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한 주, 혹은 하루를 보낸 시간, 저마다 자신만의 '힐링 스팟'을 찾게 될 것이다. 기자의 경우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조금 느긋한 드라마'를 찾게 된다. 편안한 관계, 나도 모르게 레시피를 찾아보게 된 맛있는 음식들, 야곰야곰 어느새 10부작을 완주하게 된 드라마 <녹풍당의 사계절>이다. .

일본의 명문 숙박업 가문이 있었다. 그 가문의 후계자인 쌍둥이 두 손주, 이란성 쌍둥이인 이들은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가문의 기대에 부응하여 불철주야 공부와 사업에 매진하려 했던 야코우(후지이 류세이 분)와 달리, 동생이던 스이는 어릴 적부터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직원으로 일하던 료칸에서는 예의 그 사람좋음으로 인해 직원 관리에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결국 어려운 사정만 봐주다 돈문제를 일으키게 된 스이에게 야코우는 대놓고 나가라고 면박을 주고 만다. 

그저 사람좋기만 하던 스이, 야코우는 그런 식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문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사명 하나로 '열일'하던 야코우는 '료칸'을 잘 나가는 호텔 사업으로 이어갔다. 그렇다면 료칸에서조차 쫓겨난 스이는 어떻게 됐을까? 

 

 

녹풍당의 네 남자 
료칸 사업을 하던 할아버지는 은퇴 후 '차'에 빠지셨고 고풍스런 '녹풍당'이란 찻집을 운영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은 녹풍당, 야코우는 문을 닫는게 맞다고 했지만, 스이는 할아버지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곳을 그렇게 사라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개업하게 된 '녹풍당', '스이다운' 그곳에는 세상에 상처를 받고, 휴식을 취하고픈 이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녹풍당의 사계절>은 시미즈 유우의 원작 만화를 드라마화 한 작품이다. 앞서 할아버지의 '다도'를 이어받은 스이,  바리스타 구레(사에키 다이치 분), 요리를 담당하는 토키타카(히야마 쇼노 분), 디저트 담당 츠바키(오오니시 류세이 분)까지 '먹거리'의 다양한 분야를 담당하는 네 명의 남성들이 녹풍당을 이끈다. 

드라마의 우선 볼거리는 차, 커피, 요리, 디저트에 이르는 '산해진미'이다. 실제 기자가 드라마 속 오무라이스를 덮은 계란이 하도 '고와' 보여서, 드라마에서 하듯이 계란물을 후라이팬에 풀어 젓가락으로 살짝 주름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것처럼 우선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보는 이의 '시각적 만족'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런 먹거리를 매개로 한 '힐링'이 제공된다. 직장 일에 치인 한 여성이 녹풍당에 앉아 일을 하려고 하다, 녹풍당의 달달한 케잌과 음식을 먹다 그만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에피소드처럼 드라마는 '먹거리'를 매개로한 '힐링'을 주요한 소재로 삼는다. <심야 식당>,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의 계보를 잇는 또 한편의 미식 힐링 드라마이다. 

 

 


그리고 그 '힐링'이 가능한 전제가 되는 건 녹풍당을 이끌어 가는 네 명의 주인공들이다. 료칸에서 직원의 어려운 사정을 봐주다 쫓겨난 스이답게 할아버지의 찻집에 불과했던 녹풍당에 저마다 사연이 있는 또 다른 세 명을 불러들인다. 

스이의 중학교 동창이기도 한 토키타카는 어렸을 적에 '천재 도공'이란 화제의 인물이었지만, 어린 천재 도공을 '가십'을 삼은 언론으로 인해  유일한 보호자였던 작은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고 이제 '도자기를 빚은 일'대신 녹풍당의 요리 담당이 되었다.  아직 어린 츠바키 역시 혹독한 도제 수업에서 인정받지 못한 실력을 녹풍당에서 마음껏 펼치고 있다. 

늘 활기찬 구레, 아침마다 조깅을 하는 구레는 벤치에서 밤을 샌 듯한 소년에게 자신과 함께 '동호회'를 하자며 끌어들인다. 그런데 늘 웃통을 벗어제치며 근육 만들기에 열심인 구레의 동호회라는 게  소년의 또래인 듯한 무리들과 함께 '오리배'를 타는 것이다. 그는 그 소년들과 열심히 만든 근육으로 목이 터져라 오리배를 한바탕 탄다.

구레와 함께 오리배를 열심히 몰던 소년, 하지만 다음 날도 그 소년은 벤치 신세였다. 그런 소년을 구레를 녹풍당으로 데려와 따뜻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준다. 그리고 그 에스프레소에 담긴 자신의 사연을 들려준다. 복잡한 가정사로 인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소년, 그런데 그 소년만큼, 아니 그 소년보다도 훨씬 더 복잡한 가정사를 지녔던 일본과 이탈리아 인의 혼혈이었던 구레는 이탈리아 뒷골목을 전전했다고 한다. 동네 불량배들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쓰레기통 옆에 쓰러져 있던 구레를 데려온 나이든 바리스타는 구레에게 한 잔의 에스프레소를 건넸고, 구레는 그 에스프레소 한 잔의 감동을 잊지 못해 바리스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준 은인처럼 동네에서 '전전'하는 소년들을 모아 오리배를 타는 동호회를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사실 '다이내믹'한 우리의 드라마를 보다 제 아무리 인기 만화 원작이고, 일본 아이돌들이 주연을 등장한 드라마라 해도 <녹풍당의 사계절> 같은 일본 드라마를 보면 심심하다. 녹찻물에 밥 말아먹는 '오차츠케'처럼 말이다. '갈등'은 있지만, 마치 '기승전결'에서 '전'에 해당하는 '클라이막스'가 빠져있는 것처럼 이른바 '착한 '드라마이다. 그런데 가끔 혹독한 하루를 지내고 마음을 쉬고 플 때 그 '심심한 드라마'가 오차츠케처럼 위로가 된다. 산해진미의 뷔페를 먹다못해 시달리고 돌아와 출출함을 달래고자 찬 밥 한 덩이 물에 말아 김치 얹어 먹으며 한 숨을 푹 내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턱대고 사람을 믿고 봐주다 가문의 료칸에서도 쫓겨난 착한 청년이 어려운 사연이 있는 이들을 불러 모아 4인 4색의 까페를 만들고 그곳에서 저마다의 장기를 발휘해 '아름답고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는 '환타지적 설정' 자체가 흥미롭다. 착함이 여전히 삶의 기둥이 될 수 있는 서사가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4명의 청년들, 거기서 쉬이 연상될 수 있는 '동성애적인 코드'를 드라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다 큰 어른들이지만 '가족'이 필요한 이들이고, 녹풍당은 갈 곳없던 그들에게 가족이 되어준 곳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이름과 성을 가졌지만, 어울려 '가족'처럼 살아간다. 내가 좋아하는 일과,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공간, <녹풍당의 사계절>은 삶도, 사랑도 고달픈 이 시대 젊은이들이 선택한 새로운 환타지의 공간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녹풍당에 찾아와 달콤하고 맛난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 저마다의 시름을 잊어가는 것처럼, 그걸 보는 한 시간여의 시간 동안 세상의 고달픔을 잊게 된다. 

by meditator 2022. 8. 22.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