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수능이 한 달도 채 남지않은 아들과 함께 <화이>를 보고 왔다.

어라, <화이>는 청소년 관람불가인데? 다행히도 우리집 고3은 이미 주민등록증이 나왔다. 게다가 생일이 빠른데, 1년을 숙성시켰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바람에 실질적으론 대학 1학년 나인인 셈이라, 법적으로 하등 <화이>를 관람하느데 문제가 없다. 그래도 나이로는 대학생이라도, 아직 고등학생이라서, 정체성은 여전히 '고딩'인지라, <화이>라는 영화를 받아들이는 건 딱 고딩 그 수준이다. 
<화이>를 보고 나온 아들 녀석의 한 마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그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굳이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영화같다. 설정은 충격적이지만, 화이와 아버지들의 연기가 그 잔인함을 뛰어넘는다.'

살부(殺父)의 스토리를 가진 <화이>가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 근본적으로 청소년 관람가가 되기는 힘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장준환 감독도 일찌감치 청소년 관람가 따위는 포기하고 한껏 폭력의 미학(?)을 심화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에서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중학년, 아니 저학년 때 이미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비를 오인하여 죽이고, 심지어 자신의 어미와 결혼을 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만화로 된 것 부터 안기는 우리나라에서, 좀 더 직설적이고, 폭력적이라고 해서, 화이의 살부 스토리를 청소년 관람불가로 처분하는 것은 어찌보면 눈 가리고 아웅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자신을 입시제도라는 틀에 눌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하지만 이미 그 속에는 진짜 괴물이 들어있어, 피씨방만 가면, 흠씬 두들기고 패죽이고 나오는 청소년들 속의 괴물이 혹여라도 튕겨나올까봐 절대 그런 불손한 이야기는 청소년들에게 알려져서는 안되기에 절대로 청소년 관람가가 될 수 없는 것인지도.

화이

하지만 역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성장'과 '극복'의 담론이 가장 진지하게 필요한 세대가 누굴까 하고 생각해 보면, 바로 청소년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직, 간접적 폭력에 가장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는 세대 역시 청소년들이다. 
그러기에, <화이>의 주제 의식이 정치적 함의까지 확장되기 이전에, 보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청소년 화이와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의 근간을 놓고, 함께 논해 보기에는 청소년 세대보다 더 좋은 대상이 없을 듯하다. 

아들; 그런데, 화이가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안 것까지는 좋은데, 그래도 좀 더 해명이라도 들어보지 다짜고짜 아버지를 죽이기 시작한 건 좀 그랬어.
엄마; 그건 바로 화이가 청소년이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너네들이 그러잖아. 욱 하고 행동부터 들어가고. 이 영화에서 화이의 행동방식은 '매우 청소년적'이지 않니?
아들; (끄덕끄덕)그건 그렇네.

역시나 아들에게는 그래도 방식이야 어떻든 자신을 키워 준 아버지를 죽이는 화이가 충격적이었던 거 같다. 그래서 다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주었다. 신화에서 영웅들은,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를 죽이거나, 아버지를 떠나거나, 아버지가 없다고. 그리고 그건, 실제의 아버지가 아니라, 한 사람이 성장하면서 극복하고 지양해야 할 그의 앞 세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즉, 신화 속 성장이란, 앞선 세대를 밟고 일어서 자신만의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화이>는 또 하나의 신화적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절주절 부연 설명을 붙여본다. 

몸은 이미 중학생만 돼도 어른만큼, 아니 어른보다 훌쩍 커버린 요즘 아이들에게, 정신적 성숙을 아무도 논하지 않는다. 특목고도 모자라, 국제중이란 특수 학교가 만들어 지면서, 초등학교부터 아이들은 입시 전쟁에 휘몰리고, 중학교 학제 조차 교장 재량이란 이유만으로 제 멋대로 바뀐지 오래다. 하루에 수학을 몇 시간씩 공부해도, 예체능 따위는 1학년 때 몰아 때려넣고 때우는 과목이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아무도 그들의 균형잡힌 성장과 성숙을 배려하지 않는다. 어른 세대는 너무도 폭력적이지만, 그들은 이유도 모른 채 교육이란 이름으로 당하고만 살고, 웃자란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에 귀기울일 수 없다. 그저 '일베'나 기웃거리며 감정을 배설할 밖에. 그들이 대학이란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이 시기가 어떤 정신적 성숙을 거쳐야 하는 시기임을 모른 채, 반항과 반발로 채우며 왜곡되어 가는 것이다. 그 시기를 거쳐 괴물과 싸우던, 삼키던 자신의 것을 만들어 가야 하는 과정의 의미라고는 씨알만큼도 깨닫지 못한 채. 

<화이>의 아버지 역 김윤석은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를 통해 진지한 논쟁이 벌어지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 진지한 논쟁이 청소년들에게 까지 확장되기를 바란다. 
교실과 입시에 갇힌 그들에게, <화이>를 통해, 그들이 겪어내야 할 성숙과 성장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을 부여받았으면 한다. 괴물을 벗어나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아빠들과, 괴물이 삼켜버린 화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그 무엇보다, 이 시대의 '괴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종종 좋은 영화 보고 난 후 평론가나 큐레이터가 들어 와 영화를 해석해 주고, 질의 응답을 받는 시네마 톡이 진행되곤 한다. <화이>를 청소년들이 단체 관람을 하고, 영화가 끝난 후, 진지하게 성장의 의미를 놓고 '시네마 톡'을 하는 불가능한 신화를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3. 10. 12. 1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