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제임스였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렛딧이 올라갈 때 비로소 정우성의 극 중 이름이 '제임스'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게 이 영화에선 크게 중요치 않았으니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설계자의 이름이 제임스이건, 샘이건, 그가 신발 수선 가게 주인 아저씨에게 혹독하게 자신을 키웠다고 말하는 이면에 어떤 히스토리가 숨겨져 있건, 그래서 결국은 그의 목숨을 거둬들였건 그 사연이 중요치 않다. 그저 그가 설계했던 일과 그 일의 성공과 실패 사이에, 제임스라는 존재와 그 주변 인물의 사연은 그저 그림자처럼 깃들여질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존재치 않는다. 그것은 한효주가 하윤주보다, 꽃돼지로 존재하는 것이 더 당연해 보이는 감시자들의 세계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결국은 은행 털이범을 잡는 단순한 사건이지만, 설계자와 감시자라는 임무의 선이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영화적 재미가 깔끔하게 만들어지게 된다. 동료 다람쥐의 죽음으로 감시자들의 감정적 온도는 올라가지만, 피흘리는 동료를 두고 범인을 쫓아야 결국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감시자의 숙명처럼, 인간이기 이전에 '일'로써 자신을 증명해내야 하는 '현대적' 인간형을 추구한다.
'불법 사찰'
제임스를 잡기 위해 물고 물리는 감시의 포위망 속에서, 이 단어는 대사의 행간을 뚫고 몇 번이나 등장한다. 상대방이 범죄 모의와 관련된 일련의 움직임을 보일 때, 감시자들이 그들이 가진 모든 도청 수단과, cctv를 총동원해 그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것이 녹음이 되기 시작할 때, 그것을 감시자들에서는 '불법 사찰'과 그렇지 않은 정당한 '감시'의 기준선으로 잡는 듯하다.
그런데, 의 대사를 통해 번번히 여기서부터는 '불법 사찰'이 아니야! 라고 하는 그 대사는 오히려, 피노키오의 '거짓이 아니예요'라는 대사처럼, 자꾸만 영화를 보는 동안 귀에 걸린다. 그저 스쳐가는 뒷모습이었을 뿐인데, 그것을 요소요소의 cctv를 동원하여, 결국은 정면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라던가, 아파트 복도의 위장된 카메라를 통해 범죄자 주변 인물들을 샅샅이 훑는다던가, 심지어 그가 버린 쓰레기를 통해 설계자의 흔적을 찾아내는 과정은, 영화상에서는 범죄를 밝히는 도구이지만, 그 대상이 된 누구라도 감시자들의 수사망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감시'의 현실감이 다가오는 건 어쩔수 없다.
물론, 범인을 추적하는 건, 범죄 영화의 기본이다. 일찌기 탐정 소설의 원조 셜록 홈즈 이래로, 범인을 쫓는 자는 변장술에서부터 주변 사람들의 회유와 협박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범인을 밝혀냈다. 단지, 그것이 현대에 들어와서, <감시자들>이라는 영화처럼 감시 카메라와 cctv라는 첨단의 기술을 이용할 뿐이다. 그런데 건물 옥상에 서서 전지전능하게 범죄를 설계하던 제임스를 결국 지하철 기지에서 참혹하게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감시자들의 ' 능숙한 skill' 덕분에 '감시'의 마력은 더 대단해 보인다.
영화 속 감시는 오로지 범죄자를 잡기 위해서만 씌여진다.
하지만, 상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클라이막스, 동료 다람쥐를 잃은 팀원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제임스를 쫓고, 이실장이 '이제부터 모든 상황은 나에 의해 통제되고, 그 책임은 내가 진다'는 그 대사는 영화 속에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수단으로도 쓰여질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만약, 이실장이 역시나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전제 하에, 감시자들의 능력을 다른 곳에, 예를 들면 '대선 정국'의 특정 정당을 위해 쓴다면,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최근 양심 선언 등을 불러온 '국정원 댓글' 사건처럼, 국가의 공기로 쓰여져야 할 공무원의 직무가 <감시자들> 영화에서 처럼, 사건 수사나, 동료 죽음의 복수라는 인정적 요인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적 이해의 도구로 씌여진다면 그 위험성이 선거의 결과를 달리할 가능성이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지닌 수단이라는 걸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그것이 그들의 임무라는 것만 보여줄 뿐.
그런데도 영화가 진행되어 가면서 '감시'의 포위망이 좁혀들어 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살인자 제임스가 잡히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마음은 꼭 정우성의 멋진 외양으로 인한 1차적 감정의 발의만이 아닐 지도 모른다. 미로에 갇힌 쥐를 응원하는 마음처럼, 사이버 미로에 갇힌 인간의 탈출을 응원하는 막연한 호의일 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미국 정보국의 무차별 정보 수집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전직 정보 요원 에드워드 스노우든이 미국이 자국 내는 물론, 중국, 유럽 등 해외 각국에 대한 무차별적인 정보 수집에 앞장서고 있다고 밝혀 전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이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이 마치 그런 정보 수집을 불가피하다는 듯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아 문제가 더욱 심각해 지고 있는 양상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정치 평론가들은 위세를 떨치고 있는 중국의 사이버 공격에 대한 미국의 자구책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어, 이른바 사이버 공간에서 펼쳐지는 정보 대전의 상시화의 단면을 노출시키고 있다. 즉 한 국가는 물론, 전 세계적 망을 가진 '감시'의 일상화이자, 시스템화 속에 우리는 무심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감시자>들은 가장 완변할 것 같았던 설계자조차도 경찰의 특수 감시 조직의 전능함 속에서는 무력하다는 절대 명제를 완성시킨다. 그래서, 자꾸 '불법 사찰'이란 가능성이 더 걸리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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