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개나리가 움트는 계절, 3월 <1박2일>은 뒤늦게 혹한기 특집을 방영했다. 이미 수 차례 동장군을 제대로 맞이하는 혹한기 특집을 선보였던 <1박2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혹한기 특집을 선보이기 위해, 대륙의 추위를 찾아 하얼빈을 그 장소로 선택했다. 마치 러시아 도적떼들처럼 털이 풀풀 날리는 누런 털코트를 입고 공항을 누비며 하얼빈으로 떠난 멤버들은 추운 중국 대륙의 날씨 속에 또 어떤 웃음을 선보일까 기대 반 우려 반을 하며 떠났다. 물론, 멤버들의 걱정대로 하얼빈에 도착한 그들은 한국과 격이 다른 추위에도 불구하고 1박2일의 전통에 맞게 온몸을 드러냈다. 중국이나, 한국이나 어디서나 1박2일은 1박2일이라는 듯이.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으로서의 <1박2일>은 거기까지였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이 찾아간 곳은 조린 공원, 어제의 노출이 무색하게, 그들은 그곳에서 안중근 의사의 역사를 조우한다.
안중근 의사가 동료들과 함께 거사를 모의한 하얼빈 조린 공원에서 동료들과 함께 사진을 찍던 곳, 그리고 5일간 지냈던 동포 김성백의 집, 이어 하얼빈 역, 그리고 144일의 수감 생활 후 사형을 당했던 뤼순 감옥까지, 1909년에서 1910년까지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1박2일>은 짚어본다.
서른 살 청년 안중근으로 되살아 난 안중근 의사
예능이라는 정체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퀴즈도 내며 안중근 의사처럼 휘호도 써보기도 했지만, 조린 공원의 모의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시간이 다가오면 올수록, 멤버들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신, 멤버 중 겨우 정준영보다 나이가 많았던, 다른 멤버 모두보다 어렸던 서른 살의 안중근, 우리에겐 그저 역사 책의 몇 줄로 남겨진, 박제된 위인 안중근을, 살아숨쉬는 청년 안중근으로 느껴보는 시간이 되었다.
책에 써있는 글을 통해 상상하는 역사와, 현장에서 느끼는 역사의 느낌은 다르다. 그게 바로 유적 답사의 참 맛이다. 그리고 혹한기 특집을 빙자해서 하얼빈으로 날아간 <1박2일>은 제대로 안중근 의사 유적 답사를 해낸다.
낯선 이국 땅 그곳에서 만난 안중근 의사의 단지된 손이 새겨진 기념비에서 멤버들은 예능 이상의 감회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른 살의 청년 안중근을 느껴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PD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멤버들을 조린 공원으로 데리고 간 제작진, 과연 그곳에서 무엇을 했을까란 질문에서 시작하여, 사진관으로 가서 안중근을 비롯한 당시 거사를 도모했던 분들의 나이를 되짚게 만든다. 그저 막연히 역사적으로 거사를 했던 위인으로만 알았던 분이, 되짚어 보니 겨우 서른 살의 청년이었음을 깨닫게 된 멤버들은 1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청년 안중근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따라가게 된 여정, 5일간 머물던 동포의 집, 그곳에서 저격을 앞둔 심정을 헤아려 보고, 그 와중에 지은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때를 만든다'는 장부가를 통해 흔들림이 없던 안중근 의사의 신념에 새삼 감동을 한다. 그렇게 흔들림이 없던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사실은 채가구에서 먼저 준비하고 기다렸던 동지들을 대신했던 방비책이었다는 우리가 몰랐던 역사의 우연도 접하고, 조선 식민 지배에 대한 밀사 자격으로 하얼빈을 방문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숨겨진 임무를 통해 왜 이토였는가의 역사적 이유도 살펴본다.
또한 어쩌면 우리에겐 너무 당연하고 뻔한 역사 책의 몇 줄이 되어버린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당시 전세계의 신문을 장식한 세계사적 사건이었으며, 중국이 하얼빈 역에 특별히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물론, 안의사가 투옥되었던 뤼순 감옥, 조린 공원 등에 안의사의 생생한 기록을 고스란히 남겨둘 정도로, 그리고 하얼빈의 안의사 기념관에 단 2년만에 누적 관객수가 25만명이 될 정도로 세계사적 인물임을 <1박2일>하얼빈 특집은 밝힌다.
그렇게 하얼빈 특집은 책 속의 몇 줄에 불과했던, 그리고 이젠 우리에겐 박제화되어가는 위인 안중근을 독립을 향해 흔들림없는 신념으로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나간 젊은이로 불러온다. 안의사의 유적지에서 소회를 밝힌 멤버들의 감상을 통해, 그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청년의 고뇌와 신념을 역설적으로 더 짙게 짚어볼 수 있었으며, 매장 확인조차 할 수 없는 뤼순 감옥 공동 묘지에서 결국 울컥하고만 차태현의 눈물에서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남편, 그리고 누군가의 아들이었던 안중근 의사의 생애를 절절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영화 <동주>가 시를 쓰고 싶지만, 조국의 현실 속에 시를 쓰는 것조차 사치인 것 같아 고민하는 윤동주와, 그런 윤동주를 아끼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향해 열정을 불태운 송몽규를 통해, 식민지 시대를 짊어진 젊음을 헤아려 볼 수 있게 하였듯이, 그와 시대를 다르지만, 조국을 삼킨 적의 우두머리를 저격하여 독립을 앞당기겠다는 열의 하나로 하얼빈을 향했던 청년 안중근의 행적을 되짚어 봄으로써, 1909년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을 가진 젊은이의 결단을 더욱 묵직하게 느껴볼 수 있었다.
현실의 참회록이 된 하얼빈 특집
더욱이 그저 딱딱한 연표로만 만났던 한일 한방을 앞둔 시기의 격동의 역사가, 안중근과 그 동지들의 거사와 그를 둘러싼 러시아, 중극, 일본 열강의 움직임을 통해 생생한 사건으로 옮겨졌다. 더욱이, 당시 하얼빈 역의 상황을 삽화와 CG를 통해 현실감있게 복원함으로써, 당연한 거사가 아닌, 일촉즉발의 선택, 그 역사적 한 수를 절묘하게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짚어보겠다고 했을 때 멤버들이 우스개 소리로 서로 억지 감동이나 눈물을 보이면 안된다고 지레 설레발을 떨었지만, 막상 역사의 현장에서 멤버들이 보였던 공감과 감동, 그리고 눈물이 결코 '예능적 리액션'으로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타국의 애국지사를 위해 기념관을 만들고, 그의 유적을 고스란히 남겨두는 중국 정부의 배려에서, 굳이 부연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위안부 할머니의 소녀상조차 자리를 보전하기 힘든 우리의 현실이 오버랩되었다. 무엇보다 독립된 고국으로 이장을 해달라는, 그리고 동양 삼국이 서로 협력하여 평화를 이루라는 유언이 서로 중첩되어 이루어 질 수 없는 현실에서, 역사에 대한 참회는 묵직해 진다. 더욱이 대학을 가기 위한 역사 공부가 된 현실, 그게 아니라도 역사 교과서의 진실조차 왜곡을 둘러싼 논쟁에 휘말리는 현실에서, <1박2일> 하얼빈 특집은 추위의 혹한기 특집이 아니라, 여전한 현실 혹한기 속에서, 위인의 참 모습을 찾아보는 단련의 시간이 되었다.
<무한도전>을 통해 교과서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역사를 배우고, <1박2일>을 통해 몇 줄로 박제된 위인의 생생한 유적을 답사하는 현실, 예능이 역사 교육조차 해야 하는 현실은 예능의 새로운 지평일까, 갑갑한 현실에 대한 예능의 도전일까? 그 어느 때보다도 감동을 주었던 하얼빈 특집은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박제화된 교육에 대한 반성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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