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차 관람까지 '역주행'하고 있다는 조용한 화제작 <헤어질 결심>을 뒤늦게 봤다. '화제작'답게 월요일 오후임에도 객석은 비어있지 않았다. 과연 이 영화의 어떤 점들이 관객들의 마음을 뒤늦게 빼앗았을까?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정훈희의 보이스를 한껏 돋보이게 하는 송창식의 코러스가 '안개'처럼 퍼져나가는 극장 안, 그 '모호'한 여운에 좀처럼 자리를 뜨기가 어려웠다. 

 

 

일찌기 <올드보이>에서 <친절한 금자씨>, <박쥐>, 그리고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그 독특한 '미장센'이 주요 등장 인물처럼 자리한다. 다른 작품들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은 듯해도 여전히 그 고유한 색감과 공간의 장치, 그리고 시점들이 관객들을 해준과 서래의 현실적이지만, 몽환적인 서사로 끌어들인다. 

품위있는 형사 해준
범인이 칼을 휘두르려 하자 해준(박해일 분)은 '체인메일' 장갑을 꺼내 낀다. 그 덕분에 휘두르는 칼을 잡고 범인을 쉬이 결박한다. 그 한 장면이 형사 해준을 설명해준다. 단골 양복점에서 맞췄다는 그의 양복에는 많은 주머니가 있고 그 안에는 형사로서 그의 직업에 필요한 것들이 준비되어 있다. 해준은 그런 형사이다. 늘 넥타이까지 갖춘 정갈한 옷차림, 최연소 경감이 될 정도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진다. 부산을 떠나 이포로 온 해준, 불면증이 더욱 심해지자 아내 정안(이정현 분)은 말한다. 당신 삶에 '살인'이 빠져있어서 그렇다고. 

그런 해준이 유력한 용의자 서래(탕웨이 분)를 처음 마주한다. 한국말이 서투르다며 '마침내 죽었습니다'라는 여자,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해준은 '초밥'을 시켜준다. 후배 형사는 범인이라 단정짓는데, 해준은 어떻게 해서든지 서래의 혐의를 벗어주려 애쓴다. 미해결 사건을 벽에 '저장'해 놓을 정도인 그의 이력으로는 석연치 않은 처신이다. 결국 그는 '붕괴'된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바다에 버려서 아무도 못찾게 해요,'라며 서래의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넨다. 

 

 



'날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난 순간 내 사랑은 시작됐죠.'


그리고 아내가 있는 이포로 온 해준, 그런데 그의 앞에 서래가 나타난다. 심지어 그녀의 두번 째 남편이 다시 죽음을 맞는다. 첫 번째는 '자살'이고, 이번에는 '타살'이라며 다르다는 그녀, 하지만 해준은 이번에는 그녀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감금'한다. 

사랑했다는데 해준은 내가 언제 그랬냐고 반문한다. 그 표정은 한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같다. 그리고 '우리 일이요? 무슨 일이요?'라며 언성을 높인다. 그가 일찌거니 서래를 감금한 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자신이 또 '붕괴'될까봐? 서래의 말처럼 그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다시 또 서래에게 핸드폰을 건네고야 마는 해준, 그게 그만의 사랑인가? 그런 와중에 떠나는 아내 옆의 남자를 보고 손을 불끈 쥔다. 그가 사랑한 건 서래보다 자기 자신인가. 품위있는 형사로 해준의 삶이 '사랑'보다 강력했던 건 아닐까? 문득 홍상수 영화 속 주인공들이 떠오른다.

매번 끝내려 하고 도망치려 하던 그 사랑은 결국 쓸려가 버리고 만다. 어쩌면 오늘도 그는 자신의 '불면'을 고뇌하는 대신 일광욕을 하고 족욕을 하며 호흡 기계를 끼고 많은 주머니가 달린 양복을 입고 잠복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죽어가는 범인도 하는 이런 말조차 내뱉지 못하고 말이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피의자가 되고 싶었던 서래 
<헤어질 결심>을 보고 기자의 시선을 끌었던 건  사랑보다 자신의 자부심에 더 애착이 컸던 해준보다 그의 초밥 한 덩어리에 결국 자신을 던져버리고 마는 서래, 그녀의 삶이다. 

제작진은 '탕웨이'를 캐스팅하고 싶어서 여주인공을 '중국인'으로 설정했다고 하는데, 극중 서래를 보며 2001년작 <파이란>이 오버랩되었다. 영화는 <헤어질 결심>처럼 극중 남자 주인공 강재(최민식 분)에게 촛점이 맞추어 진행된다. '모두가 친절하지만 그 중에서도 강재씨가 제일 친절합니다'라던 그의 아내 파이란, 하지만 파이란은 삼류 건달 강재가 편의적으로 맺은 인연이다. 그런데 파이란은 그런 강재를 진짜 남편처럼 여기며 아무도 친절하지 않은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다 결국 목숨을 잃는다. 

파이란과 서래, 그녀들은 모두 불법 체류자들이다. 그리고 불법체류자인 그녀들을 구해준 건 '남편'들이다. 강재는 그녀와 법적으로 부부가 되어줬고, 서래의 첫 번째 남편 기도수(유승목 분)는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었다. 기도수가 오랜 시간 컨테이너 박스에 실려 생과 사를 오가던 서래만을 돌려보내지 않자, 그녀는 그를 기꺼이 남편으로 받들었다. 그녀의 몸에 자신의 이니셜을 새기고 구타를 하는 기도수를 그녀는 8년을 참아냈다. 돌아갈 곳이 없는 그녀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을 때, 그래서 고소공포증을 무릎쓰고 '마침내' 겨우 그녀의 삶에 빛이 들까말까 할 때 그녀의 앞에 해준이 등장한다. 

해준의 등장, 그게 왜 문제가 됐을까? 그녀는 오래도록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함을 지니고 다닌다. 가족의 산이라 하는 호미산에 이를 때까지. 이 '가족'적 장치는 그녀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건 '할아버지가 독립군이었다'는 핏줄의 정체성이 아니라, 그녀가 천착한 '관계'에 대한 정체성이다. 

8년을 학대당하며 간병인으로 살아가던 그녀, 그런 그녀가 남편을 죽인 유력한 용의자가 되어 경찰서 취조실에 들었다.. 그런데 맞은 편의 형사가 그녀를 친절하게 대한다. 초밥도 시켜주고, 매일 밤 자신을 지켜보던 형사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그녀에게 중국식이라며 볶음밥도 해준다. 그녀의 줄담배도 참아준다. 마치 '모두가 친절한 데 가장 친절한 사람은 강재 씨입니다' 같은 경우인 거다. 

안타깝게도 미스터리한, 남편을 죽였을 지도 모른 '팜므 파탈'같은 서래의 불행은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 그녀가 선택한 '사랑'들에서 비롯된다. 그녀의 유력한 증거인 핸드폰을 던져주듯 가버린 해준, 그런 해준의 '언어'를 서래는 '사랑'이라 읽는다. 하지만 해준은 형사이고 결혼한 사람이다. 그런 그와 '헤어질 결심'으로 서래는 또 다른 남편을 구한다. 

하지만 두번 째 남편은 해준처럼 그녀를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는다.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는 없다. '내가 나쁩니까?', 결국 해준을 찾아나선 그녀, 하지만 그런 그녀의 선택이 해준의 자부심을 위태롭게 만들고, 그를 구하려 기꺼이 자신을 던진 그녀에게 해준은 핸드폰만 또 건넨다. 이제 그녀는 다시 한번 '헤어질 결심'을 한다, 영원히. 서래의 두번 째 남편, 임호신(박용우 분)은 투자자, 아니 투기꾼이다. 그의 아내가 된 서래, 피의자가 되서라도 해준을 만나고 싶다는, 그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열망'은 임호신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맹목적 투자 전략은 임호신과 다르지 않은 엔딩을 맞이한다. 

비벌리 엔젤의 책 <자존감없는 사랑에 대하여>는 서래와 같은 선택을 '낭만 애착'이라 말한다. 남성들보다 더 여성들은 성장 과정에서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애착을 지니도록 교육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히 전근대적 가족 관계에서 자란 여성들은 공동체적 관계, 그 중에서도 특히 남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낭만 애착'에 천착하기가 쉽다.

학대에 시달리던 서래, 그녀는 범죄자가 되는 걸 마다하지 않고 폭력 남편으로 부터 도망쳤지만 '낭만 애착'으로 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지는 못했다. 스스로 서는 대신 그녀는 다시 사랑을 구하고 거기에 자신을 던진다. 하지만 어느 남자도 자신보다 그녀를 더 사랑해주지는 않았다.

해준의 친절에 스르르 자신을 무너뜨린 서래, 해준을 잊기 위해 또 다른 남자를 선택한 그녀, 그녀의 자기 파괴적인 사랑이 결국 그녀를 파국으로 이끈다. <파이란>에서 무려 20여년이 지났지만 <헤어질 결심>은 조선족 동포라는 '대상'을 통해 관계중심적인 여성의 한계를 말하고자 한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의심이 든다.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닷가에서 목이 터져라 서래를 부르는 해준, 그가 목놓아 부르는 그 자리는 방금 전 그녀가 섰던 그 곳이다. 영화는 조선족 서래의 순애보, 그 여운을 정훈희의 안개로 이어갔지만 물이 스며드는 모래 구덩이에서 그녀가 '아이 차가워 하며 툭툭 털고 일어나 비로소 자신의 삶으로 뚜벅뚜벅 걸어갔으면 하는 외람된 희망을 놓을 수는 없었다. 사랑, 그깟 게 뭐라고.



by meditator 2022. 7. 2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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