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년이 넘은 분단의 역사는, 우리에게 '이산 가족'의 아픔을 전해주었다. 기성 세대의 화법으로, 기성 세대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국제 시장>에서 '가족사'의 고통이 배태되는 곳은 그래서, 흥남 부두 철수 과정에서 야기된 '이산'의 아픔이었다. 하지만, <국제 시장>이 어른들만의 이야기라는 논란처럼, 반 세기를 넘은 분단은 이제, 오래된 흉터처럼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래서, 1월 9일 새로이 시작된 <스파이>는 기존의 이산 가족과는 분단이 낳은 가족의 아픔을 배경으로 한다. 

10월 16일 방영된 <스파이>에는 두 가족의 고통이 극렬하게 전해진다. 바로, 여주인공 박혜림(배종옥 분)과, 간첩 수연(채수빈 분)의 가족들이다. 
중국에서 스파이 활동 중 자신의 목표물이었던 김우석(정원중 분)을 사랑하게 된 박혜림은 과거 자신의 흔적을 지운 채 선우(김재중 분)와 영서(이하은 분),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런 그녀 앞에, 과거 그녀의 연인이자, 그래서 그녀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 했던 황기철(유오성 분)이 등장하면서, 박혜림의 가족은 위기에 빠진다. 몇 십년 만에 나타난 황기철이 요구하는 것이 다름아닌, 국정원에서 일하는 그녀의 아들 선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쪽에서 공작원 신분을 접은 채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던 혜림에게 공작원이었던 그녀의 과거가 다시 발목을 잡았다면, 이제 막 '자수'를 한 수연의 발목을 잡은 건, 그녀가 북에 남기고 온 가족들이다. 
자수는 했지만, 북의 가족을 보호하고 싶었던 그녀, 하지만 그런 그녀의 소망은 아랑곳없이, 남한의 수뇌부는 그녀의 신분을 드러내는 귀순 기자 회견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선우는 그런 상황에서 희생양이 될게 뻔한 그녀의 가족들을 구하고자, 무리한 작전을 기획하지만 그 마저도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방송사 keshet tv에서 제작하여 이스라엘 평균 시청률 26%를 기록하며, 영국 가디언지 선정 '놓치면 안되는 세계 드라마 6편'에 들었던 <마이스>가 <스파이>의 원작이다. 
우리처럼 분단의 비극을 안고 있지마는 않지만, 중동 여러 국가에 둘러 싸여있는 지정학적 조건에, 정치적으로 팔레스타인과 군사적 충돌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 스파이물 <마이스>의 배경이 된다. 
그리고 그 배경은, 우리나라에 있어 여전히 휴전이 아닌, 정전 협정의 상황인, 분단 60년의 역사로 등치되어 적용된다. 거기에, 기존에 분단하면, 상징적으로 등장하던 '이산 가족'이 아니라, 분단의 역사가 현재성으로 불러 일으킬만한 가족의 비극을, <스파이>는 담았냈기에, 현재적 공감의 재미을 얻어낼 수 있다. 

오랫동안 평범한 주부로 살았던 공작원 박혜림이 자신의 신분이 들통나자 제일 먼저 선택한 방법은, 두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로 살아왔던 자신의 행복한 삶을 포기한 채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작원이었던 그녀를 기꺼이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기꺼이 많은 것을 감수했던 남편의 설득에, 박혜림은, 황기철이 협박을, 아들 대신, 부부가 대신 그것을 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렇게 선우를 넘겨주는 대신 '스파이' 작전에 돌입한 부부, 그들에게 제일 먼저 주어진 임무는, 다름아닌 아들 선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이다. 
한 집에서, 아들이 샤워하러 간 사이, 아들의 핸드폰과 노트북에 감시용 스파이웨어를 심는 엄마, 그것도 모른 채 샤워를 끝내고 방문을 열려는 아들에게 물 한 컵을 가져다 달라며 위기를 모면해주는 아빠, 거기서, 이른바 '가족 스파이'극의 묘미가 드러난다.
첫 장면이 손에 땀을 쥐는 상황이라면, 다음 장면, 출근 하기 전에 애인 집에 들러 그녀와 식사를 하고 입맞춤을 나누는 아들을 지켜보는 부모의 감시 작전은, 부모와 자식이기에 빚어지는 애증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스파이>의 강점으로 자리매김한다. 상황은 비극적인데, 마치 그 상황이, 자식을 손에 쥐고 흔드는 우리나라 엄마들의 정서를 고스란히 반영하기에 공감되고, 웃긴 것이다. 
그렇게, '가족'이라는 특수하지만, 가장 익숙한 상황, 그리고 정서를 배경으로, 남북의 스파이 작전이 등장하면서, 스파이 물의 묘미에, 가족극의 정서가 더해지며, <스파이>는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남한, 박혜림에게만 가족이 있는 건 아니다. 과거 한 남자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끊어버린 채 남한 행을 택했던 박혜림과 달리, 자수를 한 수연은 여전히 북에 남아있는 자신의 가족을 접어버릴 수 없다. 그래서, 선우에게 자신의 가족을 지켜 달라고 부탁하고, 가족을 지켜주는 조건으로, 황기철과의 위험한 접선을 감수한다. 
어렵사리 연결된 어머니와의 통화, 수연은 어머니를 걱정하고, 어머니는 정작 자신들은 상관없으니 수연의 생명을 우선으로 할 것을 당부한다. 그 두 사람의 통화가 슬픈 것은, 황기철을 잡기 위한 볼모로 쓰일 수연의 운명처럼 북한의 가족들 역시 배신자로 낙인찍힌 수연에 따라, 생명을 보장받기 힘들 것이 뻔한 상황이기에, 박혜림보다 더 애절한 가족사를 연출한다. 

이렇게 <스파이>는 현재 남과 북이 대치하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근간으로 한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스라엘 드라마의 원작을 가져와, 그저, 국가와 국가의 대치라는 보편적 스파이물의 상황으로 둔갑시킨다.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드러난 황기철이라는 '악'보다도, 언뜻 드러난, 일보다는 자신의 입신양면을 우선으로 하는  남과 북의 또 다른 악이, 이들 가족의 적일 가능성이 높다. 이데올로기적 전쟁이 아니라, 일반적인 스파이물의 반전처럼, 결국, 양 쪽의 부패된 권력 집단을 상대로 한 일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거기에, 공중파에 어울리는, 전 세대 연령층이 공감할 수 있는 '가족주의'를 주된 주제로 이야기를 끌고 감으로써 스파이물이라는 장르성을 넘어, 남녀노소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전달된다. 굳이, 누가 나쁜 놈이고, 좋은 놈인지 복잡하게 따지고 들 것도 없이, 행복하고 안온했던 박혜림 가족에 닥친 위기만으로도 드라마는 충분히 볼 거리를 제공한다. 

이렇게 해외 드라마의 화법으로 남과 북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화법으로, 하지만 결국, 우리네 안방에 가장 익숙한 '가족' 이야기로 둔갑한 <스파이>, 케이블 금요일 약진의 대항마로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by meditator 2015. 1. 17. 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