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ies in Lavender라는 영화가 있다. (우리말로 번역된 '라벤더의 연인'이라는 제목이 있지만, 어쩐지 대놓고 연인이라는 제목보다는 이 영화에는 원제가 어울리는 듯하다)

영국의 작은 마을 황혼의 삶을 안온하게 살아가고 있는 두 자매 쟈넷(매기 스미스 분)과 우슬라(주디 덴치 분)의 집 앞 해변에 한 젊은 남자(다니엘 브륄 분)가 폭풍우에 휩쓸려 쓰러진 채 발견된다. 기억을 잃은 이 남자는 두 자매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고, 자매 중 우슬라는 활기를 넘어 이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를 사랑하게 된다. 젊은 청년을 사랑하는 할머니라, 얼토당토 말도 되지 않는 설정이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소녀같은 감성을 지닌 우슬라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그리고 자신들의 삶에 청량제가 되어주는 이 젊은이를 사랑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영화를 보면 사랑은 결국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나이를 불문하고, 그 사람과 내가 조우하게 되는 그 감정의 어느 지점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는 일흔 살의 할머니도 앳된 젊은이를 사랑하는데 마흔 무렵의 사랑이 뭐 어떻겠는가. <밀회>는 대담하게 마흔 무렵의 사랑을 내세운다. 
드라마가 시작되자 마자, 선재(유아인 분)가 보여지는 것도 잠시, 화면은 줄곧 정신없는 스케줄에 빽빽하게 돌아가는 혜원(김희애 분)의 일상을 담는다. 예술 재단의 기획실장으로 마사지를 받는 이사장 곁에서 오늘의 일정을 프레젠테이션하고, 당장 있을 연주회는 나 몰라라 젊은 애인과 호텔 방에 머무는 아트 센터 대표를 찾아가 온갖 모멸 섞인 투정에 뺨 싸다귀까지맞으면서도 일정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자기 몫을 챙겨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내뱉는 남편의 지청구까지 사무적으로 능수능란하게 해결해 내는 능력자이다. 하지만 친구이자 상사인 영우(김혜은 분)의 독기어린 말처럼, 서한 재단 이사장의 마작 게임까지 불려다니는 실세이지만, 결국 서한 재단과 혈연으로 얽혀 있지 않아, 자신의 것이라고는 확실하게 없는 고달픈 '마름' 신세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상에서 만난 자신과 같은 병을 앓는 청년에게 간곡하게 치료를 권해주는 슬픈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다. 

이렇게 드라마 <밀회>는 언뜻 보면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한 여성 혜원의 삶에 숨겨진 틈을 열어보이며 이 여성이 충분히 자신의 삶에서 흔들릴 여지가 있음을 보여주기에 공들인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이해 관계에 충실한 위선자들의 사회 속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혹은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빠듯하게 살아가는 혜원의 모습은, 그리고 그 속에 갇혀진 그녀의 또 다른 삶의 욕망은, 연주회 리허설을 엿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고 마는 천재 청년 선재의 숨겨진 욕망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이물감이 없다는 것을 단 1회만에 <밀회>는 설득해 내고 있다. 그렇게 드라마는 혜원을 중심으로 그려냄으로써, 이 드라마가 중년의 삶에 밀려 들어온 사랑의 이야기에 촛점을 맞출거라는 걸 밝힌다. 마치 파도에 휩쓸려 할머니들 집 앞 해변에 나타난 젊은 청년처럼, 혜원의 삶의 울타리 안에 선재란 청년이 던져진다. 

그렇다면 사랑하기 나쁘지 않은 나이 중년의 조건이 되는 건 무엇일까. 역시나 <밀회>는 그에 앞서 종영한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의 주인공들처럼 중년의 나이임에도 전혀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 있지 않다. 오히려 첫 장면부터 그 누구보다도 정력적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의 마흔을 넘은 나이가 전혀 사랑하는데 문제가 될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꽃보다 누나>를 통해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김희애가 만들어낸 혜원은 더 이상 적역이 없다 싶을 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운 중년이 그것이다. 드라마는 속옷 차림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몸매를 자랑하는 혜원이 된 김희애의 젊음을 충분히 부각하며, 중년이란 나이를 잊게 만들고자 분투한다. 거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일찌기 치맛바람 강남 엄마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부담스럽지 않은 중년의 사랑으로 인기를 얻었던 전작 <아내의 자격>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녀의 사랑이 무리가 없을 거란 기대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사진; osen)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밀회>는 이른바 멜로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휘황찬란하게 눈요기가 되는 재벌가에, 그들 사이의 암투에, 그에 못지 않은 음대를 중심으로 한 입시 비리, 거기에 한 술 더 얹어, 고급스런 클래식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덕분에 드라마는, 맛깔나는 이야깃거리와, 눈과 귀가 즐거워진다. 멜로에, 치정에,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까지, 이만하면 고품격 멜로다 하고 내놓을만 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모와 조카 같은 혜원과 선재의 사랑을 얼마나 공감가게 그려낼 것인가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제 아무리 중년의 사랑이라지만, <아내의 자격>에서 동년배의 사랑을 넘어, 영화가 아닌 드라마에서, 젊은 청년과의 사랑까지 우리 사회에서 어디까지용인 될 수 있는가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덧붙이자면,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라벤더의 연인의 우슬라 할머니는 천재 청년을 고이(?) 보내준다. 그리고 청년의 첫 데뷔 연주를 보고 나온 할머니는 언니에게 말한다. 우리는 여기 까지라고. 물론 꼭 혜원의 사랑이 이루어지는가만이 이 드라마의 관건은 아닐 것이다. 선재와의 사랑을 통한 껍데기같은 삶을 벗어던지는 혜원의 자아 찾기, 그것의 지향점이 어디가 될 지, 그것을 얼마나 공감가게 그려낼 지가 아마도 <밀회>의 본질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4. 3. 18. 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