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7일 16부작으로 kbs2 tv의 월화 드라마 <빅맨>이 마무리지어졌다. 마지막 회 마지막 장면, 현성 에너지의 회장이 되어, 1년이 지난 후 김지혁은 기념으로 연설을 한다. 처음 자신이 회장이 되었을 때, 자신이 대단한 걸 이룬 것 같아 대견했었다고, 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른 후 깨닫게 되었다고 김지혁은 말한다. 그저 자신이 한 일이란, 자기 주변을 조금 바꾼 것 밖에는 없었다고, 그렇게 자신이 조금 바꾼 주변이, 하지만, 오늘날 이렇게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고. 김지혁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은 언제나 지기 쉽다고. 이기기 힘들다고. 김지혁은 힘주어 말한다.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이기는 세상을 위해, 우리 끝까지 힘을 모아 싸워 나가자고. 지지 말자고.  그렇게 김지혁이 말을 하는 동안, 단상의 자리는 비워져 있다. 마치, 세상의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을 위해 싸워 줄 진짜 김지혁을 기다리는 듯이. 


드라마 자체로만 따지고 보자면, <빅맨>에 내려질 평가는 결코 호의적일 수 없다. 
시장 바닥 양아치 김지혁이 그들의 심장을 원하는 현성 가의 숨겨진 아들로 둔갑하는 초반의 반전은 그럴 듯했다. 허수아비 사장이었던 김지혁이 강지혁이 되어, 현성 유통의 사장이 되어 불어 일으키는 바람은,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드라마로서의 호평은 거기까지다. 그 이후 드라마 <빅맨>은 마치 어린이 잡지의 만화를 보는 듯 순진하고 단순했다. 재벌 기업의 회장 아들 강동석은 매번, 감히 니들이 나를! 이라는 대사만 반복하며, 자신보다 나은, 시장 바닫 양아치 출신 김지혁에 대한 열등감으로 집착하며, 그런 강동석에게 당하는 김지혁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마지막 연설에서 그가 말한 바, 그의 주변 사람들의 선의이자, 정의이다. 강동석이 온갖 협잡을 하며, 김지혁을 굴러 떨어뜨리면, 그 주변에서, 그를 배신했던 사람들이, 결국 김지혁의 인간에 대한 믿음에 감동하여 결국 김지혁의 편에 서서 강동석을 무찌른다. 김지혁이 내건 사훈, '우리는 가족입니다'와, 늘 그가 입에 달고 사는, 믿을 건 인간 밖에 없다'는 그 지론이 일관되게 드라마를 끌고 간다. 심지어, 강동석 주변에서 일관되게 그에게 충성을 하던 도실장마저도, 끝내는 현성의 개가 되고 싶지 않다며 제 발로 경찰서로 향하는 시점에 이르면, 실소를 지나, 수긍하게 된다. 그렇지, <빅맨>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이 정도가 되면, 만화도, 초등 고학년이 아니라, 저학년들이 즐겨 볼 수준의 스토리텔링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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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스타 뉴스)

그런데, 회를 거듭하면서, 마지막 회를 다가가면서, 묘하게, 김지혁의 인간론, 그리고 그 인간론에서 비롯되는 개혁들에 대한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 말도 안돼? 어떻게 다 저렇게 돌아설 수 있어? 우리 사원 지주제? 말이 좋지, 그게 가당키나 해? 사람들을 믿는다고? 세상에 믿을 놈이 어디 있다고? 그런데, 정말 결국 조금씩 바뀌면 되는 건데, 우리나라 재벌들, 말이 좋아, 회사 주인이지, 반은 커녕, 1/3도 안되는 주식으로 서로 돌려막기 하면서, 그룹을 이끌어 가고 있는 건데, 말이 안되는 것도 아니잖아? 뭐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거다. 그러다, 마지막 회, 김지혁이  연설에서, 자신이 한 것은, 그저 주변을 조금 바꾼 것이라고 했을 때, '작은 불씨 하나가~'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6월 16일 한겨레 신문에 도쿄 경제대 서경석 교수는 '지식인들이여, 아마추어로 돌아가라'는 칼럼을 기재했다. 그리고 그의 글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식인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책을 근거로 한다. 즉,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글을 통해 오늘날 지식인 본연의 자세를 위협하는 것은 아카데미도, 저널리즘도, 상업주의도 아닌, 전문주의(프로페셔널리즘)이라고 단언하며, 오늘날 교육 수준이 높아질 수록, 사람들은 좁은 지(知)의 영역에 갇혀 순종적이며, 자발적인 상실의 존재가 된다고 한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이익이나, 이해, 편협한 전문적 관점에 속박되지 않는 아마추어리즘, 즉, 사회 속에서 사고하고 걱정하는 인간 본연의 자세가 오늘날 지식인들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정의내린다.

그리고, 바로 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그리고 그의 의견을 빌은 서경석 교수의 아마추어리즘을 빌어, 종영을 맞은, <빅맨>을 옹호하고자 한다. 
분명, <빅맨>은 어설프다. 스토리 라인은 단순했고, 그것을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단선적이었다. 하지만, 대신, <빅맨>은 가장 본질적인 이야기에 충실했다. 머리를 굴려야 이해할 수 있는 현학적 대사들 대신에, 단순하게 인간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인간의 변화를 추구했다. 너무 순진해서 '풋'하고 실소가 나오는, 그것이, 김지혁을 거대 기업 현성의 회장이 되게 한 힘이었다. 그리고 김지혁의 말처럼, 우리의 현실은 그걸 환타지라 치부해 버리게,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빅맨>을 구성했던 이야기의 골조들은 사실이다. 회사의 주인은 그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사장도 그들의 손에 의해 뽑히는 게 맞고, 그것을 함께 의논해 나가야 하는 것도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겨우 1/3도 안되는 지분으로, 거대 그룹의 주인입네 하는 재벌들의 현실은 틀린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당연한 원칙들을, 세상 살이에 물든 우리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 주인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런 우리의 알면서도, 스스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진실을, <빅맨>은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서경석 교수가 말한 바, 그 어떤 이익이나 이해 관계에 흔들리지 않는 아웃사이더로서의 원칙으로 단순하게 담백하게 말한다. 세상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던 세속에 찌든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 어린 아이의 티없이 맑은 눈동자이듯, 16회로 종영한, <빅맨>의 순진무구한 주제 의식이, 이기는 법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by meditator 2014. 6. 18. 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