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바다바다'하고 시작되는 Un Homme et Une Femme, 1966년 개봉된 영화 <남과 여>의 메인 테마곡이 54년만에 다시 스크린 위에 울린다. 흑백의 화면이 펼쳐지고 젊은 아누크 에메와 장 루이스 트레티냥이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한가로운 파리의 거리를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누비고, 호젓한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메임 테마곡만으로도 연상되는 영화의 장면들, 하지만 그건 요양원의 노인 장-루이의 기억 속 한 장면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노인이 된 장-루이는 그가 알았던 모든 것을 잊어간다. 한때는 스포츠카를 몰았던 레이서지만 이젠 휠체어에 의지하여 하루 종일 요양원 마당에서 햇빛을 받으며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기다린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안느', 한때 사랑했던 연인이다. 

아들인 자신마저도 기억을 못하는 아버지를 안타깝게 여기던 앙트완(앙트완 사이어 분)은 아버지가 유일한 기억 안느를 수소문하여 찾아간다. 1966년 <남과 여>는 죽은 전남편을 잊지 못했던 안느가 떠나고 그녀를 잊지 못했던 장-루이가 그 유명한 기차역 360도 포옹을 하며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2020년 다시 돌아온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은 1966년 <남과 여>의 영화 밖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었음을 밝힌다.

 

 

다시 찾은 옛사랑 
앙트완을 만난 안느,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앙트완의 부탁에 안느는 우리가 그리 좋게 헤어진 것은 아니라고 전한다. ' 어떻게 하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까'라며 고민을 하다 기차역으로 달려간 로맨틱했던 영화와 달리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결국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안느를 못견딘 장-루이가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고 다니면서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안느의 입장에서는 장-루이에 대한 기억이 좋을 수만은 없다. 

하지만 그 거리를 휘날리며 달리던 팔팔하던 레이서 장-루이가 죽음을 앞두고 기억마저 잃어간다는 처지에 안느는 연민을 느낀다. 다른 여자를 만나 자신과 헤어지게 되었는데 죽음을 앞둔 순간에 자신만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안느의 발걸음을 장-루이가 있는 요양원으로 향하게 만든다.

설레임을 가지고 장-루이 앞에 앉은 안느, 그런데 장-루이는 안느를 알아보지 못한다. 누구냐고 안느에게 물어본 장-루이는 그녀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과 많이 닮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안느에게 자신이 과거 사랑했던 '안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장-루이로부터 자신을 사랑했던 이야기를 듣는 '아이러니한 상황', 2020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의 '미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부터 발휘된다. 

자신만을 기억한다는 옛사랑, 하지만 정작 찾아가보니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옛사랑 앞에서 이제 자신조차도 나이가 들어 걸음걸이가 편안치 않은 안느는 돌아서지 않는다. 대신 장-루이의 맞은 편에 앉아 그의 늦은 사랑 고백을 듣는다.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를 찾았던 그가, 그랬던 이유가 여전히 자신이 벗어나지 못했던 전 남편이었음을, 그럼에도 이제 아들조차도 기억을 못하는 죽음을 앞둔 순간에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바로 자신이라는 장-루이의 '고해성사'를 안느는 편안한 미소를 띠고 들어준다. 

 

   

 

여전히 찬란한 
54년만에 다시 돌아온 <남과여>의 부제는 '여전히 찬란한'이다. 왜 여전히 찬란할까? 거기엔 '여전히 찬란한' 노년이 있기 때문이다. 

장-루이는 기억을 잃어간다. 사라져가는 뇌세포만큼 그에게 남은 날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 그가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건 '추억'이다. 1966년작 영화의 장면 장면이 그의 기억으로 되살아 난다. 자신을 찾아온 '안느'에게 요양원 탈출을 제안하는 장-루이, 잠시 후 그와 그녀는 그 예전처럼 차를 타고 거리를 달리고, 바다를 향한다. 자신들을 가로막는 경찰에게 총을 쏘아가며, 혹은 총으로 위협하며, 그리고 깨어나면 여전히 요양원 마당이다. 

요양원 마당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장-루이의 웃픈 상황, 하지만 그런 장-루이에게 '안느'만큼이나 연민의 시선이 간다. 인생의 종착역, 과연 그 시간은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육신의 고통과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살아가는 나날들의 무기력으로 힘들어 한다. 하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시간이지만 장-루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으로 충만하다. 심지어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 앞에 앉아있지만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하면서도. 자신의 삶에서 가장 뜨거웠던 순간의 기억으로 충만한 노인, 장-루이, 어쩌면 기억을 잃어가고 스스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복찾기'가 아닐까. 그 무엇도 맘대로 할 수 없지만, 자신의 '추억'은 그 마저도 잃어버리는 순간까지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니까. 안도현의 시 한 구절, '당신은 누구에게 얼마나 뜨거운 사람이었는가'가 떠올려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그라드는 그 순간에서도 여전히 '사랑'으로 충만한 그를 지켜봐주는 옛 연인 '안느'가 있다. 눈 앞의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으로 알아봐주지 못함에도 여전히 그를 찾아가, 매번 '사랑하는 여인과 참 닮았다'라는 말에 미소로 응답하며 그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들어주는 '안느'에게선 비로소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의 품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너그러운 안느의 아량은 이제 안느에게 씁쓸했던 지난 날의 기억을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으로 다시 채색할 것이다. 

한때 바닷가를 함께 누비던 장-루이와 안느, 하지만 이제 그 바닷가에는 그들을 만나게 해주었던 사립학교를 다니던 자녀 앙트완과 프랑스와즈가 서있다. 어렸던 앙트완과 프랑스와즈가 중년의 사랑을 나누게 될 만큼의 시간, 그 시간이 흘러 장-루이와 안느는 조우한다. 안느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뒤늦은 시간,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예전의 사랑으로 '연결'되고 오랫동안 풀렸던 인연의 끈을 다시 묶는다. 

사랑의 유효 기간은 얼마나 될까? 이런 '우문'에 과학은 3년이라던가 하는 '정답'을 내어놓는다. 하지만 그런 '과학'의 증거마저도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에서는 무기력하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죽어가는 순간에조차 가장 '충만한 기억'인 사랑에 대해 과학으로서는 더할 답이 없을 듯하다. 그리고 그 '충만한 기억'을 가진  것만으로도 인생은 참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닌가, 오후의 볕 아래에 앉아 '옛 사랑'의 추억을 나누는 두 '노인'들을 보며 다시 한번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by meditator 2020. 10. 21. 02:14

넷플릭스 영화 <에놀라 홈즈>는 낸시 스프링어의 청소년 소설 <사라진 후작>을 영화화 한 작품이다. 낸시 스프링어는 스테디 셀러인 <셜록 홈즈>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면? 이라는 질문으로 소설을 연다. 여전히 다른 버전으로 각색되어 21세기에도 회자되는 명탐정 셜록 홈즈, 그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면, 그녀도 셜록처럼 '탐정'의 능력을 지녔을까?

셜록 홈즈의 21세기 버전 <셜록>에서 이미 여동생으로 유로스가 등장한 바 있다. 셜록만큼의 '지적 능력'을 가졌으면서, 또한 셜록보다 더 '사이코패스'적인 유로스의 등장은 그 자체로 극적 긴장감을 자아냈다. 그렇다면 원작인 빅토리아 시대에 등장한 셜록의 동생은 어떤 모습일까? 

 

 

셜록의 동생, 홀로 엄마를 찾아 떠나다 
에놀라(밀리 바비 브라운 분)는  '학자며, 화학자이자,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사격의 명수, 검술사, 권투선수, 명석한 연역적 사상가'로 자신의 오빠 셜록(헨리 카빌 분)을 소개한다. 그런 오빠의 동생 에놀라는 어떨까?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고, 산수도 잘 하'며, '새 둥지도 찾을 수 있고, 지렁이도 파낼 수 있고, 고기도 잡을 수 있고, 자전거도 탈 수'있다고 영화의 초반 자신을 소개한다. 

그런데 이런 에놀라의 정체성은 에놀라가 살던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의 정체성에 '위배'된다. 여왕 빅토리아가 지배하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하지만 '신사'라는 남성들이 사회적 주도권을 가지고 발빠르게 세상을 '점령'하던 시절에, 여성들은 영화 속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두 오빠가 에놀라를 보고 질색을 하듯,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후견인을 자처한 큰 오빠가 에놀라를 '기숙학교'에 보내 강제적인 교육을 시키려고 하듯 '남편의 정숙한 아내'로서 존재가 여성의 '전부'라 인식되던 시절이다. 

대나무 광주리같은 걸로 엉덩이를 부풀이고 물고기 뼈로 만든 갑옷같은 보정물로 허리를 잔뜩 조인 옷을 입고, 정숙하게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배우고 바느질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 시절의 여성들에게 요구되던 것들, 그걸 에놀라는 하나도 배우지 않은 대신, 읽고 쓰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누구에게서? 바로 에놀라의 엄마 유도리아에게서이다. 

엄마는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에놀라에게 낱말 맞추기를,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호신술을 가르쳤다. 일찌기 집을 떠난 두 오빠들, 엄마와 홀로 남은 에놀라는 엄마 유도리아를 통해 당시의 여성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정신적 보호자이자, 유일한 스승이었던 어머니가 에놀라가 16살 되던 생일에 사라졌다. 돌아온 오빠들은 엄마를 찾는 한편, 그들이 보기에 천방지축인 에놀라를 '기숙학교'로 보내려 한다. 하지만 에놀라는 오빠들의 그런 결정과 달리 '스스로'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난다. 에놀라의 이름 에놀라를 거꾸로 하면 'alone', '홀로' 남겨진 소녀 에놀라는 '홀로' 엄마를 찾는 여정을 떠나게 된 것이다. 

 

 

사라진 엄마, 사라진 후작
영화는 원작의 제목처럼 <사라진 후작>, 에놀라가 기차에서 만난 소년 튜크스베리 자작이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후작의 지위까지 이어받은 '소년'의 실종 사건과 에놀라의 엄마 찾기가 엇물리며 셜록 홈즈의 원작보다 더 '시대적 배경'이 생생한 한 편의 추리극으로 탄생되었다. 

영화의 배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극중에서도 등장하는 참정권 운동이다. 영화에서 에놀라가 읽었다던 울스턴크래프트의 책, 1792년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의 책 <여성의 권리 옹호>를 통해 여성의 인권과 운동을 주장했고, 이 책이 여성 참정권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오늘날 너무도 당연한 남녀를 막론한 '한 표의 행사', 하지만 참정권 운동의 역사는 그 자체 '여성 해방 운동'의 지난한 투쟁의 역사가 된다. 1865년 런던에서 여성 참정권 위원회가 결성되었지만 1967년 제출된 선거법 수정안은 부결되었다. 하지만 이 부결은 외려 전국 각지에서 참정권 위원회를 발족시키게 된다. 

왜 같은 '인간'임에도 여성들의 권리는 외면당했을까? 대부분 가정에 머물렀던 여성들은 '납세'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여겨졌으며, 심지어 남편에게 아내의 재산을 통제할 권리마저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기에 번번히 여성들의 주장은 의회에서 거부되었다. 자신들의 권리가 거부되자 여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개진하려 했다. 영화 속 에놀라가 찾아간 창고 속에서 등장한 '다이너마이트' 등이 그런 여성들의 '간절하고도 적극적'인 움직임을 단편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나 뿐인 딸 에놀라에게 당대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모습 대신 당당하고 주체적인 교육을 시켰던 어머니 유도리아, 그런 어머니가 에놀라마저 들어오지 못하게 한 채 늦은 밤 회합을 가졌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 에놀라를 홀로 놔둔 채 집을 떠났다. 후에 만난 어머니는 외려 그게 사랑하는 딸을 지키려는 어머니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토로한다. 

딸을 홀로 놔둔 채 실종이라는 극단적 설정, 하지만 이를 여성 참정권 운동이 격화되어가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사랑하는 딸을 놔둔 채 집을 떠나야 했던 어머니의 '결단'으로,  어머니가 '사회적 운동'의 일원이 되어  운명적인 선택을 했음을 드러내며 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펼쳐진다.

그리고 이런 엄마의 선택은 영화 속에서 에놀라가 '정의감'으로 개입한 후작의 실종 사건이 그 실체가 드러나며 서로 다른 길로 달렸던 열차의 궤도가 하나로 만나듯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진다. 의회에서 통과되어야 할 '참정권 법안',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작이 되어 상원에서 한 표를 행사하게 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역시나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던 튜크스베리가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보수적'인 입장의 그 누군가, 그리고 '참정권'운동을 위해 집을 떠나야했던 엄마의 실종 사건이 '에놀라'라는 이제 막 세상에 자신을 던진 '소녀 탐정'을 통해 '하나의 사건'으로 '해결'되게 된 것이다. 

처음 기차에서 해프닝처럼 조우한 에놀라와 튜크스베리, 기존 남녀의 역할을 전복적으로 '해석'한  해결사 여주인공, 연약한 남성 캐릭터의 로맨틱 코미디버전인가 싶었던 영화는, 여전히 에놀라의 전복적 캐릭터의 강점을 발산시키면서도 남주인공의 '반전' 매력을 통해 사건 해결의 열쇠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여주인공이 '연애 감정'이 아니라, '정의감'으로 사건에 뛰어들게 되는 상황은 영화가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의 흐름에 걸맞고, 어딘선가 셜록이 튀어나올 것같은 국면에서조차, 아니 심지어 셜록보다 한 발 빠르게 '홀로' 사건을 파헤치고, 해결해 나가는 상황은 그 자체로 새로운 여성 히어로의 탄생을 알린다. 

 

 

결국 에놀라는 그 도전적인 탐정 데뷔전을 통해 튜크스베리 후작 실종 사건을 해결함은 물론, 사라질 뻔한 튜크스베리가 당당하게 의회에 입성하여 한 표를 행사하게 함으로써  엄마로 하여금 사랑하는 딸마저 두고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참정권 운동의 '물꼬'를 틔어준다. 자전거도 잘 탈 수 있다 말하던 시골 소녀 에놀라는 사라진 후작 사건을 통해 이제 당당하게 '런던'에서 탐정으로 자신의 삶을 연다. 처음 드러났을 때 무관해 보이던 두 명의 실종이 결국 '참정권 운동'이라는 물결 속에서 선택한 '주체적인 선택'의 결과였음을 보이며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가던 '진보적인 인물'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2018년작 다큐 <우먼 인 할리우드>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여배우를 비롯한 주요 여성 96명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 다큐는 '원더 우먼'이 등장하고, tv 수사 시리즈에서 여성 법의관이 등장하며, 그걸 보고 자란 여성들의 선택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에놀라가 탐정 에놀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딸을 홀로 남겨두고 여성 참정권 운동을 위해 집을 떠날 수 있었던, 아니 딸을 홀로 남겨두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탐정으로 자신의 몫을 해낼 수 있도록 주체적인 여성으로 키워낸 '유도리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엄마가 있었기에, 주체적으로 성장한 딸이 '참정권' 운동의 물꼬를 틔어주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영어덜트물로서 '에놀라 홈즈'를 보고 자란 이 시대의 영어덜트 누군가에는 '탐정'은 고전의 '셜록'이 아닌 '에놀라'로 기억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된 탐정 에놀라는 그 미래의 선택지를 또 다르게 열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by meditator 2020. 10. 13. 15:44

추석이 지났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일환으로 가급적이면 고향 방문을 자제하라는 정부의 권고와 상관없이 가족들이 몇날 며칠을 함께 어우러져야 하는 명절은 언제나 주부의 입장에서는 고달픈 시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어디 안가고 집에만 있었는데, 명절이 지나고 나서 서로 만나 하는 인사치레에 꼭 '살'이 들어간다. 겨우 며칠 새에 살이 쪘다더라는 식이다. 왜 주부들은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살이 찔까? 그 이유를 '사랑스럽게' 풀어낸 단편 영화 <내 아내가 살이 쪘다> 가 10월 2일 유투브를 통해 공개됐다. 

<내 아내가 살이 쪘다>는 12분 분량의 단편 영화이다. 그리고 이 단편 영화는 우리에게는 배우 류덕환으로 더 친숙한 감독 류덕환의 연출작이다. 낯선 감독 류덕환, 하지만 이미 류덕환 감독은 2012년 <장준환을 기다리며>, 2015년 <비공식 개강 총회> 등을 연출한 바 있다. 

 

 

자꾸만 먹는 엄마 
영화는 체중계에 올라 늘어난 자신의 몸무게를 확인하고 비명을 지르는 아내(장영남 분)로 시작된다. 목욕탕에서 잰 몸무게와 다르다며 늘어난 몸무게를 잘못된 체중계 탓으로 돌린 아내, 그도 잠시 밥 먹자며 부엌으로 향한다. 

식구들의 저녁을 준비하는 중, 아내는 칼질을 하다 연신 입으로 무언가를 넣는다. 거기서 끝일까? 찌개를 끓이던 아내는 맛을 본다며, 찌개 국물이며, 건더기를 먹어댄다. 간이 안맞아서 물을 더 부으니, 다시 또 간을 봐야 한다. 이미 찌개가 상에 올라가기 전에 엄마의 배가 찰 정도로. 거기서 끝일까? 

온가족이 함께 한 외식에서 남은 등갈비를 알뜰하게 싸가지고 온 아내, 다시 덥혀서 식구들에게 권한다. 하지만 '집에서 먹으면 맛이 없다'는 둥, '시간이 없다'며 식구들은 내빼기 바쁘고, 결국 그 '남은'것들은 그걸 남길 수 없는 아내의 입으로 들어간다. 

어느 집안에서도 너무나 익숙한 상황, 그 상황에 류덕환 감독은 '아내의 살'에 대한 개연성을 섬세하게 포착해 낸다. 여기까지만 봐도 아내가 살이 안찌는게 이상하다. 집집마다 한 입 더 먹으라는 엄마와, 먹기 싫다는 식구들, 버리는 게 아깝다는 엄마와 그냥 버리라는 식구들의 실랑이야 너무도 익숙한 구도이니까. 심지어 영화 속 엄마는 강아지가 저지레한 초콜릿 수거까지 엄마의 입으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 류덕환 감독은 주부 '살'의 개연성에 한 술을 더 보탠다. 거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가족, 과자 봉지를 쥔 막내가 장난을 치다 과자를 온 바닥에 쏟아버린다. 빨래를 개던 엄마는 아연실색 장난을 친 막내를 야단치지만 결국 애정어린 포옹으로 마무리된다. 화해의 기념으로 엄마에게 과자 하나를 건네는 막내, 하지만 엄마는 '엄마 살쪄'라며 거절하자, 재치넘치게도 막내는 과자 끄트머리를 조금 잘라 엄마의 입에 넣어준다. 

과자를 먹어본 사람은 아마도 알 터이다. 그 손톱만한 조각이 입에 들어와 녹는 순간의 달콤함이 주는 유혹을, 결국 그 유혹에 넘어간 엄마는 '이거 맛있는데 더 주지'라며 바닥에 떨어진 과자를 입에 넣는다. 

 

 

엄마의 살은 사랑이다 
류덕환 감독이 <내 아내가 살이 쪘다>를 통해 '정의'내린 엄마의 '살'은 '사랑'이다. 식구들을 위해 애써 음식을 준비하고, 하나라도 더 먹이려는 과정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입에 넣는 것들이 결국 엄마의 살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추석과 같은 명절을 지내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몸무게의 뒷자리가 달라지는 '비밀'이다. 

엄마는 연신 살이 찐다고 되놰이지만 음식으로부터의 '거리 두기'가 되지 않는다. 늘 엄마의 주변을 둘러싼 음식들, 그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류덕환 감독은 '주부의 살'에 대해 애정어린 고찰을 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을까? 감독이 선택한 해답 역시 '사랑'이다. 영화는 줄곧 남편(김태훈 분)의 시선으로 엄마를 지켜본다. 그간 많은 드라마에서 '서늘한 캐릭터'를 연기해 온 아빠 김태훈, 하지만 <내 아내가 살이 쪘다> 속 아빠는 다르다. 살이 쪘다며 혼비백산하는 아내에게 그대론데 라고 하는 남편, 그리고 음식을 하다 집어먹고, 남긴 음식을 아깝다며 먹고, 심지어 개가 저지레한 음식까지 먹는 아내를 줄곧 애정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던 남편은 결심한다. '안되겠다! 나도 노력해야겠다'

 

 

남편의 노력은 무엇이었을까? 찌개를 끓이다 간을 보려는 아내 대신 남편이 뛰어가 간을 본다. 엄마가 차려놓은 음식을 안먹고 내빼는 아이들을 불러모아, 너네가 안먹으면 엄마가 먹게 된다며 먹인다. 아들이 엄마 입에 넣어주는 과자를 대신 먹기 위해 아빠는 슬라이딩을 한다. 그 결과? '아빠가 살이쪘다'

영화는 우리네 생활 속 '주부의 살'이라는 사소한 사건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따라간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그냥 '살'에 대한 보고서가 될 뻔한 영화는 아빠가 살이 쪘다라는 반전 아닌 반전을 통해, '주부'라는 짐에 대한 '혜안'을 제시한다. 영화는 엄마가 살이 찔 음식을 나눠먹는 아빠이지만, 결국 그 속에 담긴 건, 주부라는 역할을 나누어 짊어짐이다. 

아무리 주부의 역할을 덜어낸다 해도 각자 저마다의 생활이 뚜렷해져가는 상황 속에서 그 역할의 나눔이라는게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아내가 살이 쪘다> 속 아내를 대신해서 기꺼이 살이 찔 각오가 될 남편의 자세라면 주부의 짐도 조금은 덜어지지 않을까?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나누어지는 '살'이 아니라, '짐'이다. 

by meditator 2020. 10. 7. 17:44

지난 2010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획기적인 영화 한 편을 들고 등장했다. 올해 8월 재개봉한 <인셉션>이다. 누군가의 꿈에 잠입하여 꿈꾸는 자의 무의식에 정보를 심고, 그를 통해 현실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우리에게 돌아가는 '팽이'로 상징되는 '토템'과, 꿈의 상황을 상징하는 엿가락처럼 휜 도시의 영상으로 기억된다. 프로이트를 통해  현실 세계에 문을 두드린 '무의식'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 의해 영화적 상상력의 신선한 영역으로 그 지평을 넓혔다. 

이렇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과학적 성과'를 영화적 서사의 주요한 장치로 활용하는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인셉션>에 이어 2014년 170분이라는 긴 런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우주 과학'의 붐을 일으킨 <인터스텔라>에서 우주 비행사 쿠퍼는 환경 오염으로 인해 멸망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 위하여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 답을 구한다. 

그리고 이제 2020년 과연 이번에는 어떤 '과학적 성취'를 들고 올 것인가 하는 기대에 걸맞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테넷>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과연 내가 본 것이 무엇인가 하며 관객들을 '아노미' 상태로 빠뜨릴 정도로 '엔트로피'를 비롯하여, 평행 우주 등등 최신 과학 이론들이 진수성찬을 이룬다. 

하지만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과한 이론적 나열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당부는 명쾌하다.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 과연 무엇을 느끼라는 것일까? 여기서 뜬금없지만 오랫동안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는 영국 SF시리즈 <닥터 후>가 떠오른다. 닥터 후는 이제는 사라진 미지의 별에서 온 외계인이다.

겉보기에 전화박스로 보이는 우주선을 타고 외계와 지구,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 드라마에서는 <테넷>이 무색할 정도로 다양한 과학적 이론들이 등장한다. 평행 우주 정도는 당연할 정도로. 하지만 그런 SF적 장치를 관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살던 외계의 멸망을 지켜본 닥터 후가 지구에서 벌어진 갖가지 사건에 개입하며 지구의 불행을 막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먼저다'
마찬가지로 <테넷> 역시 전체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건 영화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종횡무진 활약기다.  첫 장면 무려 4300 명의 엑스트라가 등장했다는 엄청난 규모의 오페라 극장에서 주인공은 CIA 일원으로 잠입하여 암살당할 뻔한 요인을 구출하고, 214라고 칭해지는 '무기(?)'를 빼돌리는 작전에 투입된다. 

오페라 극장을 꽉 채운 관객들이 최면 가스에 모두가 잠이 든 상태에서 곳곳에 시한폭탄이 놓여진 상황, 이미 자신들의 임무가 완수되었기에 굳이 그 상황에 개입할 필요가 없음에도 주인공은 홀로 남아 사람들을 구하고자 분투한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결국 적에게 체포된 상황에서 동료들과 작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던가. 당연히 죽을 줄 알았던 주인공은 '의문의 단체'에 구출되어 미래에서 온 미지의 적으로부터 3차 대전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는 작전에 투입된다.

이런 주인공의 '휴머니즘'이 <테넷>을 이끌어 가는 근간이다. 눈이 휙휙 돌아가는 액션과 그보다 더 현란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인버전'의 장치들 사이를 오가며 작전을 수행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전'의 결정적 순간에 '사람'이 있다. 그것이 때로는 오페라의 관객들이요, 아들을 지키려는 여주인공인가가 다를 뿐이다. 

그렇게 '사람'을 중심에 둔 주인공의 활약, 거기에 또 하나 '방점'을 찍어야 하는 것은 '자기 주체성'이다. 영화 속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되풀이 하여 말한다. 내가 상황을 주도하겠다고. 어쩌면 <테넷>에서 가장 결정적 '스포'가 될 대사는 '인버전'도 '엔트로피'도, '프리패스'도, '알고리즘'도 아니라, 바로 매번 주인공이 말한 '상황을 주도하겠다'는 말이다. 그의 '주도성'은 결과적으로 영화 <테넷>을 가능토록 만든 '동인'이다. 그 동인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지구를 멸망에 이른 '적'들에 대항하여 지구를 지켜낸다. 바로 이런 주인공의 사명감이야말로 '교리'라는 의미를 지닌 '테넷'으로 이어진다. 작전이 아니라 사명감, 모험이 아니라 인류애가 결국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느껴달라는 '요점'이 아니었을까. 

바로 그런 주인공의 휴머니즘적 주체성의 맞은 편에 지구 멸망의 키를 움켜 쥔 케네스 브래너가 분한 사토르가 있다. 사토르 마방진 첫 줄의 단어, 사토르는 러시아로부터 버려진 땅에서 플루토늄을 채취하며 살아남아 불법 무기 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한 인물이지만, 그런 자신의 부를 지구 멸망의 군불로 삼는다. 자신이 없으면 세상도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는 세상의 운명을 그 자신의 '맥박'에 맡긴다. 

자신이 없어도 인류는 세상은 존재해야 한다는, 환경 오염 등 많은 오류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주인공과 내가 없으면 다 소용없다는 사토르, 두 가치관은 사토르를 매개로 하여 지구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미래의 적'이 한 도발을 통해 '현재'에서 충돌한다. 사토르 마방진의 대각선 글자인 '테넷(TENET)'은 글자에서 보여지듯 앞과 뒤가 같다. 그리고 이는 '시간'을 매개로 마주한 과거와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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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버전'된 시간 속에서 
그런데 여기서 조우하게 된 과거와 현재는 이전에 우리가 알던 시간 여행의 의미와 다르다. 시간 여행이 시간의 순차적 흐름을 뛰어넘거나 역행하는 과정이라면, '인버전'이라는 장치를 통한 <테넷> 속 시간의 흐름은 거꾸로 주행하는 자동차, 쥐는 것이 아니라 놓아야 손으로 튀어 오는 총알처럼 시간이 거꾸로 흐르되 그것이 현재에서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원리를 통해  미래의 세력은 '현재'에 개입하게 되고, 그로 인해 <테넷> 속 지구의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할아버지의 역설'이다.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로 가서 할아버지를 죽인다면, 그 할아버지의 손자는 미래에 '존재'할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할아버지가 사라진다면 당연히 손자도 존재하지 않지만, <테넷>은 거기에 평행 우주론을 등장시키며 '엔트로피'의 법칙을 거슬러 그 '역설'에 변수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변수'가 결국 오페라 극장 이후 오슬로, 에스토니아, 그리고 최후의 결전지가 되는 러시아 사토르의 폐허가 된 고향 마을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는 '인버전'된 인물과 현재 인물들의 교차된 행보을 통해 관객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3차원의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원인과 결과, 하지만 영화는 <인셉션>처럼, 하지만 다른 '과학적' 성취에 기반하여 그런 '사고'의 패턴에 이의를 제기하며 미래와 현재를 연결한다. '일어날 일'의 시작은 현재일까? 미래일까? 뒤엉킨 '시간'의 세계에서 주인공은 그럼에도 주도적으로 '삶의 선의'를 향해 자신을 내던진다. 그리고 그런 '선의'의 끝에서 <테넷>을 만나게 된다. 

by meditator 2020. 8. 30. 15:32

욕창은 스스로 운신이 쉽지 않은 환자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오래도록 고정된 상태에 있을 때 살이 무르기 시작하여 급기야 썩어들어가게 되는 질병이다. 7월 2일 개봉하는 영화 <욕창>은 70대 퇴직 공무원 강창식(김종구 분)의 아내 나길순(전국향 분)이  뇌출혈로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해 욕창이 생기며 벌어지는 난감한 상황을 다룬다. 하지만 영화는 그리고자 하는 건 그저 '보이는 상처'만이 아니다. 

외려 영화 속 '욕창'은 상징적이다. 영화 속에서 '오래도록 고정된 상태'에 놓인 건 그저 나길순의 움직일 수 없는 몸만이 아니다. 70 평생을 '가부장'으로 군림해 온 아버지, 여전히 지금도 아버지의 200만원이 넘는 연금과 그의 집이라는 경제적 영향력 아래 놓인 가족들의 부조리한 모습을 어머니 나길순의 욕창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욕창으로 드러난 가족
낡았지만 오래된 성곽과 같은 김종구 씨의 집, 그곳에 김종구 씨와 뇌출혈로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내 나길순 씨가 산다. 아니, 그들 부부와 함께 나길순 씨를 '전담 간병'하는 재중동포 유수옥(강애심 분)씨가 산다. 

간병인이라지만 이젠 집안 살림까지 책임지는 강애심 씨, 그녀가 마련한 밥상에 세 사람의 식사할 저녁이 준비되면 김종구 씨는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든다. 일반적으로 가족이 함께 하는 밥상의 모습은 어떨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식구를 기다리고 모든 식구가 앉으면 그때 비로소 함께 수저를 들지 않을까? 하지만 김종구 씨는 강애심 씨가 뒤늦게 아내를 데리고 와서 밥을 먹이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단편적인 식사의 한 장면이야말로 이 집안에서 김종구 씨가 누리는 권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아내인 나길순 씨의 식사와 집안 일 모두를 책임지는 강애심 씨, 그녀의 바지런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투병을 해온 나길순 씨의 몸에 '욕창'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리저리 강애심 씨가 환자의 위치를 자주 바꿔도 보고 약도 발라보지만 상처는 쉬이 낫지 않는다. 

그러자 김종구 씨는 딸인 지수(김도영 분)에게 연락을 한다. 그에게는 세 명의 자식이 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지는 딸에게 연락을 한다. 아버지의 성에 차지 않아 매사에 반목하는 큰 아들, 멀리 떨어져 립서비스만 능한 둘째 아들과 달리, 딸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와 상관없이 집으로 달려가 '해결사'가 되곤 한다. 

점점 심해져 가는 어머니의 욕창, 방문 간호사가 오고 강애심의 노력으로 잣아드는가 싶은 욕창에 변주를 일으키는 건 간병인 강애심이다. 어느덧 '안주인'의 자리가 익숙해져가는 강애심의 '위치', 어머니를 위해 사온 과일도, 어머니의 옷장 속 머플러도 그 모든 것들이 자연스레 강애심의 것들이 되어가는 상황이지만 몸조차 움직일 수 없는 나길순 씨도, 그걸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딸인 지수도 전담 간병인을 쉽게 구할 수 없는 상황에 이렇다할 토를 달기 어렵다. 

강애심이 미묘하게 경계를 오가는 상황에서 기름을 불어넣은 건 하지만 결국 강창식의 욕망이다. 어느덧 누워있는 아내를 제쳐두고 그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강창식은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의 불안정성으로 다른 선택을 하고자 하는 그녀에 대해 '무리한 결정'을 도모한다. 하지만 이는 숨겨져 있던 가족의 깊은 갈등을 건드리며 파국의 끈을 당긴다. 

피해자 여성들 
영화의 시작은 어머니 나길순의 오랜 투병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어머니로 인해 재중동포 전담 간병인이 함께 살고, 그런 상황을 딸인 지수가 뒷치닥거리를 하는 상황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욕창이 깊어지고, 거기에 아버지의 욕망이 드러나며 보여지는 이 모순적인 관계는 그 정점에 아픈 어머니가 아니라 가부장으로서의 자신의 불편이나 불리함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거기에 더 나아가 자신의 욕망마저 편승하고자 하는 집요하고도 파렴치한 가부장의 권세가 있다. 

그리고 결국 그런 '구조'에서 여성들은 피해자가 되고 만다. 욕창으로 점점 더 살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어머니는 좀 더 나은 '케어'를 받을 수 있는 '조건' 대신 아버지의 편의를 위해 집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딸인 지수는 언제나 1분 대기조처럼 달려오곤 한다. 그녀 자신이 정신적 안정을 얻을 수 없는 가정에서 말조차 못하는 어머니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 그리고 그 손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손으로 어머니가 잡아주는 장면은 모녀의 '난감한' 처지를 비감하게 드러내 보인다. 반면 아들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핑계로 이 '책임'에서 자신들을 방기한다. 

강애심이라고 다를까. 아픈 남편, 무능한 아들을 대신하여 손주를 키우기 위해 이곳까지 온 그녀는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헐거워보이는 '사기'의 그물에 취약하고, 강창식 씨의 욕망 앞에 역부족이다. 딸기 한 알의 시큼한 맛이, 나길순 씨 옷장의 오래된 머플러 한 자락으로 달래지기엔 기구한 운명이다. 

부모님 세대가 노인이 되어가면서 불가피하게 맞이하게 되는 <욕창>의 상황들, 하지만 그 상황의 전개는 각 가정이 저마다 '역사'로서 지녀왔던 모순적 가족 관계를 답습한다. 겉으로 보기엔 아픈 환자의 문제이지만 결국 그 속에서 곪아들어가고 있는 건 해묵은 가족의 지체된 역사다. 

by meditator 2020. 7. 1. 19:54

'덕질'이란 단어가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생소한 단어가 아니다. 일본의 '오타쿠'란 단어가 우리 나라로 오면서 등장한 '오덕후'는 이제 집안에 틀어박혀 자신의 취미 생활을 탐닉하는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이란 협소한 의미에서 탈피,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전문가 이상으로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임하는 일군의 사람들을 뜻한다. 바로 그 '덕후'들이 열정적으로 임하는 일인 '덕질'은 최근 '트롯 열풍'에서도 드러나듯이 이젠 연령과 직업을 막론하고 전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바로 그런 '덕질'을 하는 사람들의 '로망'이라 하면 다름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과 함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바로 그 좋아하는 사람과 일을 하게 된 여성이 있다. 바로 <나의 첫 번 째 슈퍼스타>의 3년차 매니저 매기(타코타 존슨 분)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공연을 하고 돌아오는 그레이스(트레시 앨리스 로스 분)를 맞이하는 매니저 매기, 그녀가 먹고싶은 음식과 그녀가 원하는 옷을 그녀 자신보다도 더 잘 알아서 챙겨주는 이 막내 매니저의 꿈이 '매니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때는 기자로 그레이스를 인터뷰하기도 했던 지방 음악 방송 DJ인 아버지를 둔 매기, 이제는 세상을 떠났지만 어머니가 좋아하던 그레이스의 음악을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랐던 그녀의 꿈은 자신이 슈퍼스타 그레이스의 음악 프로듀서가 되는 것이다. 그레이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케어하고 돌아온 늦은 밤 그녀의 히트곡 'Bad girl'의 보다 나은 버전을 위해 한 음, 한 음 놓칠세라 다시 작업해 보며 시간을 보내는 매기, 하지만 다음 날 다시 그녀가 할 일은 그레이스의 음료수를 챙기는 것이다. 

하지만 매기의 소망 자체가 어쩌면 이미 때가 늦은 일일 수도 있다. 슈퍼 스타 그레이스, 하지만 그녀를 슈퍼스타로 만들어준 히트곡은 10년 전 발표된 것이다. 여전히 공연마다 성황을 이루고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에 몸을 흔들며 흥겨워하지만, 이제 그녀의 오랜 매니저는 그녀에게 이곳저곳 투어를 다니는 대신 노년의 가수들이 안정적으로 무대에 서는 라스베가스 공연을 추천한다. 한때는 오프라윈프리 쇼에 나가 자신의 팬들에게 늘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곡을 쓰지만, 그의 오랜 매니저도, 그녀와 함께 해온 음반사도 그녀에게 주문하는 건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기존 곡의 리믹스 버전이라는 '안정적'인 기획 뿐이다. 

프로듀서가 되고 싶은 매기의 동상이몽 
매기와 그레이스의 동상이몽, 그 아슬아슬한 동행의 이면은 매기의 도발로 드러나게 된다. 최신 유행하는 힙합 버전으로 그레이스의 히트곡을 리믹스하겠다는 오랜 매니저의 기획에 매기는 정면으로 반기를 들며 그레이스의 음색을 한껏 살려낸 자신의 프로듀싱 버전을 선보인다. 하지만 돌아온 건 내 밥상에 숟가락 얻을 생각 말라는 오랜 매니저의 따끔한 경고, 그레이스 역시 매니저의 손을 들어준다.

덕업 일치에 실패했을 때 어떤 대안이 있을까? 매기가 선택한 건 이미 슈퍼스타가 된 그레이스 대신, 마켓 앞에서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던 '신인' 데이비드(켈빈 해리스 주니어 분)였다. 물건을 사는 매기에게 호의를 보이며 접근하던 데이비드, 처음엔 외면했지만 음악적으로 많은 것이 자연스레 통한 데이비드에게 호의가 느껴졌던 매기는 어수선한 마케의 광장에서도 호소력있게 다가오는 그의 음색에 끌려 그에게 다가선다. 

 

 

그런데 자신이 겨우 음료수나 나르는 매니저라고 하면 데이비드에게 프로듀서로서 '가오'가 떨어질 것을 우려했던 매기는 그녀가 생각하기에 약간의 '트릭'을 쓴다. 그리고 시작된 매기의 투잡 생활, 안그래도 24시간이 빠듯한 그레이스이 매니저 역할에, 짬짬이 데이비드의 프로듀서 일까지 하며 데이비드의 음악을 완성해 간다. 

위기와 기회는 동시에 다가온다. 흔히 음악 영화에서 벌어지는 '결정적 순간'이 매기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레이스의 새 리믹스 앨범 발표 파티, 오프닝을 열어줄 가수의 섭외가 쉽지 않던 차, 매기는 그 기회를 자신의 가수 데이비드에게 맡기고자 한다. 오프닝에 서겠다는 유명 가수를 설득하면서 까지 얻은 기회, 일반적인 영화의 클리셰에 따르면 데이비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매기에게 프로듀서로서의 '성공'을 안겨주겠지만 영화는 그 반대의 결과를 매기에게 안겨준다. 

자신의 가수도 잃고, 매니저로서의 직장도 잃은 채 아버지의 집에 칩거하는 매기, 그리고 그녀를 찾아온 그레이스와 데이비드, 그 뜻밖의 만남은 생각지도 않은 반전의 관계를 드러내며 영화는 매기가 프로듀서한 데이비드, 그리고 그레이스의 화려한 무대로 마무리된다. 비록 매기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해프닝같은 무모한 도전이 실패로 끝났지만 음료수와 의상을 들고 고군분투하던 3년간 매니저 생활이 보여준 성실성과, 모두가 '안정'을 요구했을 때도 가수로서의 그레이스에 대한 '덕후' 매기의 열정이 결국 그레이스와 데이비드를 설득해 낸 것이다. 

다코타 존슨의 아름다움이 영화 속 그녀가 분한 프로듀서로서의 열정을 쬐금 더 앞지른 영화, 그리고 좀 더 감동적인 음악적 성장 영화가 될 수 있음에도 어쩐히 한 스푼의 양념이 아쉬운 듯한 영화였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매기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꿈을 놓지 않은 채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거기에 어수선한 마켓에서 울려퍼지던 데이비드의 소울 충만하던 목소리, 무대를 휘어잡는 그레이스의 음색은 보는 걸 넘어 듣는 만족을 충족시킨다. 또한 한 음, 한 음, 그리고 세션의 조화에 고민하는 매기를 통해 <비긴 어게인>에 이어 뮤지션의 음악을 완성시키는 '프로듀서'라는 직업의 매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by meditator 2020. 6. 14. 00:58

오랜 시간이 걸려 도착한 영화가 있다. 지난 2014년 <레드 바이올린>의 프랑수와 지라르 감독이 더스틴 호프만, , 케시 베이츠, 데브라 윙거 등과 함께 만든 <보이 콰이어>가 뒤늦게 지난 5월 14일 개봉했다.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 채 알콜 중독인 엄마와 살아가는 소년 스텟(개럿 웨어링 분), 그는 음악 시간에 뒷자리에서 엎드려 있다 자신을 지적하는 선생님에게 수업은 따분하며 선생님은 아이들을 때린다는 식으로 노래를 바꿔 부르며 반항을 하는 소년이다. 자신의 엄마에 대해 험담을 하는 친구에게 쓰레기를 뒤집어 씌우는 건 여사이다. 얼굴은 늘 우울한 불만투성이, 그의 발에 걸리는 돌은 걷어차여 저만치 날아간다. 

반항아 스텟, 보이콰이어의 문을 두드리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스텟은 술에 쩔어 정신을 못차리는 엄마를 돌본다. 목욕물을 받아주고 스프를 끓이고 먹던 술을 버린다. 그러나 그런 스텟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양육비를 부담하던 아버지는 혼외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육 시설로 스텟을 보낼 것을 청한다.

부모가 없이 홀로 남겨진 스텟의 처지는 흡사 넷플릭스 <인간 수업> 속 오지수의 조건과 같다. 하지만 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오지수와 달리, 스텟에게는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 아침에 보육원 행이 될 뻔한 스텟에게 스텟이 다니던 학교 교장 선생님인 미스 스틸(데보라 윙거 분)은 '편애'라는 힐난을 무릎쓰고 스텟을 감싼다.

스텟이 천부적인 목소리를 타고 났다며 학교에 국립 소년 합창단 보이 콰이어를 초빙하여 스텟에게 오디션 기회를 제공했던 미스 스틸,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스텟에게 그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보이콰이어  소속 단원들이 다니는 사립 학교에 보낼 기회를 열어준다.

 

 

하지만 입학 오디션에서 단장인 카르벨레 선생(더스틴 호프먼 분)은 스텟의 목소리에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감동하지만 그의 불손한 태도를 들어 입학을 반대한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은 했지만 이미 나이도 많고, 악보조차 볼 줄 모르며, 거기에 자신을 배척하는 학교 분위기에 이전 학교에서 하듯 불손한 태도로 일관하는 스텟은 학교 생활에 어우러져 들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스텟은 점차 보이콰이어 단원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신도 그 일원이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커져만 간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의 목소리를 알아본 율리 선생은 기회를 주지만 목소리 말고는 음악적 기초가 없는 스텟은 늘 '맨 땅에 헤딩'하는 처지이다. 

카르벨레 선생님 스텟에게 손을 내미다
입학 때부터 스텟을 눈엣 가시처럼 여겼지만 일찌기 스텟의 재능을 알아본 카르벨레 선생님은 흡사 <위플래쉬>의 플랫쳐 선생처럼 스텟을 몰아부친다. 플랫쳐 선생처럼 위악적이지는 않지만, 그 누구보다 음악적 완벽함을 추구하는 카르벨레 선생님은 스텟이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일깨워내고 단련해 나갈 것을 엄중하게 요구한다. 동시에 지금까지 스텟이 살아왔던 '독불장군'식의 일탈적 태도를 지양하지 않고서는 무대에서 온전히 조명을 받으며 일사불란한 보이 콰이어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놀라운 속도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스텟은 합창단의 솔로를 맡을 정도로 성장하지만 그런 만큼 동료 단원들의 시기도 더해진다. 솔로 무대에서 악보가 사라지고, 또 다시 이미 세상에 없는 엄마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 역시 스텟처럼 자신의 불뚝거리는 성정을 이기지 못해 기회를 잃었던 쓰라린 기억을 가진 카르벨레 선생님은 일탈적 행동을 한 스텟에게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며 기회와 책임의 의미를 일깨운다. 그런가 하면 그의 뒤에서는 기지를 발휘하여 학교를 쫓겨날 처지에 놓인 스텟의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또한 스텟으로 인해 자신의 가정 생활이 파괴될까 두려워 찾아온 아버지를 돌려세운다. 

 

 

카르벨레 선생님의 엄격하지만 따스한 지도로 스텟은 비로소 그간 자신을 얽어맸던 상실감을 떨치고 눈물어린 진심으로 학교에 남을 것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보이 소프라노로서 최고의 난이도이자, 최고의 영예가 되는 3옥타브 '레'의 경지를 펼쳐보일 '메시아'의 독주 파트 기회가 찾아온다. 국립 소년 합창단에게, 그리고 보이 소프라노로서 스텟에게 찾아온 다시 없을 기회, 스텟은 다른 합창단원들과 함께, 그리고 홀로 그곳에 모인 관중들의 감동어린 열렬한 박수 세례를 이끌어 낸다. 

<보이 콰이어>는 천부적인 목소리를 지닌 스텟이 미스 스틸, 카르벨레 선생님 등 그에게 따스한 손기를 내민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보이 콰이어의 아름다운 보이 소프라노로 빛을 발하는 '음악적 성취'만으로도 이미 음악적이면서도 교육적인 성과를 거둔다. 교실 책상 위에 올라가 발을 구르며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던 소년이 다수의 관중 앞에서 헨델의 메시아 최고 난이도 3 옥타브 레를 넘나들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뿜어내는 장면은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감동적이다. 

하지만 <보이 콰이어>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렇게 최고의 공연을 마친 스텟에게 '이상 증세'가 나타난다.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스텟, 변성기가 온 것이다. 보이 소프라노로서의 생명이 끝난 스텟, 하지만 선생님들의 든든한 지원과 사랑으로 자신이 원하던 바를 성취한 스텟은 이제 더는 '일탈'하거나 주저 앉지 않는다. 소프라노 파트 대신 알토 파트가 되어 학교에 남을 수도 있지만, 스텟은 대신 자신에게 열린 '기회'를 선택한다. 그의 편이 되어주고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스승들의 가르침 덕분에 스텟은 기꺼이 또 다른 인생의 길에 설 준비가 된 것이다. 무엇을 가르치는 것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길을 열어 준 이야기, 그것이 음악 영화 그 이상 <보이 콰이어>의 가르침이다. 

by meditator 2020. 5. 21. 02:49

양녀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는 우디 앨런 감독의 신작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이 오랫동안 미루어 지다 5월 6일 개봉했다. 최근 이렇다할 개봉작이 없어서일까. 박스 오피스 1위를 선점하고 있다. 역시 우디 앨런일까? 아니 그런 찬사보다는 과연 우디 앨런 감독에게 차기작을 기대할 수 있을까란 우려가 앞선다. 성추문도 성추문이지만 이제 2020년, 우디 앨런이 감독이 하는 이야기가 '그의 시절'을 지나고 있다는 지점에서이다. 

 

 

최근 우디 앨런 감독이 영화를 여는 방식처럼 <레이니 데이 인 뉴욕> 역시 그의 다른 영화처럼 다큐식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뉴욕을 떠나 지방의 작은 대학을 다니고 있는 개츠비(티모시 살라메 분), 하지만 그는 쫓겨났다고 전해지는 이전의 대학처럼 이 대학에 영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그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를 든다면 애리조나 유지의 딸인 여자 친구 애슐리(엘르 패닝 분)때문이다. 주말 유명 감독인 롤란 폴란드 감독(리브 슈나이더 분)과의 인터뷰가 잡힌 애슐리와 함께 모처럼 뉴욕으로 돌아가 로맨틱한 데이트를 즐기고자 하는 개츠비, 하지만 그들의 야무진 데이트 계획은 인터뷰를 하러 간 애슐리가 돌아오지 않으면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방황하는 개츠비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두 이야기의 갈래로 진행된다. 그 중 하나는 남자 친구인 개츠비의 고생담이다. 여자 친구와 함께 뉴욕에서 주말을 보내기 위해 뉴요커인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통털어 가장 로맨틱한 일정을 짜놨지만 비가 오기 시작한 날씨와 함께 여자 친구와의 일정은 자꾸만 어긋난다. 

하지만 그런 어긋날 연예 행보에 좌절하는 그의 절망 사이사이로 차츰 드러나는 건 뉴욕 상류층의 자제이지만 형이나 친구들이 부모님이 원하는 삶의 행보를 따라가는 것과 달리 스스로 삶의 여정을 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갬블러로서 타고난 거 아니냐며 포커판에서 딴 돈으로 고급 호텔을 호기롭게 예약하는 개츠비, 여전히 부모님이 주신 돈으로 공부하고 부모님의 제공하는 각종 문화적 향유를 통해 지적인 여유를 누리지만 그날 밤으로 예정된 어머니의 파티에 어떻게든 참석하지 않으려 하듯 그에게 부모님과 그 주변 사람들은 그저 '지적 허영'에 들뜬 졸부들일 뿐이다. 책을 읽고 전시회를 보고 피아노를 치고 그렇게 그가 누린 모든 것들을 그저 어머니가 시켜서 어쩔 수 없어서 했던 것들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여자친구의 동생인 챈(셀레나 고메즈 분)의 지적처럼 그런 '부'의 울타리를 차고 나갈 용기도 없다.

누린 것과 지향하는 것 사이의 '혼돈', 그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청년이 개츠비다. 그는 <위대한 개츠비> 속 그 개츠비처럼 방황하는 청춘임에는 동일하지만, 스스로의 삶에 도박을 거는 대신 어머니의 돈을 종자돈 삼아 재미로 도박판을 다니는 청년에 불과하다. 사랑에 올인하고 싶지만 여자 친구는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뜻하게 않게 만난게 된 챈을 통해 부모님의 부는 누리고 싶지만 아직 그 무엇도 열정적으로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찌질한 자신을 시인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언가를 찾아 방황하는 이야기에 있어서 우디 앨런 감독은 예의 장기를 발휘한다. 거기에 도시적 감성이 더해지며 영화는 청춘 영화 이상의 문화적 감성을 즐길 거리로 제공한다. 거대 도시 뉴욕이 아니라 지적 문화적 공간으로서 그곳에서 나고 자란 개츠비가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은 비오는 뉴욕 명소를 통해 감각있게 드러난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럼에도 그런 정체성의 방황 끝에 만나게 된 '어머니의 진실'을 통해 감각적인 문화 도시 뉴욕이 가진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역사'에 대한 우디 앨런 식의 풍자 역시 놓치지 않으며 예의 풍자적 기지 역시 놓치지 않는다. 

 

 

애슐리의 엇나가버린 도전 
남성인 개츠비의 서사가 우디 앨런 감독의 장기를 살린 영역이었다면, 또 다른 측면 여성인 애슐리의 서사는 역시나 우디 앨런 식의 '조크'이지만, 그것이 바로 더 이상 우디 앨런을 이 시대의 대표적 감독이라 부를 수 없게 만드는 지점이 된다.

개츠비를 연신 본의 아니게 바람 맞히고 있는 애슐리((엘르 패닝 분)는 학교 신문의 기자로 유명 감독 로만 폴라드 감독을 만난다는 기쁨에 설레이는 여학생이다. 애리조나 출신 은행업계 거물인 아버지, 미인대회 출신의 이력, 살면서 뉴욕은 어릴 적 겨우 두 번을 와봤던 이 지방 출신의 여학생은 학보사 기자로 뉴욕에, 거기에 유명 감독을 만난다는 행운으로 인해 한껏 들뜬다. 출발할 당시부터 개츠비는 뉴요커로서 애슐리에게 로맨틱한 데이트 행보를 제시하지만 이미 인터뷰란 기회에 들뜬 애슐리에게 그런 개츠비의 '선물'은 자꾸 한 귀로 흘러 나간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작품 완성도에 대한 로만 폴라드 감독의 돌출 행동으로 인해 애슐리가 애인에게 돌아갈 시간은 늦춰진다. 하지만, 이건 애슐리의 생각이다. 천재 감독의 우울증, 그리고 이어진 그의 각본가의 뜻하지 않은 가정사, 그리고 뜻밖에 조우한 당대 스타와의 인터뷰는, 애슐리가 만난 행운이지만, 그 반대로 그 남자들의 입장에서는 앳되고 아름다운 여성과의 만남일 뿐이다. 

홍상수 영화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여자만 보면 그 상대방이 누구건 상관없이 '작업 정신'을 발휘하게 되는 이 남성들의 조합은 역시나 우디 앨런 영화의 '전통'이다. 그런데, 그런 '전통'과 맞물리는 애슐리가 제 아무리 애리조나 출신에 뉴욕에 몇 번 와보지도 못한, 심지어 로만 폴라드 감독을 알게 된 계기조차 개츠비를 통해서일 만큼 문화적 성숙에 있어 미숙하다 해도, 애슐리를  대상화시키는 지점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당당한 여성성까지는 아닐지라도 영화적 장치로서 썩소를 자아내게 한다.

제 아무리 지방의 작은 대학이라 하더라도 학보사 기자를 할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가진 여성이 뉴욕의 대감독이란 이유만으로, 혹은 당대의 스타란 이유만으로 그렇게 쉽게 그들의 '언어적 유혹'의 정체를 모른 채 쉽게 무장해제 되어 버리는 장면은 '백치미'를 넘어 '실소'를 자아내게 만들 만큼 전 세대의 관습적 장치이다. 그녀가 매번 꺼내드는 취재 수첩이 무색하게 만들 만큼.

물론 영화 속에서는 그런 애슐리와 대비되는 지점에 개츠비를 '자각'시키는 어머니와 챈이 등장한다. 하지만 전직의 상처를 딛고 '사랑'을 통해 그리고 그녀가 모은 돈을 통해 뉴욕의 상류층으로 자리매김한 자수성가의 상징도, 그리고 개츠비에게 자신의 현실을 자각케 만드는 뉴요커 챈의 존재도 영화 속에서는 개츠비의 '자각'을 위한 '장치'로 씌여졌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마돈나 아니면 마리아, 남성의 시각에서 자신을 구제할 두 여성성의 협소한 한계 속에서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는 머무르고 만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이번 세기 이전에는 통상적이고 관습적인 조크로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세기의 시대에는 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의 관점에 대해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성찰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던 이야기를 여전히 능숙하게 변주하고 있는 우디 앨런 감독은 이제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진짜 안타까운 것은 그의 지나간 이력보다 그가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호흡할 수 없는 옛날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지점이다. 

by meditator 2020. 5. 10. 21:45

영화의 후반, 생의 마지막 생일 파티를 연 줄리언 무어가 분한 테레사 영은 남편에게 묻는다. 삶이 우리를 지나쳐 가는 것일까? 우리가 삶을 지나가는 것일까? 라고. 이 '우문' 은 결국 '주체적'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던 삶이, 어떤 순간 나 자신을 떠도는 방랑자처럼 '객체'화 시켜버릴 때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그건 죽음일 수도, 혹은 생각지도 못했던 자신의 과거와 조우하게 된 상황일 수도 있다. 그 누구라도 살면서 종종 자신을 휩쓸어 버리는 삶의 국면에 마주하게 된다. 여기 그렇게 자신이 의도치 않는 삶의 기로에 놓인 두 여성이 있다. 바로 줄리언 무어가 분한 테레사 영과, 미셸 윌리암스가 분한 이자벨 앤더슨 이다. 

 

 

당신이 잊고 있던 과거가 다시 찾아 온다면?
영화를 여는 건 인도에서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자벨 앤더슨이다. 아이들과 여유로운 야외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이자벨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품조차 사기 어려울 정도로 자금 부족의 위기 상황을 맞이한다. 그런데 도착한 기쁜 소식과 그렇지 않은 소식, 한 가지는 뉴욕의 세계적인 미디어 그룹을 운영하는 테레사가 거액을 후원하기로 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아원 아이들에게 담뿍 정이, 그 중에서도 자꾸만 그녀의 모성 본능을 일깨우는 한 소년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녀가 직접 뉴욕으로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지원을 받기 위해 뉴욕으로 향한다. 

마침내 테레사를 만난 이자벨, 그런데 어쩐지 자신이 거액을 공여하기로 했음에도 고아원에 관심이 없어보이는 테레사는 생뚱맞게도 이자벨을 자기 딸의 결혼식에 초대한다.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결혼식에서 이자벨은 18살 시절 낳아 입양을 하기로 결정했던 딸과 그 딸의 아빠인 오스카(빌리 크루덥 분)를 만난다.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딸과, 지우고 싶은 그녀의 과거가 그녀를 찾아왔다. 

2006년 매즈 미켈슨 주연으로 수잔 비에르 감독이 만든 <애프터 웨딩>처럼, <애프터 웨딩 인 뉴욕> 역시 인도에서 복지 사업에 헌신하는 이자벨이 뜻밖에 만나 자신의 과거로 영화를 연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18살 시절, 이자벨은 아이를 낳는 것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미성숙한 자신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 부당하고 생각한 그녀는 당시 남친이었던 오스카와 입양을 결정했다. 그런데, 그녀가 떠난 후 아이를 만나러 간 오스카는 그런 두 사람의 결정을 번복했다. 그리고 아이를 홀로 키우며 테레사를 만나 다복한 가정을 꾸려왔다. 딸인 그레이스는 엄마가 죽은 줄 알고 오늘에 이르렀다. 

영화는 이제는 복지 사업가가 되었지만, 한때는 자식을 버린 이자벨이 뜻밖에 조우하게된 '과거'의 인연,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엄마의 '실존'을 뒤늦게 알아버린 딸 그레이스의 혼란으로 이끌어 간다. 

 

 

'과거'를 불러온 테레사
눈 앞에서 자꾸만 인도의 소년이 어른거리던 이자벨은 자꾸만 인도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테레사는 지원하겠다는 금액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리면서 그녀를 만류한다. 그러면서 한편에서는 자신이 지금까지 키워왔던 미디어 그룹의 매각과 정리를 한다. 왜?

<애프터 웨딩 인 뉴욕>, 그 혼돈의 시작은 테레사가 남몰래 삼키는 알약으로 부터 비롯된다. 야심찬, 그리고 진보적인 사업가로 찬사를 받으며 미디어 그룹을 키워왔던, 그리고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부녀와 가정을 꾸려 이제 8살난 쌍둥이 아들까지 둔 남부러울 것 없는 테레사에게 지나가야 할 삶의 '마지막 문'이 도래한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끌어들인 테레사를 찾아온 이자벨에게 테레사는 자신에게 시간이 남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아직 두 쌍둥이 아들이 어리다는 것을. 뒤늦었지만 그녀에게 딸을 돌려주듯이. 테레사는 자신의 아들들을, 그녀가 부재한 가정을 그녀에게 부탁하고 싶었던 것이다. 
 
수잔 비에르 감독의 <애프터 웨딩>이 덴마크의 송강호라 칭해지던 걸출한 매즈 미켈슨의 연기력에 기대어 뒤늦게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 한 남자의 회한에 방점을 찍었다면, 그에 반해 <애프터 웨딩 인 뉴욕>은 어쩐지 그 방점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 여겨진다. 분명 이야기는 뒤늦게 과거를 마주한 이자벨의 혼란과 갈등이지만, 어쩐지 자꾸 시선이 줄리언 무어가 분한 테레사에게 향한다. 

둘 다 명불허전의 배우이지만, 그럼에도 줄리언 무어와 미셸 윌리암스가 가진 배우로서의 내공의 차이때문일까, 그것도 그렇지만, 과거 남성이 주인공이었던 영화가 지난 시절의 회한에 솔직했던 반면, 진취적인 두 여성을 앞세운 영화는 '여성'으로서의 그들의 ' 멋져야 하는 존재감'에 짖눌렸달까. 지나온 시절에 대한 회한과 후회, 그리고 때로는 이기적이거나 감정적인 지점에들에 대해 그 '바닥'에 다다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사건은 절절하고 두 배우의 연기는 훌륭한데 감정의 울림이 깊지 않다. 

 

 

죽음을 마주하게 된 여성 사업가, 아직 어린 두 아들, 그녀가 과거 남편이 사랑했던, 그리고 지금 자신이 키우고 있는 큰 딸의 생모를 불러들이기까지의 '고뇌'가 관객은 자꾸만 짚어지는데 영화는 어쩐지 그걸 평면적으로 스쳐간다. 죽고 싶지 않다는 테레사의 절규만으로는 그녀가 홀로 약을 삼켜가며 남편의 과거 여자이자 딸의 생모를 불러오기까지의 복잡한 심사가 다 설명되지 않아 안타깝다.

이자벨은 어떨까? 18살에 포기한 모성, 그리고 이제 고아원의 한 아이에게 유독 모성적 연민을 놓지 못하는 상황, 거기에 뒤늦게 나타난 딸에 대한 애매한 모성의 복잡한 갈래가 차별성을 가지고 드러나지 않는다. 거기에 18살에 딸을 포기했던 여성이 이제 인도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복지 사업가에 이르기까지의 회한어린 여정의 깊이 역시 미흡하다. 요가로 마음의 안정을 찾는 복지 사업가라는 여성과 미디어 그룹의 대표인 여성의 미담을 넘어 그들이 드러내는 감정적 여운이 짧다. 멋진 여성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 삶의 여정에 대한 좀 더 진솔한 천착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by meditator 2020. 4. 27. 23:31

4월 15일은 국회의원 총선거였다. 결과는 압도적인 여당의 승리, 외신들과 언론들은 '코로나 19'에 시의적절하게 대처한 정부의 성과라 입을 모은다. 아직도 전세계적가 이 바이러스로 인해 혼란에 빠져있는 상황, 그러나 우리는 이제 사회적 격리를 해제할 것인가를 고민할 만큼 위기의 파고에서 한 발 물러나있다. 여러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3차 대전에 맞먹는 위기 상황을 잘 대처해 낸 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국가'의 존재를 실감시켜준 여당의 손을 들어줬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4월 16일, mbc는 이승준 감독의 <부재의 기억>을 방영했다. 2020년 92회 아카데미상 수상식, <기생충>에 앞서 호명되었던 우리나라 작품이다. 29분의 영상,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작으로 선정된 <부재의 기억>, <기생충>과 마찬가지로 후보작이 된 5작품 중 유일한 외국 작품이었다,

지난 2009년 <달팽이의 별>로 서울 국제 청소년 영화제 SIYFF 관객상, 2011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영화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이승준 감독, 감독이 미국의 한 다큐 플랫폼  회사로 부터 촛불 집회와 관련된 다큐를 제안받으며 <부재의 시간>은 시작된다. 이에 어떻게 세월호가 촛불 집회까지 이어지는가를 설명하고, 4.16 세월호 참사 가족 협의회와 4.16 기록단과 함께 다큐를 제작한다. 

 

 

고통이 남아있는 한 고통은 계속 얘기되어야 한다
다큐의 시작, 아직 수학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레이던 그 상황이 남겨진 가족들의 상황극으로 재연된다. 그저 '수학 여행'을 다녀오는 것일 뿐, 그것이 꿈에서도 다시 만나기 힘든 영원한 이별이 될 줄 몰랐던 아이들과 가족들은 여느 가족들처럼 그 시간을 맞이한다. 용돈이 주느냐 마느냐, 웬 용돈을 이렇게 많이 주느냐, 엄마보다 친구들이 그렇게 좋냐는 등 그 스스럼없는 대화들은 고스란히 남겨진 가족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멍에로 새겨진다. 아이들이 남긴 말을 읊던 가족들을 끝내 대사를 마치지 못한다. 

그렇게 잘 다녀오겠다며 웃으며 떠난 아이들은 4월 16일 당일 배가 좌초되고 있다는 신고가 되고 배가 기울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밝게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며 상황을 낙관하고 있다. 이만큼 기울어 졌어요라며 아이들이 찍어 보인 세월호는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 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방송은 침착하게 대기하라 하고 아이들은 저렇게 가만히 있으라 할 때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고 농담처럼 서로 주고 받는다. 

그렇게 배가 기우는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은 설마  해경이, 그리고 국가가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어른들이 자신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고 하면서도 지시에 따르던 아이들은 결국 해경과 정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배가 가라앉아 버리고 민간 잠수사들이 솔선수섬하여 아이들을 구하러 들어갔을 때 2인실에 7,8명이 모여, 작은 창에 머리를 끼워 넣으며 살려고 발버둥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다큐는 세월호가 좌초되었다는 신고가 접수된 그 순간부터의 당시 상황과 그 상황을 기억하는 부모, 생존자, 잠수부들의 증언을 오가며 당시의 상황을 담담하게 전한다. 하지만 담담하게 보여준 그 시간 속에 '국가'는 없었다. 

 

 

그곳에 국가는 없었다.  
배가 좌초된다는 신고는 이미 접수받았다는 무책임한 응대로 이어졌고, 해경은 온데간데 없었다.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제 때 상황실에 나타나고 제 때 해경이 현장에 출동하기만 했어도, 

'살릴 수 있는 아이들을 살렸으면 우리같은 사람들이 있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 제대로 구할 수만 있었으면' 하고 아쉬운 맘을 접지 못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관홍 잠수사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개 민간 잠수사조차 그 책임감과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에 국가는, 책임자들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다큐는 묻는다. 

이에 해외 관객들도 일찌감치 공감, 2018년 뉴욕 다큐멘터리 영화제(DOC NYC)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며 일찌감치 아카데미 상의 후보로 예견되었다. 또한 미국 영화 협회 다큐멘터리상( AFIDocs) 단편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제 때 대처만 했다면 그 수많은 목숨들이 '바다'에 묻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다큐를 본 사람이라면 국적을 막론하고 그 누구라도 공감하고, 그래서 국가의 부재에 대해 분노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수장' 시키고서도 대통령 앞에서 보여지는 '그림'에 연연하는 관계자들, 국회에서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한 사람들, 왜 사람들이 그 추운 겨울 거리로 나서 촛불을 들었는지 다큐를 보면 인과 관계가 명백하게 설득된다. 드디어 2016년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아이들이 사라진 그곳에 없었던 국가는 그렇게 '심판'되었다. 

 

 

그리고 2017년, 3년 만에 세월호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울부짖는 유가족들, 그곳에서 뒤늦게나마 배의 잔유물로 돌아온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밝혀지지 않은 그날의 진실이 숙제처럼 남아있다. 

<부재의 기억>이 아카데미 상에 노미네이트 된 사실에 대해 '단순한 영화 하나가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게 아니라, 전 세계 영화 관객들이 세월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봉준호 감독은 말한다. 

20분을 더해 감독판으로 방영하게 된 이승준 감독은 시간적 제약으로 인한 아쉬움을 달랬다며,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없었던 그 당시'를 통해 시민들이 보호받는 안전한 사회, 시민들을 보호하는 국가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고 논의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감독의 말처럼, 이제 2020년에 본 <부재의 기억> 속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건 이제는 부재한 사람들을 통해, '부재한 국가'에 대한 상흔이다. 그러기에 세월호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되새김해야 할 '과제'다. 

by meditator 2020. 4. 17.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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