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조선에서 토, 일 밤 10시 50분에 방영 중인 <바람과 구름과 비>는 1977년 2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10권 분량의 대하 장편 소설이다. 5백년을 이어왔지만 김씨 세도가에 휘둘리는 무능한 임금 철종, 훗날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이 될 이하응은 자신의 야심을 숨기고 투전판의 개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세상, 그렇게 중병을 앓고 있는 조선의 끝자락에서 소설가 이병주는 회한의 역사 속에서도 꿋꿋하게 피어나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펼쳐보이고자 하였다.

그런 이병주 원작의 소설이 <야경꾼 일지(2014)>의 방지영 작가의 손을 빌어 20부작의 드라마로 새롭게 태어났다. 자신의 아들을 왕재로 삼아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던 야심가 최천중은 장동 김문의 모략으로 강직한 관리였던 아버지를 잃은 청년 최천중으로 거듭났다. 

최천중의 아버지 최경은 강화현감이었지만 백성들이 그의 행차에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생업에 종사하게 할 만큼 '백성의 삶'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당연히 권문세가이던 장동 김문에게는 거추장스러웠던 인물, 나라에 바칠 세금을 빼돌리려던 김문은 그것을 실은 조운선을 불태우고, 그 죄를 최경에게 묻는다. 도망칠 수 있었지만 아들을 역적의 아들로 만들고 싶지 않아 거부한 최경은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겨우 살아난 최천중은 '요절'할 운명인 그를 예언한 '산수도인'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끊어진 길을 다시 잇고자 '사주 명리학'의 통달한다. 

 

 

그들이 원하는 말을 들려줄 뿐이다. 
거처로 정한 배오개의 주막에서 공부했던 '사주 명리학'으로 '도사'로 이름을 얻게 되었지만 역적의 아들이라는 '오명'으로 인해 결국 장동 김문에 잡혀 이하응과 이하전의 역모를 내통한 '죄인'의 처지가 된 최천중(박시후 분)은 그를 사랑하는 옹주 봉련(고성희 분)의 도움으로 피신하지만 조선 팔도 장동 김문의 세도 세상에서 더 이상 살기 힘든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최천중은 도망자가 되는 대신, 장동 김문의 잔치에 '점바치 최천중'이 되어 등장한다. 무능했던, 거기에 이제 병까지 얻은 철종의 후사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시점, 앞날을 살펴볼 줄 아는 사주 명리학을 무기로 그는 모두가 예상치 못한 이하응의 아들 이재황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왕재임을 '선언'한다. 죽을 자리에서 삶을 구걸하는 대신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의 덜미를 잡는 방식으로, 그 스스로 선언한 삶의 길을 만든 것이다. 

그의 이런 '선언'은 동상이몽으로 서로 다른 왕재를 밀고 꿈꾸던 이들의 긴장을 고조시키며 최천중의 존재감을 드러내 스스로 목숨을 구명할 기회를 얻게 된다. 무능한 철종에게 불려가 왕의 권위는 후세를 원하는 사람으로 잘 이어가는 것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며 평생 김문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왔던 철종을 솔깃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장동 김문의 손아귀에서 왕실의 권위를 복권시키고 싶은 신정왕후에게 후사의 힌트를 쥐어준 것처럼, 다시 한번 자신들의 손으로 꼭두각시 왕을 만들고자 했던 장동 김문 역시 최천중의 '예지력'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든 것이다. 즉, 모두가 자신들이 원하는 그 누군가를 왕재로 삼고 싶지만, 자신들의 내세울 카드에 대해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최천중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읽어줄 수 있다는 '능력'을 내보이며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는 것을 넘어, 그 '세력의 중심'에서 '키'을 쥔 인물로 스스로를 부상시켜  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기 존재의 부상 능력에 대해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려줄 뿐이라고 정의내리는 최천중, 그의 예지력은 그가 공부한 '사주 명리학'을 넘어 권력의 판세와 그들의 욕망을 읽어낸 '혜안'의 산물이다. 

물론 그런 그의 '도발적 점괴'가 그를 위태롭게 만들기도 한다. 차기 왕좌의 자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하던 이하전에게 '단명'할 것이라 예언하는 바람에 목숨이 위태로와지기도 하지만, 외려 그런 이하전에게 훗날 고종이 되는 이재황을 방패막이로 삼으라 하며 회유하며 그가 자신을 책사로 여기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보이며 선언한 '왕재' 이재황의 아버지 이하응은 그런 최천중을 개처럼 바닥을 기며 보존해온 자신의 가문을 위협하는 인물로 여겨 총을 겨누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하응의 위협 역시 왕의 앞에서 그에 대한 오해를 풀어 그가 자신을 적으로 삼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최천중, 화려한 언사로 권문세족의 홀려 재산을 털어내고 천하를 도모하고자 했던 원작의 야심가는 멸문지화의 운명에서 겨우 살아나  '명리학'을 무기로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의 그 '욕망'을 읽어내 한낫 점바치라는 비천한 존재에서 스스로 권력의 중심에 선 신선한 캐릭터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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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길을 만드는 영웅 
하지만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 최천중이란 인물이 매력적인 건 그저 그저 '권력'을 자신의 세 치 혀로 좌지우지하는 그 '매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강직한 강화 군수였던 아버지 아래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기 위해 애를 썼던 청년은 그 스스로는 세상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이하응의 말처런 그의 운명은 그를 세상의 뒷전에 놔두지 않는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 다시 맞아 죽을 뻔하던 적도사을 거침없는 일갈로 구해내던 천중의 기개는 갈곳없는 아이들을 보살펴주던 유접소가 장동 김문의 온실로 인해 내쫓기는 처지에 이르자 홀로 나서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칼을 맞기까지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몇 수 십장의 탄원서를 마다하지 않겠다던 그의 정성이 이하응을 움직이고 다시 이하전을 움직여 유접소를 구해내지만 장동 김문의 권세를 그것을 무기력하게 한다. 결국 그 스스로 아이들을 그가 머무는 주막에 거두는 최천중, 그런 그의 명성은 저잣거리에 머물고, 전주에서 관리의 횡포에 억울한 백성들은 관이 아닌 그를 찾아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리고 그는 거침없이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이하전을 찾는다. 


이하전이 그렇게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온 백성들을 장동 김문을 위한 공격의 빌미로 삼고자 할 때, 그렇게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지 않는 왕재가 장동 김문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분노를 폭발하는 최천중, 거기에 <바람과 구름과 비>가 그려내고자 하는 영웅의 '진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원작에서 천하를 도모하고자 삼전도장을 만드는 최천중, 드라마는 그 천하에 대한 야심을 청년 최천중의 강직함과 올곧음으로 인한 '영웅 서사'로 변화시킨다. 곪을대로 곪은 나라, 그 속에서 자기 가문과, 자기 자신의 끊어진 길을 '명리학'이라는 역설적 무기로 만들어가는 최천중은 그 스스로 권력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권력에 욕망을 애초에 지니지 않음으로 인해, 그리고 '백성의 삶'에 중심을 놓치지 않음으로 인해 조금씩 저잣거리의 영웅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의적이었던 홍길동이 율도국을 만들 듯, 한때 양반이었으나 비천한 점바치가 권력을 주무르는  최천중이 품을 새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드라마는 10권의 소설을 21부작이라는 짧은 서사 속에 풀어내기 위해 매회 군더거기 없는 박진감넘치는 전개로 관심을 끌고 있다. tv조선이라는 방송국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아쉬운 지점이다. 

by meditator 2020. 6. 16. 1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