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엔 '바다'를 보고 싶으면 극장에 갈 일이다. 

여름 극장가 4편 중 3편이 바다를 담았다. 그 중 <명량>은 날마다 기록을 갱신하며 천만 관객 몰이를 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해적>이 '의외로 재밌다'는 평을 받고 개봉했고, 다음 주면 올 기대작 중 마지막 영화 <해무>가 개봉할 예정이다. 이렇게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 세 편을 내리 보고 나면, 아마 올 여름도 지나갈 것이다. 

<명량>이 천만 관객을 추동하는 가장 중심적인 요건은 아마도, '명량 해전'을 통해 구현된, 해전사에 길이 남을 이순신의 전략적 성공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보듯이, 그에게 남겨진 단 열 두 척의 배, 그것도 그나마 믿었던 거북선마저 불타 없어져 버린 상황에서, 판옥선 열두 척을 가지고 330여척의 위용을 자랑하는 일본을 무참히 패배의 늪으로 빠뜨렸던 '승리'의 역사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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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사를 많이 알지 못했던 사람이라도 안다. 그렇게 '기적'을 만들었던 이순신이지만, 결국, 노량 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가슴에 맞고 전사했다는 것을. 또한 전장에 나서면서, 투구를 벗고 나섰다는', 어쩌면 예정되었을 지도 모르는 죽음이,  이미 영화 <명량> 서막에서도 보여지듯이, 그를 질시하는 임금과 조정 관료들에 대한 그의 비감어린 마지막 선택이었으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역사적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명량>은 그런 후기를 담지 않는다. 오로지, 갖은 고문으로 옥고를 치루어 병을 얻고,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신위조차 모시지 못한 상황에서도, 백성에 대한 '의리'를 다하여 결국 성공하고 마는 지도자 이순신이 성공했던 '순간'을 그려내고, 사람들은 그에 환호한다. 

하지만, 그런 영웅을 거두고 본 <명량>의 바다는 비감하다. 
패전을 거듭하여, 단 열 두 척의 배만이 남은 상황에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선의 수군은 '전멸'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았고, 그런 수군에 대해 중앙 정부는, 그나마 전력을 집중하기 위해 육지의 권율 부대로 합류할 것을 명령한다. 
날마다 전해지는 소식은, 일본에 의해 저질러지는 갖은 만행, 그 결과물로 돌아오는 건, 귀와 코가 베어진 채 죽은 자들의 머리들이다. 일본군은 누가 먼저 한양을 칠 것인가를 두고 내기를 하는 마당에, 갈 곳 없는 백성들은 하지만 믿을 자가 없다. 이순신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지만, 그가 바다에서 외선을 쓰러뜨리는 그 순간까지, 그 누구도 진정 이순신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파죽지세로 밀려들어오는 왜국의 파고에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댈 곳 없는 현실의 비감한 바다는 시대를 달리 하지만, IMF의 파고를 맞은 <해무>의 바다와 그리 다르지 않다. 수리를 필요로 하는 낡은 배, 하지만 선주는 수리비를 주는 대신, 정부 방침이라며 '폐선'을 종용한다. 이름만 전진호일 뿐, 물때를 맞추지도 못한 채 항구로 돌아온 낡은 배와 거기에 몇 명의 선원이 있을 뿐이다. 몇 푼의 보상금으로, 지금까지 뱃놈으로 살아왔던 삶을, 그리고 미래를 날려버리라 한다. 온갖 서류를 내세워도 알량한 돈 몇 푼을 마련하기 힘들다. 하지만, 여전히 배에는 팔팔하던 그렇지 않던 사람 여섯 명이 있고, 그들의 인생이 있다.  IMF라는 소리없는 전쟁은 조용히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전사시켜 가는 중이다.단지 다르다면, 그런 현실의 비감함을 이순신은 '기적'을 통해 성공적으로 길어올렸고, <해무>는 한 치 앞을 모르는 바다 안개 속에, 배와 함께 뱃사람들의 삶도 방향을 잃는다. 

이순신은 현실의 비감함을 '두려움'이라 정의내린다. 
동료들이 모두 죽어, 자신도 죽을 게 뻔해 도망을 치려던 병사를, 두 말 할 것도 없이 처치해 버린다. 덕분에 사람들은 두려우면서도, 두려움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한다. 자신은 그런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하겠다고. 
물 때를 이용한 유리한 위치 선점, 그리고 거북선의 위용에 가려 그 능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바다에서 일본 배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가졌던 판옥선,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다 절묘한 시기에 발휘되는 기가 막힌 전술을 통해 이순신은 열 두 척, 아니 영화 속에서는 그들 역시 두려움에 떠는 백성에 불과했던 나머지 군장들의 판옥선들 앞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순신을 보고, 우리쪽 사람들은 두려움이 '용기'가 되어  쓰러져 가던 이순신의 배를 사람들의 힘으로 살려냈고, 일본군은 공포에 질려 앞다투어 도망을 치게 되었다. 

하지만 배를 살리기 위해 '밀항'이란 최후의 수단을 선택하는 운명적 리더, 자신이 이 배에선 선장이고, 아버지고, 책임자라며 소리를 높이는 철주와, 죽기를 각오하고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았다며' 싸움에 나서는 이순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래서 무척이나 다른 듯 닮았다. 
해전이 성공을 거둔 후, 한적한 길을 여유롭게 거닐며 아들은 아비에게 묻는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섰던 그 전투의 승패가 갈리던 그 순간이 미리 대비해 두었던 것이냐고. 그에 이순신은 담담하게 말한다. 천우신조라고. 즉, 그에게 명량의 회오리 물때를 대비한 전술은 있었지만, 그래도 300여 척이 넘는 역부족의 외선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결국 '두려움이 용기가 되어, 모두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기적이었다. 

덕분에 <명량>에서 리더 이순신의 행간을 채우는 것은, 그런 리더의 고뇌어린 선택에 따라, 때론 방황하고, 저항하며,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며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우리가 국제 경기에서 종종 마무쳤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헝그리 정신'과 묘하게도 일치한다. 적진에 첩자로 나갔던 젊은 남편은, 죽어가면서도 아내에게 치마를 휘둘러 자신이 탄 배가 화약고임을 알리게 했고, 주줌거리던 무장들도, 지켜보던 백성들도, 그리고 아비를 잃은 아들들도 신들린 듯, '용기'를 낸다. 어쩌면 이순신이 말했듯이, 기대했지만, 우연이고, 기적이고, 그 기적의 실체는 사실 리더가 아니라,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런데, <명량>을 통해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이 비감한 현실에서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용기를 줄 헌신적인 리더이다. 정작 명량 바다에서, 배를 젓고, 배에 기어오르는 적들과 뒤엉켜 싸우고, 쓰러지는 배를 세운 사람들은, 백성 자신들인데, 그런 자신들을 그렇게 이끌어준 이순신에 환호한다. 즉, 열패감에 사로잡혀 현실을 견디기 힘든 자신을 다시 한번 '헝그리 정신'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독려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는 구도의 심정이요, 그런 영화를 통해 쏟아지는 환호는, 우리가 매번 선거 등을 통해 확인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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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메시아적 열망을 대변하는 <명량>과 달리, <해무>는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구원을 약속하는 메시아는 멀고, 현실의 리더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그리 넓지 않으며, 그 조차도 여의치 않다. 선장이 안겨 준 돈을 받고 뿔뿔이 흩어지는 선원들처럼, 부당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듯한 이익은 결국 신기루라는 걸 확인시켜 줄 뿐이다. '환타지'로서의 <명량>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메시아적인 리더와, 그를 따라 기적을 만들었던 역사가, 현실로 내려 앉으면, 사실 이렇다는 걸 <해무>는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당신이 선택한 리더가 철주요, 당신 역시 전진호 선원 중 누구 하나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족과 같은 선원들을 저버리고 '사랑'을 선택했던 동식의 선택조차 결말을 알 길 없다. 그리하여, <명량>에 이어, <해적>을 걸르고, 뒤이어 개봉하는 <해무>에 대한 대중의 판단이 더더욱 궁금하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기적을 구원하는 대중의 열망이, 현실 속 자신들의 모습을 안개 속에서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전진호 선원들의 선택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지. 

기적처럼 현실의 삶을 구원해줄 거라 믿었던 리더가 선택한 묘수가, 밀항과 같은 무리수이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이 나라를 구원해 주리라 믿으며 젖는 노와, 휘두르는 칼날과도 같은 선택이, 해무 속에 오리무중 갈 길을 잃은 욕망을 향한 몸짓일 수도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4. 8. 7. 1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