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에서 5회를 거치며 상승세를 보이던 <쓰리데이즈>의 시청률이 7회 11.3%(닐슨)로 하향 곡선을 그었다. 전회 12.9%로 동시간대 1위를 차지했던 거에 비해 1.7% 하락한 수치이다. 동시간대 경쟁작인 <감격시대>가 1위를 차지했다고는 하지만, <감격시대> 역시 전회 12.1%에 비해 0.6% 하락한 상태에서  <쓰리데이즈>가 보다 하락폭이 컸기때문에, <쓰리데이즈>의 시청자들이 다른 드라마로 채널을 돌렸다고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6회에서 7회에 걸쳐 전개된 내용에서 <쓰리데이즈>의 하향 요인을 찾는 것이 정확하리라 본다. 굳이 한 회의 방송분에 따른 시청률을 분석해 보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쓰리데이즈>의 시청률 하락 현상이 마치 우리 사회 정치를 대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 이다. 


(사진; 메트로)



<쓰리데이즈>가  정치 드라마였어?
5회 중반에서 6회 중반에 걸쳐 <쓰리데이즈>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의 축을 지나 본격적으로 98년 양진리 사건을 둘러싼 정치 세력간의 입장 차이를 조명하는데 주력했다. 
재신 그룹이라는 자본가가 정치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손을 잡은 여당 대표와 합참의장이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덮기 위해 현재의 대통령을 압살하려는 음모를 장황하게 설명해 나간다. 6회 마지막 합참의장이 건물에서 떨어져 죽는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7회, 드라마는 그 사건의 범인으로 추정되는 신규진 비서실장이 합참의장을 살해하는 사건에 집중하는 대신에, 그와 벌인 정치적 입장 차이를 보인 설전에 촛점을 맞춘다. 또한 그 이전에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과 동일시했던 대통령과의 입장 차이를 장황하게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동지였던 두 사람이 어떻게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자 애쓴다. 

그 장황했던 정치적 이견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장면은, 결국 <쓰리데이즈>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미스터리를 푸는 장르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정치적 담론을 이 작품의 주제로 하고자 하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의 의도에 대해 여러가지 반응이 있지만, 가장 즉자적으로 나타난 반응 중 하나는 <쓰리데이즈>가 정치드라마였냐?는 반문이었다. 이 반문이 내포한 뉘앙스는 부정적이다. 그저 대통령을 저격한 범인을 찾는 재미로 드라마를 보아왔는데 골치아픈 이야기를 한다는 속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저격 사건의 배후를 파헤치다보면 당연히 정치적 내용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했을 텐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라마를 통해 설명이 되기 시작하니 뜨악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얼마나 '정치'에 대해 피로감 혹은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사는 것도 고달프고, 매일 접하는 정치판도 시끄러운데, 굳이 드라마를 통해 그런 것을 또 복기해야 하냐는 볼멘 입장인 것이다. 

'나꼼수'를 통해 지난 총선 당시 정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김어준씨는 사람들에게 일갈한다. 당신이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모든 고민과 문제들이 결국은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만, 신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철저하게 개별화된 존재로 규정되어버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사는 것도 힘들고 고달픈데 그런 거창한 문제까지 신경을 써야 되느냐는 것이 하나의 흐름이다. 그래서, 신문도 끊고, 뉴스도 포털에 나온 단신만 거들떠 봐도 감지덕지한 상황에서, 뉴스도, 다큐도 아닌 드라마에서 정치 이야기를 정색하고 논하니, 채널부터 돌리고 보는 식이 되는 것이다. 

(사진; 메트로)


정치 이야기도 하기 나름?
<쓰리데이즈>가 6회에서 7회에 걸쳐 폭로하고자  했던 정치적 속살은 묘하게도 지금까지 몇번의 선거를 통해 반복되었던 야당의 정권 비판과도 닮은 면이 있다. 드라마는 친절하게 반복 설명하면서 이동휘 대통령과 그들이 98년 당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다시 그것을 밝히려는 이동휘 대통령을 주저앉히고자 하는 지를 덧붙인다. 하지만 굳이 반복하고 덧붙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벌써 '아'하면, '어' 하고 안다. 벌써 그런 세월을 살아온 게 몇 년인데, 몰라서 이러고 있는게 아닌데, 드라마도, 야당도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며 가르치려 든다. 

<쓰리데이즈>는 아버지 세대의 과오를 바로 잡으려는 옮은 어른과, 아버지 세대의 과오를 넘으려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룬 이른바 '건전한' 역사적 시각을 다룬 드라마이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했으면 좋겠는 드라마이다. 하지만, 좋은 주제와, 건강한 의식을 가진 드라마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시청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마치 학창 시절 그 좋았던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시간이 지겨웠던 것처럼, 정치가 남의 일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에, 사실은 이런 거야를 곧이 곧대로 가르치려 드는 드라마에 채널을 고정하며 견딜 시청자가 얼마나 될까? 더구나 트렌디한 젊은이들에게, 자기 삶의 문제에 빠져있는 젊은이들에게 장광설이라니!

그 좋은 주제 의식을 드라마적 재미로 살리기 위해 한태경이라는 경호관의 신분을 지닌, 하지만 과거사의 책임을 지닌 아버지를 가진 젊은이와, 진실을 밝히려는 대통령을 극중 인물로 합류시켰지만, 그들이 드라마의 중심 스토리 밖에 빠져있고, 지금처럼 장황하게 주변 인물들의 입을 통해 주제에 접근하는 식이라면 인내심의 한계치를 넘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김어준의 <나꼼수>로 돌아가보자. 그렇다면 그때 당시 그렇게 원자화되고 개인주의화된 사람들에게 어떻게 정치 팟캐스트 <나꼼수>가 인기를 끌었을까? 재미가 있어서다. 그리고 듣다보면 비록 방송이라도 명확하게 딱 꼬집어 주는 사안들이 속시원하고, 선동적인 걸 뻔히 알면서도 끌리게 되는 것이다. <나꼼수>가 정치사에 있어서 어떤 평가를 받는가를 차치하고, 당시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붐을 이룬 것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멧 데이먼의 영화 '본시리즈'도 있다. 영화는 주구장창 싸움박질만 하는데도, 우리는 그 영화를 통해 미국이라는, 이 시대 절대 권력의 속살을 소름끼치게 절감할 수 있었다. 옳은 이야기를 하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옳은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쓰리데이즈>도, 현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가르치려 들지 말고, 설명하려 들지 말고, 드라마를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다면 보여주어야 한다. '쟤네들이 이렇게 나뻐', '쟤네들한테 이렇게 당했네' 만 중언부언하지 말고, 그렇게 나쁜 얘들한테 우리는 이렇게 맞서싸우고 있어, 이렇게 싸우는 사람들도 있어 를 보여줘야 보는 사람들도 신이 나서 맞장구치게 되는 것이다.

물론 7회에 이르른 <쓰리데이즈>는 중간중간의 장황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덕을 더 많이 가진,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훌륭한 담론의 가능성을 지닌 드라마이다. <쓰리데이즈>가 성공적인 드라마로 남아 이런 시도가 앞으로도 계속 더 많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장르물에도 불구하고, 기껏 어렵게 획득한 대중적 관심을, 주제에 대한 확신만으로,  안이한 전개 방식으로 놓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에서 몇 자 덧붙여 보게 된다. 


by meditator 2014. 3. 27. 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