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란 그림이 있다. 

대사들
 이그림의 원제는 [장 드 댕트빌과 조르주 드 셀브]로, 그 중 댕트빌은 프랑스아 1세가 영국에 파견한 대사이고, 그 옆의 댕트빌의 친구 셀브는 역시 프랑스 대사로 베네치아에 파견된 성직자이기에, 제목이 [대사들]로 명명된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그림이 그려질 당시 약관 스물 아홉의 나이로, 그 나이에 대사로 임명될 정도라면 창창하게 출세 가도를 달리던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림 중앙에 비스듬히 그려진 물체가 있다. 바로 해골이다. 젊은이들의 그림에 해골이라니! 이 해골이 상징하는 것은 당연히 죽음, 그리고 그를 통해 되돌아 본  인생의 덧없음이다. 이렇게 르네상스 시기의 그림, 혹은 꼭  그 시기의 그림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명화라 칭송하는 많은 그림들에는 그려진 사물 이상의  철학적 혹은 종교적 상징을 띤, 퍼즐처럼 숨겨진 의미들이 꼭꼭 숨겨져 명화의 맛을 더해준다.

그런데, 매회 다음이 어떻게 이어질 지 전혀 가름할 수 없는 <쓰리데이즈>를 보노라면, 자꾸 그림들이 눈에 띤다. 게다가 그저 등장인물들의 배경을 장식하기 위해 쓰였다기엔 그 명화들이 숨겨놓은 의미가 심상치 않다. 이제 <쓰리데이즈>에 등장한 명화들을 통해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재미를 찾아보자.

함봉수(장현성 분) 실장의 암살 시도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이동휘(손현주 분) 대통령은 비서실장이 청수대의 비상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등 각종 기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그들을 즉각 소집한다. 

그리고 경호관과 비서실장을 대동하고 재신 호텔에 나타난 이동휘 대통령, 그가 걸어가는 복도의 끝에 니콜라스 랑크레의 [유년기(childhood)]가 걸려있다. 


니콜라스  랑크레의 이 그림은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등 네 시기를 다룬 연작 [the four ages of man] 의 첫 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그림은 유모가 뒤에 서서 갓난 아기를 안고 있고, 그 앞에서 조금 큰 아이들이 유년기의 아이를 바퀴 달린 기구에 태운 채 끌어주고 있다. 
드라마에서 이동휘 대통령은 그 그림을 멀리한 채 김도진 일행을 만나러 비장한 표정으로 걸어간다. 그런 그를 랑크레 그림의 아이로 치환시켜 보면 어떨까? 그간 김도진을 비롯한 여당, 군대, 국정원의 비호를 받으며 무리없이 대통령 직을 수행하던 이동휘가 그림 속에서 자기 보다 큰 언니, 오빠들이 밀어주고 끌어주는 아이에 해당되었다면, 이제 그 그림이 걸린 복도에서 비장하게 걸어가는 이동휘 대통령, 98년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이동휘 대통령은 그림 속과 같은 누군가 보호해 주는 시절과 이별이자,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는 홀로서기에 나선 대통령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음, 김도진 일행을 만나러 간 방안에는 그 유명한 렘브란트의 [야간 순찰]이 붙여져 있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민병대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와 그 대원들이 모금을 하여 의뢰한 그림으로 원제는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의 중대]이지만 그 보다는 어두운 배경과 그 배경에 감싸인 듯 어둡게 처리된 인물들로 말미암아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그림이다. (하지만 실제 이 그림의 배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낮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주인공이 된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들은 대장은 귀족, 그리고 부대원들은 부과금을 감당할 재력을 지닌 상인들로 구성된 부대로, 총을 지니고 발포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자위권을 가진 부대였었다. 즉 17세기 당시 자본주의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던 암스테르담의 자본가 그룹의 상징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그림 앞에 자리한 이동휘를 비롯한 네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은 98년 당시 국가 부도 위기에 줄어든 국방 예산을 빌미로 양진리 사태를 일으킨 주범들이다. 그들은 국가 부도 사태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각자 다국적 기업인 팔콘의 이익을 위해, 혹은 그 자신이 주인인 재신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삭감된 국방 예산을 되찾기 위해, 화해 국면으로 변화되는 정국의 경색을 위해 등 각자의 이익을 위해 북한 강성 지도부를 접촉하여 양진리 사건을 도모한다. 팔콘의 개라고 지칭된 이동휘가 당당하게 그러면 당신들은 누구의 개냐고 되물었듯이, 그들은 대의적 명분으로 내걸은 것과 달리, 이동휘가 지적하듯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탐하기 위해 무고한 양진리의 사람들과 군인들을 희생시킨 사람들인 것이다.  

기세도 등등한 그림 속 자본가 그룹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총도 쏠 수 있는 자위권을 획득했다. 그들의 이해와, 그 그림 앞에 앉아 각자 자신의 주판알을 튕기는 네 사람은 다르지 않다. 더구나, 17세기의 자본주의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의 다른 이름이 식민주의라는 것을 안다. 자신들의 무한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해, 신대륙을 강탈하고, 무고한 사람들은 죽인 무한 이기주의 자본가 그룹의 초상, 그것은 바로 [쓰리데이즈] 속 네 사람의 실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김은희 작가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나서는,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자랑스레 집단 초상으로 남겼던 17세기 부르조아지들의 모습을 통해,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이는 일도 불사할 그룹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4. 3. 25. 1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