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달콤하다'

복수에 대한 이 정의는 7월 16일자 한겨레 칼럼에서 전중환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 교수, 진화 심리학)가 내린 것이다.

복수가 달콤하다니? 그 이유는, 당할 때는 그 어떤 것보다도 분노를 일으켰던 복수가 복수를 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가는 순간, 뇌에는 초콜릿이나, 마약을 한 거 같은 짜릿한 흥분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술래잡기의 술래가 되어 상대방이 숨어 있는 장소를 향해 나아갈 때 느끼는 그 긴박감같은 거랄까.

 

 

그런데 술래잡기의 술래가 다가가서 상대방을 잡으려다가 술래가 먼저 덜미를 잡힐 때가 있듯이, 복수란 꼭 계획을 할 때의 짜릿한 흥분을 일으키는 그 상황대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복수란 진화론적으로 볼 때, '복수심은 상대방의 공격을 사전에 억제한다는 뚜렷한 기능을 수행하고자, 나를 두 번 다시 건드리지 않게 하려면 상대로 하여금 앞으로 그 어떠한 도발도 털끝만한 이득조차 가져다주지 못할 것임을 똑똑히 각인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라는 것이다. (마틴 테일리 & 마고 윌슨) '상대방의 순이익이 0이 되기 위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되도록 갚아주려는 것인데, 그 과정은 대단히 소모적이고, 자기 파괴적이기 까지 하다'는 것이다. 즉 '엎질러진 우유를 다시 담을 수 없듯이, 내 가족을 죽인 원수에게 보복한다고 해서 가족이 살아돌아올리는 만무하'니까. 하지만, 진화론적으로, 그 어떤 나쁜 짓도 영원히 보존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인류는 오늘도 자기를 내던지며 복수에 헌신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월, 화 드라마의 남 주인공들은, 이런 복수에 대한 진화론의 시뮬레이션 실행 모델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명횡사한 아버지의 복수를 갚기 위해 스스로 불나방이 되어 복수의 화신으로 살아간다.

<황금의 제국>의 주인공 장태주(고수)는 성진그룹의 건설 공사 과정에서 철거민으로서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아버지의 복수를 갚기 위해 그 스스로 '황금의 제국'이라 일컬어지는 성진그룹을 향한 복수의 일전을 꿈군다.

<상어>의 김준 역시 마찬가지다. 조상국(이정길)회장이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킬러를 이용해 없애버린 자신이 아버지와 자신의 복수를 갚고자, 15년만에 김준이 되어 나타났다.

 

 

 

 

전중환 교수는 복수가 비록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이라고 해도 결코 복수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국가라는 공적 처벌 제도를 지닌 문명 사회는 바로 이 횡행하던 사적 복수를 '법'이라는 심판을 통해 제도화함으로써 안정화를 기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사회란 사적 복수는 엄벌에 처하지만, 복수심에 몸부림치는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회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다시 <상어>로 돌아와서, 납치당한 이현을 어렵게 구한 이수, 즉 김준에게 이현의 양아버지 변방진(박원상)은 내 손으로 너를 잡고 싶지 않다며 더는 복수를 진행하지 말 것을 호소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김준의 대답은 자신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15년 전에 처럼 당하지는 않겠다고도 한다. 그런 김준에게, 변형사는 고개를 수그릴 수 밖에 없다. 미안하다고. 내가 15년 전에 조금만 더 진실을 밝히기에 노력했다면 니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라며.

 

 

 

<상어>와 <황금의 제국>을 관통하는 복수는 공적 처벌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던 우리 근대사의 피해 사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상어>는한때는 친일파이다가, 전쟁 통에는 인민군이 되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학살했던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범죄도 서슴치 않았던 조상국이라는 근대사의 전범이 오늘날의 지도층으로 살아가기 위해 저지르는 만행을 복수의 배경으로 삼는다.

<황금의 제국>은 고도 성장기의 대한민국, 돈이 되는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철거민의 목숨 따위는 가볍게 거둬들였던 자본 축적기의 대한민국 재벌의 파렴치한 범죄를 역시나 복수의 배경으로 삼는다.

즉, 복수의 진행은 사적 복수이지만, 그 배경이 되는 피해 사례는, 근현대사의 과정에서 단죄되지 않았던, 공적 범죄들인 것이다. 그것은, 전중환 교수의 말처럼, 피해자의 눈물을 제대로 닦아주지 못한 '국가 제도'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드라마는 여전히 눈물 흘리고 있는, 공적 부조를 받지 못한 채 여전히 사적 복수를 통해서만이 억울함을 풀 수 있는 피해자 김준과 장태주를 통해, 대한민국의 현실을 짚고 있는 중이다.

by meditator 2013. 7. 17. 0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