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란 단어가 생소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기자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에만 해도 '페미니즘'은 매우 '생소한 분야'였었다. '여자'로 대학 생활을 하는 건 '혼돈'이었다. 여전히 '남성'과 '여성'에 대한 '분리'된 의식이 지배적이었던 그 시절, '여성'이라는 이유로 '다른 존재'로 대하는 '묘한 태도'들에 나는 '혼란'을 느꼈었다. 이런 나의 갈증을 도서관에서 만난 이러저러한 서적들을 통해 '페미니즘'에 입문하게 되었다.

당시 보던 '페미니즘' 관련 서적에서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버자이너'를 보고, 만져느끼고, 그려보는 과정이었다. 자신의 '몸'이었음에도 '상체'가 아닌 '하체'를 들여다본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행위'였다. '더럽게스리', 이런 이야기를 주변에 했을 때의 반응이었다. 자신의 몸이지만, 차마 볼 수 없는 곳, 더러운 곳이라 여겨지는 그곳,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이브 앤슬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바로 '버자이너'를 알고, 그 욕구을 수용하는 것이 바로 여성 존재를 바로 세우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했다. 8월 11일 개봉한 <굿 럭 투유, 리오 그랜드>는 2022년판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아닐까 싶다. 

 

 
60대 낸시의 버킷리스트 
60대의 낸시, 그녀의 삶은 권태롭다. 2년 전 남편과 사별했고, 장성한 아들과 딸이 있지만 그 무엇도 그녀에게 '활기'를 되찾아 주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 '종교학'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 엄격한 '윤리적 규율'을 강조하던 그녀는 자신의 삶도 그렇게 살아왔다. 늘 예측 가능하고, 정해진 원칙에 맞춰 살아오던 그녀가 60대의 어느 날 뜻밖의 도발을 '선택'한다. 바로 돈을 지불하고 '남자 리오(대릴 맥코맥 분)'를 산 것이다. 

영화는 '성적인 퍼스널 서비스'를 매개로 60대 여성의 억눌린 '자아'를 풀어내고자 한다. 동양 고전에서 '이순( 耳順)이라는 표현처럼 세상의 모든 것에 '편해진', 즉 더는 '욕망할 것이 없어 보이는 연배가 60대이다.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한평생 살아온 '습'이 굳어질 대로 굳어진 '나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속 '낸시' 역시 마찬가지다. 십대 시절 스쳐지나가듯 자신을 갈망의 상태로 빠뜨렸던 이국의 젊은이를 떠올리며 아쉬움을 피력하지만, 그도 잠시 눈 앞에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서비스'를 할 준비를 한 남자가 있음에도 좀처럼 옷깃을 놓지 못한다. 그리고 여전히 선생님인듯 군다. 

60평생 낸시가 지켜온 '습'은 현모양처이자, 엄격한 선생님으로 자신을 버텨온 '페르소나'이다. 그녀가 애써 지켜온 것이지만, 한번도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했다는 그녀의 불만은 그녀 안에 억눌린 '욕망'과 '욕구'를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지 못한 채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로 살아오다 보니 어느덧 그 '역할'이 자신이 되어버린 상태, 하지만 이제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 나이의 낸시는 그런 자신이 '답답하기만'하다. 

 

 

낸시로 분한 '엠마 톰슨', 그녀의 또 다른 작품 <칠드런 액트(2017)>가 오버랩 된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엠마 톰슨과 또 다른 젊은이들과의 '만남'을 그린다. 하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려 한 '애덤'과의 만난 완벽주의 판사 '핑오나'와, 자기 삶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리오'를 산 낸시는 극과 극이다. 그러나 워커홀릭인 피오나와 은퇴를 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원칙에 옭죄어 있는 낸시는 모두 자신의 '페르소나'가 곧 '자신'이 되어버린 처지이다. 아마도 이건 피오나와 낸시라는 영화 속 캐릭터들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했더니'라며 자신의 감정을 피력하지 못해 답답해 하던  환갑을 앞둔 '선배님'처럼, '페르소나'에 오랜 시간 충실한 삶을 살던 이들이 어느 지점에서 모두 느끼는 갈증이 아닐까. 

 

자신을 마주하다. 
<굿 럭 투우, 리오 그랜드(이하 굿 럭 투유)>는 낸시와 리오의  네 번에 걸친 만남을 내용으로 한다. 소피 하이드 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엠마 톰슨'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말처럼, 네 번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페르소나'로 부터 한 발자국씩 나와 자신만의 자유를 찾아가는 놀라운 변화를 엠마 톰슨은 설득해 낸다. 

올드 에이지 세대가 확장되고, '골드 에이지' 세대가 되며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늘어나고 있다. 다이안 키튼, 제인 폰다, 캔디스 버겐 등 쟁쟁한 과거의 여배우들이 등장하는 2019년작 <북클럽>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매개로 노년의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리고'사랑은 그냥 단어입니다. 누군가가 의미를 부여해 주기까지는요.'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사랑'을 찾는 것으로 그녀들의 갈증과 욕구를 '해소'한다. 

그렇다면 <굿 럭 투유>는 노년 버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일까? 결국 자신의 원하던 목표를 이루는 자체로만 보면 그럴 수도 있지만, 영화는 '지적 탐구'라는 수식어처럼 '낸시'라는 '존재'에 보다 천착한다. 조심성넘치고, MBTI 극 J로 보여지는 그녀의 성격은 그래서 답답하지만, 동시에 신중하게 자신에 대한 탐구의 발길을 내딛는다. 

 

 

영화는, 그저 욕망에 불붙은 60대 여성이 아니라, '오르가즘'이라는 갈증을 매개로, 한 여성의 삶을 살펴본다. 자신에게 주어진 '페르소나'의 삶을 충실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가 무엇을 억누르며 살았는가,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차분하게 밝혀나간다. 또한 억눌린 욕망을 '분출'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정체성이었던  '페르소나'가 리오와의 관계를 '성숙'하게 풀어가는 현명한 장치가 되어 그녀가 살아온 시간 또한 긍정한다. 

앞서, 자신의 '버자이너'를 마주하는 과정은, 나를 '긍정'하는 과정이다. 내 몸에 걸쳐진 '브래지어'와 '거들'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일부분이지만 외면했던 그것을 마주하는 건 있는 그대로 나를 '수용'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낸시 역시 드디어 자신의 날 것 그대로의 몸을 마주한다. 60대의 육체, 그녀의 표현대로 가슴은 허리까지 내려오고, 배는 부풀었고, 늘 그녀를 위축되게 만들었던 육체를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가장 사랑스럽게, 그리고 자부심에 넘쳐서 바라본다. 그 늘어진 가슴과 부푼 배가 된 그 시간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건 비단 낸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 유행하고 있는 '바디 프로필', 언뜻보면 '자신을 사랑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걸 위한 극강의 다이어트와 피티를 거치는 모습은, 결국 보여질만한 자신을 '가공'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와 달리 영화 속 낸시의 '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하는 첫 발이다. 지난 60 평생 낸시가 갈망했던 건 바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낸시의 모습은 우리에게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하는가?라고. 

물론 <굿 럭 투유>는 진지한 자아를 향한 탐구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 '봉인'된 성매매에 대해 '공익 서비스'라는 도발을 던지는 문제작이기도 하다. 영화는 자아에 대한 갈증을 성적 서비스를 통해 풀어내려한 60대 여성과 그 여성에 대한 '심리적 서비스'마저 마다하지 않는 이상적인 '관계'를 통해 긍정했지만, 그 여성과 남성이, 남성과 여성이었다면 과연 그럼에도 여전히 호의적으로 보여질 수 있을까라는 난제를 남긴다. 






by meditator 2022. 8. 17. 2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