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3일 첫 선을 보인 mbc 월화 드라마 <화정>, 50부작의 포문을 연 것은 다름아닌 단 한 회만에 생을 마감한 '선조'(박영규 분)였다. 자신의 아들 중 하나였지만 광해군(차승원 분)이 누군인지 알아보지도 못한 아비, 사랑하는 애첩의 아들 대신 죽어도 될 만만한 존재로 세자를 책봉한 얍삽한 아비,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궁을 버리고 떠나는 자신을 대신해 백성을 독려하고, 왜군에 맞서싸우던 자신보다 더 '임금님' 같던 세자를 정적으로 여기던 아비, 그는 명의 고명을 핑계로 16년이나 된 나이가 지긋한 세자 대신, 왕후의 몸에서 난 어린 대군을 세자로 다시 옹립하려 한다. 


이렇게 <화정>은 문제적 인물 광해군을 설명하기위해, 그 보다 더 문제적 인물이었던 아비 선조를 등장시킴으로써, 광해군이 가진 존재론적 고뇌를 단번에 설명해 낸다. 아직도 역사상 정당한 임금으로 대우받지 못한 채 군으로 남겨진 문제적 군주 광해를 설명하기 위해 당시의 정치적 세력의 대력부터, 광해군의 중도적 외교 노선 등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이 첫 회의 서막만으로도, 선조의 편을 들어 어린 세자를 옹립하려 했던 중신들과, 못이기는척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싶어하는 인목대비, 그리고 그 밖의 왕가의 사람들 사이에서, '아비와는 다른 왕'이 되고자 했으나 결국 그럴 수 없었던 광해의 존재론적 한계를 설득해 낸다. 



'사극의 트렌드로서의 '선조'
역사에도 유행이 있던가? 한때는 사극만 했다하면 '정조'가 등장했었다. <화정> 작가인 김이영 작가의 2007년 작품도 정조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산>이었듯이, 여러 사극들이 개혁 군주로서의 정조의 열망을 그려내기에 앞다투었다. 하지만, 이제 개혁의 기치를 올린 정조 대신, 백성을 두고 줄행랑을 친 선조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2015년 종영한 <왕의 얼굴>에서 부터, kbs1tv의 대하사극 <징비록>, 그리고 이제 새로이 시작한 <화정>까지, 실패한 지도자 선조의 모습을 다각도로 그려낸다. 

<화정>이 자신의 아들을 정적으로 여기며 그를 몰아내고자 하자 목숨을 잃은 노회한 아비의 모습으로 선조를 그렸다면, <왕의 얼굴>은 광해를 백성을 생각하는 개혁 군주로 그려내기 위해, 아비 선조를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자신의 컴플렉스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아들을 의심하고 조련하는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가진 인물로 그려낸다. 자신의 부족한 정당성을 '관상'이란 대상에 실어 부족한 자신의 얼굴을 보완해 주는 인물을 찾는데 집착하는 인물, 그래서 자신보다 더 왕의 얼굴을 가진 광해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견제하는 인물로 그려낸다. 

<징비록>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징비록'의 저자 유성룡이지만, 실제 드라마적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결정적 인물은 '문제적 인간' 선조이다. 김태우가 분한 선조는, 임금이 될 깜냥이 안되는 인물이, 지도자의 능력을 갖추자 못한 사람이 리더가 됨으로써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그려내는 듯하다. 

왜 선조일까?
백성들을 버리고 평양으로가지 도망간 선조, 그를 원망하는 듯한 일부 중신들의 시선에 선조는 반문한다. 그럼 내가 죽었어야 했냐고. 그리고 그런 시선을 의식한 듯 평양을 배수의 진으로 삼아 왜적들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고자 한다. 군사를 모으고, 자신이 외면한 백성들의 환심을 사고자 손수 백성들에게 장국을 나누어 주는 등 솔선수범 리더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 하지만, 군령이 혼란을 겪는 시기, 자신이 임명한 군 지도자를 따르지 않는다 하여 그의 통솔을 벗어난 소속 군관의 목을 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그런 선조의 명령이 잘못된 명령이었음을 알게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선조가 명령을 내린 얼마 후, 적들을 보고 도망간 지도자를 벗어나 직접 적과 맞서 싸워 임란 최초의 전승을 거둔 그가, 적들의 수급을 자랑스레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절규하며 명령을 다시 내리지만 이미 그 시각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까지, 그리고, 전란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잘못된 리더쉽을 끊임없이 보이고 있는 선조를 그려낸다. 김태우의 열연으로 형상화되는 선조는, 자기 중심적인 인간, 그리고 리더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한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저 드라마일 뿐이라고 할 지 몰라도, 드라마의 트렌드는 귀신같이 사람들의 정서를 복사한다. 정조를 앞다투어 주인공으로 삼던 시기에는, 그래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나라를 '구제해줄' 누군가가 등장할 거란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이 기대했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새삼, 재삼 등장하는 선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을 그려내는 방식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혹은 인간적으로 미흡한 등 다양한 접근이지만, 결국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한 나라의 리더로서의 그릇을 갖추지 못했다는 결론으로 귀착한다. 

한 나라의 왕이지만, 백성을 이끌고, 중신들을 다스려야 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인물, 그래서, 자기 마음가는대로, 결국 자기 자신과, 자기가 끌리는 핏줄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 모험을 벌이는 인물, 아들 광해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제대로 된 신하들을 중용하지 못하듯이, 제대로된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없고, 애초에 그럴 능력조차 가지지 못한 리더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 그래서 실패할 수 없는 리더의 존재를 드라마는 끊임없이 복기한다. <왕의 얼굴>은 개혁 군주가 될 광해를 그리고자 했으나, 실패한 리더 선조의 그림자가 짙었고, <징비록>은 아예 대놓고 임진왜란에 피할 수 없는 책임을 가져야 하는 존재로 선조라는 부실한 리더를 그리는데 골몰한다. 그리고 이제 다시 <화정> 역시 혼돈스런 광해를 그리기 위해 그 아비 선조의 부덕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결국 엎어치던 메치던, 리더가 될 깜냥이 안되는 인물이 리더가 된다면, 그리고 그의 좁은 소견과 안목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면, 그의 대는 물론, 그의 다음 대까지 역사가 어떻게 절단나게 되는가를, 선조는 계속 증명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런 선조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자기 이익와 자기 주변의 이익, 그리고 자기 이해 관계에 맞춘 리더쉽이 한 나라를 어떤 지경으로 끌고가는지는 우리가 최근 우리 사회의 모습을 통해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선조의 미흡한 리더쉽이 낯설지 않은 세상, 그런 세상에서, 리더를 통한 희망 대신, 실패한 리더쉽을 복기하고 있어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안쓰럽다. 

by meditator 2015. 4. 15. 1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