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역시'다. 김용수 감독의 <달리는 조사관>은 회를 거듭할 수록 이야기의 밀도는 진해지고, 미장션은 더욱 예술적이어지지만, 역설적으로 시청률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전작과 달리, 동시간대 종편의 <우아한 가>가 매회 자체 최고 시청률을 치고나가며 시청자청의 이반이 심해지고, 거기에 감각적이면서도 '이성적'인 김용수 감독의 연출 방식이 여전히 이 시대엔 낯선듯하다. 그럼에도 3,4회 <달리는 조사관>이 보여준 이야기는 이 시대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인권'의 실마리를 풀어준다. 

 

 

인권, 그 당연하고도 위협적인 화두의 딜레마 
인권,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라 '사전'은 말한다.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건, 장애인이건 아니건, 여자건 남자건, 외국인이건 아니건 사람은 누구나 누려야 할 '인간적'인 권리가 있다. '하늘'로 부터 부여받은 인간적 권리이다. 하지만 '인권'이 이 인간적 권리가 중요하게 강조된다는 점은 늘 어느 사회에서나 각 사회가 지니고 있는 여러 '편견'으로 인해 인간적 권리들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는 조사관>의 배경이 되는 국가 인권 증진위원회는 바로 이런 '위협받고 있는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 일을 하는 곳이다. 

2019년 소오소관 주점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주인이 칼에 찔려 사망한 것. 이를 조사한 경찰은 이 주점에서 일하던 지순구(장정연 분)가 외국인 노동자 나뎃 쿠미(스잘 분)과 함께 밀린 임금 50만원 받으러 갔다가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수감중이던 나뎃은 자신의 옷에 '나는 사장을 죽이지 않았다'라 쓰고 스스로 목을 매 죽음으로 자신의 무죄를 호소했다. 그리고 나뎃의 형  사와디 쿠미야가 인권 증진 위원회(이하 인권위)를 찾아와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달라 호소한다. 
그리고 지순구의 변호사인 대형 로펌 '썬앤문'의 오태문((심지호 분)가 등장해 경찰이 외국인 노동자 나뎃, 그리고 경계성 지능장애인 지순구를 '임의 동행'해 장시간 심문하여 경찰의 시나리오에 맞춰 '자백'을 받아냈다며 무죄를 주장한다. 

하지만 인권위는 의견이 갈린다. 인권위가 할 수 있는 거, 해야 하는 거는 '조사'다. 그러나 사건의 성격상 경찰의 무리한 강압적 수사를 밝히기 위해서는 애초의 소오소관 주점 살인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재조사'해야 하지만 그건 결국 인권위의 영역을 넘어선 '수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권위'의 성격에 맞게 '조사'만 해야 한다는 한윤서(이요원 분)와 예의 열혈 검사 출신답게 '수사'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배홍태(최귀화 분)는 서로 다른 의견으로 티격캐격하지만 결국 '사건'의 진실을 향해 한 발 한 발 들어서고 만다. 

 

 

편견의 공동 정범들 
여기서 <달리는 조사관>이 주목하고자 하는 건 바로, 편견이다. 경찰들은 외국인 노동자와 경계성 지능 장애인이 범죄 피의자가 되어 왔을 때 보여준 편견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런 '관습적 편견'에서 한 발 나아간다. 인권위에 '조사'를 받으러 온 경찰은 외려 반박한다. 과연 경찰이 그렇게 '편견'만으로 수사했겠냐고. 조사 과정에서 지순구는 경찰이 간과했던 '소화기'를 언급하며 범인만이 아는 현장의 상황을 '자백'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편견'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범인만이 아는 현장의 상황이란 '자백'에 대한 편견이다. 하지만 인권위 조사관들은 현장과 조사한 내용을 보며 이 '자백'한 내용의 헛점을 찾아들어간다. 그리고 결국 동네 주민의 증언을 통해 사건 당일 나뎃은 지순구와 함께 술집에 간 것이 아니라 집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그렇지만 현장에 있었던 족적은 2명의 것. 결국 지순구와 함께 술집을 찾은 건 지순구 고시원에 지내던 고시생 형이었다. 

그러나, 고시 1차 합격을 했다는 형은 '고시'라는 사회적 관문을 통과했다는 이유만으로 피의자의 그물에서 벗어났다. 더구나 지순구의 변호사는 나뎃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대신, 나뎃을 재물삼아 지순구의 '무죄'를 주장하며 자신의 사건 수임 성과만을 노린다. 결국 조사관들은 그 '고시 1차 합격'이라는 허울의 실체를 밝혀낸다. 사실은 백수였지만 남들한테 그럴 듯해 보이기 위해 '고시생'이라는 겉치레로 자신을 치장했던 것. 그리고 그 '고시생'보다는 당연히 '외국인 노동자'가 더 범죄 피의자로 그럴 듯해 보였기에 수사는 '진실' 보다는 그럴 듯한 '편견'의 색안경을 쓰고 진행되었던 것이다. 또한 경계성 지능 장애라는 장애 역시 변호사의 편의적인 사건 포장의 함정이 된다.  

'조사관'이라는 신분적 딜레마를 넘어 한윤서는 지순구에게 충고한다. 나뎃의 억울한 죽음을, 변호사의 그럴듯한 입에 발린 말에 넘어가 '무죄'라는 얄팍한 법의 그물을 피하는 비겁함에 대해. 그리고 수사를 할수 없는 한계를 넘어, 그럼에도 '나뎃'에게 행해졌던 부당한 겁박 수사에 대한 인권위의 입장을 밝히고. 비록 고시원 형과 함께 현장에 있었던 공동정범이지만 지순구에게 어떤 살인적 의도가 없었음에 대한 의견도 빼놓지 않는다. 

 

 

언뜻 평범한 살인 사건, 그러나 그 '평범한 사건' 속에 숨겨진 건 우리 사회를 잠식한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고, 또 역설적으로 '학벌'과 이제는 고착화 되어가는 '고시 합격자'라는 신분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는 '인간의 권리'를 존중한다고 늘 선언적으로 다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인간'에 대한 다종다양한 수식어의 함정에 빠져 있는지 드라마는 차근차근 폭로한다. 그러면서 한윤서의 입을 통해 묻는다. 우리 역시 '편견의 공동 정범'이 아니냐고. 

<달리는 조사관>를 채우는 건 '감각적'인 영상과 구도이다. 하지만 그 구도를 통해서 제작진이 진득하게 설득하는 건 우리의 굳어져 가는 사고의 양식이다. 이는 이미 김용수 감독의 전작 <아이언맨>에서 보여졌던 방식이다. 드라마를 채운 건 유려하고 감각적이고 심지어 서정적인 영상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드라마는 예리하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관습적'인 사고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졌었다. 그리고 이제 <달리는 조사관> 역시 마찬가지다. 불편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해진 '사고 방식'에 대해 '질문'하는 '공간'을 연다. 그래서 그건 낯설고 어색하다. 바로 그 낯설고 어색함이 <달리는 조사관>의 딜레마이자, 매력이다. 

by meditator 2019. 9. 27. 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