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늑대 소년>을 통해 '송중기 신드롬'을 선도했던 조성희 감독이 돌아왔다. 이번엔 탐정이 된 이제훈이다. 심지어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이 되어 나타났다. 

중세 유럽에서부터 회자되어 왔던 전설 '늑대 인간'을 통해 비윤리적 어른들의 세계와 야수의 욕망을 지니지만 순수함을 간직한 늑대 소년의 사랑을 대비시켰던 조성희 감독, 하지만 송중기라는 배우를 보기 위해 뭇 여성들의 발길을 끌어당겼지만, 그 완성도나 작품성에 있어서는 후한 평가를 받지 못했었다. 그랬던 2년만에 선보인 <탐정 홍길동>은 이제 본격적으로 '조성희월드'의 시작임을 알리듯, 영화 전편에 조성희다운 색채가 흠씬 칠해져있다. 



어른들; 광신도들이 판치는 세상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스스로 자신을 활빈당의 수장이라 소개하며 '신출귀몰 탐정'으로서의 면모를 선보이는 홍길동(이제훈 분),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던 '원수' 김병덕을 찾아 길을 떠난다. 
하지만 그는 간발의 차이로 '원수' 김병덕을 놓치고 대신 그에게 남겨진 두 손녀를 '볼모'로 떠맡는다. 말순(김하나 분)과 동이(노정의 분), 원수의 손녀와 함께, 원수를 찾아 가는 '로드 무비'의 형식을 띤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하 탐정 홍길동)>은 그 여정을 통해 어린 시절 사고를 통해 잃었던 홍길동의 좌측 해마의 숨겨진 기억과 앞으로 발생한 마을의 사건을 통해 어두운 실체 '광은회'를 밝혀가는 과정이다. 

<늑대 소년>에서도 그랬듯이, <탐정 홍길동>의 배경은 모호하다. 그저 등장인물의 옷차림과, 등장하는 장소의 분위기, 그리고 tv를 통해 보여진 광은회 인물들의 행태로 보아, 7,80년대 그 어디쯤의 한국 사회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렇게 추정될 뿐 오히려 그보다는 현실의 한국을 빗댄, 가상의 어느 나라, 어느 공간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마치 영화 <씬시티>의 그 암흑의 도시와, <배트맨>의 고담시처럼. 

악이 전횡하는 그 도시들처럼, 마을 사람들의 tv를 통해 거짓말이 장기라는 홍길동보다 더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며 국민들을 위하는 듯한 미사려구를 펼치는 인물들의 손목엔 광은회의 표식이 숨겨져 있다. 후반 영화를 통해 설명되듯이, 광신적 종교적 집단인 광운회는 마을을 이루며 집단 종교 생활을 했고, 그 과정에서 신자들을 희생시키며 축적한 부를 통해, 이제 사회와 정치 전반이 실세로 등극했다. 

형제복지원 사건 등을 통해 드러난 우리 사회의 광신도 조직 사건을 고대로 빼어닮았다.  그리고 이들은 그 축적된 부를 통해 사회의 지도층으로 성장해 나간다. 조성희 감독이 규정하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을 설명하는 단어는, '광신'과 '권력'이다. 이미 <늑대 소년>에서도, 소년을 살인병기로 만들었던 박병두로 상징된 어른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자신의 능력인 '과학 기술'을 통해 좀 더 나은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실험이, 맹목적 권력욕으로 변질되며 박병두는 늑대 소년을 만들었듯이, <탐정 홍길동>의 광은회는 그 '광신'의 힘으로, 사회를 장악한다. 조성희가 두 작품을 통해 그려낸 대한민구의 현대사는 '성장'이라는 광신적 목적에 빠져, 애꿏은 생명들을 희생시킨 '나쁜 어른들'의 역사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 마을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광은회'의 마을은 사라졌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층으로 계승 발전되었고, 이제 그 권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순박한 사람들의 마을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마을'이 희생양이 되는 사건은, 2014년 방영된 sbs의 <쓰리데이즈>의 양진리 사건과 유사하다. 현실의 대통령을 다루고, 그 대통령이 자신과 협잡했던 정, 군, 재계 세력들과 벌였던 양진리 사건이, 이제 조성희 감독이 그려낸 환타지 속 현실에서 다시 한번 복기된다. 현실에서도, 그리고 영화에서도 기득권층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마을 사람들의 희생'을 제물로 삼는다. 

물론, 광신론적이며 권력을 쟁취하고 계승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쁜 어른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순박한 어른들도 있다. <늑대 소년>의 마을 사람들처럼, <탐정 홍길동>의 마을 사람들도 그렇다. 언뜻 첫 인상으로는 선인지 악인지 모호했던 그들이, 영화가 진행되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 <늑대 소년>에서 강박사로 등장하여, 늑대 소년의 사살을 막기 위해 애썼던 유승목 배우가, 다시 한번 정비소 주인으로 등장하여 위기의 홍길동 일행을 구출하는 건, 익숙한 데자뷰다. 하지만, 결국 홍길동 일행을 구출하려 했던 여관 주인 정성화나 유성목이나 몰살에 무방비했던 마을 주민들이나, 권력이 된 광은회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순박하지만 무기력한 어른들, 이 또한 조성희 월드의 또 하나의 표식이다. 

어른이 만들어낸 괴물 아이; 홍길동
영화 초반 활빈당의 두목이라 소개한 홍길동이 홍길동인 이유는 영화의 클라이막스, 김병덕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에야, 왜 그가 하필 '아비를 아비라 부를 수 없는' 홍길동인지 밝혀진다. <늑대인간>과 <탐정 홍길동>은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광신'적 목적에 빠진 아비들이 만들어 낸 자식, 그래서 그 트라우마로 '괴물'이 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캐릭터이다. 

홍길동은 자신의 장기가 '거짓말'이라는 주장하듯(물론 그 거짓말이 어린 소녀 말순조차 속이지 못할 만큼 어설프지만), 그리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이 적이라 생각한 인물의 목숨을 '거두어 버리듯' 좌측 해마의 장애로 감정을 상실한 인물이다. 늑대 소년이 인간성과 야수성을 동시에 가짐으로써 괴물이 되어버리듯, 홍길동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기억의 단편을 잃고 , 감정을 상실한다. 



그리고 '늑대 소년'이 이름조차도 순박한 '순이'와 마을 사람들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해 가듯이, 피눈물도 없다 장담하는 홍길동은 원수의 자식 '동이'와 '말순'을 통해, 아직 사회적으로 상처받지 않은 이들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적'으로 회복되어간다, 

하지만 그저 '인간적'인 단편적 파편의 감정들이 복수를 향한 그의 여정을 막지 못한다. 인간적 감화를 받지만, 홍길동은 복수를 향한 행로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난 것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 김병덕이 아니라, 자신을 낳은 아버지의 살인보다도 더한 잔혹사이다. 전래 소설 속 홍길동은 '아비'라 부름을 허가받고, 아비랑 화해하지만, 영화 속 홍길동은, '아비를 아비라, 그리고 형을 형이라' 부르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단죄'한다. 늑대 소년이 인간의 세계를 떠나 '늑대'의 세계로 회귀한 것과 달리, 홍길동은 꿋꿋이 부조리한 아버지의 세계와 맞서 싸울 것을 다짐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심지어, 형을 비롯한 아버지의 잔당들을 싹 쓸어 없애버리며. 

프랑스 만화 <땡땡>과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선과 악의 경계를 오간다지만, 결국 말순과 동이의 손아귀에서 어수룩하게 넘어가는, 각성제를 수시로 삼키는 신경질적인 인물 홍길동은, 영화 전체적 분위기가 다크한 것에 비해 그다지 '다크'하지도, '안티 히어로' 같지도 않은 범죄물 영화나 드라마 어디선가 본듯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 '다크'연하고, '안티 히어로연'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선한 이 인물은 결국 광신적인 아비를 처단하는 '도덕적' 판단을 내릴 존재로 적절했다. 

결국 나쁜 아비의 세상은, 또 다른 순박한 아비들은 희생될 뿐, 아비가 만들어 낸 '괴물'같은 아들의 '단죄'로만 '청산'되어야 한다고 영화를 통해 조성희 감독은 말한다. 그리고 <탐정 홍길동>은 이런 감독의 주제 의식에 충실하게 전개되며, <늑대 소년>이 가졌던 불투명했던 주제와 허술했던 전개에서 진일보한 전개와 이야기를 선보인다. 이형곤 감독의 <구미호 가족>의 독특한 분위기, 나아가 박찬욱의 미장센, 김지운의 분명한 색채마냥 조성희월드가 한결 뚜렷해진 점이 반갑다. 영화 말미 노골적으로 드러낸 속편의 가능성에서 보여지듯이, 아마도 다음 편에서는 더더욱 진화한 조성희 월드를 만날 질도 모를 일이다. 

홍길동으로 분한 이제훈과, 강성일 역의 김성균, 그리고 김병덕의 박근형은 모두 캐릭터에 맞는 성실한 연기를 보인다.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었던 홍길동 형제의 비애가 좀 더 두드러졌으면, 그래서 김성균의 진폭이 컸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는 한다. 오히려 이들의 성실한 연기 사이로 톡톡 튀어오른 것은, 예측을 불허하는 씬스틸러 말순의 김하나이다. 하지만 말순이 늑대 소년의 송중기의 신드룸을 불러올 것같지는 않다. 과연 신드롬의 도움없이 조성희 감독은 홍길동 2편을 다시 만들 수 있을까? 우선 시빌워에 압도적인 상영 시간이 아쉽다. 

by meditator 2016. 5. 5. 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