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는 <근대 미술가의 재발견1; 절필시대>를 전시하고 있다. 이미 그 이전에도 이쾌대 우리 근대 미술계에서 잊혀진 혹은 방치된 예술가들을 복기하는 전시회를 꾸준히 이어왔던 국립 현대 미술관은 <근대 미술가의 재발견1; 절실시대>를 통해 일제 시대와 6.25라는 역사적 격동기에서 본의 아니게 자신의 예술을 더는 이어갈 수 없었던 미술가들을 소환하여 미술로서의 근대사 읽기를 시도한다. 그리고 이는 사회와예술, 나아가 존재와 예술이라는 거대 담론을 향해 한국 미술사가 해나가야 할 진중한 과제를 향한 성실한 답변의 일환이다. 

1층과 2층, 총 3부로 이루어진 전시회는 근대 화단의 신세대; 정찬영, 백윤문, 해방 공간의 순례자; 정종여, 임군홍, 현대 미술의 개척자; 이규상, 정규 등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는 낯설은 이름, 그리고 그 이름만큼이나 우리가 만날 수 없었던 그들의 그림들, 하지만 그 그림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우리 근대 미술의 지평이 그저 몇몇 명망가들로만 이루어진 그런 것이 아닌  다양한 시도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더구나 최근 미술사를 수놓았던 인물들이 '친일'이라는 오명을 달고 퇴진하게 되는 위기에서 더더욱 반가운 시도이다. 

 

 

근대 화단의 신세대 
3부의 전시회를 여는 건 여류 화가 정찬영이다. 1929년, 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당시 유행하던 채색화 기법의 <지반, 또는 수련>, <설중백로>로 연이어 입선하며 미술계에 등장, 이후 그런 채색화의 기법에 자신만의 세밀한 묘사를 더한 <모란>, <여광> 등으로 여성 최초로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의 특선 작가가 되었다. 특히 자신의 딸을 모델로 하여 나물 바구니를 옆에 두고 애처로이 앉아있는 <소녀>는 1935년 창덕궁상을 수상함은 물론 식민지하 조선의 심성을 대변한 작품으로 높게 평가받았다. 

결혼의 조건이 그림을 계속할 수있었던 것일 만큼 예술에의 의지가 강했던 정찬영, 그녀는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기 위해 공작을 그릴 때 창경원에 나가 직접 데생을 하거나 했지만 그 자체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구경거리가 될만큼 화제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혼 두 둘째 아이를 잃게 되면서 그 아픔으로 붓을 놓게 된 정찬영, 이후 그녀의 그림은 식물학자인 남편 도봉섭의 식물서에 식물세밀화를 통해 만날 수 있었지만 그 마저도 남편의 납북으로 더는 그녀의 그림을 만나볼 수 없게 되었다. 가장 촉망받는 여류 예술가였지만 '가정'과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붓을 접어야 했던 근대 여성의 자화상이다. 

 

 
정찬영과 함께 전시된 백윤문, 도화원 집안에서 태어나 대를 이어 순종의 어진을 그렸던 화가이다. 김은호에게 사사하였으며 정찬영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채색화 화풍의 그림을 그렸던 화가, 정찬영이 여성적이며 섬세한 필치로 채색화를 접근했다면, 백윤문은 그와 반대로 김홍도의 풍속화처럼 당시 남자들의 생생한 생활의 모습을 담아내며 자신의 미술 세계를 이끌어 가다 1942년 건강상의 이유로 무려 35년 동안 붓을 접게 되었다. 이후 기적적으로 1977년 건강을 되찾아 78년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지만 불과 2년 후 유명을 달리했다. 

현대 미술의 개척자 
근대 미술의 신세대의 맞은 편 공간에 펼쳐진 건 지금의 우리에게도 신선한 현대 미술의 화풍을 개척한 이규상과 정규의 작품 세계이다. 김환기, 유영국, 그 이름만으로 걸출한 우리나라 모더니즘 미술의 대표자들이다. 김환기의 그림이 십억을 넘는 낙찰가를 호가했다는 기사를 아직도 접하게 될 정도로 여전히 '핫'한 것과 달리, 김환기, 유영국과 함께 한국 모더니즘 미술, 나아가 추상 미술을 이끈 세 사람이라 당대 칭해졌던 이규상은 자신의 그림을 알아주지 못한 시대를 만나 가난에 그림마저 절필하는 불우한 삶을 살게 되었다. 

1930년대 당시 일본에서는 서양의 모더니즘의 화풍을 이어 받아 다양한 미술적 시도가 융성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에 미술로 유학했던 이규상이 그런 화풍을 이어받은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 하지만 이규상은 그런 모더니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호안 미로의 초현실주의를 받아들여 그걸 자신의 작업 세계에 풀어놓는다. 기독교적 세계관, 이를 선과 원 등의 추상적 대상을 통해 풀어내고자 했던 이규상, 하지만 그런 '난해한' 그의 작품은 전시회를 통해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으며 동시대인들에게 외면을 받게 되고 하지만 추상적 주제를 향한 그의 예술적 열정은 더해만 가며 결국 그를 세상과 멀어지게 만들었다. 

반면 역시나 같은 모더니즘 계열의 추상화로 작품 세계를 열었던 정규는 초창기에는 교회, 소년같은 구상적 이미지를 선으로 구획된 단순화시킨 추상적 이미지로 만드는 작품들에 집중했지만, 불모지와 같은 추상화단에 머무르지 않고 판화, 도예, 그리고 도예 작품을 활용한 벽화로 자신의 작품 영역을 확장시켜나가며 우리 미술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해방 공간의 순례자 
<근대 미술가의 재발견1; 절필시대>가 시사하고 있는 바는 크다. 우리가 이름조차 몰랐던 근대 미술가들의 그림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전시회지만, 그 그림들을 통해서 우리는 해방공간과 분단의 시대를 살아갔던 '선인'들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이기에 예술가로서의 생을 다하지 못했던 사람도, 너무 앞서가서 외면받아 좌절했던 선각자도, 하지만 이런 근대인들의 초상들 중에서도 어쩌면 정말 이 전시회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해방 공간의 순례자'라는 제목으로 찾아온 두 사람 정종여와 임군홍이 아니었을까란 생각들게 전시회를 보고나서면 들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2층의 양 홀을 가득 메운 그들의 작품이 그러하거니와, 작품들의 면면이 우리 미술사에 이런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걸출하고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들의 이름도, 그들의 그림도 낯설기만 할 뿐이다. 

화가 임군홍,  하지만 그에게는 화가 말고도 다른 수식어의 직업이 많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정규적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던 임군홍, 독학으로 공부하여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미술계에 얼굴을 내밀었다. 연속 입선에 미술학도들과의 동인전으로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한편, 가장으로서 여행사를 운영하던 그는 1939년 이래 중국으로 가 중국의 풍물을 인상주의, 야수주의 등의 다양한 기법을 통하여 자신의 그림에 담았다. 

 

 

도화서 가문 출신의 백윤문이 평소에는 수묵 담채의 기법을 좋아했지만 당시 미술의 트렌드를 따라 조선화단에 인정을 받기 위해 채색화 그림을 그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을 하였듯이 일본 유학파 등이 주축이 된 조선 화단은 특정 트렌드가 중심이 되었고, 그런 조선의 화단과 거리를 둔 임군홍은 중국인의 거리와 풍물을 중심으로 자유로운 화풍을 진작하여 우리 미술계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고학으로 일본 유학을 마치고 조선미술전람회에 1936년 입성을 시작으로 1938년부터 44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입선과 특선을 거듭했던 대표적인 작가 정종여, 전시회장 1층 전면을 가득 메운 괘불도, 25살에 그렸다는 이 그림에서 보여지는 화풍은 호방하며, 일본 화단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수리에서 보여지는 기상은 우리나라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상이다. 또한 중국의 고전을 답습하던 전통화에서도 금강산과 지리산, 가야산 등 우리 산하의 정경을 실사화로 그려내었던 화가, 그만큼 정종여가 해방 이전과 후 한국 화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그러나, 색달랐던 임군홍도, 호방했던 정종여도, 그 이름도, 그의 그림도 우리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자진 월북, 혹은 납북되었기 때문이다. 각각 1972년, 1982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에서 '공훈 예술가'의 칭호를 받으며 활동했던 이 두 사람, 그래서 그들은 본의 아니게 남한 화단에서 '절필'의 작가가 되었다. 이제 북한 최고 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역임한 김원봉의 월북 이전 독립 운동의 공으로 '서훈'조차 제기되고 있는 시점, 한국 화단의 블랙홀이 되었던 월북 화가들의 작품을 '절필 시대'를 통해 복기하는 건 그래서 반갑고도 소중하다.  본의 아니게 절필이 된 그들의 절필 이전의 작품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근대 화단의 본 모습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by meditator 2019. 7. 11. 2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