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옛 이야기 속 여우 누이는 '누이'로 둔갑한 여우가 가축들부터 시작하여, 부모님, 형제들까지 잡아먹어가며 한 집안을 '거덜'내어 버리는 이야기였다. 이제는 전설이 된 <전설의 고향> 속 구미호는 여름이면 찾아오는 단골 손님이었지만 '서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으로 둔갑한 여우는 사람의 간을 먹고 사람으로 되고자 한다. 그런데 그만 아내가 된 여우를 의심한 남편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사람을 원망하며 사라진다. 이렇게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던 구미호 전설이 환타지 멜로 버전으로 오늘에 되살려졌다. 

 

 

'전설' 속 이야기를 현대적 버전으로 되살리는 건 낯선 일이 아니다. 드라큐라도, 늑대인간도 영화로 부터 시작하여 '미드' 속 주인공으로 맹활약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동훈 감독에 의해 일찌기 족자에 봉인되었던 전우치가 서울 시내를 활보한 적이 있다. '저승사자'들은 영화<신과 함께>, 드라마 <도깨비>를 비롯하여 다작 중이다.  그런 면에서 구미호의 현대적 버전 업은 새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12월 3일 종영한 <구미호뎐>은 구미호 전설과 함께  우리의 전설 속 다양한 콘텐츠를 현대적 버전으로 재해석해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무엇보다 전설 속 구미호들은 일관되게 '여자'였다. 여우라는 동물이 가지는 그간의 고정 관념에 힘입어 늘 이야기 속 여우들은 '여성'이라는 성적 정체성을 대변했다. 그런데 새롭게 찾아온 구미호는 그런 전설 속 고정 관념을 뒤집는다. 산속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르시즘'에 빠질 만큼의 '미모'를 가진 남성이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가 되어 돌아왔다. 

그런데 그 여우는 서울 한 복판에 빨간 우산을 들고 활보하지만 한때 백두대간을 다스리던 산신이었다. <구미호뎐>이 흥미로운 건, 전설 속에서 '구미호'라는 캐릭터를 빼내 온 것이 아니라 구미호를 중심으로 전설 속 세계관을 오늘에 되살려 냈다는 것이다. 

 

 

오늘에 되살려 진 전설 속 세계관 
백두대간을 다스리던 산신 구미호가 주인공이지만, <구미호뎐> 서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되는 삼도천이다. 즉 죽은 후 저승에 이르는 큰 강, 서양 신화의 아케론과 같은 영역에서 그곳을 관장하는 염라대왕의 누이 탈의파가 이제는 '내세 출입국 관리소'가 되어 그곳을 관장하며 드라마 속 삶과 죽음의 운명을 총괄한다. 삶과 죽음의 운명을 가르는 현세와 내세관이 드라마의 세계관으로 중심을 확고하게 잡아준다. 

백두대간을 다스리던 산신이었지만 구미호 이연(이동욱 분)은 전설 속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 채 '인간' 여성(조보아 분)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 사랑의 훼방꾼, 그리고 백두대간을 다스리는 산신의 자리를 욕심낸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로 인해 사랑하는 여인을 스스로의 손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여기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여우는 은혜를 입으면 갚아야 한다는 전설 속 '인연의 고리'가 아킬레스 건이 되어 사랑하는 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건 인간과 여우 사이에 태어난 구미호의 의붓동생 이랑(김범 분)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이무기의 측근과의 얽힌 인연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은혜'라는 전통적 보은의 사고를 환타지 멜로 <구미호뎐>은 양날의 칼이 되는 극적인 장치로 활용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구미호는 산신의 자리를 박차고 삼도천의 '무사'가 되어 600년의 세월을 인고하며 사랑하는 이의 '환생'을 기다린다. 구미호가 '환생'을 기다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저승을 향해 가던 여인에게 자신의 여우 구슬을 주었기 때문이다. 여우 구슬을 가진 이를 찾으며 이승을 어지르는 갖은 악귀를 '처단'하는 전사 구미호가 된 것이다. 

전사가 된 구미호 곁에는 또한 전설 속 인물들이 포진되어 있다. 인간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심전심으로 이해해 준 이연의 든든한 지원군이 된 우렁각시와 토종 여우, 그리고 애증의 이복동생 이랑과 그가 구해준 러시아 여우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600년의 세월 동안 사랑으로 얽힌 환생한 인간 남지아와 그 맞은 편에 그만큼의 세월 동안 구미호의 자리를 넘본 이무기가 가장 강력한 '적'으로 등장한다. 그외에 에피소드로 민속촌에서 사또 코스프레를 하는 또 다른 산신 반달곰, 여우고개의 지박령 외눈박이 장승에, 여우구슬을 탐내는 저승지왕까지 매회 신선한 전설 속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밀고 당긴다. 구미호를 중심으로 이 캐릭터들의 향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미호뎐>은 흥미로웠다. 

 

 

인연의 결자해지 
건물주가 된 구미호 이연, 다큐 피디로 그의 앞에 나타난 환생한 연인 남지아, 방송사 사장으로 포진한 이무기의 측근, 그리고 인턴으로 등장한 이무기에 수의사 토종 여우 등등 각각 저마다의 직업을 가지고 드라마 속에서 분주히 움직이지만 결국 이들을 이끄는 것은 '인연'이자 운명이다. 그리고 그 '운명'에 순응하지만은 않은 '사랑'이다. 

매년 <전설의 고향>이 리바이벌 되고, 그 중에서도 구미호라는 캐릭터가 스터디 셀러가 되는 이유는 그 비극적 운명성에 있다. 인간의 간을 탐하면서도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이 되고 싶은 아이러니한 운명은 고전 비극의 요소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구미호뎐> 역시 그러한 비극적 운명을 그대로 가져온다. 사랑하지만 600년 전 결국 사랑하는 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인연을 저버리지 못한 채 구미호가 그녀의 환생을 기다린 이유는 바로 자신을 위해 죽어간 그녀에 대한 '보은'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전설이 가졌던 비극적 운명성은 살리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인연으로 얽힌다. 구미호와 600년의 연인 남지아가 그렇듯, 드라마 초반 '악역'으로 매번 구미호의 발목을 잡았던 이랑의 '원한'은 알고보니 600년 전 형에게 버림받았다는 '악연'의 고리를 끊지 못해서이다. 또 다른 악의 축 이무기의 사연도 알고보면 안타깝다. 흉측하게 태어난 몰골로 인하여 죽은 자들의 틈에 버려진 아기가 이무기가 되어 용이 되어 승천하고 산신이 되고 싶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원한'이 시공을 거슬러 오늘의 '악'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남지아에 이무기가 연연하는 건 그녀가 600년 전 그에게 제물로 받쳐진 여인이기 때문이다.

매번 우렁 각시의 식당에 와서 알짱거리던 탐사 보도 팀 팀장이 알고보니 이무기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신랑이라던가, 공원에서 자꾸만 이랑의 뒤를 따라오던 아이가 알고보니 전생에 이랑이 아끼던 검둥개였다는 식으로 드라마 속 모든 인물들은 전생과 이생에 이어진 다하지 못한 인연의 끈으로 묶여 있다. 

하지만 그 인연에 순응하는 대신 저마다 그 주어진 숙명을 뛰어넘고자 애쓴다. '환생'을 통해 다시 만났지만 사랑하는 이의 몸에 따라온 이무기로 인해 죽이거나, 죽임을 당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신'을 던져 사랑하는 이를 구하려는 '희생'은 숙명을 거스른 전설의 재해석이 된다.  600년 전과 달리 이연이 몸을 던져 남지아를 구하고 삼도천에 뛰어들었지만 그가 남긴 여우 구슬이 이연을 환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남의 목숨이었던 꽈리로 목숨을 연명하던 이랑이 형 이연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희생'함으로써 사랑받는 소년으로 '환생'한 것처럼 드라마는 인연의 재해석을 통해 '해피엔딩'을 맞는다. 하지만 그 전설을 비껴간 듯한 재해석은 결국 '권선징악'이라는 전통적 세계관에 따르기에 환타지 멜로는 '모던'했자만 전체적인 정서는 여전히 고전적 프레임을 유지한다. 

앞서 <도깨비>에 이어 <구미호뎐>까지 고전적 인물의 현대적 버전으로 안성맞춤인 배우 이동욱의 적절한 캐스팅에, 중 2병같은 형님앓이를 하는 반항적인 이랑의 김범, 그리고 젊은이의 모습이지만 그 서늘함은 딱 600년을 거스른 이무기에 어울렸던 이태리에, 삼도천의 수장에 그보다 더 어울릴 수 없었던 김정난 등 적절한 캐릭터 캐스팅에 전설을 환타지적으로 잘 버무려 낸 극본, 그 극본을 공들여 환타지로 되살려 낸 강신효 연출까지 모처럼 깔끔한 환타지 멜로가 반가웠다. 




by meditator 2020. 12. 4. 1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