기와 함께 파미안느와 뤼미의 모녀 관계를 대비시킨다. 불치병으로 지구에서 산다면 몇 년을 살 수 없었던 엄마는 어린 딸을 놔둔 채 7년마다 한번씩 지구를 방문하게 된다는 영화 속 영화의 이야기. 훌쩍 떠나갔듯이 다시 훌쩍 찾아오는 엄마, 그때마다 딸은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다른 연령의 사람이 되어있다. 손님처럼 찾아와 사춘기의 딸을, 어느덧 엄마의 나이가 되어버린 딸을, 그리고 나이가 들어 어느덧 엄마를 잊어버린 정도가 되어버린 노년의 딸을 '엄마'로 위무하는 엄마. 

단절적으로 그려지는 sf영화 속 엄마와 딸의 이야기는 질문을 던진다. 과연 저렇게 7년마다 한번씩 찾아오는 엄마도 엄말까? 라고. 그리고 이 질문은 파미안느와 뤼미르의 관계에도 등치된다. 

엄마의 회고록을 읽고 진실은 하나도 없다고 화를 내는 딸 뤼미르, 그녀가 자라는 동안 여배우 파미안느는 화려하게 세상의 조명을 받았지만 딸을 위한 여지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빈 자리를 채워준 건 두 모녀의 애증이었던 파비안느의 동료 여배우였다. 뤼미르는 그녀를 흠모했고 사랑했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랑만큼 엄마를 경원시해왔다. 

영화에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질문하는 대사가 여러 번 등장한다. 자신이 살아왔던 그래서 믿었던 개인의 과거가 사실은 그 개인이 기억하고 싶은 '오류'일 수도 있지 않냐고 영화는 반문한다. 그리고 그 반문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걸어도 걸어도> 속 부모와 아들은 어쩌면 늦어버린 시간을 다시 걷는다. <세 번째 살인>은 뒤늦어 버린 관계의 상흔을 짚는다. 그렇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 속 가족들은 그들이 어긋나버린 '과거'를 현재로 부터 길어올린다. 그것이 때로는 늦고, 때로는 늦지 않게 현재의 관계 그 틈을 메운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어땠을까? 

때맞춰 사의를 표명하며 뤼미르에게 시간을 준 그 누구보다 어머니를 잘 아는 뤼크 덕분에 뤼미르는 본의 아니게 배우 파미안느의 시간을 함께 한다. 한때는 전설이었으되 이제는 나이 들어 조연의 자리에서 여전히 주연의 존재감을 욕심내는 천상 배우 파미안느, 이제는 나이들어 버린 어머니가 무사히 또 한 편의 영화를 마무리하는 걸 함께 하며 모녀간에도 이해를 할 수 있는 틈이 마련된다. 

돈이 필요하면 찾아드는 아버지를 거뜬히 감수하는 엄마, 엄마이자 가장인 파비안느는 동시에 동시대 최고의 여배우가 되기 위해 많은 것을 감수했다. 그리고 그 감수한 것에는 딸을 위한 자상한 어머니의 자리도 있다. 그리고 그건 고레에다 감독이 일관되게 그려왔던 '가족'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진다. 우리 사회이건, 일본이건, 이제 장소를 바꿔 프랑스 건 세계 각국 그 어느나라에서건 '가족'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면서 동시에 인간 개개인의 '갈등'을 유발하는 진원지였다. 많은 이들이 '가족'으로 부터 배태된 '갈등'을 짊어진 채 평생을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곤 한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이 추구하는 가족의 '화해'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치 않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 만나 또 다른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내 가족이라 부등켜 안는 <어느 가족>에서 보여지듯이 '가족다움'의 전제란 무색하다. 그래서 <파비안느에 대한 진실> 속 두 이야기 sf속 엄마와, 파비안느는 역설적으로 '엄마됨'을 묻는다. 가족됨을 사색한다. 

 

자신을 학교로 한번도 마중나오지 않았던 엄마, 자신의 학예회에 왔어도 그 예의 입바른 성정 때문에 딸에게 상처를 줄까 차라리 안온 걸로 오랜 시간 원망을 들을 것을 감수했던 엄마, 자신보다 더 딸이 따르는 동료 여배우를 기꺼이 감수해낸 엄마, 그 엄마를 오랫동안 엄마의 그늘에서 허우적거리던 딸이 비로소 안는다. 늦지 않게. 그리고 그건 내 자식이 아닌 아들을 품었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의 아버지, 의붓 동생을 기꺼이 받아들인 <바닷 마을 다이어리(2015)>의 세 자매, 철들지 않은 늙수구레한 아들을 품어주는 <폭풍이 지나가고(2016)>의 어머니 요시코의 그것과 통한다. 가족다워서 가족인 것이 아니라, 가족이어서 '가족'이 되는 '이해의 절정'이다. 딸을 안는 그 순간, 영화 속 자신이 놓친 캐릭터에 안타까워하는 그 엄마까지도 기꺼이 이젠 웃으며 이해하는 그 넉넉한 가족적 이해의 품말이다. 물론 거기에는 뤼미르가 다시 엄마가 되는, 파미안느가 사실은 뤼미르를 독접했던 자신의 동료 배우를 애증했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히 파미안느와 뤼미르는 더 늦지 않게 포옹한다. 

 

프랑스로 간 고레에다 감독은, 그가 줄기차게 천착해 온 이야기가 그저 '일본'이라는 사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화두'일 수 있음을 증명해 낸다. 파미안느라는 전설의 여배우라는 풍모에 딱이었던 카트린느 드뇌브, 그녀의 재발견이라 해도 좋을 법한 아름다웠던 줄리엣 비노쉬, 그리고 기꺼이 가교 역할을 감수한 에단 호크, 그리고 다른 프랑스 영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청량하게 아름다웠던 파비안느의 정원과 그곳에 어루러졌던 낭랑한 ost 속에 어우려저 고레에다 월드는 그 깊이를 더한다. 

by meditator 2019. 12. 15. 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