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핏줄이 땡긴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이 짧은 문장은 매번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클리셰로 등장한다. 어린 시절 헤어져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부모와 자식은 매번 핏줄이 땡기는 모습들을 보이곤 한다. 이른바 인지상정인 것이다. 부모 자식이라는 걸 몰라도 서로를 안쓰러워하고 아껴주고 그리워 함으로써 시청자들의 동정심을 가중시키고, 혈연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왔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드라마들은 그런 클리셰를 뛰어넘는 경우를 종종 보여준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부모와 떨어진 자식이 '에미에비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물론, 흔히 핏줄이 땡겨 내 자식에게는 남달라하던 부모조차도 자신의 자식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등장하는 것이다. <최괴다 이순신>의 미령(이미숙 분)은 자기 자식 순신(아이유)를 알아보지 못한 채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원더풀 마마>의 복희(배종옥 분)는 자기 자식을 알아보지 못한 채 자신의 의붓 딸 영채(정유미 분)와 친 자식 훈남(정겨운 분)을 결혼까지 시키려 한다. 물론 결국에는 자기 자심임을 알고 피눈물을 쏟아 내지만, 이전과 다른 설정들은 한결 덜 두터워진 혈연과 개개인의 이익이 앞서는 현실을 일면 반영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도 알아보지 못하거나 그저 괴롭히는 정도면 약과다.
<스캔들>에 이르르면 드디어 아버지는 스스로 총을 들어 아들을 쏘려고 하고, 결코 자신을 쏘지 못할 거라는 아들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마지막 순간, 자신을 향해 총을 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임을 깨닫는 아들을 향해.
물론 우리 역사를 보면, 영조를 비롯해, 중종 등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한, 혹은 희생했을 것이라는 혐의를 받는 임금들이 있다. 하지만, 냉혹한 권력의 쟁투 현장에서 희생당한 세자들과 달리, <스캔들>의 장태한(박상민 분)은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 아들 바보라 자청하는 헛똑똑이이기에 그의 발사가, 의식적 아들 살해를 넘어선 징벌의 상징적 의미로써 더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이디푸스의 슬픈 전설은 현대의 심리학적 분석의 프리즘을 통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취하는 남성의 성장 과정에서 드러나는 성적인 메타포로 부각되곤 한다.
하지만 애초의 그리스 신화 내용에 좀 더 천착해 보면, 오이디푸스는 희생자이다.
아비인 테베의 왕 라이오스가 자신의 방만했던 사생활로 인해,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란 신탁을 피하기 위해 오이디푸스를 낳자 마자 버렸던 것이다. 드러난 죄는 오이디푸스의 몫이지만, 원죄를 따지자면 라이오스로 부터 기인된 것이다.
<스캔들>은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오이디푸스의 비극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어쩌면 라이오스는 그저 아들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자신을 죽인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도, 그 아들이 자신의 어머니와 천륜을 어기게 되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속편하게 사라져버렸다. 죄는 자신이 짓고, 그 벌을 아들에게 떠넘기는 아이러니를 목도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태하 건설을 일구기 위해,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죽어가던 하명근의 아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린 장태하 회장은 자신의 아들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린 것도 모자라, 스스로 총을 들어 아들에게 겨누고, 결국 방아쇠까지 당기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사업을 일구기 위해 타인의 목숨을 거두기를 개미 새끼 하나 죽이듯 쉽게 생각하던 '개발과 발전의 주역'이자, 고아로 자라나 자신의 핏줄에 그 누구보다 집착한 장태하에게 가장 처절한 응징인 것이다.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만들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피눈물'이라는 전형적 한국적 권선징악의 효과이자, 그간 기업물 혹은 가족물에서 자신의 탐욕으로 주변 사람들을 괴롭혔던 가진 자에게 돌아간 처벌의 끝판 왕이 아닐까 싶다.
다행히, <스캔들>은 자식 세대에게 고통을 전가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수준까지는 밀어넣지는 않는다.
부도덕한 경지까지 이를 가능성이 있었던 장주하(김규리 분)와 하은중(김재원 분)의 계약 연애는 적당한 수준에서 마무리 되었다. 친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감옥에 보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불타오르던 하은중의 시도는 오히려 그를 장태하의 제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예고에서도 보여지듯이 자신의 동생과 연애를 할뻔했다는 트라우마는 장주하를 내내 괴롭힐 것이며, 그보다 더한 건, 장태하가 총구를 들이민 그 순간, 바로 장태하의 입을 통해, 지금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하은중의 눈빛이다.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 타인의 아들을 죽인 것도 모잘라, 자신의 자식들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긴 아버지, 그리고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자신을 지키려는 아버지, 장태하, 그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현대사를 거침없이 달려온, 그리고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왜곡시킨 자본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스캔들>은 그저 한낮 주말 드라마를 넘어 이 시대의 신화를 그려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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