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스포네'

영화 <관상>을 보고나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와 그를 보호하려던 김종서를 제거하는 '계유정난'(1453년)이란 역사적 사실은 변할 수가 없기에, 그들의 관상도, 그 틈바구니에 끼인 내경 일가도 그 이미 결과가 자명한 역사 속에서 짖눌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또 하나 역사가 스포가 되는 작년 사극 영화였던, 그리고 보잘 것 없던 인물이 역사에 휘말렸던 영화 <광해>와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광해>가 광대가 왕이 되어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왕도, 그리고 왕이 되어 이루려고 해보았던 그 무엇도 이루지 못했음에도 마치 <왕의 남자>의 공길이 한마탕 놀아보기라도 한 듯한 속 시원함이라도 남겨주었다면, <관상>은 이상하게 껄쩍지근한 민초의 자괴감을 남긴다는 뒷이야기들이 많이 들린다. 

(사진; 뉴스엔)

그런 <관상>의 후기는 다시 <황금의 제국>의 결말에 대한 소감으로 이어진다. 그래도 태주(고수 분)가 성진 그룹을 한번이라도 차지해 보기라도 했으면, 결국 태주는 아무 것도 이룬 게 없고, 성진 그룹은 결국 성진 그룹의 것이 되었구나 라는, 그래도 단 한 회 만에 모든 걸 자신이 책임진다며 너무 획 바뀌어 버린 태주도 적응이 안되지만, 죽일 것 까지야......등등. 아마도 이것은, 영화를 보는, 혹은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동일시했던, 자신들과 비슷한 주인공들이, 역사 속에서, 드라마 속에서 '신분 상승'의 꿈을 향해 용트림을 틀지만, 결국 '패배자'가 되어 스러지는 현장을 보는, 아니 그 아픔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공감하는, 2013년의 민초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투영된 소감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이라면, 아니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때깔좋게 살아보기 위하여 거짓말, 사기, 협잡 따위에 점점 눈을 감고, 오로지 타고난 제왕의 자리가 어디 있냐며 나라고 왜 못하겠냐며 일갈하는 태주의 마음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췄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신이 사는 동네에 뉴타운이 들어선다고 하면, 거기에 쫓겨날 사람들은 생각도 않고 옳다구나 땅값이 올라 한 몫 잡겠구나 이러고, 대통령이 될 사람이 사업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하건, 그의 아비가 누구였건 아니 오히려 그의 아비가 누구라서 그때처럼 잘 살게 해주겠지 하며 투표를 했었을 것이다. 

<황금의 제국>의 장태주는, 작가의 전작 <추적자>의 강동윤(김상중 분)을 빼닮았다. 철거될 지역의 초라한 음식점집 아들과, 찌그러져가는 이발소 집 아들들은, 그저 자신의 호기와 배짱, 그리고 능력만을 믿고 '입신양명'을 꿈꿨다. 그리고 똑같이, 그 과정에서 괴물로 변해갔다. 그렇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저 곳에 도달할 수 있으려니 했는데, 놓친 게 있었다. 거기는 바로 괴물들이 사는 나라인 것을. 자신이 바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짓밟고 괴물이 되어야 그 언저리라도 갈 수 있다는 것을, 


고수가 SBS 월화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 자살을 선택하며 그동안 자신이 저질렀던 악행들에 대한 대가를 목숨으로 대체했다. 하지만 이번 고수의 죽음은 새로운 결말을 요구하던 시청자들에게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 결말이었다. / SBS 대기획 황금의 제국 방송 캡처
(사진; 스포츠 서울)

<황금의 제국>성진 그룹 회장실에 걸려있는 최동성의 사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귀기 그대로, 거기는 괴물들이 사는 나라이다. 마지막 홀로 남겨진 서윤처럼 자신의 가족도, 주변 사람도 모조리 잡아먹는 괴물이 되어야 했다. 
장태주가 포기한 것은, 바로 그것, 자신이 괴물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설희를 다시 감옥에 보내야 하고, 그리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더 많이 짓밟아야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현실의 그는 비록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가는 벌을 스스로에게 내렸지만, 최소한 궁극의 괴물이 되지는 않았다. 강동윤은 끝까지 괴물이 되어서라도 그 곳에 도달하려고 하다 실패하고, 장태주는 스스로 괴물이 되는 길에서 돌아선다. 
반면, 홀로 회장실에 남겨진 서윤은 주변의 모두를 잡아 먹은 채 괴물이 되어, 아버지란 이제는 망령이 되어버린 괴물의 주구가 되어 똑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민재는 치유되지 않는 괴물 중독증으로 인해 , 아마도 오랜 시간이 흘러 감옥을 나와도, 여전히 괴물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 자신에게 벌을 내린 장태주를 보며 느끼는 자괴감은 무엇일까? 바로 괴물이 되어서라도 한번 때깔나게 살아보지 라는, 내 안의 괴물 중독이 일까? 새삼스럽게 절감하게 된 괴물들이 사는 나라 때문일까? 아니, 괴물이 아니고서는 견딜 수 없는 황금의 제국에 대한 절망감때문일까?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라는 어린이 그림 동화가 있다. 홀로 방 안에 남겨져 무서워 하던 아이의 방이 어느 덧 숲 속으로 변해가고, 괴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괴물들은 무서운 괴물이 아니다. 아이는 어는 덧 괴물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괴물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렇다. 변해버린 방과 괴물들은 바로 아이의 마음 속에 있던 공포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기에, 아이가 마음 먹기에 따라 괴물은 친구가 되기도, 부하가 되기도 하고, 방문을 열고 나온 순간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사실, 드라마도 그렇다. <황금의 제국>이란 드라마가 끝나면, 드라마 속 괴물 일가는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사람들은 안다. 드라마 속 괴물들은 사라져 없어져도, 현실의 괴물은 더 공공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현실의 자괴감을 드라마 속 환타지로 치유해 주지 않은 드라마로 인해, 잠시 눈감고 싶었던 현실이 더 느껴져 괴로워 하고, 드라마에서 조차 이루어 지지 않은 '꿈'에 분노하기 조차 한다. 

(사진; 리뷰스타)

언제인가 부터 드라마 속 재벌들은 괴물이 되어 있다. <스캔들>의 장태하가 그렇고, <황금의 제국>의 성진 그룹이 그렇고, <결혼의 여신>의 시댁이 그렇다. 그들은 눈 하나 끔쩍하지 않고 사람을 없애고, 사람을 피 말리게 하고, 사람을 휘돌린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 속 괴물처럼 친구가 되어주지도, 부하가 되어주지도 않는다. 눈 한 번 끔뻑하고 나면 사라지기는 커녕 오히려 괴물이 되지 못한 사람들을 잡아 먹으려 든다. 

황현산 교수는 그의 수필집 [밤은 노래한다]에서 현실을 지옥도처럼 그려내는 김기덕 감독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튼튼한 상상력으로, 우리 안에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어떤 괴물.....을 외면하려는 비겁한 마음들과의 싸움에서 우리 시대 가장 높은 투지를 보여주'는 문화적 상상력에 찬사를 보낸다. 
물론 김기덕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괴물과, 최근 드라마 속 괴물들은 맥락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야만성을 고발하고, 우리의 비겁함을, 초라함을 용기내어 말할 수 있는 이들 작품에 대해 우리는 황교수와 똑같은 찬사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현실을 직시해 주어 고맙다고. 
결국 '꿈 속의 괴물'을 없애거나, 그들과 친구가 되거나, 내 자신이 괴물이 되어버리는 건, 현실의 내 몫이다. 


by meditator 2013. 9. 18. 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