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이 소속된 집단의 리더는 소통은 커녕,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며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문제가 되었다 한다. ㅇㅇㅇ를 제대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이 리더는 여전히 군대에 있는 듯, 군대 시절의 경험을 고스란히 사회로 확장시켜 주변에 물의를 끼치는 중이다. 남자들이 모이면 군대 다녀온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이유는, 그들의 인생에서 그 군대가 그만큼 자신의 전인생사의 경험을 뛰어넘을 만큼 파격적이고 이질적인, 그리고 그 여파가 이후의 삶에 지대하게 미친 충격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군대라는 건, 이른바 '조직 사회'의 가장 첨예화된 형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 하고, 그 반대편의 누군가는 인생에서 가장 무용한 시간이라고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그 남자들의 전형적 후일담 '군대' 이야기가 육사 출신이 송곳의 이수인(지현우 분)의 이야기에 종종 등장한다. 성공하는 직업 군인이 희망이었던 이수인은 하지만, 결국 직업 군인이 되지 못했다. '군대'라는 조직 사회에 가장 잘 적응할 거 같았던 그는, 결국 '군대'라는 조직 문화를 견녀내지 못했다. 그놈의 '송곳'같은 성정 때문에. 




하지만 그가 사회 생활을 하는 구비구비마다 그의 군대에서의 체험은 그로 하여금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는' 예방 주사로 작동한다. 그 누군가가 '군대'에서의 경험을 사회로 확장하여 '군대식' 행태를 보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반면, 이수인에게 '군대'는 철저한 삶의 복기 대상이다. 그가 프랑스 인 점장의 총애를 받는 과장에서 직원들의 부당해고에 맞설 수 밖에 없는 송곳같은 인물이 되는 그 순간부터, 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드라마는 그가 겪었던 '군대'의 경험을 들먹인다. 



군대 이야기, 노조에서 인간으로 넘어가는 매개제
그렇게 시작된 군대 이야기는 11월 15일 8회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회사가 노조원들의 월급을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지불하자, 많은 노조원들이 노조를 탈퇴한다. 그러자 남은 노조원들과 탈퇴한 노조원들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고, 그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남은 노조원들은 탈퇴한 노조원들을 배신자라 지목하며 그들이 돌아와도 받아주지 않아야 한다는 둥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다. 구고인이 나서서 이렇게 같은 편끼리 싸우는 걸 바로 회사가 원하는 거라 설득하지만 그의 말조차 잔뜩 화가 난 노조원들에게는 별 무 소용이 없다. 바로 그 순간 이수인의 군대 이야기가 등장한다. 십여일의 거친 훈련 과정, 전우애로 똘똘 뭉칠 것 같은 그들은 다음 순간 이수인이 짊어졌던 10kg의 화기를 모른 척 할 정도로 자신이 견뎌야 할 현실의 무게에 짙눌려 있다. 심지어 이수인조차 조장의 일어나라는 소리를 모른 척 할 정도로 지쳐있었다. 하지만 그가 나 하나쯤이야 제일 먼저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으로 조금 더 눈을 붙일 동안, 그 시간 동안 조장은 목이 쉬어 터지도록 동기들이 일어날 것을 독려했다. 

그런 이수인의 군대 이야기는 이제 푸르미 노동조합 결성 과정에서 맞부닥친 현실의 문제로 다시 되돌아 온다. 그리고 이수인은 회사의 부당한 월급 강등에, 그리고 동료 노조원들의 후퇴에 화가 나고 좌절한 노조원들에게 말한다. 여러분들도 그만하셔도 된다고, 각자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짐의 무게만 짊어지면 된다고. 아마도 이수인의 그 말이, 그의 군대 경험이 보여지지 않은 상황에서 풀어졌다면, 그럴 듯은 했지만, 그만큼 감동적으로 전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군대 시절에 대한 복기는, 그저 현재의 노조 상황을 넘어, 인간의 삶에 짙눌려진 무게에 대한 촌철살인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송곳>은 푸르미 노동 조합 결성이라는 사건을 둘러싼 전개를 하면서 이수인이라는 인물이 가진 경험의 전사를 동시에 풀어낸다. 그럼으로써, 이런 상황이 그저 노동조합 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인간으로써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는 삶의 요소요소에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보편적 상황임을 설득해 낸다. 즉, 노동조합이라는 것은 그저 푸르미란 특수한 조건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굳이 노동조합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며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언제 어느 곳에서든 벌어질 수 있는 동일한 문제라는 것을 드라마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푸르미란 작업장에서 일을 하게된 사람들에게는 노동조합이란 형태로 다가왔을 뿐, 그 상황이 군대로 바뀌면 군대에서, 혹은 학교로 바뀌면 학교에서 우리들은 언제나 동일한 문제의 상황을 맞부닦치게 되고, 그 상황에서 똑같은 갈등과 결정의 기로에 설 것이라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드라마는 남자들의 가장 보편적인 경험 '군대'를 구구절절히 들먹이고 있다. 그 누군가는 군대를 통해 그저 사람들을 휘두르고 부려먹는 방법을 배웠다면, 이수인은 그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을 '인간'의 민낯에 대한 충실한 선험적 학습을 완료했다. 누군가에겐 트라우마 된 경험이, 이제 이수인에게는 그를 쉽게 흔들거나 좌절치 않게 만들 단단한 토양이 된 것이다. 그렇게 이수인의 군대처럼, <송곳>도 마찬가지다. 그저 푸르미란 가상의 마트에서 사람들이 노조를 만드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다. 그래서 노조에 관심이 없으면 모지 않아도 될 이야기가 아니다. <미생>이 환타지로 일관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송곳>은 일하는 곳에서 인간이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처절한 민낯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진짜 미생들의 이야기이다. 갑이면 갑, 갑중에 을은 을대로, 그리고 을들 속에서도 저마다 서로 다른 입장들의 얼굴을, 하지만, 그래서 보기 싫고,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치장하지 않은 그 민낯에서, 이수인이 군대 생활을 통해 인간에 대한 단단한 배움을 쌓았듯이, 쉽게 기대하거나 허물어 지지 않는 인간사를 배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기대어 살아가야 하고,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길어올리게 된다. 그래서 <송곳>은 그저 노동조합 만드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에서도 쉽게 말해주지 않는 진국의 '인간학'으로서 2015년의 우리가 보아야 할 드라마 된다. 
by meditator 2015. 11. 16. 1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