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바다바다'하고 시작되는 Un Homme et Une Femme, 1966년 개봉된 영화 <남과 여>의 메인 테마곡이 54년만에 다시 스크린 위에 울린다. 흑백의 화면이 펼쳐지고 젊은 아누크 에메와 장 루이스 트레티냥이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한가로운 파리의 거리를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누비고, 호젓한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메임 테마곡만으로도 연상되는 영화의 장면들, 하지만 그건 요양원의 노인 장-루이의 기억 속 한 장면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노인이 된 장-루이는 그가 알았던 모든 것을 잊어간다. 한때는 스포츠카를 몰았던 레이서지만 이젠 휠체어에 의지하여 하루 종일 요양원 마당에서 햇빛을 받으며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기다린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안느', 한때 사랑했던 연인이다. 

아들인 자신마저도 기억을 못하는 아버지를 안타깝게 여기던 앙트완(앙트완 사이어 분)은 아버지가 유일한 기억 안느를 수소문하여 찾아간다. 1966년 <남과 여>는 죽은 전남편을 잊지 못했던 안느가 떠나고 그녀를 잊지 못했던 장-루이가 그 유명한 기차역 360도 포옹을 하며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2020년 다시 돌아온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은 1966년 <남과 여>의 영화 밖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었음을 밝힌다.

 

 

다시 찾은 옛사랑 
앙트완을 만난 안느,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앙트완의 부탁에 안느는 우리가 그리 좋게 헤어진 것은 아니라고 전한다. ' 어떻게 하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까'라며 고민을 하다 기차역으로 달려간 로맨틱했던 영화와 달리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결국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안느를 못견딘 장-루이가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고 다니면서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안느의 입장에서는 장-루이에 대한 기억이 좋을 수만은 없다. 

하지만 그 거리를 휘날리며 달리던 팔팔하던 레이서 장-루이가 죽음을 앞두고 기억마저 잃어간다는 처지에 안느는 연민을 느낀다. 다른 여자를 만나 자신과 헤어지게 되었는데 죽음을 앞둔 순간에 자신만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안느의 발걸음을 장-루이가 있는 요양원으로 향하게 만든다.

설레임을 가지고 장-루이 앞에 앉은 안느, 그런데 장-루이는 안느를 알아보지 못한다. 누구냐고 안느에게 물어본 장-루이는 그녀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과 많이 닮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안느에게 자신이 과거 사랑했던 '안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장-루이로부터 자신을 사랑했던 이야기를 듣는 '아이러니한 상황', 2020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의 '미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부터 발휘된다. 

자신만을 기억한다는 옛사랑, 하지만 정작 찾아가보니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옛사랑 앞에서 이제 자신조차도 나이가 들어 걸음걸이가 편안치 않은 안느는 돌아서지 않는다. 대신 장-루이의 맞은 편에 앉아 그의 늦은 사랑 고백을 듣는다.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를 찾았던 그가, 그랬던 이유가 여전히 자신이 벗어나지 못했던 전 남편이었음을, 그럼에도 이제 아들조차도 기억을 못하는 죽음을 앞둔 순간에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바로 자신이라는 장-루이의 '고해성사'를 안느는 편안한 미소를 띠고 들어준다. 

 

   

 

여전히 찬란한 
54년만에 다시 돌아온 <남과여>의 부제는 '여전히 찬란한'이다. 왜 여전히 찬란할까? 거기엔 '여전히 찬란한' 노년이 있기 때문이다. 

장-루이는 기억을 잃어간다. 사라져가는 뇌세포만큼 그에게 남은 날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 그가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건 '추억'이다. 1966년작 영화의 장면 장면이 그의 기억으로 되살아 난다. 자신을 찾아온 '안느'에게 요양원 탈출을 제안하는 장-루이, 잠시 후 그와 그녀는 그 예전처럼 차를 타고 거리를 달리고, 바다를 향한다. 자신들을 가로막는 경찰에게 총을 쏘아가며, 혹은 총으로 위협하며, 그리고 깨어나면 여전히 요양원 마당이다. 

요양원 마당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장-루이의 웃픈 상황, 하지만 그런 장-루이에게 '안느'만큼이나 연민의 시선이 간다. 인생의 종착역, 과연 그 시간은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육신의 고통과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살아가는 나날들의 무기력으로 힘들어 한다. 하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시간이지만 장-루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으로 충만하다. 심지어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 앞에 앉아있지만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하면서도. 자신의 삶에서 가장 뜨거웠던 순간의 기억으로 충만한 노인, 장-루이, 어쩌면 기억을 잃어가고 스스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복찾기'가 아닐까. 그 무엇도 맘대로 할 수 없지만, 자신의 '추억'은 그 마저도 잃어버리는 순간까지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니까. 안도현의 시 한 구절, '당신은 누구에게 얼마나 뜨거운 사람이었는가'가 떠올려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그라드는 그 순간에서도 여전히 '사랑'으로 충만한 그를 지켜봐주는 옛 연인 '안느'가 있다. 눈 앞의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으로 알아봐주지 못함에도 여전히 그를 찾아가, 매번 '사랑하는 여인과 참 닮았다'라는 말에 미소로 응답하며 그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들어주는 '안느'에게선 비로소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의 품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너그러운 안느의 아량은 이제 안느에게 씁쓸했던 지난 날의 기억을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으로 다시 채색할 것이다. 

한때 바닷가를 함께 누비던 장-루이와 안느, 하지만 이제 그 바닷가에는 그들을 만나게 해주었던 사립학교를 다니던 자녀 앙트완과 프랑스와즈가 서있다. 어렸던 앙트완과 프랑스와즈가 중년의 사랑을 나누게 될 만큼의 시간, 그 시간이 흘러 장-루이와 안느는 조우한다. 안느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뒤늦은 시간,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예전의 사랑으로 '연결'되고 오랫동안 풀렸던 인연의 끈을 다시 묶는다. 

사랑의 유효 기간은 얼마나 될까? 이런 '우문'에 과학은 3년이라던가 하는 '정답'을 내어놓는다. 하지만 그런 '과학'의 증거마저도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에서는 무기력하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죽어가는 순간에조차 가장 '충만한 기억'인 사랑에 대해 과학으로서는 더할 답이 없을 듯하다. 그리고 그 '충만한 기억'을 가진  것만으로도 인생은 참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닌가, 오후의 볕 아래에 앉아 '옛 사랑'의 추억을 나누는 두 '노인'들을 보며 다시 한번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by meditator 2020. 10. 21. 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