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선조와 그의 아들인 광해 사이의 불협화음은 이제 더 이상 생소한 내용이 아니다. 2015년 2월 종영한 kbs2의수목 드라마 <왕의 얼굴>이 갈등의 주요 축을 아들을 믿지 못하는 선조와, 아버지의 의심으로 인해 고통받는 광해로 삼았고, 새로 시작한 mbc월화 드라마 역시 문제적 인간 광해를 설명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에게 양위을 하지 않으려고 갖은 수을 다쓰는 노회한 선조를 등장시켰다. 이렇게 자신의 아들임에도 그 아들을 미덥지 않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적으로 여기며, 그에게 양위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아버지 선조, 그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이유는, 왕답지 않은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 비해 왕다웠던 아들이라는 '시기'와 '질투'의 인간적 감정을 등장시켰다. 거기에 덧붙여 평생 적통이 아니라는 컴플렉스에 시달렸던 그래서 역시나 적통이 아닌 광해가 싫었던 '옹졸하고 편협한' 인간 선조를 부각시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도 아닌 아들을 '정적'으로 삼은 아버지 '선조'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으로는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이 빈 행간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선조'의 캐릭터를 부각시켜 설명한다. 그리고 26회까지 진행된 <징비록>은 어딘가 석연치 않았던 선조와 아들 광해의 갈등, 그 정치적 순간을 포착한다.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이었음에도 서로를 정적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던 그 역사적 이유를 설득한다. 그리고 거기엔 우리나라의 국토를 침탈한 왜의 도발, '임진왜란'이 있다. 


왜란으로 비롯된 아버지와 아들의 파열
1592년 조선의 국토를 침탈한 왜는 거침없는 행군을 거듭한다. 이미 그 이전부터 왜의 침탈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있었지만, 오랫동안 전쟁을 겪지 않은 '문(文)'의 국가 조선은 외적의 침입에 무력했다. 하루가 다르게 수도인 한양을 향해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오는 왜에 대항하여, 죽을 각오로 싸우자는 유성룡을 비롯한 일부 대신들의 뜻과 달리 무기력한 임금 자신의 안위에 급급한다. 결국 그가 선택한 길을 야반도주하듯 수도 한양을 비우고 도망가는 것. 어가를 향한 백성들의 모욕을 견디며, 그는 북으로 북으로 길을 정하고, 여차하면 중국으로 건너 갈 양으로, 의주에 다다른다. 그렇게, 무주공산이 된 한양, 그리고 결국은 조선, 그 권력의 빈틈을 채운 건, 총알받이처럼 내세운 둘째 왕자로 세자가 된 광해였다.

또 하나의 조정, '분조'를 이끌게 된 광해는 정탁의 간언을 받아들여, 아직 왜적의 손이 닿지 않은 강원도 이천으로 들어가 '아직 조정이 살아있으니, 그대들은 충심을 다해 싸워라, 세자가 앞에 설 것이다'라는 격문을 통해 흩어진 관군과, 지방에서 봉기한 의병들을 규합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버지 선조에게 아들의 전술적 선택이, 항명으로만 비출 뿐이다. 자신은 무기력하게 도망을 가느라 바쁜데, 앞서 싸우겠다는 아들 광해의 행동이, 자신의 안위를 거스르다 못해 위협하는 행동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결국 선조가 내린 결정은, 광해를 겨눈 분조의 모든 신하들을 '파직'하겠다는 결정. 이에 광해는 억울하지만 석고대죄를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달랜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일편단심 왕의 편에 섰던 윤두수와 정철 등의 세력까지, 아버지 선조 대신 아들 광해의 분조를 조정으로 심리적 승인을 하는 과정을 격게 된다. 이제 아버지 선조는 사사건건 '광해'의 편을 드는 신하들로 인해 아들에 대한 적개심을 쌓게된다. 오로지 그의 귀를 현혹시키는 건, 비빈의 달콤한 이간질뿐. 



거기에 불을 부은 것은 명이란 존재다. 명나라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향하던 조승훈이 왜에 전멸을 당하고, 명은 심유경이라는 후에 '국제 사기꾼'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 인물을 통해 왜와 협상을 하고자 한다. 심유경의 말처럼 왜와 싸워서 이겨 봐야, 바다 건너 왜란 나라를 명의 국토로 만들 수도 없고, 정작 전쟁은 조선의 국토에서 벌어졌는데, 명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명의 군사들을 잃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명의 처지 역시 많은 군사들을 동원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명과 왜의 협상 앞에 아버지와 아들의 다른 선택
하지만 단지 세 치 혀만을 가진 심유경에 선조는 납작 엎드린다. 26회에서 보여지듯이, 그가 명의 사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신하들을 물린 채 심유경과 독대를 하고, 그가 할 협상의 내용을 알아보지도 않은 채 전권을 위임한 것이다. 신하들조차도 이젠 자기 보다는 광해의 분조에 더 신뢰를 보내는 상황에서, 무력한 왕 선조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대국 명뿐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선조가 정체도 모를 심유경에게 전권을 위임한 시기는, 이제 조선이 일방적인 왜의 공격을 벗어나 반격을 도모할 여지가 마련된 시기이다. 이순신의 수군이 바다에서 적을 무찌르고, 같은 날 곽재우와 고경명의 부대가 각각 이치고개와 금산에게 왜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힘으로써, 전라도를 지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곡창 지대 전라도를 수성함은 물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겨울이 다가오는 시점에 적을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는 반격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거기에 왜에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비격진천뢰'가 완성되어갈 시점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왜의 입장에서는 심유경의 협상 카드를 외면할 이유가 없었다. 한양까지 치고 올라오기까지 왜 역시 병력의 타격이 극심했고, 전라도에서의 패배로 전열은 물로, 무엇보다 부족한 보급을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이 문제가 되는 선조에게 이런 정황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는 그저 조선을 침탈한 왜가 아니라, 그저 이 상황을 얼른 종식시키고, 예전과 같은 왕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나라를 명의 정체모를 사신의 손에 맡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와 달리, 아버지가 명 사신의 말을 듣고 50일간 휴전을 선택했을 때, 아들 광해는 왜적이 손을 놓고 있는 이 때야 말로 반격의 기화라 생각한다. '비격진천뢰'을 앞세워 경주성을 되찾았고,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 일행을 급습했다. 

안그래도 신하들의 충심을 행동을 통해 얻어가고 있는 광해, 그런 광해의 자신의 뜻과 다른 결정에 대해 오직 '권좌'만이 중요한 아버지 선조는 아들을 '정적'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거기엔, 나라를 강국 명의 처분에 맡길 지언정 자신의 권력만 유지되면 되는 왕 선조와, 그런 아버지와 달리 조선을 침탈한 왜적을 물리치고자 했던 전란을 통해 진정한 세자로 거듭한 광해의 서로 다른 선택이 있다. 그리고 그런 선조의 선택은 그저 '찌질이'라 치부할 수 없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자주 만났던 리더의 기시감이 들게 한다.  자신의 안위와, 백성의 안위,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리더, 그들의 다른 길이 '정적'으로서의 선조와, 비극의 주인공 광해를 낳게 된 것이다. 그리고 광해의 비극은 결국 세자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자그만치 7년이라는 길고 긴 전쟁과 많은 인명 손실, 국토의 피폐함을 낳은 역사적 통한을 결과한다. 
by meditator 2015. 5. 11. 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