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남편/문정희


11월25일 <네이웃의 아내> 중 채송하(염정아 분)는 친구 지영이 들려주는 문정희 시인의 남편이라는 시를 듣다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만다. [남편]이라는 시 속에서 문정희 시인은, 자신에게 이제는 남자같지도 않은, 자신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편에게 그래도 여전히 밥을 해서 나누어 먹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채송하는 그 남편과 더 이상 함께 마주앉아 밥을 먹지 않기를 결심한 터이다. 


누가 보건 말건 밖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던 민상식(정준호 분)과 호텔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채송하, 그런 그녀의 집에서는, 그녀의 남편 안선규(김유석 분)와 홍경주(신은경 분)가 다정히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다. 

분명 채송하와 안선규가, 그리고 민상식과 홍경주가 공식적 부부사이인데, <네 이웃의 아내>에서 사랑의 작대기는 어긋나버렸다. 드러난 사실로만 보면, 이건 뭐 암묵적 스와핑 방조 드라마인가 싶게,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하지만, <네 이웃의 아내>를 꾸준히 지켜 본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에 섣부르게 '막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중년의 권태와 외로움에 대한 보고서에 가까운 드라마라 할 수 있다. 


마흔을 공자는 '불혹(不惑)'이라고 하셨다. 세상사 그 어느 것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2013년 대한민국의 마흔은 어떨까? 팔십을 넘는 나이가 평균 수명이 되는 세상에 마흔은, 삶의 한 가운데, 아직 한참 피가 뜨거운 나이다. 세상의 유혹에 눈감기에는 너무 팔팔하다. 하지만, 일찌기 이십대에 한 결혼은 한 고비를 넘겨, '권태'라는 수식어가 붙어 나른해져만 간다. 아내는 더 이상 여자 같지 않아, 함께 잠자리를 할 수 없게 되고, 남편은 그저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동거인일뿐, 아버지와 오빠의 중간 정도의 애매모호한 존재가 되었다. 시인의 시에서처럼, 제일 먼저 의논하고 싶은 사이라도 되면 다행이지만,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부부에게 서로는 가장 가깝워야 하는 강박은 가지지만, 기실은 가장 먼, 그래서 가장 상대방을 외롭게 하는 존재라는 걸 드라마는 그려내고 있다. 채송하는 말한다. '외롭지 않으려고 결혼을 했는데, 왜 점점 더 외롭니?'라고.


(사진; 서울경제 신문)


그래서 그 외로운 사십대의 중년에게 '미혹(迷惑)'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늘상 홀로 가부장의 자리를 버텨온 민상식에게는 당당한 커리어 우먼 채송하가 다가왔다. 그런가 하면 채송하 역시 마찬가지다. 강직함을 무기로 경제적으로는 무능한 남편 안선규 대신, 책임감있는 민상식이 듬직해 보였다. 이 커플에게 사랑은, 그들의 삶에서 채워지지못했던 그 무엇이었다. 

반면, 안선규와 홍경주 커플에게는 '첫사랑'이란 로망의 완성이다. 아내로 인해 완성되지 못했던 첫사랑, 채송하로 인해 빼앗겨버린 첫사랑에, 두 사람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다. 물론 첫사랑이라고 하지만, 두 사람 역시 자신의 결혼 생활에서 결코 채워질 수 없었던 그 무엇을 첫사랑이란 이름으로 대신 적어넣고 있는 중이다. 


결혼이란 게 특정한 사람과 또 다른 특정한 사람의 만남이니만큼, 처음엔 특정한 누군가 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나를 매료시켜 그와 '백년가약'을 맺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흐르다 보면, 그 '매력'이 가장 증오할 대상이 되어버리곤 한다. 더구나, '사랑'을 전제로 한 부부라는 제도는 오히려 그 사랑이 짐이 되어, 사랑을 해야 한다는 명제에 매달려, 서로를 할퀴고 실망하게 되는 것이다. 


<응답하라 1994> 6회에서 나정의 어머니(이일화>는 생리가 끊긴 걸 페경인 줄 알고 우울증에 빠져든다. 그걸 눈치 챈 아버지(성동일 분)가 웅크리고 있는 어머니에게 다가간다. 그런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인제 내는 여자도 아니다. 괘안나?'라고 묻고, 그런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다정하게, '임자, 그러면 이제 의리로 살면되네.'라고 대답해 준다. 더 이상 여자가 아니라 섭섭하지 않냐라는 질문에, 의리로 살면 된다는 질문은 생각하기에 따라 여전히 외양은 여자인 어머니에겐 섭섭할 수도 있는 대답이다. 하지만, 자식 하나를 먼저 보내고서도 여전히 금술이 좋은 나정이 부모님에게는, 그 말이 동문서답이 아니라, '아'하면 '어'하는 선문답같은 거였다. 

하지만, <네 이웃의 아내>의 부부에겐, 그 '아'하면 '어'할 수 있는 교감이 빠져있다. 오회려, '아'하면 '왜?'할 정도로 서로가 , 서로에게 날카로워져 있을 뿐이다. 각자, 자신이 지고 있는 나이의 무게에 눌려 상대방을 보지 못한다. 홀로 외로워 하는 네 사람을 보면, 어쩌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기 보다는'우정'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네 사람은, 응답하라의 나정이 부모님이 세월로 채워왔던 '의리' 대신에, 지금의 헛헛함을 새로운 '사랑'에서 구한다. 응답하라 나정이 부모님의 해결 방식이 구세대의 그것이라면, <네 이웃의 아내>의 도발은, 2013년, 부부이지만 외로운 중년의 부부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십 여년을 살아, 이제는, 덤덤해지다 못해, 원수같은, 당신의 부부 관계를 어쩌시렵니까? 그 허함을 첫사랑으로 달래보시렵니까? 내 파트너가 갖지 못한 그 무엇을 가진 새로운 사랑으로 달래보시렵니까? 라고. 

문정희 시인이 돌아본 남편은, 그래도 내 아이들을 가장 사랑하는 이였다. 2013년 위기의 중년 부부들 갈라진 틈을 메우고 여전한 아이들의 부모로써 남을  수 있을까? 

by meditator 2013. 11. 26. 2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