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희(한은정 분)가 살아돌아왔다. 아니 엄밀히 말해, 태희는 죽은 적이 없으니, 살아돌아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겠으나, 태희가 죽은 줄 알았던 주홍빈(이동욱 분)에게도, 엄마가 저 멀리 별로 간 줄 알았던 창이(정유근 분)에게도 태희는 다시 살아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태희가 그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그녀와 관련된 과거의 사건들 역시 봉인이 풀릴 여지가 보인다. 그러자, 태희를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야 했던 무리들은 돌아온 태희의 존재에 위험을 느낀다. 당연히 다시 봉인해제된 태희를 그 이전 상태로 돌리고자 한다.

 

그간 태희를 만나왔다는 홍주(이주승 분)의 말을 듣고, 홍빈이 태희를 찾아나선 그곳, 하지만 그곳에 홍빈이 그리워했던 태희는 없었다. 그저 김태희라는 이름표를 건 또 따른 아가씨가 있었을 뿐. 하지만 그건 홍빈이 찾아온 줄 알고, 벌인 태희의 작은 눈속임이었다. 홍빈이 떠난 후 태희는 홍주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지만, 그녀의 바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태희의 아버지를 따라나섰던 세동(신세경 분)에게, 그리고 자신이 갔던 재래 시장에 태희 아버지가 내렸다는 운전사의 전언으로 홍주에게까지, 결국 태희의 존재는 드러나게 되었다.

 

(사진; 뉴스엔)

 

그렇다면 돌아온 태희는 어떤 모습일까?

단발의 웨이브에, 기다란 가디건 속에 남방, 그 안에 받쳐입은 흰 티의 소박하지만 자유로워보이는 모습?  그도 아니면 여전히 홍빈이 사랑했던 추억 속의 그 아리따운 외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아니, 그 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상징적 우화로서 <아이언맨>이 그려내고 있는 태희의 모습이다. 드라마 속 태희를 없애고자 했던 세력, 그들의 상징적 주구는 바로 주홍빈의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지, 아닌지 그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주홍빈의 아버지 주장원(김갑수 분)는 자기 아들의 눈을 멀게 한 보잘 것 없는 집 딸 태희가 사라지기를 원했고, 아버지의 측근이었던 윤여사(이미숙 분)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태희를 없애는 더러운 일을 자처했다. 윤여사가 바랐던 것은 큰일 하시는 아버지가 작은 일에 마음을 쓰지 않게 하는 것이었고, 아버지가 하시는 큰 일이란, 그가 다시금 벌이듯이, 태희 아버지가 사는 섬진강 변을 개발하는 것과 같은, 개발이란 명목으로 자연을 허물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건물을 지어 올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15회 태희가 사는 곳을 찾아가는 태희 아버지의 행적을 쫓다보면, 오래된 재래시장이 나온다. 태희의 아버지는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재래 시장을 지나, 철거 예정 지역이라되 된 듯 사람들의 흔적이 사라진 구불구불한 미로같은 골목을 지나, 허름한 이층집에 다다른다. 태희가 사는 곳이다. 홍주가 태희를 만났다는 곳은 또 어딜까? 고물상같은 그곳은, 사람들이 쓰다버린 옷가지와 책들 중에서 쓸만한 것을 모아, 볼리비아 같은 개발도상국의 아이들에게 보내주는 유니세프 휘하의 단체이다.

 

개발 시대의 상징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맞은 편에, 개발이란 이름 속에 스러져갈 철거 예정지에 살며, 문명 사회가 쓰레기가 버린 것들에서, 가난한 아이들의 구원이 될 것들을 길어올리는 일을 하는 태희, <아이언맨>은 그저 재벌집 아들을 사랑한 가난한 집 딸의 전형적인 멜로의 구도를 넘어, 개발과, 그 개발 속에 스러져 간 희생자들이라는 사회적 구도로서, 주인공을 사이에 둔 아버지와 첫사랑을 그려낸다.

 

태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홍빈은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부탁한다. 아버지가 세동이에게 했던 것처럼, 세동이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이 자신이 했던 일의 과정에서 생겨난 불행이었음을 우회적이나마 사과했던 것처럼, 자신의 첫사랑 태희에게도 그렇게 '사과'해줄 것을.

그런 홍빈에게, 아버지는 오히려 반발한다. 홍빈이 사랑하는 태희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아 갔다고. 그리고 아버지가 생각하는 태희가 빼앗아 간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아들 홍빈이었다.

즉, 개발 시대의 아버지는, 그저 아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 아들을 좀 더 낫게 만들기 위해, 땅을 파헤치고, 사람들을 몰아내고, 종종 사람들을 헤치기까지 했다. 그저 아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하지만, 정작, 아들의 사랑을 얻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부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었는데, 아버지는 그걸 외면한 채 왜곡된 사랑을 얻으려, 아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조차 빼앗아 버린 것이다. 즉, 우리 사회가 개발이란 이름으로 놓쳐버린 것들을 <아이언맨>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상징적으로 그려내고자 한다.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무의식적 사주로 인한 폭력으로 인해 머릿속에 뼈조각이 돌아다녀 시한부의 삶을 사는 태희는, 개발이란 이름 아래 위기에 놓인 섬진강변처럼, 개발 이란 이름 아래 사라져갈  자연과, 우리가 소중히 여겨왔던 추억들을 상징한다.

 

<아이언맨>의 스토리는 상투적이다.

아들의 가난한 사랑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위해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는 어둠의 세력, 그리고, 시한부의 운명을 가지고 절묘한 시기에 다시 나타난 첫사랑, 그리고 그 첫사랑을 다시 음해하려는 세력 등, 멜로 드라마의 클리셰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부한 클리셰들이, 우리 사회를 상징적으로 그려내는 우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면서, 진부함은, 다른 진동으로 다가온다. 뻔한데, 다른 울림을 준다. 스토리를 채색해 간 배경의 다름때문이다. 또한 스토리를 바라보는 시각의 다름때문이요, 그 갈등의 해법의 차이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다시 사랑하는 아들을 빼앗은 세동에게 아버지 주장원이 우회적이나마 사과를 통해 해원을 풀었듯이, 돌아온 첫사랑 태희에 대한 주장원의 결자해지를 <아이언맨>답게 풀어내는 것이, 이 드라마를 개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우화로 완성시킬 관건이 될 것이다.

 

 

by meditator 2014. 10. 31. 1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