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의 홍보 문구를 보면 핀란드의 '뭉크'라는 표현이 있다. 아마도 이름조차 생소한 북유럽의 여성 화가를 알리기 위해서 그나마 우리 나라 사람들들에게 익숙한 북유럽의 화가 '뭉크'를 소환해야 했던 듯 싶다. 심지어 뭉크는 노르웨이 사람인데 말이다. 

이렇듯 헬렌 쉐르벡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화가이다. 그런데 그 생소한 화가는 그녀의 생일을 '미술의 날'로 정할 만큼 핀란드인들이 사랑하는 화가이다. 뿐만 아니라 2019년 영국에서 개최된 개인전에 대해 '너무 늦었다'라는 아쉬움의 평가처럼 그녀의 전시회가 열린 곳마다 평단과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은 우리에게 낯선 이방의 예술가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여성 화가가 아니라, 그냥 '화가'
하지만 낯선 예술가를 알게 된다는 '기회'를 넘어 영화는 20세기 초 여전히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힘들었던 여성 화가의 강인한 예술적 의지와 삶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헬렌 쉐르벡은 1862년에 태어났다. 4살 때 계단에서 넘어졌지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평생 불편한 몸으로 살아가야 했다. 일찌기 헬렌은 화가로서 재능이 두각을 나타냈다. 11살 때 장학금을 받고 핀란드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17세에 미술협회상을 받으며 화단에 주목을 받았다. 1880년 후원을 받아 프랑스로 건너간 헬렌은 다양한 미술적 사조를 경험하고 그 가운데서 자신만의 화풍을 모색해간다. 

하지만 일찌기 미술적 재능이 빛을 발했지만 여성으로서 그녀가 '화가'로 인정받는 길은 험란했다. 전쟁 등 당시의 사회상을 화폭에 담은 그녀에게 '세상 사람'들은 '여성답지 않다'라고 비판했다. 그런 세상의 시선에 대해 헬렌은 자신은 '여성 화가'가 아니라 '화가'라고 답한다.

그녀의 발목을 거는 건 '세상'만이 아니었다. 가부장적 분위기가 강했던 당시 핀란드 사회에서 헬렌은 오빠보다 괜찮으면 안되는 딸이었다. 밥상머리의 고기도 오빠한테 양보하고, 자신의 작품을 판 돈도 오빠 몫이었다. 아직 여성의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은 사회에서 그녀는 고집스러운 딸일 뿐이었다. 하지만 헬렌은 그럼에도 자신의 권리와 몫에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 사이에서도, 사회에서도 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던 그녀 앞에 그녀를 이해해주고 심지어 칭송하는 한 남자가 나타난다. 영화는 헬렌이 건강 등의 문제로 헬싱키를 떠나 어머니와 함께 히빈까에 머물던 1915년에서 부터 1923년까지를 다룬다. 

장학금을 받고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후원을 받아 프랑스 유학을 다녀왔지만 50대에 이를 때까지도 헬렌은 화가로서 자신의 개인전조차 열지 못했다. 그런데 산림청 공무원이자 아마추어 화가인 에이나르가 그녀의 전시회를 적극 추진한다. 50대의 나이에야 비로소 개최된 첫 전시회, 히빈까에 칩거하며 자기 자신과 싸우며 그림에 천착했던 여성 예술가는 비로소 세상 밖으로 한 걸음을 뗐다. 

연하이지만 자신의 그림을 알아봐주었던 사람, 그 에이나르를 향해 헬렌의 마음이 조금씩 열려간다. 늘 그렇듯 '사랑'의 비극은 그래서 잉태된다. 그녀의 그림을 좋아하다 못해 그녀를 칭송하는 에이나르, 그녀와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를 기뻐하고 그녀와 함께 자신의 별장으로 여행도 떠나지만 결국 그는 50대의 헬렌이 아닌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여성을 자신의 약혼자로 택한다. 

소유권을 주장하는 오빠, 그런 오빠의 역성을 드는 어머니에게 대항하여 자신의 작품료를 당당하게 '고수'했던 헬렌, 그렇게 어렵게 '획득'한 돈으로 에이나르를 견문을 넓히는 명목으로 여행까지 보내준 헬렌이었던 만큼 에이나르의 선택은 그녀를 무너뜨리고 만다.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만큼.

쓰러진 이젤, 짙이겨진 그림, 부러지고 으깨진 도구들, 처참한 화실 속 풍경처럼 헬렌도 무너져버린다. 뒤늦은 나이였지만 자신을 인정해준 한 사람을 향해 어렵게 열었던 마음만큼, 그녀의 상실은 깊고 컸다. 영화는 그런  헬렌의 상흔을 처참하게 짖이겨진 그녀의 그림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사랑도, 차별도 그림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이 가진 미덕은 고통스러운 예술가의 영혼을 그려내는데 멈추지 않는다. 

오랫동안 서로를 경원시해왔던 어머니와 헬렌, 헬렌과 입장 차이를 보이던 어머니는 아들 집으로 가지만 그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결국 다시 헬렌에게 돌아온 어머니, 하지만 병은 어머니를 삼키고, 자리에 누운 어머니와 헬렌은 늦은 '화해' 아닌 화해'를 한다. 

그렇게 해묵었던 앙금을 풀어낸 헬렌은 자신의 화실로 와 그림을 그린다. 오빠가 와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라 하지만 대신 헬렌은 그림을 그린다. 바로 '나의 어머니'라는 그녀의 그림이다. 

그렇게 영화는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중단'없는 화가로서의 헬렌을 그려낸다. 칩거한 시골에서 그릴 대상이 아쉬웠던 헬렌은 자신을 그린다. 

'조건이 있어요. 당신을 그리고 싶어요.'


영화 속 대사처럼,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그림으로 표현해 낸다. 몇 시간 째 앉아만 있었다는 에이나르의 볼멘 불평도 그녀의 예술적 의지 앞에서 무력하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로, 실연하면 실연의 마음으로 그녀는 그린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제목 ' 내 영혼의 자화상'이라는 표현은 헬렌이 그림 그리는 행위를 가장 적절하게 대변한다. 

우리들에게 여성 예술가는 어떤 모습으로 그간 다가왔을까. 때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살아갔던 시대의 희생자로, 그녀가 헌신했던 사랑의 피해자로 그려왔던 작품이 꽤 있었다.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은 그런 면에서 '화법'을 달리한다. 그녀는 사회적 차별을 받고, 가정적으로 편견에 시달리고, 사랑에 실연을 하지만 자신의 '그림'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예술가가 말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작품이다.

살아생전 그린 1천여 점의 작품, 그 성실을 넘어선 작품 수가 말하듯 헬렌은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존재', 자체인 작품을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무너지고 쓰러지는 우리의 인생처럼 헬렌의 삶에도 많은 시련이 다가온다. 때로는 이젤을 쓰러뜨리고, 그림을 짓이겨도 헬렌은 결국 다시 이젤을 세우고 그림을 그렸다.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은 사랑보다도, 편견보다도 강했던 한 여성 화가의 예술적 의지를 121분의 런닝 타임을 통해 구현한다. 


by meditator 2021. 3. 11.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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