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부작의 <쓰리데이즈>가 마무리되었다.

김도진을 향해 폭탄이 실린 차를 몰고 갔던 이동휘 대통령, 하지만 차에 실린 폭탄은 김도진만을 산화시킨 채 이동휘 대통령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를 구하려 총을 맞은 채 달려간 한태경도 간발의 차이로 함께 살아남았다. 

김은희 작가의 전작 <싸인>에서처럼, 이동휘 대통령이 김도진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면, 혹은 이동휘 대통령을 구하고 대신 한태경이 죽었다면, <쓰리데이즈>는 진실을 향한 묵직한 메시지만 남긴 드라마로 끝맺었을 것이다. 하지만, <쓰리데이즈>는 둔중한 운명론 대신에, 희망을 택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동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말한다.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겠다고. 그의 이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양진리가 위기에 빠지고 홀로 돌아온 대통령에게 한태경은 말한다. 청와대로 가시라고, 하지만 이동휘는 거절한다. 김도진이 대통령의 목숨을 놓고 딜을 할 때, 다시 한태경은 대통령을 구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동휘는 말한다. 사람 목숨은 다 똑같다고. 대통령의 목숨과 국민의 목숨이 다르지 않다고. 대통령은 국민이 있어야 존재하는 거라고. 그리고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은 홀로 폭탄이 실린 차를 몰고 김도진에게 간다. 한태경도 마찬가지다. 사라진 대통령을 찾기 위해 차를 몰고 질주하다, 폭탄이 실린 듯한 주민들이 탄 트럭을 몰고, 대통령의 뜻을 기억하며 차를 돌린다. 대통령을 지켜야 하는 경호관이지만, 대통령의 목숨만큼, 그의 뜻이, 그리고 국민이 있어야 대통령도 존재할 수 있다는 대통령의 의중을 기억하며 양진리 주민들의 목숨을 구한다. 

(사진; osen)


역사는 늘 승자의 이야기를 하고, 그 승리를 거머쥔 영웅의 이야기에 골몰한다. 하지만, 정작 역사의 현장을 가득 채운 것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에서 그려낸, 그 강고한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기어올라가고, 또 기어올라가고, 또 기어올라가던 그 사람들처럼. 실제 역사를 이룬 것은, 그 작전을 지시한 누군가가 아니라, 그 현장에 있었던 수많은 이름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쓰리데이즈>는 진짜 이 사회의, 이 권력의 주인이 누군인가를 밝힌다. 

그리고, 세상에 지친 그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한다. <쓰리데이즈>는 첫 회부터, 16회에 이르기까지, 많은 출연자들이 나온다. 그런데, 다른 드라마에서 그저 스쳐지나가는 많은 단역, 조역들이 그저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간과되어 지는 반면에, 이상하게도 이 드라마에서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눈에 들어온다. 마치 애초에 제작진이 그럴 의도인 양, 한 장면, 한 장면에서 등장했던 그 어느 인물 하나, 하나의 연기가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15회 김도진의 수하들의 총격에 스러져가는 경호관들이 안타까웠던 것은, 그 시간까지 진행되어 온 드라마의 흐름 속에서, 그들이 어느새 또 한 사람의 주인공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치 애초에,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이 대통령이 말한, 국민, 그들인 것처럼. 그래서 비로소, 16부에 이르러, 왜 이 드라마가 대통령을 지키는 음지의 직업인 경호관을 주인공으로 했는지 이해가 된다. 바로,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직분을 위해 충실히 살아가는 그 사람 각각이,그들의 삶이 가장 중요하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래서, 16부 마지막 취조실 씬에서 감동이 더해진다. 김도진의 수하들은 저마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운다. 돈을 위해서, 혹은 애국을 한다는 아이러니한 신념을, 혹은 그래봐야, 언제나 세상은 힘있는 자본이 지배한다는 논리를. 그건 그들이 새삼 부언하지 않아도,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맞닦뜨린 세상의 지배 논리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쓰리데이즈>는 그들을 취조하는 검찰관의 입을 빌어 말한다. 설사 세상이 그렇다 해도, 자신이, 그리고 자신이 다하지 못하면 그 누군가가, 그것을 대항해 싸워가겠다고. 그리고, 이동휘가 살아있어서, 한태경이 살아있어서 고마운 마음과 함께, 어디선가 세상의 불의를 향해 싸우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1%의 그들이 있음에 내가 서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비록 1%라도 세상을 위해 싸워보겠다는 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그 어느때보다도 마음이 든든해 진다.

<쓰리데이즈>는 전무후무한 드라마였다. 한 눈 팔지 않고, 소신있게 포기하지 않는 1%가 세상을 바꿔나가겠다는 주제를 한 치의 흔들림없이 전하고자 노력했고, 거기에 도달했다. 드라마의 경직된 공기를 바꾸고자 쓰이는 그 흔한 말랑말랑한 대사, 웃기는 말 한 마디없이, 1회 대통령의 암살 시도에서 부터, 서로 다른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뚝심있게 전달했다.  거친 액션씬조차,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고뇌와 분노의 장치로 승화될 수 있다는 걸 <쓰리데이즈>는 보여준다. 이동휘란 대통령을, 그의 지지율 10%로 설명할 수 없듯이, 그저 몇 %의 시청률로 이 드라마를 평가하기에 <쓰리데이즈>가 전해준 메시지는 2014년의 우리 삶의 시금석이자, 위로이다.




그래서 <쓰리데이즈>를 함께 해준 배우들이 대단하고 고맙다. 단 한 장면, 한 마디의 대사만으로도 이동휘라는 고립무원의 대통령의 진심을 전해준 손현주씨는 물론, 이십대의 젊은 배우임에도 흔한 러브씬하나 없이 묵직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드라마를 선택하여, 한태경이라는 캐릭터에 생기와 열정을 살려내 준 박유천이란 배우가 고맙다. 화려한 의상과 아름다운 분장을 포기한 채, 남자 주인공보다도 적은 의상으로, 고군분투하여 기존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주체적 여성 캐릭터를 실현해준 소이현, 박하선 배우도 감사한다. 

<쓰리데이즈>란 드라마의 16부작을 이동휘, 한태경이라는 양대 산맥의 줄기가 버티어 갔다면, 그 산맥의 거목이 된 것은, 장현성이 분한 함봉수 실장, 윤제문의 비서실장, 그리고 안길강의 김상희 비서실장의 신념이었다. 그들이 자기 자리에서 겪는 혼돈과 고뇌와 결심들이, 우리 삶의 구체적 문제로 다가오며 <쓰리데이즈>의 신념을 생생히 우리들에게 제기했다. 그들만이 아니다.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서슴지않고 자신의 목숨을 던졌던 경호관들처럼 16부를 채워갔던 수많은 조연, 단역들의 흐트러지지 않는 진심들이, <쓰리데이즈>라는 숲을 채워갔다. 물론, 거기에는, 그런 그들의 진심을 돋보이게 해준 최원영을 비롯한 악역들의 호연도 빠질 수 없다. 

그저 실종된 대통령을 찾아가는 흔한 장르물인가 싶었는데, 우리 시대의 정의를 향한 신념에 대한 담론이 된 <쓰리데이즈>의 여정은 달달한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익숙치 않은 과정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고된 여정의 끝에 이 드라마는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진실한 위로를 전한다. 고맙다. 


by meditator 2014. 5. 2. 0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