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4 다니던 낙원 상사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영애씨, 시장에서 밥까지 나르던 영애씨는 큰 뜻을 품고, 동료와 함께 자신의 사업체를 차린다. 오피스텔 하나를 빌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사업체, 하지만 그녀에게 닥친 현실은 냉혹하다. 생활고에 쫓긴 동료는 배신을 하고 떠나고, 가능성을 열어두었던 사업안들을 하나씩 부도수표가 되고 만다. 결국 직원들 월급을 주기 위해 식당 알바까지 내몰리게 된 영애씨. 이렇게 '자영업'에 나선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현실은 대한민국 300만에 이르는 자영업자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도 드라마에선 여주인공을 여전히 사랑하는 옛 남친이 등장하여 그녀에게 구원의 두레박을 던져주지만, 그 누구하나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없는 대다수 대한민국의 자영업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벼랑 끝으로 내몰릴 수 밖에 없다. 이런 자영업자의 현실을 1171회 <추적 60분>이 총제적으로 다루었다. 




망하거나, 쫓겨나거나, 빚지거나
2013년 기준 유통, 운수, 숙박 등 자영업자의 비중은 전체 인구 중 42%,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  평균 15.8%에 2.6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그 중 50대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45%에 달한다. 그리고 그들의 월 평균 수입은 100만원 미만인 경우가 태반이다. 도저히 한 가구의 생활을 영유할 수 없는 돈을 벌면서 자영업에 종사하는 다수의 가장들, 이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디로 부터 유래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추적 60분>의 진단은 IMF이다. IMF는 대한민국에 6.25에 버금가는 상흔을 남겼다. 정권은 금 모으기를 하면 IMF를 무난히 넘겼다며 정권의 치세로 자부하는 와중에, IMF를 통해 정리 해고되어 거리로 내몰린 많은 직장인들은 2015년 자영업이라는 굴레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정리 해고되어 쫓겨난 사람들, 사회와 국가는 그들을 방치하고, 그들은 '각자도생'의 길목에서 '자영업'이라는 대안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장미빛같던 대안은 거리 곳곳에 나붙은 폐업 표지판, 끝없는 경기 침체, 과도한 경쟁 속에서 막다른 길로 그들을 다시 내몰고 있다. 



9월 9일 방영된 <추적 60분>의 시작은 고용노동부 전주 지청에서 분신 자살을 시도한 한 자영업자의 고통에서 시작된다. 한 때는 줄을 서서 손님이 끓던 식당의 주인이었던 그는 이제 분신 자살의 상흔을 안은 채 죽지 못해 살아있는 처지가 되었다. 2015년 정부는 한때 400만 명을 육박하던 자영업자의 수가 300만 명 남짓으로 줄었다며 안정세에 들어섰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 안정세의 이면에는 1년새 10만 7000명의 폐업이라는 비극이 숨겨져 있다. 더 이상 자영업자가 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수의 자영업자가 '망'해서 어쩔 수 없이 수가 줄은 것이다. 퇴직금을 쏟아부어, 그리고 남의 돈까지 빌려 자신의 가게를 열었던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해 동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들은, 전주 지청의 분신 자살 자영업자와 같은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그렇다고 문을 닫지 않으면 살만한 것도 아니다. IMF로 거리로 내몰린 가장들 그들의 대다수가 자영업을 선택했다. 그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퇴직'은 빠르지만, '재취업'은 요원한 나라 대한민국, 그 나라에서 한 가정을 이끌기 위한 선택에, '자영업'은 불가피했다고, 대다수의 자영업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대기업 명예 퇴직자였던 가장은 이제 친구네 방앗간 한 켠에서 떡집을 새벽부터 밤까지 운영하지만, 하루에 5만원 벌이도 힘들다. 아내까지 나와서, 몸을 돌보지 않고 '노동'을 하지만, 퇴직금은 켜녕, 대출금 갚기도 요원하며, 그저 대안이 없어 하루하루를 버티는 신세이기 십상이다. IMF이후 계속되는 경제 불화, 그리고 특히 세월호 사태, 메르스 등 각종 사회적 현안의 직격탄을 맞은 자영업자들은 '망'하지만 않았을 뿐 '망'한 것이나 진배없는 사업을 이끌고 살아간다. 

그래도 버티면 다행이랄까? 2015년 1월 임대차 보호법이 개정되었고, 7월부터 이 법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다수의 자영업자들이 법의 외곽 지대에서 신음을 한다. 대부분 자신의 돈만으론 안되서 빚을 얻어 사업을 시작한 자영업자들, 그들이 그래도 사업적 이들을 보기 위해선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임대업자의 '갑질'은 그들의 이익을 보전해 주지 않는다. 현행 임대차법 상 2년, 길어야 3년을 주기로 갱신되는 계약은, 자영업자들이 이익을 갱신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장사가 좀 되려나 싶으면, 집주인이 나가달라고 한다. 심지어, 자신들이 활성화시킨 상권은 '젠트리피케이션(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이다. 이 과정에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까지 지칭한다.)의 희생양이 되어, 자영업자들로 하여금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서게 만든다. 골목 상권을 침범해 오는 대기업의 진공 청소기같은 상권 확장은 또 다른 복병이다. 대한민국 사회 그 어느 곳에서도, 자영업자들을 위한 법적 사회적 보호 장치는 없다. 



그간 다수의 다큐가 '자영업자'의 위기에 대해 분석을 해왔다. 그런 가운데, 9월 9일 방영된 <추적 60분>은 위기에 몰린 자영업자의 현실을 총제적으로 분석해 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사회적으로 쉽게 용인되는 자영업으로의 유입, 그로 인한 과당 경쟁, 끝이 안보이는 경제 불화, 그리고, 어떤 사회적, 법적 보호 장치는 커녕, 대기업, 임대업자 등 '갑'으로 부터 끊임없이 수탈당해야 하는 처지, 그 속에서 오로지 자영업자 개인으로 그것을 맞서야 하는 '개인'으로서의 위기, 현재 대한민국 자영업자의 벼랑 끝 현실을 <추적 60분>을 낱낱이 고발한다. 고통은 개인에게 귀결되지만, 그 시작은 '사회'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by meditator 2015. 9. 10. 15:55

sbs는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2부작 특집 다큐를 마련하였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 < 최후의 심판>이 그것이다. 8월 15일 방영된 1부는 <엄마여서 미안해>, '위안부'라는 명칭조차 숨기며 살아왔던 '엄마'로서의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다룬다. 




엄마, 아내, 그리고 위안부
정부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의 숫자는 238명, 하지만 실제로 추정되는 '위안부'의 수는 수만에서 많게는 수십 만에 이른다고 한다. 알려진 '위안부'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홀로 '역사의 상흔'을 숨기며 살아가야 하는 역사의 희생자들이 더 많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저 무심코 '위안부'라 지칭하는 이분들에게는, 그 '위안부'라는 명칭 석자 만으로도 몸서리를 치는 상흔을 가진 가족들이 있다. sbs스페셜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위안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자 하였다. 지난 3월 시작된 이 프로젝트, 하지만 찾아간 가족들은 제작진을 거부하거나 마다하였다. 광복 70주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그 상흔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들 중 생존해 계신 분이 몇 십 분에 지나지 않은, 그래서 아마도 일본은 그 위안부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기를 기다리는가보다 라고 절망하는 위안부 생존자들, 그분들에게도 가족이 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어머니가, 아내가 위안부였다는 것은 또 다른 '사회적 짐'이 된다. 마흔이 넘어서부터 신경 안정제를 먹어야 지탱하는 어머니의 숨겨진 비밀을 알고, 더 이상 한국 사회에 살기 힘들어 이곳을 떠나야 했다는 딸, 차마 직장에서 자신의 숨겨진 가족사를 알릴 수 없어 직장에서 멀러 떨어져 나와 인터뷰를 하는 아들, 임종의 얼마 안남은 이제야 회한에 잠긴, 한때는 '남의 남자랑 실컷 뭐 하던 걸 데려와 좋게 살지 못했던' 남편, 그들에게 '위안부'는 그저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뒤늦게 회한에 쌓인 남편은 그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병상에 누운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죽기 전에 쌓인 한을 풀어주고 싶지만, '일본의 사과'를 받기 전에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나마 결혼을 하고 자식이라도 낳았으면, 277번 째 신고자 박숙이 할머니는 열 여섯 그때 자궁마저 들어낸 줄 자신조차 몰랐다고 한다. 그래도 가슴으로 낳은 아이들이 혹시라도 자신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까 그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자신의 상처는 꼭꼭 숨겨야만 했다. 그렇게 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상처가 직접 낳았든, 그렇지 않든 아이들에게 이어질까 가슴조리며 살아왔다. 한 달에 한번 대학생들을 만나 자신의 경험을 전하는 할머니 짱짱하게 일본의 만행을 전하던 할머니는, 손님들이 다 돌아가고 난 후 되살아난 그 시절으 ㅣ기억에 몸을 가누지 못한다. 



그렇게 <최후의 심판-엄마라서 미안해>는 70년이란 세월이 대를 이어 이어지는 '위안부'의 고통을 다룬다. 일본이 기다리는 것처럼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신다고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엄마라서 미안해>를 보다보면 다큐를 통해 제작진이 결론을 낸,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서도 풀어내지 못한 응어리인 '일본의 사과'가 다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사과를 하지 않는 뻔뻔한 일본만큼이나, '위안부'라, 혹은 '위안부'의 자식이라 드러내는 것이 수치가 되는 우리 사회는? 이라는 질문이 던져진다. 

물론 70년이 지나도 여전히 제대로 된 '사과'한번 하지 않는 주범 일본도 문제다. 하지만, 시민 공원에 자리가 없다고 위안부 소녀상조차 설치 하지 못하게 하는 최근 부산시의 방침에서 보여지듯이,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기에 앞서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도 경계 밖의 존재로 대접받는 '위안부'의 존재를 집어보는 것이 <최후의 심판-엄마라서 미안해>가 드러낸 뜻밖의 진실이다. 엄마가 위안부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그래서 더 이상 한국에서 살 수 없었던 딸, 직장에서 어머니의 과거로 인해 눈치를 보는 아들, '너네 할머니는 일본 군인들하고 살다 온 창녀다'라고 아이들이 놀림받는 현실, 어쩌면 진짜 짚어보아야 할 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소녀상조차 설 곳이 없는 대한민국의 냉랭한 현실이 아닐까. '위안부 할머니'들이 '엄마라서 미안해'라고 말하게 하는 대한 민국 사회, 그런 면에서, 본의 아니게, <최후의 심판-엄마라서 미안해>는 시사적이다. 

by meditator 2015. 8. 16. 15:39

곧 광복70주년이 다가온다. 

우리에게 광복은 어떤 의미일까? <sbs스페셜>은 광복의 기쁨 대신에, 광복 70주년이 분단 70년이 된 우리의 현실에 주목한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이념에 따라 남과 북이 나뉘어 어언 70년이 흐른 지금 그 시간이 길어질 수록, 남과 북의 마음도 멀어져만 가는 그 현실을, 남과 북의 청년들을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그 현실을 짚어보기 위해 우선 우리에게 생소한 북한의 삶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그래서 준비된 것이 '북한 중산층의 가정집', 2006년 탈북한 새터민 정은심씨, 아버지가 음악 대학 학장이었다던 그녀의 기억에 따라 복원된 집, 그 집을 본 남한의 청년들은 놀란다. 늘 미디어를 통해 굶어 죽을 수준의 북한에 익숙한 남한 청년들은, 북한에도 남한의 아파트와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 이렇게 '한 민족'이면서도 서로에 대해 사실은 '무지'한 남북한의 청년들이 광복 70주년 '대기획'으로 한 자리에 모인다. 



남북 청년 통일 실험; 자본주의에서 함께 살아남기 
남북 청년들이 함께 모여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몇 단계에 걸쳐 실시된다. 그 첫 번째, 탈북 청년들의 남한 시장에서 살아남기. 

190년대 중후반 식량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북한 내 배급 체계가 붕괴되고, 주민들은 스스로의 살길을 찾아 북한식 시장인 '장마당'에 나와 자급자족을 하기 시작하였다는데, 바로 그 북한식 자본주의인 '장마당'을 경함한 장마당 세대가 첫 번째 실험의 주체들이다. 장마당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모자를 팔았다던 승설향, 권력을 이용한 불법적 거래로 큰 돈을 만지기도 했다던 군 보위부 출신 장범철은 장사밑천 100만으로 이틀간 자유로이 남한에서 장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제작진이 돈을 건네 주기도 전에 미리 물품을 예약해 놓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던 이들은 정작 그 물건을 하나도 제대로 팔지 못한다. 생각과 달리, 그들이 내놓은 북한 사탕과 순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게다가 큰 돈을 벌어봤다던 장범철은 거리에서 호객 행위 한번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등, 남한식의 '장사'에 어설픈 티가 역력하다. 승설향은 눈물까지 보이고, 결국 물건은 그들이 아는 북한 새터민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두번 째 실험은 남과 북의 청년이 함께 이틀간의 장사 여정. 하지만 그 여정은 첫날 함께 식사를 하는 순간 부터 삐그덕 거린다.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장사 물품 마련, 장사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맞는 것이 없는 두 청년, 게다가 북한 장마당에서 땔감을 팔아봤다던 청년은 역시나 장범철처럼 거리에 나서 자신을 드러내고 무언가를 파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배달을 나선 길은 헤매기 일쑤, 고객의 한 마디에 물건에 대한 자신감은 뚝 떨어져 팔지 말자는 이야기까지 해버린다. 

그렇게 삐그덕거리는 그들을 위한 해법은 시간, 함께 밤을 보내고 다음날, 남한 청년을 따라 주먹밥을 팔러 나온 북한 청년은, 그저 주먹밥을 파는 것을 넘어 출근길 시민들에게 '화이팅'을 외치며 밝은 기운을 전해주는 모습에 자신감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북한 청년에게 남한 청년은 '북한'이라는 이질감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의 그 어설픔을 느끼며공감한다. 

드디어 마지막 실험, 따로, 혹은 함께 장사를 하던 남과 북의 여섯 청년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북한의 장마당'과 같은 까페를 연다. 남과 북의 청년이 번갈아 가며 리더가 되어 꾸려가는 까페, 손님은 오지 않고, 서로의 낯선 리더쉽에 남과 북의 청년 사이엔 불만만이 쌓여간다. 



통일을 논하기엔 너무 먼 남과 북의 거리 
탈북 청년들과 함께 남한 청년들이 남한에서 남한 식의 '장사'를 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실험, 그 실험은 이미 실험 자체에서 '남한',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장마당'을 경험하고, 북한에서도 노동당보다도 '돈'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탈북 새터민들의 입장은, 어쩌면 이미 우리가 깨닫고 있지 못하는 북한내 변화의 단면을 보고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한식 자본주의라는 한계적 상황이건, 그 한계적 상황에 기꺼이 적응하려고 내려온 새터민들이라는 제한적 조건임에도, <어서오시라요>가 보여준 상황은 분단 70년이 가져온 남과 북의 거리를 깨닫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남과 북의 청년이 함께 한다는 종이 간판을 내세운 남한 청년에게 북한 청년은 거부감을 보인다. 자신이 내려와 겪은 짧은 시간 동안 남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북한의 물건을 가지고 나선 거리에서 시민들은 냉랭하기 이를데 없다. 아니 그리고 그건 '북한'이라서라기 보다는, '내 이익'과 관련되지 않는 그 무엇에도 '무관심'한 남한의 분위기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터이다. 

그렇게 지극히 자기 중심적 '자본주의'가 팽배한 남한 사회에서 이벤트처럼 만난 남과 북의 청년들은 사사건건 부딪친다. 리더를 뽑는 방식에서, 리더에게 기대하는 것에서, 그리고 함께 무언가를 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그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서로의 샅샅이 다른 문화적 차이이다. 안그렇다 하면서도 상당히 서구적 '민주주의' 문화가 익숙한 남한과, 남한에 내려왔음에도 북한식의 상명하복에 익숙한 북한 청년들이 정작 곤란을 느끼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부터이다. 

당연히 '통일'은 어불성설이다. 그래도 '한 민족'인데 하는 북한 청년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오히려 지금처럼 압도적인 인구와, 그보다 더 압도적인 자본을 가진 남한과의 '통일'은 그저 가지고 있는 자원을 내어줄 뿐 북한의 희생이라는 목소리가 우세를 점한다. 하지만 정작 무서운 것은, 그 둘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채 남의 집 이야기를 듣는 듯 멀거니 바라보는 남한 청년들의 아득한 눈빛이요, 남과 북의 만남이라는 '호객' 행위에 '일별하지도 않은 채' 각자의 길을 가기 바쁜 남한의 거리 사람들이다. 

<통일 실험 어서오시라요>는 다큐임에도 오히려 리얼리티 프로그램과도 같은 성격을 띤다. 하지만, 아름다운 북한 미녀의 소비도 아니고, 가난한 북한 주민에 대한 위로 프로그램도 아닌, 남한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북한 청년들의 적응기를 기반으로 한 다큐는 불가피하게 현실의 절박감을 내보인다. 그런 반면, 청년 실업에 시달리는 남한 청년의 현실은 거기선 드러나지 않는다. 월수 2500만원의 청년 실업가 수준의 청년과 국내 유수 대학, 대학원을 다니는 우리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의 청년들은 애초에 남한 사회에 적응하고자 하는 새터민 북한 청년들과 그 마음 가짐이 다를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여유로운(?)  남한의 자본주의 속 여전히 낯설은 북한 청년들, 이미 전제된 아량의 제한선이다. 
by meditator 2015. 8. 10. 15:52

8월 4일 방영된 mbc의 <pd수첩>에 대한 반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세간에 '김치녀'로 통칭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에 대한 남성 들의 반응, 거기서 부터 시작된 최근 두드러진 여성 혐오 현상에 대해 다루었기 때문이다. 



'김치녀' 현상으로 시작된 남성들의 '양성평등론'
시작은 '수 백만원을 호가하는 명품가방을 받고 수 천만원짜리 가방이 아니라는 이유로 남자 친구에게 짜증을 내는' 속칭 김치녀 동영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김치녀'에 대한 사이트를 운영하며, '이들이 사회적으로 분란을 일으키며 문제가 되는 여성'이라고 지탄하는 '양성 평등' 주장을 하는 남성들이 등장했다. 

남성들이 주장하는 바 '양성 평등'은 이어진 '군 복무'에 대한 남성들의 억울함으로 이어진다. 2030 의식 조사에 따르면 남성 들 80.6%가 군복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 지지 않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또한 2015년을 대한민국의 남성들은 '군복무'에서부터 시작하여 학교, 연애, 사회 생활에서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최근 남녀 공학을 기피하는 남학생들의 조류에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여학생들의 '실력'에 밀리고 있다는 남성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그들 남성들에게만, '군복무'를 비롯하여, 데이트 비용, 결혼 비용 등 각종 사회적 부담을 지게 만듦으로써, '남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고 피력한다. 이에 일부에서는 '양성 평등'을 주장하며, 과격하게는 여성의 동등한 군입대, 혹은 그 보다는 완화하여 몇 주간이 군사 훈련, 혹은 군대에 비견되는 각종 봉사 활동에 여성도 '동등'하게 일정 기간을 '의무적'으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남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달픔
<pd수첩>이 짚고자 하는 것은 조선 시대 이래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여전한 가운데, 여전히 사회적으로는 '남성'들을 우월적 존재로 인정하여, '군대'등의 사회적 의무를 비롯하여, 데이트 비용, 결혼 비용 등 각종 의무를 부담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현실적으로는 사회, 경제적으로 더 이상 '지배 계급'으로서의 '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보장 받을 수 없는 2030 세대 남자들이 느끼는 정서적, 현실적 괴리감이 '김치녀'를 비롯한 '양성 평등' 등의 극단적 주장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심리학자와 함께 '데이트'를 통해 짚어본 현실을 '웃프다'. 남성들은 '관계'에 의한 주도성을 강요받으며 의식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자 하며, 그 결과는 그들이 슬그머니 자기 편으로 땡겨 온 '영수증'으로 귀결된다. 문제는 이런 '시뮬레이션'이라도 된 것처럼 동일하게 드러난 남녀의 데이트 과정에서의 역할 관습이, 이후 결혼까지 이어지는 남녀간의 역학 관계를 규정짓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취직'보다는 '실업'과 '비정규직'이 익숙한 2030 세대에게 아버지 세대로부터 이어진 이러한 여전한 성역할은 이제 그들의 '딜레마'로 작동한다. 그들은 여전히 '아버지'처럼 '가부장'이 되어야 하는 정서적 각인에 시달리지만, 현실 속 그들은 그것을 버텨낼 만큼 '특권'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허지웅의 쾌도난마처럼, '남녀 갈등'이라는 인터넷 세상의 지옥도는 결국 계급 갈등 등 현실 갈등의 또 다른 현상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사회, 경제적으로 불안한 사회에서, 그 사회의 약한 고리인 외국인 노동자, 동성애자 들에 대한 반발이 드러나는 것처럼, '실업'이 일상화되어가는 2030 세대는 그 불만을 '남녀 평등'의 문제로 분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pd수첩>은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통해 이런 결론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방송 후의 논란을 촉발 한 것은?
하지만 <pd수첩> 측의 이런 선의의 의도와 달리, 8월 4일 방영분이 방송 된후 동 방송 게시판은 물론 각종 인터넷 사이트들은 방송 내용과 관련된 논란으로 활활 타올랐다. 

무엇보다 논란이 된 것은, '여성 혐오' 현상의 예로 등장한 '김치녀'와, 그에 대한 사이트를 운영하는 '양성 평등' 주장 운영자의 적절성때문이었다. '혐오' 현상의 두드러진 예로 부터 시작하겠다는 제작진의 선의의 의도는, 그와 달리, 오히려 '김치녀'에 대한 편견을 드러냈을 뿐이라는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남성 사이트 운영자 역시 보편적인 '양성 평등'의 예로는 부적절했다는 중론이다. 

또한 그 뿐만 아니라, 전개 과정에서, 남녀에게 가중되는 다른 부담을 설명하기 위해,  문제가 되었던 '김치녀'와 비슷한 실험 예를 등장시킨 것도 문제가 되었다. '김치녀'에서처럼 남성은 무릎을 끓고 여성에게 명품 백을 선물하고, 그것을 보며 반색을 하는 여성들과 난감해 하는 남성들의 반응을 일반화한 것 역시 논란을 촉발시켰다. 

이런 논란을 통해 역설적으로 짚어볼 수 있는 것은 평소같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다큐 프로그램조차, 그것이 '남녀갈등'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감하게 반응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만큼 우리 사회 '남녀 갈등'의 수위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비록 제작진이 적절치 못한 예를 들어 설명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래서 오히려 '남녀 갈등'을 조장시키는 측면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남녀 갈등은, 오히려 '남성의 성 역할'의 과도기적 혼란과, 사회 경제적 부조응의 문제라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논란은 그런 결론의 적절성을 차치하고, 드러난 현상의 적절성 여부만을 놓고 들끓고 있다는 점에서 아쉽다. 오히려, 그를 통해 한번쯤은 생각 해 볼만한 문제였던 사회적, 계급적 갈등을 내포한 '남녀 갈등'이, 쑤셔놓은 벌집처럼 되어버렸을 뿐이다. 이는 제작진의 어설픈 접근의 문제, 그리고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 대한 미약한 전개가 무엇보다 큰 이유이겠지만, 아직은 무르익지 않은, 아니 무르익으려고 조차 하지 않은 '남녀 갈등'에 대한 대중적 인식 역시 한 몫을 하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다. 불쾌함을 억누르고 한번쯤 생각해 볼 사회적 성숙이 아쉽다. 
by meditator 2015. 8. 5. 16:12

5월 7일과 14일 <sbs스페셜>에는 하얀 가면을 쓴 일군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들은 바로 '의사'였다. '병원의 고백'이라는 2부작을 통해 '의료계'의 현실을 현장의 목소리로 토로했던 '의사'들은 자기 고발적인 프로그램의 내용때문에 얼굴을 드러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숨기고 낱낱이 의료계의 현실을 들려준 덕분에, <sbs스페셜>은 '의료수가'로 인해 히포크라테스 선서 대신, 주판알을 튕겨야 살아남는 의료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이제 7월 26일 의사들은 다시 한번 '하얀 가면'을 썼다. 바로 26일 자정을 기해 마지막 남은 메르스 환자가 격리에서 해제된, 사실상 종식된 메르스를 복기하기 위해서이다. 



메르스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중동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신종 베타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되는 중동 호흡기 증후군 메르스는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병된 후 3년간 453명의 사망자를 내었지만 백신이 개발되지 않아 공포의 대상이었다. 

<sbs스페셜-메르스의 고백>은 메르스 바이러스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바레인에 다녀온 첫 번째 환자를 숙주로 그 어떤 제재도 받지 않고 가뿐히 대한민국에 입국한 메르스, 그로부터 186명의 확진자와, 6729명에 이르는 격리자, 그리고 36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 시설이라 자타의 공인을 받았던 삼성 서울 병원을 비롯하여 몇몇 병원을 '자체 폐쇄'이르는 병원 시스템의 마비를 가져왔다. 과연, 이토록 무방비하게 대한민국이 '메르스'에 당하게 되었는지 jtbc <썰전>의 이철희 소장과 조동찬 의학 전문 기자가 각계 전문가와 현장 의료진, 그리고 보건 당국자들을 만나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메르스 사태'와 관련하여 전 사회가 경악했던 가장 큰 이유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외래의 바이러스 질환에 이토록 무방비하게 무너졌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로 들어본 <sbs스페셜>을 통해, 이전의 '병원의 고백'처럼 시청자들은 그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접하게 된다. 


평택 성모 병원에서 시작된 메르스, 하지만 첫 번째 감염자가 확진을 받을 때까지의 시기는 늦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현장 의료진의 반응은 뜻밖이다. 고열의 환자를 이름조차 낯선 '메르스'라 의심했던 '의사'를 '의대 시절 공부를 잘 했구나'란 감탄의 반응을 보이고, 확진이 늦어진 상황에 대해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니란 이유로 확인조차 하러 들지 않은 '질병 감염 관리 본부'의 늦장 대처가 짚어진다. 하지만, 그건 '메뉴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바이러스성 질환에 대한 '메뉴얼'은 있었지만, '메뉴얼'대로 시스템을 가동하여 '긁어부스럼'을 만들려고 하지 않은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이 메르스 사태를 확산시켰음이 짚어진다. 그저 병원 복도에 잠시만 않아있어도 알아차릴 수 있는 상황을. 책임질 위치에 있는 그 누구도 '현장'에 나가보지 않는 '안일한' 태도가 결국 '메르스'를 확산시킨 주범이었음을 확인시켜준다. 

나아가 어떻게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이! 라는 전국민적 경악을 낳았던 '삼성 서울 병원'의 무능도 짚는다. 원장 위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사장'이라는 존재가 삼성 서울 병원을 '의료'의 공익성보다는 '이윤 집단'으로서의 가치를 우선하게 함으로써 '전염병'대응에 무능하게 대처하도록 했음을 지적한다. 이는 결국 '병원의 고백'의 연장 선상이다. 대한민국의 의료체계가 '공익' 성보다는 '돈벌이'에 우선하는 현실이 다시 한번 까발려진 것이다. 또한 '삼성'이라는 체계가 가진 습성인 '비밀주의'가 현장에서 일하는 의사들 내에서 조차 정보가 공유되지 않도록 하여, 메르스에 대한 대처를 '할 수 없는' 체계로서 삼성 서울 병원을 만들었다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결국은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의 붕괴, 질병 관리 시스템의 무능
'비밀주의'는 삼성의 습성만이 아니었다. 현장의 의사들조차 '메르스'에 대해 알 수 없어 감염자가 마구 돌아다니게 방치했던 상황, 결국 박원순 서울 시장의 한밤 기자 회견을 봇물이 터져버린 메르스 정보 공유의 문제도 다루어 진다. 감염 분야 전문가들의 입장에 바라본 박원순 시장의 정보 공개 기자 회견의 정당성 여부에서 부터 시작하여, '전염병' 대응에 있어 무지하고, 무능력했던 정부의 대처 시스템의 원인도 적나라하게 짚어본다. 결국 '슈퍼 전파자'라는 희생양을 만들어 내고만 시스템의 무능을 드러낸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미 ' 병원의 고백'에서 부터 비판된 대한민국의 의료 현실, 의료 수가배분의 문제가 다시 한번 지적된다. 1인당 감염 관리료 150원인 대한민국의 현실, 그 비용을 가지고 정부는 '음압 병동'을 짓고 '바이러스성 질환'에 대처하라고 한다고 현장의 의료진을 입을 모은다. 이는 결국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고. 



질병 관리 본부 등 정부 측 관계자는 이 정도면 '메르스'라는 바이러스 성 질환에 대해 '양호하게' 대처한 것이 아니냐고 정부측은 자부한다고 전한다. 하지만, 정작 '메르스의 고백'을 통해 밝혀진 대한민국 질병 관리 체계의 현실은 '메르스'가 끝났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적 이윤'을 추구하는 거대 병원, 150원의 감염 관리료를 측정한 정부, 그리고 언제라도 다시 발생할 수 있는 '메르스'와 같은 감염성 질환에 대해, '이 정도면'하며 자부하며 '박원순 사태'가 아니었다면 끝까지 '정보 공개'조차 했을까 의심스러운 관료들, 심지어 정부의 발표 그 순간에조차, 국민들의 건강보다, 그 누군가의 이해가 우선되는 시스템은 결국 또 다른 '메르스'의 발병과' 또 다른 '슈퍼 전파자'라는 희생양은 필요충분 조건이 됨을 자연스레 이해시킨다. 

<sbs스페셜-메르스의 고백>은 몇 달간 겪었던 메르스 사태, 그리고 그로 인한 다수의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이 그저 '메르스'라는 우연적 요소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데 주력한다. 이미 '병원의 고백'을 통해 고발하려고 했던  영리 산업이 되어버린 '의료계의 현실'과 그것을 방조하는 정부 정책의 연장 선상에서 이번 '메르스' 사태를 다루고자 한다. 달라지지 않을 현실, 여전한 시스템의 무능, 그 속에서 환자 0명, 마지막 격리자의 해제로 '메르스 사태' 종식을 선포하려는 정부의 발표는 그저 무수한 지뢰 중 하나를 누군가의 희생으로 제거한 것에 불과하다. 

by meditator 2015. 7. 27. 07:02

2008년 요미우리 신문발 보도로 한일 정상 회담 과정에서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란 표현으로 정체성을 의심받았던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를 4개월여 남기고 독도를 깜짝 방문했다. 이로써 이명박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로 독도를 방문한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의 독도 방문으로 오히려 독도는 국제적 분쟁지역으로 부각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일본내 반한 감정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안그래도 일본내 끝없는 불황의 지속으로 재일 외국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감정이 격해지고 있는 시점, 이명박 전 대통령은 그 상황의 예봉을 한국인으로 돌리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에 이어진 박근혜 대통령의 냉랭하다 못해 '소원'해진 한일 외교 정책, 그리고 그런 한국의 태도에 맞불을 놓기라도 한 일본 정부의 반한 시위 등 혐한 감정에 대한 암묵적 방조는 2002년 월드컵, 그리고 드라마 <겨울 연가>, 이후 동방신기 등 아이돌 그룹의 인기로 융성했던 한류 붐의 침체기를 불러온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한류'라는 막연한 문화 현상, 혹은 문화를 빙자한 산업으로 인식되고 있는 '한류', 하지만 실제 일본에서 '한류'는 '신오쿠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한 문화 컨텐츠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고, 그 속에는 거기에 깃들어 살아가는 재일 한국인 뉴커머들이 있다. 



신오쿠보 화려한 영광과, 긴 그늘
신오쿠보 지역이 원래부터 번성했던 상업지구는 아니었다. 일본 신주쿠에서 10분 남짓 신오쿠보, 한류 거리, 코리아 타운이라 불리어지는 이곳은 애초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이 많이 다니던 공장 주변에, 한인들을 위한 식당, 가게들에서 그 유래를 추정한다. 하지만, 그때는 코리아 타운이라 불리워지지 않았다. 그저 퇴폐 유흥 업소들이 즐비한 후미진 골목이었을 뿐이다. 그러던 곳이 한류 열풍과 더불어 화려하게 만개했다. 

하도 길을 메운 인파가 많아서, 심지어 '걷다가 서지 마시오'라고 했던 이곳, 한류가 인기를 끌면서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 트렌드가 되며, 신오쿠보를 중심으로 한국 식당, 화장품, 한류 인기 상품을 파는 곳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분위기를 급락시켰다. 무엇보다 일왕에 대한 남다른 외경감을 가진 일본인들에게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 사죄 발언은 감정적 충격파가 컸다. 그에 이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단 한번도 이루어 지지 않는 정상 회담으로 양국의 냉각 분위기는 더해졌고, 그는 곧 일본 내 한류 열풍에 찬물을 끼얹었다. 



한류가 붐을 이루었을 때는 지상파 방송에서도 한국 문화 등에 대한 소개가 자주 등장하여 일본 문화 전반에 한국에 대한 접근성을 용이하게 했다. 하지만 이제 냉각된 한일 관계는 그 자리를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가 대신한다. 그리고 신오쿠보 중심가에서는 혐한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겨진 상인들은 한류 붐을 타고 높아진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미노게임처럼 파산 대열에 빠져들고 만다. 남아있는 상인들도, 혐한 시위대가 던진 빨간 페인트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대한민국'이라는 간판을 가리고, 가게에서 손님을 맞는 대신, 도시락 배달을 한다. 

정부의 정책은 정권의 입맛에 따라 변하고, 산업으로서의 한류는 편의적으로 흐름이 달라지지만, 그 자리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쉽게 그 곳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한때는 tv에 소개되기도 했던, 재료가 없다며 사람들의 줄을 끊기도 했던 호떡 장수는 '화양연화'처럼 그 시절을 회고할 뿐이다. 그나마 이전에 돈을 벌어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은 나은 편이다. 문을 닫은 가게들이 즐비하고, 파산 신청을 한 사람들은 일본에서도, 그렇다고 이제 한국으로도 발길을 돌리지 못해 방황한다. 



물론 정부의 냉각된 외교, 한 철 장사같았던 한류 열풍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신오쿠보 상권의 한계도 있다. 동아시아 최고라 불리워지는 챠이나타운처럼 문화콘텐츠로서의 내실을 키워가지 못한 채 화장품 가게와 한류 상품에만 집중한 상권의 특성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신오쿠보가 인기가 있자 너도나도 몰려들어 동일한 업종에 경쟁이 붙어 스스로 부가가치를 낮춘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혐한이나 헤이트 스피치에 반대하는 일본 내 양심적인 움직임이 등장하고, 혐한시위도 한풀 꺽여 가는 이 즈음, 여전히 신오쿠보를 중심으로 일본내에 자리잡고 살고자 하는 3세대 한인들은 일본 내 공존을 위해 고민한다. 
by meditator 2015. 7. 23. 15:21

지난 2014년 6.4 지방 선거 중 함께 치뤄진 교육감 선거에서 뜨거운 화두는 바로 학생들의 '수면권'에 대한 것이었다. 그에 대한 각 자치권역 교육감들의 선거 공약은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의 '9시 등교', 그리고 충북 김병우 교육감의 '0교시 폐지'였다. 그리고 이런 공약을 앞세워 당선된  진보적 입장의 이들 교육감들은 '성적' 이전에 학생들의 '행복 추구권'을 앞세우며 각각 학생들의 충분한 아침 잠을 위해 '0교시'를 폐지하고, 9시 등교를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2014년 11월 충북 고교생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서 도내 766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70.2%의 학생들이 만족을 표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올해 초 충북의 한 시의원은 '김 교육감의 0교시 폐지 정책으로 '9년은 행복할 지 몰라도 90년 불행할 수도 있다'며 0교시 폐지로 인한 교육량 감소, 학력 저하를 문제 제기하고 나서기도 하였다. 과연, '잠'을 줄여서 수업을 해서 교육량을 늘려야만 학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것인가? '성취'와 '능력'을 위해 개인의 희생과 고통 감수를 당연시하는 '능력 사회'에서 '잠'은 어떤 존재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7월 6일 <mbc다큐 스페셜>이 파헤쳐 본다. 



성공하기 위해 잠을 줄이는 사람들
다큐는 '능력 사회' 속 자신의 능력을 제고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잠을 줄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대표적으로 잠을 줄이는 사례로 등장하는 것은 수능 준비를 하는 고3수험생이다. 수능에서 좀 더 높은 성적을 위해 애쓰는 승엽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성적을 올리기 위해 수면 시간을 절반으로 줄였다. 부족한 잠때문에 아침 밥상에서도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는 승엽이, 그런 승엽이가 안타까워 엄마는 고기 반찬에 영양제까지 챙겨 먹이지만,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은 승엽이의 고민거리다. 
다음으로 등장한 것은 직장인 김씨, 높은 연봉의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지만, 유학을 다녀온 동료들의 존재가 부담스러운 김씨가 선택한 방법은 남들보다 잠을 덜 자는 것이다. 새벽 서너시가 되도록 수학 문제를 풀고, 독서를 하며 자신을 다져가는 김씨, 하지만 일상의 그는 늘 '피곤에 쩔어있다'. 

보다 나은 능력을 얻기 위해 잠을 줄이고자 하는 것은 대한민국 사회만의 화두가 아니다. 자본신자유주의가 점령한 세계 곳곳에서 '능력 사회' 속에서 생존하고 성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잠을 줄이고' 있다. 미국 아이비 리그 대학생들의 20%가 잠을 덜 잘 수 있는 '스마트 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하고, 뇌에 전기 자극을 주어 잠을 쫓는 '경두개직류 자극장치(TDCS)가 인기를 끈다. 우리 사회에서 잠을 쫓는 각종 각성 음료는 학생 층을 중심으로 일상화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위적으로 잠을 쫓는 방식, 성공을 위해 잠을 희생하는 방법이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일까? <MBC다큐 스페셜>은 이에 대해 설명해 보고자 한다. 



잠, 생존을 위해, 성공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
잠을 줄여 자신의 충전에 사용하는 직장인 김씨, 그를 진단한 의료진은 그의 건강 상태가 시한부 폭탄과도 같다고 위험을 경고한다. 즉, 줄어든 수면 시간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불면증까지 나타나고 있는 상태이며, 잠을 자도 숙면을 취하지 못해, 쌓인 만성 피로가 언제 폭발할 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혹은 생존을 위해 가장 만만하게 희생의 제물이 된 잠, 하지만, 그 잠을 줄인 결과는 뜻밖에도 참혹하다. 다큐는, 현대사의 인류에게서 벌어진 엄청난 재앙들이 뜻밖에도 부족한 잠의 결과물임을 밝힌다. 체르노빌을 비롯한 대재앙을 불러 일으킨 각종 사고들 뒤에는 뜻밖에도 '잠이 부족한'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즉 잠은 그저 줄여도 되는 만만한 기능이 아니라, 잠을 줄였을 때 오는 집중력 저하, 인지 능력 감퇴는, '재앙'을 불어올 만한 가공할만한 위험 요소가 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실제 실험에 참가한 대학생들을 상대로 잠을 자는 집단과 잠을 자지 못한 집단으로 나눠 명백한 연구 결과로 그것을 증명한다. 

나아가 잠의 역할에 대해 규명하고 한다. 평생을 잠을 연구해온 학자들을 동원하여, 그리고 실제 실험을 통해 '잠'이 그저 휴식을 넘어, 깨어있는 시간 동안 했던 활동을 정리하고 축적하는 시간임을 밝힌다. 즉, 깨어있는 동안 했던 공부를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잠'은 필수인 것이다. 

다큐는 무조건 잠을 줄인 승엽이와 달리,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잠을 충분히 자며 공부하는, 그래서 오히려 늘 맑은 정신으로 각종 정보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 같은 고등학생 다은이와 수림이의 학습 방식을 바람직한 예로 제시한다. 

실제 '뇌과학'은 우리 뇌를 '도서관'에 비유한다. 즉, 깨어있는 동안 받아들인 각종 정보를, 우리 뇌는 우리가 잠을 잘 동안 차곡차곡 정리하여, 마치 서가에 책을 꼿듯이 자신의 데이터베이스화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잠'을 자지 않는다면, 우리 뇌는 정리되지 않는 정보의 포화 상태가 에 불과하다는 것이 최신 뇌과학의 입장이다.

하지만 이렇게 최신의 과학적 입장이 분명한데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수능 만점자가 나오지 않았다'며, '9년의 행복이 90년의 불행을 낳는다는 담론'이 횡행한다. 그런 여전한 '능력 우선주의' 그리고 '그 희생의 제물로서 잠을 당연시 하는' 지배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MBC다큐 스페셜-잠을 지배하라>의 그 '지배'하고자 하는 방향은 유의미하다. 

단지 아쉬운 것은, 늘 그렇듯이, 승엽이와 수림이, 다은이의 방식 제시처럼, 공부를 잘 하기 위한 '개인의 선택'의 문제처럼 제시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 '잠'의 문제, 그리고 '체르노비' 사고처럼, 사회적 재앙을 불러 일으킨 '잠'의 문제는 개인이 어떤 방식을 택하느냐의 선택이 아니다. 삼교대, 혹은 철야가 시스템으로 강요되는 사회 근본적인 문제이며, 직장인 김씨의 경우처럼 '성공을 위한 강박', 잠을 줄여서 수업량을 늘려야 한다고 하는 '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원인은 사회에 있는데, 선택은 개인으로 귀결되는 다큐의 시선이 아쉽다. 


by meditator 2015. 7. 7. 15:42

7월 2일 종영한 mbc수목 미니 시리즈 <맨도롱 또똣>의 낯선 제목은 제주 방언으로 '기분좋게 따스한'이란 뜻이다. 제주도 방언을 차용한 제목답게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는 제주도에서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주인공은 이정주(강소라 분)는 해녀가 되기를 원하고 해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드라마의 설정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결혼 한 달만에 남편이 죽은 후 '물질'을 하며 아이를 키운 자부심 강한 해녀 김해실(김희정 분)이 있다. 이렇게 <맨도롱 또돗>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해녀와, 그녀들을 키워내는 '해녀 학교'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스타 작가 홍미란 홍정은 두 작가에도 불구하고, 7%대의 낮은 시청률도 드라마도, 그리고 그 드라마가 다루었던 '해녀'의 이야기도 화제를 모으지 못했다. 

반면에 2013년 일본 nhkf를 통해 방영된 <아마짱>은 역시나 도호쿠 북쪽 산 리쿠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일본 해녀, 아마가 되려고 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156부의 이 드라마는 평균 시청률 27%의 인기를 끌었다. 더구나 극중 아이돌 그룹까지 되었던 작은 마을의 소녀가 대지진 이후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가 '아마'가 되는 이야기는 '아마'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조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해녀와 일본의 아마라 불리워지는 해녀, 두 해녀가 두 나라에서 다른 '조명'을 받게 되는 건 '드라마'가 뜨고 안뜨고의 문제일까? 거기엔 단지, 낮은 시청률의 <맨도롱 또돗>과 높은 시청률의 <아마짱>이상의 복잡한 두 나라의 문제들이 얽혀있다. 

세계 문화 유산 등재를 둘러싼 한, 일 양국의 갈등
일본이 <아마짱>을 드라마화한 시기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사회적으로 분위기가 침체되었을 때이다. 그래서 재건을 위한 프로젝트가 필요했고, 거기서 눈에 띤 것이 바로 '아마'였던 것이다.<아마짱>은 일본의 해녀 아마가 일본 여성의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는 '문화 유산'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거기엔 또 하나의 숨겨진 의도가 있다. 다름아닌, 일본의 대표적 '문화 유산'으로 '아마'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굳이 '아마'를 대표적 문화 유산으로 부각시켜야 했을까? 그 배경엔 '해녀, 혹은 '아마'를 둘러싼 한, 일 양국의 문화 콘텐츠 전쟁이 있기 때문이다. 7월 5일 <sbs스페셜>은 이 한일 양국의 문화적 갈등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한 해녀 삼춘의 죽음이다. 제주도에서는 '존중과 친근함를 나타내는 말로 삼춘을 쓰는데, 바로 그 삼춘이라 불리우던 해녀 양석봉 할머니는 86세가 되던 올해 4월 16일 78년을 물질 해오던 바다에서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차가운 겨울 바다도 마다하지 않고, 숨을 멈춰야만 살아갈 수 있는 해녀로 살며 네 아들을 유학까지 시키며 키운 장한 어머니였던 양석봉 할머니는 하지만 결국, 그녀가 평생 살아오던 바다에서 생을 마쳤다. 

그렇게 그 어느 나라의 잠수부도 따라올 수 없는 능력으로 깊은 바닷속을 마다않는 제주 해녀, 그 해녀의 우수성은 전세계인들도 찬사를 보냈고, 이에 제주도는 10년전부터 제주 해녀의 세계 문화 유산 등재를 위해 준비해 왔다. 그런데, 유네스코 본부가 있는 프랑스의 언론들이 제주 해녀가 아닌 일본의 '아마'를 부각시키는 기사들을 내면서 판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본이 뒤늦게 '해녀'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하지만 뒤늦게 뛰어든 일본의 움직임을 빨랐고 체계적이었다. 정부 부처 간 손발이 맞지 않아, 해녀 전시장 하나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아마'의 고향이라는 미에현을 중심으로 한 8개의 현과 정부가 문화 유산 등재를 위해 다각도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학자들에 따르면 일본의 아마가 제주의 해녀를 본딴 것이라는 설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아마의 기원을 3000전까지 당기며 학문적 기원을 마련했고, 미비한 지역적 유산의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각종 '아마 축제'를 마련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본은 공동 등재까지 제안하며 대안까지 마련했다. 결국 10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지방의 엇박자로 인해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한 우리나라는 심사 보류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제주 해녀의 문화 유산 등재는 2016년 하반기에 결정된다. 

문화 유산 등재보다 해녀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존중감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sbs스페셜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그저 한일 양국의 문화 전쟁이 아니다. 정작 제주 해녀를 연구해온 학자는 반문한다. 제주 해녀가 세계 문화 유산 등재가 된다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할 거냐고? 그리고 이 질문의 숨겨진 의미는 문화 유산 등재 전쟁 속에 드러나지 않은 양국 해녀의 위상과 존재에 대한 의문이다. 

2016년 문화 유산 등재를 낙관하는 제주도, 그런데 현재 제주에 남아있는 제주 해녀는 4,415명, 일본의 2174명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이다. 하지만, 들여다 본 실정은 다르다. 지난 3년 사이 여러 가지 이유로 바다를 등진 해녀가 92명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해녀들은 중년 이상의 연배들이다. 호구지책으로 해녀로 살지만 단 한번도 자부심을 느낀 바 없다는 그녀들은 자신의 딸들이 해녀의 삶을 택하겠다면 말리겠다고 입을 모은다. 하루 종일 '물질'을 하는 해녀의 삶은 문화 유산 등재의 대상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자부심의 대상이기보다는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택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하지만 일본의 아마는 다르다. 그저 아이돌 가수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아마가 된다는 드라마 속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서 만난 '아마'들은 한국의 아마들과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다르다. 잠수복을 입고, 큰 물고기가 다가왔을 때 흰 색을 보고 큰 물체인 줄 착각하여 도망가게 흰 천을 뒤집어 쓰고, 허리에 납을 매달고 물질을 하는 모양새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하루 종일 물질을 해야 하는 제주의 해녀들과 달리, '아마'들은 바다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하루 단 두 시간의 물질만을 허용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마들이 '아마가 운영하는 민박'집을 운영하거나 현에서 운영하는 아마 체험장에서 일을 하며 또 다른 일을 병행한다. 그리고 그런 아마의 수입은 월 500만원 정도 경제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수준이다. 하지만 단지 돈벌이 만이 아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아마가 된 제주 해녀의 말처럼, 그저 먹고 살 게 없어서 해녀가 되었다고 보는 한국의 시각이랑, 아마 체험을 하기 위해 관광객이 줄을 선 일본의 처우는 많이 다르다. 그래서 3대를 잇는 아마 가문이 탄생하고,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젊은 여성들이 아마가 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결국 sbs스페셜이 도달한 곳은 우리 사회에서 '해녀'이 존재론이다. 먹고 살게 없어 택하는 직업이란 인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자기 자식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해녀, 그런 사회적 인식과 처우가 달라지지 않는 한, 세계 문화 유산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한일 양국의 해녀 전쟁의 승자는 거창한 드러나보이는 성과가 아니라, 그 사회에서 해녀로서 행복하게 살아갈수 있는 직업적 자부심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sbs스페셜>의 결론이다. 

by meditator 2015. 7. 6. 16:22

2013년 발표된 OECD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1000명당 2.3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혼율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현실적으로 높은 이혼율과 달리 결혼의 또 다른 과정인 '이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경우는 드물다. 그저 연예인들의 이혼 과정을 '가십성 기사'로 다루거나, 혹은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나에게는 발생하지 않을 일이려니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이 우리나라의 '이혼'문제이다. 그러나 결혼 생활을 하는 부부라면 다 공감하겠지만, 살면서 누구나 '이혼을 꿈꾼다'. 여기서 이혼을 꿈꾼다 라는 것은 말 그대로, '꿈을 꾸기'때문이다. 이렇게 이혼을 꿈꾸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는 이혼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SBS스페셜>은 현실로서의 이혼을 생각해 보게 한다. 




결혼의 균열을 위한 카드, 이혼
현실로서의 이혼을 위해 준비한 무시무시한 카드는 생각지도 못한 이혼 서류이다. 그래도 자신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고 있다고 자부하던 30대의 주부에게 남편은 뜬금없이 이혼 서류를 내밀고 집을 나간다. 청천벽력같은 그 소식에 아내는 어떻게든 상황을 추스려보려고 하지만, 이혼 서류 대신 남편의 각서 요구는 오히려 아내의 발목을 잡는다. 주변에서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이혼이 낫다고 하지만 아내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남편의 외도로 평생을 살아온 60대의 주부는 남편이 이제 와 재산을 현금화하여 빼돌리려고 하니, 딸들의 도움을 받아 이혼을 서두른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다가오는 '이혼'이라는 현실, 그래서 <sbs 스페셜>은 결혼 생활의 위기를 겪는 부부에게 '이혼 연습'을 하도록 한다. 최초로 시도되는 '가상 이혼 프로젝트'이다. 그 대상이 된 것은 결혼 10년차 이재은 이경수 부부, 전주의 결혼 2년차 유씨 부부 등이다. 

결혼 10년차 이재은, 이경수 부부, 아이가 없는 이들 부부의 일상은 건조하기가 이를데 없다. 남편은 늦게 들어온 아내의 애교에 짜증을 내고, 멀찍이 앉은 부부의 눈은 tv나 핸드폰에 향해 있다. 한 공간에 있어도 대화 한 마디가 힘든 이들 부부는 잠도 따로 자고, 일상도 따로따로다. 
그런 익숙한 듯 낯선 부부의 일상에 남편 이경수가 이혼 서류를 내밀며 위기의 결혼을 되돌아 보자고 한다. 아내 이재은은 '결혼'을 돌아보기 위한 '가상 이혼'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결혼 2년차 전주의 유씨 부부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가장 자상할 것 남자라 생각하여 결혼 했지만 남편은 집에 들어오면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친구들이 부르면 언제나 ok다. 아내가 불만이라도 터트릴라 치면 그럼 돈을 벌어오든가, 더 잘 하라는 식이다. 결국 참다못한 아내는 이혼 서류를 내민다. 호기롭게 '이혼해'라고 했지만 남편의 심사는 복잡하다. 



현실로서의 이혼을 연습하다
그렇게 각자 이혼 서류를 준비한 부부는, 각자 이혼이라는 현실에 대해 다가간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라며 좌절하던 아내 이재은은, 받아든 이혼 서류의 현실을 알아보기 위해 도움을 요청한다. '이혼 플래너'에, 변호사를 통해 만나본 이혼, 이혼 서류는 단 한 장이지만, 그 이혼이 합의하기 위해, 혹은 결국은 합의가 되지 않아 재판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전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구동성이다. 그저 막연하게 생각하던 이혼이, 실질적 과정으로 이어지면 재산 분할 등의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온다. 가진 거 주면 돼지 라고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이혼 후의 현실은 또 다르다. 이혼의 현실과 마주한 이재은에게 든 마음은 '그저 이런 과정을 겪고 싶지 않다' 뿐이다. 

전주의 아내 유씨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을 거 같아, 이혼을 알아보기 위해 나선 아내, 그녀 역시 이혼의 현실 앞에서 좌절한다. 결혼 후 2년간 전업 주부로 살아온 그녀에게 생각보다 재산 분할이 적다는 사실 앞에 좌절하고, 또 300을 요구한 자신의 보육비에, 답한 50만원의 현실, 그 조차도 받기가 쉽지 않다는 또 다른 이면의 현실에 좌절한다. 게다가 유명인들의 엄청난 위자료는 보통 서민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찾아간 친정 엄마는 그러니 저러니 해도 남편 그늘이 낫다며 참고 살라고 한다. 

결국 이혼을 준비한 두 부부가 도달한 곳은 그대로 이혼보다는 결혼이 낫다이다. 아내 이재은은 그래서 이혼서류를 쓰는 대신 남편에게 편지를 쓰고, 남편은 한번 더 아내를 보다듬겠다고 다짐을 한다. 아내 없이 아이와 하루를 보낸 남편은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고, 이혼의 현실을 엿본 아내는 결국 남편과 아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sbs스페셜-이혼 연습이혼을 꿈꾸는 당신에게>는 생각지도 못하게 이혼 통보를 받은 아내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이혼' 과정을 도와주기 보다는 '이혼'이라는 과정이 이혼을 꿈꾸듯 그리 만만치 않은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유명인들의 이혼 과정에서 보이는 진흙탕 싸움이라는 것이 이혼 과정에서 누구나 겪게 되는 과정이라는 것, 그저 부부의 이혼으로 시작된 과정은 결국 육아, 재산권의 문제로 이어지며 이전투구의 현장이 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리기에 주력한다. 거기에 대한민국 현실에서 위자료가 그리 만만하게 얻어낼 만한 것이 아니며, 얻어내도 이혼 후의 현실을 보장하기에는 미흡하다는 것도 알려준다. 심지어 이혼 후 아이들의 양육비는 턱없이 적거나, 받기조차 힘든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충실한다. 

그리고 그 취지에 걸맞게 '이혼 연습'을 하던 두 부부는 다시 맘잡고 잘 살아 보자고 미소를 띠고 결혼 생활로 돌아간다. 물론 이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혼이라는 게 생각만큼 녹록치 않은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취지는 성공적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또한 이혼율 1위의 대한민국에서는 하나의 '환타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루 아침에 남편에게 진짜 이혼 서류를 받은 부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부인도 이혼이 녹록치 않으니 참고 각서를 쓰고 남편과 부부로 살아가게 될까? 60평생 참고 산 부인은 남편이 재산을 빼돌려도 두고 보아야 하는 걸까? 분명, 이혼의 현실을 엿보게 해준 성의는 가상하지만, 그 현실의 찬바람에 불가피하게 설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실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야만 물론 현실을 모르고 꿈꾸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가상 이혼 프로젝트'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결혼을 위한 이혼이 아니라, 진짜 '이혼'이 아쉬운 것이다. 

by meditator 2015. 6. 29. 12:07

우리나라의 최저 빈곤층은 정부 통계상으로 2.6%이다. 그러나, 6월 24일 방영된 <추적 60분>은 이런 정부의 통계에 이의를 제기한다.  <추적 60분>이 이날 방송을 통해 찾아낸 방식에 따르면 최저 빈곤층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부 통계의 두 배를 넘어선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를 위해 <추적 60분>이 내세우고 있는 것은 '시간 빈곤', 즉 통계나 수치상으로 잡히지 않는, 삶의 질로써의 '빈곤'의 문제를 접근하기 위해 <추적 60분>은 인간다운 삶의 최저 치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의 빈곤 상태를 짚어봄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방치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숨겨진 빈곤을 폭로한다.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여성들
그렇다면 숨겨진 빈곤층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시간 빈곤'이란 개념은 무엇일까? 
1주일 168시간 중 생존에 필요한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이 주당 근로 시간보다 적을 경우를 '시간 빈곤'으로 정의된다. 2014년 한국 고용 정보원과 미국 레비 경제 연구소가 공동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전체 인구의 42%가 시간 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왜 그 중 여성을 <추적 60분>은 주목했을까? 이렇게 시간 빈곤에 놓여있는 42% 중 여성들, 특히 일하는 엄마들은 직장, 육아, 가사 등 삼중고로 극단적 시간 빈곤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추적 60분>은 실제 사례를 통해 설명해 들어간다. 

학습지 교사로 일하는 한승희씨 그녀의 아침은 초등학생과 어린이집을 다니는 두 아이를 깨워 각각 학교와 어린이집을 보내는 준비를 하는 한편, 빨래를 하는 등 집안 일을 하기 위한 전쟁과 같은 시간으로 채워진다. 단 한 시간 안에 이 모든 일들을 '슈퍼우먼'처럼 해내고 아이들을 각각 학교로, 어린이집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와중에 아픈 작은 아이를 데리고 병원까지 들려야 한다. 아이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바삐 출근 준비를 하는 한승희씨에게 자신을 위한 치장이나, 아침 식사를 위한 시간은 없다. 또 다른 두 아이의 엄마 조은주씨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레비 연구소와 함께 제작진들은 이들의 '시간 빈곤'을 명확하기 위해 이들의 일주일을 시간표로 만들어 분석해 본다. 그 결과, 일주일에 35시간이 부족한 한승희씨, 27시간이 부족한 조은주씨는 극단적 시간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드러났다. 이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부족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결국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한 먹고 자는 시간을 줄이며 살아간다. 대부분의 일하는 여성들은 결혼의 동반자인 남편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온전히 가사, 육아의 책임을 전담하고 있느라 '시간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시간 빈곤 층 42% 중 56%가 여성이었다. 4인 가족 평균 가사 노동 시간이 55이었을 때 50시간을 쓰는 한승희씨와, 53시간을 쓰는 조은주씨가 얼마나 편중된 가사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소득이 낮아질 수록 더 심해지는 시간 빈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계층에 따라 더 심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한승희씨의 경우, 그녀의 부족한 '시간 빈곤'을 친정 어머니의 도움을 채워간다. 그녀가 퇴근하기까지의 '육아'를 친정 어머님이 맡아 주신다. 조은주씨 역시 친정 어머님이 도와주시다 다치시는 바람에, 조은주씨 자신이 일을 줄이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형편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맞벌이를 하는 조은주씨는 아이들을 맡기고 밤 늦게까지 일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경제적 불안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계층이 낮아질 수록 상황은 더 심각해 진다. 어린이 집에서 보육 교사로 일하며 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이제 겨우 초등학생인 큰 아이들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이 가정에서 엄마의 시간 빈곤을 채우는 건 아이들이다. 하지만 엄마는 지금의 경제 형편에서 아이들이 정상적인 학교 과정조차 마칠 수 있을까 불안해 한다. 

그래도 맞벌이 부부의 형편은 낮다. 한 부모 가정, 그 중에서도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우는 가정의 형편은 잔혹하다. 
50대의 신영주씨의 하루 일과는 끝없이 이어지는 아르바이트의 연속이다. 새벽 2시 신문 배달로 시작된 그녀의 일과는 공중 화장실 청소, 장애인 돌보미, 노인 돌보미 등으로 이어진다. 20년을 그렇게 살아온 그녀, 그녀는 '자신이 죽어야 이 노동이 끝날 것'이라며 자조적으로 말한다. 
40대의 여성 가장 이지선씨가 일하는 곳은 마트이다. 집에서 두 시간 거리의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는 야근을 하며 받는 택시비를 아껴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늦은 밤 두 시간 여의 거리를 버스를 타고 으슥한 밤길을 걷는다. 덕분에 아침 등교를 하는 중학생 딸 아이의 얼굴은 당연히 마주할 수가 없다. 



왜 소득이 낮을 수록 '시간 빈곤'은 심해지는 것일까? 정부는 여성들을 위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다지만, 정부가 자신하는 많은 일자리의 대부분은 여성을 정당한 노동 인력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보조적 '아르바이트' 개념의 노동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20대의 남성과 여성의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 비율이 비슷한 반면, 나이가 들어가면 여성과 남성의 비정규직 노동 비율은 현격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전체 노동자 중 남성의 비정규직 비율이 33.7%인데 반해,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60.3%이고, 그 중 39.1%가 저임금 계층이다. 최저 임금을 받는 엄마들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노동에 투여할 수 밖에 없고, 거기에 가사, 육아까지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여성의 시간 빈곤'의 실체다. 

따라서 <추적 60분>이 주장하는 것은 노동 정책에서 지금까지 논외로 치부되었던 가사, 육아 노동의 시간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배려하지 않는 노동 정책이 계속되는 한, 가사, 육아와, 경제적 부담으로 인한 '이중 부담'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시간 빈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숨겨진 최저 빈곤층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저 빈곤층 2.6%의 통계 속에 숨겨진 '시간빈곤'에 시달리며 경제적 부담까지 짊어진 여성 노동자의 삶의 빈곤을 들여다 볼 때이다. 
by meditator 2015. 6. 25. 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