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모래알처럼 구별이 안 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면 어떤 얼굴이든 독특하고 딱 하나뿐이라는 것이었다. 그 얼굴들은 엄마의 얼굴이거나 아빠의 얼굴이고, 누이 혹은 형제의 얼굴이며, 딸의 얼굴이거나 아들의 얼굴이다. 그 얼굴에는 수많은 기억들이 아로새겨져 있어서 다른 누구의 얼굴과도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애착의 핵심이고, 그 애착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특질이다. -붉은 낙엽, 토마스,H.쿡


흔히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뇌리에 떠오르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일 것이다. 인류가 수만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자손손 융성을 이루는 기본이 되어온 남녀간의 끌림, 하지만 곰곰히 다시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인간의 삶을 보존하는데 거 원초적인 것은, 남녀간의 원초적 끌림보다도 더 맹목적인, 내 새끼를 보호해야 한다는 부모들의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었을까? 더구나 다른 동물들과 달리, 나이가 지긋해서야 지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인간이란 동물의 생존에는, 이성에의 사랑보다 육친의 맹목적 보호가 더 선험적이 아닐까 싶다. 흔히, 육친에의 사랑이라고 하면, 모성성을 우선으로 치지만,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비의 자기 유전자에 대한 집착이란 어미의 모성성 못지않은 한가닥을 하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11월 17일 KBS드라마 스페셜, 단막극 2013, 드라마 극본 공모 당선작 시리즈 마지막 편으로 방영된 <불청객>은 이 맹목적 부성애에 발목을 걸며, 인간으로서의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숭고한 이유는 죄의식이 있어서래요'라며.



이야기의 구조는 복잡하지 않다. 매의 눈을 가진 강력반 반장 국서, 그의 집에 불청객이 찾아온다.

그는 바로 7년전 국서가 살인죄로 집어넣었던 범인 이태호다. 그는 7년전 사건의 범인이 자신이 아니었으며 국서 자신도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냐며 다그친다. 그렇다. 매일 밤 한 컵의 소주를 들이키고도 잠을 못이루는 국서는 알고있다. 그날 밤 죽은 자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 태호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막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딸을 둔 아빠는 현장에 떨어진 핸드폰으로, 딸이 범인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딸의 핸드폰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고, 대신 엄한 태호를 범인으로 몰아 감옥에 보낸다. 결국 참지못한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슬며시 흘린 채. 그 한 마디에 단서를 얻은 태호는 7년만에 감옥에서 나와, 다짜고짜 국서의 집을 찾아 들어와 복수를 하겠단다. 그의 복수란 건, 국서 스스로 경찰에 자신의 딸을 고발하라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딸을 죽이겠다고 태호는 협박을 해댄다. 


드라마 스페셜 극본 공모 당선작 시리즈의 카피는, '한 줄의 상상이 한 편의 드라마가 되는 순간'이다. 지금까지 방영된 네 편 중, 10월 23일 방영된 <마귀>는 역사의 행간에서 길어올린 파발꾼을 역사적 인물로 형상화시켰고, 11월3일 방영된 <나에게로 와 별이 되었다>는 이 시대 88만원 세대의 슬픈 사랑이 자화상을 그려내었다. 11월 10일 방영된 <오빠와 미운 오리>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상투적 반전이 또 기존 드라마와는 또 다른 반전이 되는 사고를 담아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시리즈인 <불청객>은 가장 공모작 카피에 어울리는 상상의 폭과 깊이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마치 한 방울의 물감이 종이 한 장을 다 물들이듯이, 그저 집에 찾아온 불편한 사람이라는 에피소드는 아버지와 딸, 그리고 억울한 범인과 그를 범인으로 몰아간 형사, 라는 표면적 관계를 넘어, 인간다움의 근원을 헤집는다. 

좋은 드라마일수록, 등장인물들의 면면이 단선적이지 않다. <불청객>은 보는 내내 등장하는 누군가의 편을 들어 우리 편 이겨라 하는 심리로 편하게 드라마를 보던 시청자들을 괴롭힌다. 느닷없이 쳐들어 온 불청객인 줄 알았더니,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람이요, 그래서 그의 편을 들고자 했더니, 그의 협박은 도를 넘고, 이미 아비와 딸은 충분히 고통을 받은 거 같아 보인다. 그래서 다시 불청객을 미워하려 했더니, 아뿔사, 그는 그 7년 동안, 그나마 자신을 혹처럼 생각하는 아비가 죽은 것도 모른 채 그 자신도 죽을 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저 드라마의 마무리에 이르러, 내뱉을 수 있는 단어는, '이를 어째'이다. 


삶은 언제나 불신과 추측으로 무너진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의심이 모든 것을 망쳐놓는다. 혹시 혹은 만약에, 라는 생각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이다-토마스, H쿡


부모 자식의 연을 맺고 사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국서가 맞딱뜨린 상황에서, 맹목적인 부성애의 결정에 토를 달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단지 부성애와 인간의 도리를 대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7년이 지난 후, 딸은 울부짖으며 대든다. 아버지는 왜 한번도 그날의 일을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았느냐고, 아버지는 지레 자신이 피해자를 죽였으리라 예단한 거 아니었냐고. 아버지는 나를 한번도 믿지 않았다고. 그러면서 드라마는, 우리가 원초적이라 접어두는, 그 맹목적 육친애의 맹목성에 질문을 던진다. 과연 당신 자식을 사랑한다는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이냐고. 



토마스 H쿡의 소설 <붉은 낙엽>은 그 막연한 부성애가, 어떻게 세 명의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두 가정을 무너뜨려 가는지를 증명해 내는 소설이다. 드라마 <불청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막연히 내 자식을 사랑한다고 지레 짐작한다. 그러면서, 사실 누구보다 앞서 내 자식을 의심하고 불신하며 자식들을 몰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빚어지는 수많은 왜곡된 부모 사랑들이 그 증거로 넘쳐나고. <불청객>은 그 눈감은 내리 사랑에 발을 건다. 그리고, 그 맹목성이 가지는 잔인함을 가슴 절절하게 그려낸다. 태호의 죽음이 마치 내 잘못인 것처럼 뜨금하도록. 언제나 그렇듯 좋은 드라마는 고해성사와도 같이 우리를 정화시킨다. 


<불청객>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절찬리에 종영한 kbs2의 수목 드라마 <비밀>이 떠오른다. 운전대의 주인을 바꾼 남녀의 어긋난 사랑이 펼쳐가는 파장은, <불청객> 아비의 잔인한 내리 사랑의 파장과 유사하다. 똑같이 좋은 드라마에서 풍기는 향내가 난다. 조만간, 또 한 편의 무시무시한 명작 속에서 이은미 작가와, 노상훈 피디의 이름을 발견할 것같은 예감이 든다. 벌써부터 기대로 어깨가 들썩거린다. 

by meditator 2013. 11. 18. 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