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이 71주년이다, 벌써. 하지만, 7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우리 국회의원들의 독도 입성이 '정치적 행위'가 되어야 하고, 그 상대편인 일본은 오히려 시대를 거슬러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고 있다. 두 나라 사이의 역사적, 정치적 긴장감은 미국의 동아시아 벨트라는 전략적 군사적 연합에도 불구하고 쉬이 잦아들지 않는다. 광복한 지 70년이 지나도록 두 나라 사이의 알력이 쉬이 해소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 경계에 선 사람들은 어떨까? 8월 14일 방영한 <다큐 공감>은 자이니치 연출가 김수진의 이야기를 통해 여전히 그 경계에서 쉬이 자유롭지 않은 재일동포들의 삶을 다룬다. 




자이니치, 경계인의 삶
'자이니치'(在日, ざいにち) 는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통칭하는 표현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재일 한국인들을 뜻한다. 재일 한국인, 그들은 일본에 살며, 여전히 종종 일본인들에게 '조센징'이라 놀림을 받는 처지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일본에 온 사람들이 아니다. 대부분 일본에 의해 강제 징용 등으로 '끌려온' 사람들, 그러다 발붙이고 살다보니 이제 2세, 3세까지 일본에 살게 된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귀화'하지 않는 한 '자이니치'로 여전히 '국외자'로 취급받는 경계인들이다. 

경계인들의 삶은 어떨까? 도쿄케이자이 법학부 교수가 된 자이니치 서경식은 그 경계의 삶을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라는 학문의 영역으로 풀어낸다. 조선, 대한민국, 일본 그 어디에서도 정체성을 확인받을 수 없는 그의 존재가, 역사와 사회의 경계성으로 확산된 것이다. 와세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나가노 데쓰오였던 강상중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한국 이름을 찾았다. 하지만, 그 되찾은 한국 이름으론 일본 사회 진출이 어려워 독일로 유학을 가야만 했다. 그렇게 독일에서 공부한 정치학, 그는 일본의 근대화와 전후 정치사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을 가차없이 하며, 비판적 지식인이 되었다. 그의 '경계'가 그의 '비판'의 토대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도 내노라하는, 책만 내놓았다 하면 베스트 셀러가 되는 학자들이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경계'라는 그 모호한 정체성 위에 놓여있다. 일본인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 일본인 대접을 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한국에서도 환영받는 존재도 아니다.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한국 이름을 지키고 살자니, 일본 사회 내에서 삶은 고달프다. 이것이 여전한 '자이니치'들의 삶이다. 

그들 중 김수진은 대부격인 사람이다. 그의 일본인 아내는, 만약에 그가 '귀화'를 한다면 많은 자이니치들이 실망할 것이다라며 눈물짓는다. 재일 한국인의 대부, 대표적 연출가. 그는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유학왔다가 일가를 이룬 아버지가 물려준 이름 김수진을 고집하며, 30년째 연극 활동중이다. 그가 꾸려가고 있는 신주쿠 양산박은 일본인과 자이니치 단원들이 혼재되어 있는 극단으로, '자이니치'의 이해와 공감을 높일 수 있는 작품들을 주고 공연해 왔다. 

나날이 경직되어 가고 있는 한, 일 관계의 물꼬를 트기 위해 한국의 연극인들을 찾은 김수진, 그들과의 술자리에 그는 '조센징'이라 놀림받던 젊은 시절, 연극이 없었다면, 테러리스트가 되었을 것이라며 토로한다. 그렇게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고통받는 김수진은 무기 대신,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백년, 바람의 동료들>, <두 도시 이야기> 등을 통해 조국을 떠나 일본에서 떠도는 자이니치들의 삶과 애환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일본 내에서도 큰 상을 휩쓸며,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연출가이지만, 그는 공연이 있을 때면, 직접 견인차를 운전하며 무대를 꾸민다. 그뿐이 아니다. 때론 할머니 분장도 마다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다. 그뿐이 아니다. 그의 아내는 극단의 재정을 맡고, 또 다른 단원들을 무대 의상이며, 무대 장치까지 품앗이를 한다. 하루 7000원 짜리 방에서 단돈 33만원으로 한국에서의 며칠을 보내는 그와, 신입 단원을 뽑기조차 힘든 형편의 극단, 하지만 그와 단원들의 열정은 쉬이 지치지 않는다. 가난한 극단의 처지는, 난파선에 휩쓸리는 자이니치의 고단한 삶을 구현하기 위해 무대에 물을 퍼붓는 그의 파격적 연출을 실현하는 '천막 극장'이라는 차별화된 공연 방식으로 실현된다. 덕분에 그와 단원들은 천막이 펼칠 수 있는 곳이면, 일본 신주쿠의 신사든, 한국의 왕십리 역이든, 그 어디서든 자신들의 무대를 펼친다. 



경계인으로서 살아남기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60줄의 그는 아직 어린 두 아이의 아버지다. 스스로 충실치 못한 아버지라 자신을 평하듯, 그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인 학교를 다니는 그의 아이들은 인삿말을 제외하고는 한국어가 낯설다. 뒤늦게라도 아이들에게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려는 그, 하지만 그도 안다. 지금은 한국인이기도, 일본인이기도 할 수 있는 아이들이, 20살이 되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더 늦기 전에, 아이들에게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고자 한다. 

그가 서두르는 이유는 바로 아이들도 자신처럼 경계인이기 때문이다. 경계인으로서 부대끼며 살아가려면,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인식이 명확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들처럼, 가야인으로 태어나 신라의 명장이 된 김유신을 빗대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설명해 들어간다. 일본 사회에서 살기 위해, 일본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일본 사회에서 버틸 수 있다는 그의 교육관은, 곧 그의 신념이다. 그리고 그 신념에 따라, 그는 지난 30여년간 자이니치의 삶을 연극으로 구현해 왔으며, 그래서 이제 자이니치들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그것이 그가 일본에서 온전히 살아남는 방식이다. 
by meditator 2016. 8. 15. 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