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나이 오십에 이르러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2016년 대한민국 오십대의 남자들은 하늘의 뜻을 알기는 커녕, 평생 그들이 믿고 살아왔던 뜻이 무너지는 '청천벽력'을 겪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바로 이제 '가정'으로 돌아온 그들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들 때문이다. 




'정말 이혼이란 건 생각도 안해 봤어요. 낼 모레면 60이고, 조금 있으면 7~80인데, 이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박승호(가명)

그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이혼이 중년 남자들에게 현실이 됐다. 대한민국 중년 남성 10명 중 아홉 명이 아내로 부터 이혼을 요구받는다고 한다. 전체 이혼 건수에서 중년의 이혼이 젊은 층의 이혼을 뛰어넘은 지도 오래, 1995년 8.2%에 불과했던 중년의 이혼이 2015년 29.9%로 늘었다. 그리고 그 대다수가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라 한다. 

<sbs 스페셜>은 중년 이혼의 현실을 밝히기 위해 이혼 위기에 놓인, 혹은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한 남성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풀어간다. 58세 배정효씨는 은퇴 후 전원 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의 전원 주택에는 아내가 없다. 그는 어머니가 들어가면 뭐가 떨어진다고 질색을 하던 주방에 들어가 홀로 끼니를 챙긴다. 그곳에 부재한 그의 아내는 일산에서 홀로 어린이집을 준비중이다. 아직 이혼을 하지 않은 주말 부부인 이들, 하지만 만나서 반가운 것도 잠시, 하루를 못넘기고 해묵은 감정을 들춰내며 언성을 높인다. 그리고 그 싸움의 끝에 아내는 이혼을 들먹인다. 젊은 시절 동시 통역사로 일하던 강철규씨는 동시 통역 일을 그만두고 택시 운전을 하게 되면서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 받았고, 그 결과 지금 산속 주차장의 작은 승합차에서 홀로 생활하는 신세가 되었다. 역시나 중년의 이혼남 박승호씨(가명)는 매일 눈물의 일기를 쓰며 아내에게 빌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혼'이었다. 





자기가 잘못해서 전과가 있거나 이래서 당하는거야 어디다가 하소연도 못하지. 그런데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도 바라보는 시선은 적으로 바라보고 이러니까 정말 이거는 아니지 진짜 -배정효

이혼을 요구당하거나, 이혼을 당한(?) 남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저 평생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는데, 경제적으로 무능력해지자 아내와 가족이 자신을 버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내와 이혼을 했을 뿐인데 공통적으로 가족으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그들의 가족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혼을 당한 남성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이혼 이유를 경제적인 이유에서 찾는 반면, 이혼을 요구한 아내들의 대답은 다르다. 대부분 우리나라 이혼 부부들의 원인이 '경제'보다, '성격 차이'이듯이 아내들은 경제적인 어려움보다도 참을 수 없는 남편의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태도를 이혼의 제일 우선으로 든다.

이렇게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이혼을 했음에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중년 부부의 위기를 다큐는 붕괴하는 가부장제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이혼 상담사임에도 남과 여의 사고방식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대한민국의 남성들에게 남편의 자리란 곧 경제적 책임을 떠맡는 자리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가정을 내팽겨 둔 채 바깥 생활에 몰두했고, 가정에 돌아와  바깥에 나가 돈을 번 자신을 행세했다. 전통적인 아내들이 그렇게 바깥일을 하는 남편의 무관심과 폭압적인 태도, 언사를 '가족'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인고'해 왔다면 2016년 대한민국의 아내들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데 현재 위기의 시발점이 있다. 

그 예전 50이면 인생의 고개 2/3을 넘어선 노년기에 접어든 시기라면 100세 시대가 일컫는 현대의 50은 그 예전 40대처럼 아직도 한참을 더 살아내야 하는 말 그대로 '미들 에이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을 키우기 위해 사사건건 아내를 무시하고 '노예'처럼 부렸던 남편을 참아왔던 아내는 이제 '자식'을 키우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시기도 지나고, 돈도 벌어오지 않는 남편을 참아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남편들은 돈을 벌어오지 않아 자신을 버렸다지만, 그저 '돈'에 의지해 가정 내에서 군주처럼 살아왔던 가부장적 남편들에겐 아내는 물론 다른 가족들까지의 외면이 필연적 결과이다. 시대가 변화하고 아내와 가족들의 인식이 변화하는 동안 마치 기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공룡처럼 변화된 세상에서 여전히 '가부장'이기를 원하는 남편들의 부적응이 엄청난 중년 이혼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다큐는 진단한다. 

나는 그동안 주로 무슨 일을 했느냐 하면 주로 토목에 도로도 만들고 교량도 만들고 뭐 이런 일을 주로 했어요. 그래서 힘들었으니까 집에 와서라도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좀 대우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거야.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진짜 그건 일도 아니더라고." -배정효 

남자 이혼상담사는 여성 상담사들에게 여자들과는 다른 남자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그의 부탁을 받은 여성들의 표정은 냉랭하다. 그도 그럴 것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을 살아온 여성들은 그 남성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맞추려 애쓰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스로 '노예'처럼 살았다 생각한 여성들은 그래서 이혼 앞에 두려울 것이 없다. 남편들은 이혼으로 전부를 잃지만, 오히려 여성들은 이혼을 통해 '자유'로워진다 생각한다. 

그래서 다큐의 모색은 다시 한번 남성의 입장이 되보는 대신, 아내의 입장을 이해하는 쪽을 택한다. 전원 생활을 하며 홀로 끼니를 때우던 배정효씨는 몇 달생의 생활 후에야 비로소 지난 세월 아내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돈을 번다고 유세를 하며 바깥을 하는 동안, 아내는 매일 매일 쳇바퀴처럼 되풀이 되는 가사 노동에 시들어 왔었다는 것을. 막상 하루만 안해도 태가 나는 가사 노동을 해보고 토목 사업을 했던 배정효씨는 자신이 했던 바깥 일이 별게 아님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아내가 하겠다는 어린이집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물론 여전히 그는 다음 세상에 여자로 태어난 자신과 같은 남편과 살아봐야 온전히 아내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가부장의 자리에서 내려온 그의 존재만으로도 아내는 그를 견대낼 여유가 생긴다. 

아내는 물론 가족마저 잃고 싶지 않다면 더 늦기 전에 얼른 남편들이 '가부장'의 자리에서 내려올 것을 다큐는 권한다. '돈'마저도 그의 편이 되지 않는 세상에서. 


by meditator 2016. 4. 18. 05:25

그 어느 때보다도 투표에 대한 회의가 팽배해진 선거를 앞두고 있다. 60대 이상이 선거인의 60%를 넘는 이번 선거는 어쩌면 이미 그 결과가 불을 보듯 빤히 보인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 그렇다. 선거를 해야 하지만 막상 '뽑을 놈'이 없다는게 대다수 투표에 회의적인 사람들의 입장이다. 혹은 해봤자 세상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고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한 표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은 어쩐지 설득력이 떨어진다. 하다못해 선거라도 해야 욕할 자격이 생기지 않겠냐고 우겨보기도 하지만 그 역시 낯부끄럽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은 어떨까? 4월 9일과 10일 오후 4시 45분에 방영된 ebs특별 기회 <THE VOTE- 투표(이하 투표)>는 굳이 우리의 상황을 들이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2부작 다큐를 보고 나면, 비로소 우리가 선거를 해야 하는 의미를 제대로 배운 듯하다. 많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선거를 하고 싶기보다, 정치와 정치인이 싫어지게 만드는 종편의 시사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이렇다 할 선거 기획이 없는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시점, 그래서 EBS의 <투표>는 더욱 소중하다. 




1부 인간의 권리, 당신의 한표 
우리가 지난 학창 시절에 배운 선거는 그저 달달 외어야 하는 사회 과목 중 한 부분에 불과했다. 보통 선거 universal suffrage 재산, 신분, 성별, 교육 등의 제한을 두지 않고 일정한 연령에 달하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거권의 의미는 그저 틀리면 안되는 시험 문제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 평범한 단어에 숨겨져 있는 핏빛의 역사를 다큐는 밝힌다. 

다큐는 1913년 영국 엣섭 더비 경마장에서 시작된다. 말들이 결승점을 향해 달려오는 오래된 필름, 그곳에 한 여인이 질주하는 말들 사이로 뛰어든다. 당연히 여인은 말들에 짓밟혔고 그로 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이름은 에밀리 데이비스, 당시 영국은 여성에게 투표권은 물론 법적 권리도 보장되지 않는 사회였다. 여성들은 일할 기회가 부여되지 않아 기껏 할 수 있는 일이 하녀였고, 결혼하면 재산조차 남편에게 귀속되어야 하는 이등 시민이었다. 당연히 교육의 기회는 제공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여성들은 자신들의 법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여성 투표권 운동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9차례나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던 에밀리 데이비스는 최후의 수단으로 왕가의 말들이 참가하는 경주에 자신을 던졌다. 그녀의 장례식엔 수만 명의 여성들이 동참했으며 그로부터 5년 뒤 영국 정부는 30세 이상의 여성들에게 투표를 허용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간 제약되었던 여성들의 권리는 보장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는 한 표는 처절한 투쟁의 역사라는 걸 다큐는 보여준다. 그 당연한 보통 선거가 세계적으로 시행된 건 20세기 초중반, 에밀리 데이비스와 같은 여성들의 투쟁을 거쳐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투표가 여성에게도 열렸다. 그리고 여성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법적으로 낼 수 있게 되었다. 

여성만이 아니다. 미국에서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은 것은 1920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여성은 백인 여성에 국한된 것이다. 흑인들은 투표권을 얻기 위해 그로부터 40여년의 세월을 싸워야 했다. 1863년 노예 해방과 함께 투표권이 부여되기는 했었다. 하지만 흑인의 지적 능력이나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교묘하게 차별적으로 만들어진 문맹 시험 등이 흑인들의 투표권을 제한했다. 이는 곧 흑인들의 정치적 법적 권리의 제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50년부터 흑인들은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을 벌여나갔다. 1965년 600여 명의 시민들로 부터 시작된 셀마 행진은 그 과정에서 무장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피로 얼룩졌다, 하지만 행진은 멈추지 않았고 마틴 루터 킹도 합류한 2차, 3차 행진을 통해 결국 흑인들은 투표권을 되찾았다. 그렇게 투표권을 얻은 이후 흑인들은 자신들을 대변해 줄 흑인 정치인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차별에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할 수 있었다.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명확하다. 당신이 쉽게 포기하는 그 한 표을 위해 지난 역사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피흘리며 싸운 결과 '보통'의 당신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그 투표권은 곧 인간의 권리이며, 지난 인간의 역사가 마련해준 당신의 자리라는 것이다. 

2부 표의 주인, 누구를 위한 투표인가? 
1부가 당연한 권리 투표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었다면, 2부는 투표의 당위성에 대한 각론이다. 그리고 그걸 위해 다큐는 대통령 선거 중에 있는 미국 퀸시의 한 초등학교로 시선을 옮긴다. 불과 9살에 불과한 아이들, 그 아이들은 '선거'와 관련된 내용을 선생님에게 듣고 문제를 푸는 대신 실제 대통령 선거 과정에 사용된 광고지를 보며 비방 광고를 가려내는 법을 배우거나, 후보자 공약을 분석한다. 그리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인다. 이렇게 이 초등학교는 대선때마다 실제와 가장 근접한 선거 교육을 통해 투표가 국민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리임을 가르친다. 



호주는 투표를 하지 않으면 20달러 벌금을 무는 의무 투표제를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굳이 벌금이 아니더라도 호주 시민들은 투표를 당연한 의무와 권리로 여기며 투표를 안하는 사람을 어리석고 멍청하게 여기는 정서를 지니고 있다. 자신들이 투표를 안하면 정치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며 지역 사회가 관심있는 일이 이루어 지지 않을 거라 믿는다. 이런 호주인의 정서가 투표율 세계 1위 93.1%의 득표율을 만든다. 

아직도 전주민이 광장에 모여 손을 들어 의사를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곳이 남아있는 스위스, 하지만 이런 직접 민주주의의 제도가 아니더라도 3개월에 한번씩 법안 통과 여부 등의 국민 투표를 실시하는 스위스에선 1년에 한 사람이 투표해야 할 일이 3~40여회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국민들은 번거로워하기는 커녕 정부를 압박하는 야당으로서의 국민의 존재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기꺼이 참여한다. 

그 다음은 스웨덴이다. 의무 투표제를 실시하는 나라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이고 있는 나라로, 평균 80%가 넘는 투표율을 보이고 있다. 이런 스웨덴의 투표는 미국과 마찬가지도 어릴 때부터 이루어진 교육의 결과물이다. 학생들은 투표권이 희생과 투쟁의 결과물이라는 걸 배우고, 자신의 지지 정당을 놓고 토론하며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견해를 배양한다. 

투표율이 높은 호주, 스위스, 스웨덴 이들 나라의 또 다른 공통점은 높은 국민 소득과 높은 행복감이다. 우리에겐 그들의 높은 국민 소득이나 복지가 관심사지만, 다큐는 바로 그런 안정된 국민들의 생활과 행복 지수에는 바로 '정치의 힘은 모아진 투표의 힘'에 비례한다는 투표율의 결과물로서의 행복 국가를 증명해 낸다. 또한 이들 국가는 어릴 때부터 교육 과정에서 국민된 권리의 실천으로 선거와 투표를 배우고, 그런 과정 속에서 소속감을 성취하여 민주주의의 주인 의식과 행복감을 고양시킨다고 주장한다. 

다큐는 한번도 우리가 4월 13일 투표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신 그 보통의 선거권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흘린 역사를 나열한다. 그리고 우리가 부러워하는 잘 사는 나라의 투표 교육과 국민의 권리로서 투표를 당연히 여기는 시민 의식을 보여준다. 잘 사는 나라를 부러워하기 전에, 솔선수범하여 우리가 투표로서 우리가 원하는 나라를 만들어 가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2부작의 다큐를 보고 나면 투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홈쇼핑 광고같은 연예인을 동원하지 않아도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배기 선거학 개론이다. 
by meditator 2016. 4. 11. 05:57

얼마전 sbs스페셜에서는 '개저씨'를 다루더니, 이번에는 '꼰대'란다. ebs다큐 프라임은 지난 3월 28일부터 30일까지, 그리고 4월 3일에 <우리집 꼰대> 3부작을 방영했다. '꼰대'에 '개저씨'에, 이 시대 아저씨들의 수난시대다. 그런데, sbs스페셜이 '아저씨, 어쩌다 보니 개저씨'를 통해 젊은 세대와 소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념마저 상실한 아저씨 세대를 '개저씨'라 명명하며 '개만도 못한 어른이라 치욕을 안긴 반면, 제목부터 어딘가 정겨운 다큐 프라임의 <우리집 꼰대>는 소통하지 못한 꼰대 세대와 젊은 세대의 소통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 소통과 공감을 위해 다큐가 시도한 건, 웹툰과 다큐의 콜라보레이션이다. 




웹툰과 다큐의 콜라보 <우리집 꼰대> 
<우리집 꼰대> 3부작의 주인공들은 웹툰 작가들이다. 1부는 웹툰 <세자전>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정이리이리(이정일)작가, 2부는 밀리언셀러 만화가 <힙합>의 김수용 작가, 그리고 3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하는 과정과 그 이후의 일상을 웹툰으로 옮긴 버선버섯(정가연)작가이다. 다큐는 '꼰대'와 관련된 이들의 일상과, 그리고 '꼰대'를 주제로 이들이 그린 다큐를 번갈아 보여주며, 우리 시대 꼰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실제 이 다큐 속 웹툰은 3월 한 달 동안 코믹 스퀘어를 통해 연재되었다. 

그 첫 번째 <우리집 꼰대>는 이정일 작가의 아빠 탈출기이다. 어린 시절 책 여백에다 낙서를 했다고로 무려 297대을 회초리로 때렸던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정일 작가의 아버님은 전형적인 이 시대 꼰대시다. 웹툰 작가로 이젠 제법 이름을 날린 아들이 여전히 남자답지 못하게 방구석에서 만화나 끄적거리는 걸 못마땅하시는 아버님은 소를 키우시고, 아들 이정일 작가는 만화를 그리는 틈틈이 아버님을 돕는다. 하지만 말이 돕는거지, 매양 만화나 그리던 아들이 하는 일은 언제나 아버님의 눈에 차지 않는다. 그러기에 결혼을 앞둔 이정일 작가의 소원은 얼른 빨리 아빠를 탈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집 꼰대>라는 웹툰을 계기로 꼰대 가장 아버지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한 이정일 작가, 그가 만난 것은 말썽꾸러기였던 소년이 세파에 시달리며 꼰대가 되어가는 전사에 대한 공감의 과정이었다. 더욱이 자신의 결혼을 위해 오랫동안 꿈궈왔던 축협 조합장 선거마저 포기하는 아버지를 알게 되며 이정일 작가는 '꼰대' 이전의 가장으로 살아온 한 남자의 이력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아들에 의한 아버지 꼰대 이해기가 되었던 1부와 달리, 2부는 자기도 모르게 꼰대가 되어버린 김수용 작가의 '반성문'이 그 내용이다. 힙합을 좋아하며 취미가 디제잉인 신세대 아저씨 김수용 작가, 그런데 스스로 돌아보니 어느새 딸에게 치마가 짧다, 아들에게 머리가 그게 뭐니 하며 잔소리를 해대는 꼰대가 되어 있다. 이제는 알아주는 만화가가 되었지만, 한때 거리의 바닥을 휩쓸며 '머리 기르고, 염색하고, 춤추던' 반항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던 그가, 그리고 그와 함께 '힙합' 정신을 외치던 힙합 1세대들이 이제는 꼰대가 되어 헤드뱅잉이라도 한번 할라치면 두터운 배가 드러나 버리는 민망한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가장이 되어 저마다 자기 식구들을 건사하느라 춤을, 힙합 정신을 잊고 산다. 아버지가 한때 춤으로 날렸다고 하면, 자식들이 코웃음치는 그런 꼰대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반항의 아이콘조차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을 절감하며 작가는 그런 자신을 견뎌냈던 아버지와, 이제 꼰대가 된 자신을 견디는 아이들을 이해하려 애쓴다. 

꼰대의 반성문에 이어 바톤을 받은 것은 아직은 미성년이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아 신분을 보장받을 그 무엇도 없는 소녀 웹투니스트 정가연 작가와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술이라도 한 잔 걸치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서둘러 방문을 걸어 잠그는 정가연 작가, 작가네 집 식구들은 아버지만 등장하면 모두 '얼음'이 된다. 소통할 수 없는 아버지와 가족들, 아버지는 그런 가족들과 가까워지는 대신, 얼른 밥을 먹고 자신이 좋아하는 옥상에 올라가 골프 연습을 하거나 홀로 tv를 본다.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꼰대였던 아버지, 하지만 학교를 나와 스스로 웹툰을 그리며 돈을 벌기 시작한 정가연 작가는 '세상'의 맛을 조금씩 알면서 자기 가족을 건사하는 가장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 진다. 그래서 아버지 회사에 가서 인턴으로 일도 해보고,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가 한때 문학 소년이었던 아버지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전기 기사가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아버지의 역사를 들으며, 자신과 다르지 않은, 어쩌면 자신이 가장 아버지를 닮았음을 깨달아 간다. 




웹툰을 통한 꼰대의 이해, 그리고 소통
3부작 다큐는 제목이 꼰대인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지칭하는 고집불통 소통 제로의 꼰대 아저씨들에게서 시작된다. 자신들이 살아온 세상에서 자신들이 얻은 신념만을 고집하며, 그 자신이 믿는 방식만을 자식들에게 강요하는 꼰대들, 하지만 다큐는  그런 꼰대들을 그저 '개저씨'로 짖누르지 않는다. 대신, 우리집이란 수식어에 걸맞게, 한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의 그 이면의 전사를 들여다 본다. 한때는 반항의 아이콘이었던 춤쟁이, 교실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말썽꾸러기, 그리고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걸 좋아했던 문학 소년, 지금의 젊은이들처럼 역시 꼰대들에게도 젊은 그 시절이 있었음을 살핀다. 그리고 그들이 세월을 살아내며, 살아내기 위해,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어가며 그 젊은 시절의 꿈들을 잃어가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 추적의 과정은 이제는 꼰대라 불리는 그들을 이해하는 소통의 첫 걸음이 된다. 그리고, 또한 자신을 되돌아 본 꼰대들의 물러섬이기도 하다. 그저 버거운 세상을 살아남았으면 하는 소망이, 고집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왜곡된 믿음이, 어느새 무디어져 버린다. 그리고 그 무뎌진 꼰대리즘의 자리에, 아버지의 역사를 이해한 자식들과의 소통의 싹이 튼다. 

사실 아버지가 살아온 과정을 이해하고, 서로 소통하게 되었다는 결국 이 한 줄로 마무리될 수 있는 3부작 <우리집 꼰대>는 그리 새롭지 않다. 하지만, 꼰대라는 고집스럽고 막무가내의 캐릭터가 이정일, 김수용, 정가연 작가의 웹툰을 통해, 말랑말랑 유연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각형 얼굴형의 고집스런 이정일 작가의 아버지도, 김수용 작가을 꼭 빼어닮았지만 어딘가 통통 튈 듯한 아저씨도, 그리고 예민한 토끼로 표현된 정가연 작가의 아버지도 웹툰 속 인물이 되는 순간, 우선 '꼰대'의 거북함은 한 풀 꺽이며 이해의 폭이 넓혀진다. 또한 그저 세대 소통의 상투적 에피소드도, 각각의 삶 속에서 저마다의 캐릭터로 개성적으로 드러나며, 우리가 그 무시무시하게 밀쳐두는 꼰대라는 '어른'에 대해 조금은 다가서게 만든다. 
by meditator 2016. 4. 4. 17:34

2015년 삼일절 특집극으로 mbc의 <절정>과 kbs의 <눈길>처럼 걸출한 드라마가 방영되었던 것과 달리, 올해는 이렇다 할 삼일절 특집 작품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mbc와 kbs는 각각 삼일절 특집으로 몇 편의 다큐를 준비하여, 삼일절의 의의를 살리고자 하였다. 그 중, <mbc스페셜-일본의 다른 얼굴, 카운터스 행동대>와 kbs의 <발굴 추적, 조선 정예 부대 '타이거 헌터'>는 주목할 만한 새로운 내용을 다루고 있다. 




<mbc 스페셜- 일본의 다른 얼굴, 카운터스 행동대>
삼일절 특집으로 <mbc스페셜>이 다루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이야기이다. 온라인 상에서 움직임이 시작된 재특회(재일 한국인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모임)는 급격하게 진전된 일본 정치의 우경화를 빌미로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한류'가 붐을 이루어 활성화된 신주쿠를 중심으로 일본 전역의 코리안 타운에서 혐한 발언과 인종 차별적 내용이 담긴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를 무차별적으로 퍼부으며 거리를 점령했다. 

'한국인은 모두 죽여라. 남경 대학살이 아닌 코리안 대학살을 실행하자'라는 무시무시한 발언을 서슴치 않는 재특회의 도발에 반기를 든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대응은 있었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경찰의 비호를 받는 재특회의 득세에, 이들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소리는 쉬이 반향을 얻기 힘들었다. 더구나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고고해야 한다'는 일본 시민 운동의 정서는 '막말'을 일삼는 재특회에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2013년 그런 상황을 역전시킨 조직이 등장한다. 바로 카운터스 행동대-오토코구미(남자 조직)이 그것이다. 야쿠자 출신의 다카하시가 조직한, 야쿠자에서, 재일 조선인, 대학 교수까지 다양한 분야의 남자들이 결성한 이 조직은 지금까지 일본 시민 운동의 관행을 깨고, 적극적으로 제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확성기'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소리를 높여 재특회의 헤이트 스피치가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막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행렬을 막기 위해 도로를 점거하는 탈법적 행동도 불사함으로써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다. 

이들의 주장은 극명하다. 이미 일본 사회 내에 1만 5천명 이상의 회원을 규합하고 있으며, 유투부 채널까지 보유하며, 암묵적으로 경찰의 비호까지 받고 있는 재특회의 행동들은 바로 그것 자체가 '폭력'이며, 그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폭력'을 쓰는 것은 '정당방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mbc스페셜>은 '폭력'도 불사하며 재특회에 도전한 카운터스 행동대의 결성과 활동, 해체, 그리고 그 이후의 재결성까지의 일련의 움직임과 정당성, 그리고 이들이 일본 시민 운동에 가져온 영향을 담아내고자 한다. 

대표 다카하시의 말처럼 경찰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종종 '폭력'도 불사했다는 이들의 단호한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재특회의 활동을 저지하는데 효과적이었다는 보여준다. 재특회는 이들의 등장에 헤이트 스피치의 방향을 종종 잃어버리거나, 카운터스 행동대의 과격한 저격으로 함부로 헤이트 스피치를 내뱉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우려와 달리, 이들의 단호한 움직임에 소극적이었던 시민 단체는 물론, 시민들의 반응도 달라졌으며, 그 결과 재특회에 대한 사회적 대응에 대한 여론을 이끌어내는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음을 다큐는 주목한다. 



<발굴 추적, 조선의 정예 부대 '타이거 헌터'>
<타이거 헌터>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얼마전 개봉했던 영화 <대호>의 그 호랑이 사냥꾼이다. 흥행을 하지 못해 여러 사람에게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우리 역사 속에 사라져갔던 일제 시대 호랑이 사냥의 사회사를, '독립운동'이라는 각도에서 새롭게 조명했다. 

그 시작은 영화 <대호>에서 처럼 일제 시대 무차별적으로 벌어진 일제의 호랑이 사냥이다. 1910년 한일 한방을 전후하여 한반도에서 무차별적으로 벌어진 호랑이 사냥, 그 사건의 결과는 그저 영화 속 호랑이 사냥꾼 부자의 슬픈 사연을 넘어 우리 독립 운동사의 궤적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즉 일본은 한일 합방을 전후하여 자신들이 무차별적으로 호랑이를 잡아들인 것과 달리, 총기를 소지한 포수들이 혹시나 무장 독립군으로 돌변할까, 포수들의 총기 사용을 금지시켰다. 그 결과 일본에 의한 무차별적 호랑이 사냥과, 토착 포수들의 총기 압수로 인해 늑대 등에 의한 인명 살상이 늘어났고, 총기를 반납하지 않은 포수들의 만주 탈출과 독립군화가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홍범도 장군의 부대의 주요 인원이 한반도에서 총기 압수에 저항하여 건너간 '산포수'라는 것이다. 즉 1919년을 전후하여 홍범도 장군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쪽, 그리고 만주에서 벌어진 무장 독립 투쟁은 바로 한반도의 산포수들이 주축을 이루었다는 것을 다큐는 밝힌다. 그 자신이 산포수 출신이었던 홍범도 장군, 그리고 역시나 산포수 출신인 차도선 의병장, 그리고 그들의 수하에 50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산을 펄펄 날아다녔던 산포수 출신의 독립군들이 호랑이를 유인하여 잡던 그 전술을 고스란히 활용하여 일본군을 섬멸한 것이 바로 무장 독립 투쟁의 숨겨진 역사라는 것을 다큐는 밝힌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큐는 이런 일제 시대 무장 독립 투쟁 이전, 우리도 알고 있는 신돌석등이 산포수 출신이었음을 필두로 구한말 의병 운동, 그리고 그 이전 신미양요, 병인양요의 외세 에 대항한 각종 전투에서 산포수, 타이거 헌터들이 발군의 활약을 보였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행동을 앞세운 카운터스 행동대의 돌출적인 운동에 주목하다 보니, 과연 이들이 재특회에 대항하게 된 의식의 기저를 살펴보는데는 미흡하다. 왜 하필이면 재일 한국인을 보호하는 행동에 나서게 되었는가에 대한 개연성은 아쉽다. 역시나, 부족한 사료를 바탕으로 타이거 헌터를 역사의 수면 위로 부상시키고자 애쓴 '발굴 추적' 역시 타이거 헌터의 사료를 나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조국을 위해 무기를 든 호랑이 사냥꾼의 다음 행보는또 다른 편을 기대해야 할 듯하다. 하지만, 2016년의 삼일절을 기념하여, 독립 만세라는 상징적인 행위를 넘어, 행동으로 실천하는 한, 일 양국의 역사를 드러낸 mbc와 kbs의 다큐는 묘하게 시의적이다. 마치, 2016년의 우리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거리로 나가 온몸으로 저지하는 카운터스 행동대의 그것이나, 총기를 빼앗기는 대신, 총구를 겨냥한 산포수의 그것이라는 것처럼. 

by meditator 2016. 3. 2. 16:30

tv 라는 매체를 통해 여러 종류의 프로그램들이 만들어 지고 있다. 트렌드리더에 가까운 예능은 당대를 가장 발 빠르게 선도해 간다. 먹방이 유행이다 싶으면 진이 빠질 때까지 먹방을 울궈먹는가 하면, 먹방이 다해간다 싶으면 발 빠르게 '집방'이란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내려 애쓰는 식이다. 그에 반해 드라마는 점점 세대 별 구획이 분명해 져간다. 젊은이들은 아예 공중파에는 시선을 돌리려 하지 않지만, 그럴 수록 주말 드라마나 아침, 저녁 시간대 드라마는 중장년 세대를 위한 철저한 '서비스'정신에 투철해진다. 


하지만, tv를 통해 방영되는 프로그램이 이들 예능과 드라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능이나 드라마 만큼이나, '다큐'도 많이 방영된다. 월요일이면 <다큐 스페셜(mbc)>, 화요일에는 <pd수첩(mbc)>, 수요일엔 < 추적 60분(kbs)>,  목요일 <kbs스페셜(kbs1)> , 토요일 <다큐 공감(kbs1)>, <그것이 알고 싶다> 등 거의 매일 여러가지 성격의 다큐 프로그램이 편성되어 있는가 하면, ebs에서는 <다큐 프라임> 등 거의 매일 한 두 편의 다큐가 편성 방영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지 못하는 '딱딱한' 형식의 다큐는 마치 동네 오래된 빵가게처럼 쉬이 잊혀지곤 한다. 하지만, 묵묵히 고집스런 뚝심으로 자신만의 레시피를 고집하는 쉐프처럼, 사람들의 주목을 쉬이 받지 못하는 다큐는, 속물화되고 세상사에 쉬이 타협하는 다른 프로그램과 달리, 우직하게 우리 사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을 쉬지 않는다. 2월 28일 방영된 <sbs스페셜>과 <다큐 3일>도 마찬가지다. 



단원고, 그 멍에가 된 이름을 다시 불러보다. 
2월 28일 방영된 <sbs스페셜>은 '졸업-학교를 떠날 수 없는 아이들'을 방영했다. 졸업 즈음에 해가 바뀌어 졸업생이 된 단원고 박준혁 군의 이야기를 다룬다. 다큐의 시작은 아이들이 없는 단원고 교실에서 시작된다. 없는 아이들의 빈 자리를 채운 부모님, 그리고 아이들의 출석부를 부르기 시작하는 선생님, 불러도 대답없는 아이들 대신 부모님들이 대답한다. 하지만 그 대답의 끝은 흐느낌으로, 통곡으로 마무리되면서, 600일이 지나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가는, 아닌 적극적으로 잊혀져 가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결코 끝날 수 없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sbs스페셜>은 그저 상기 시키는 것만 하지 않는다. 해가 바뀌고, 다시 해가 바뀌어 어느덧 2학년 준혁이가 친구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이제 홀로 졸업식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을 묵묵히 지켜본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 동네 친구가 곧 학교 친구가 되었던 준혁이, 하지만 이제 준혁이에겐 친구가 없다. 그래서 준혁이는 학교를 다녀 온 후에 밖에 나서지 않는다. 함께 어울릴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종종 교실을 찾아 친구들에게 하고픈 말을 남길 뿐이다. 그런 준혁이가 이제 그렇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긴 학교를 떠날 즈음이 돌아왔다. 



하지만, 단원고의 졸업식은 그저 여느 학교의 졸업식처럼 쉽지 않다. 아이들이 없는 빈교실을 존치하느냐 마냐의 문제를 비롯하여, 여러가지로 갈라진 학교와 학부모들간의 이견, 그리고 이제 600일이 된 상황에서 여전히 아이들을 잊을 수 없는 부모와 그들을 바라보는 차가운 사회의 시선, 거기에 특별전형이라는 '배려(?)'에 대한 따가운 시선 등이, 축하 받아야 할 졸업식을, 따가운 보도 카메라의 세례와, 거기에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듯 학교문을 나서야 하는 학생들의 행렬로 마무리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큐는 그런 소란 가운데 부모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자신을 드러낸 준혁이와, 그의 의연함 뒤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덤덤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사태에 집중하는 대신, 졸업을 했지만 아직은 새로운 세상에 나서기가 두려운 준혁이와 그리고 함께 하지 못한 준혁이의 친구들과 함께, 미처 가보지 못한 제주도 수학 여행을 다녀온다. 물살에 휩쓸려 그만 손을 놓치고 만 아이, 준혁이가 만들어 준 것이면 무엇이든 맛있다 먹어주던 친구, 준혁아 부르던 목소리가 독특해서 지금도 귓가에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친구, 준혁이와 친구들은 그렇게 함께 가지 못한 친구 다섯의 사진을 대신 가지고 추운 제주도의 바람을 맞는다. 



종로구 익선동, 그 오래된, 지켜야 될 골목길
종로구 익선동 166번지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마을이다. 일제 강점기 도시형 한옥 마을로 집단적으로 조성된 이 마을은 2004년 재개발이 무산되는 바람에 유일한 한옥 마을로 잔존하게 되었다. 

<다큐 3일>은 언제난 그렇듯 72시간 동안 이 오래된 한옥 마을을 촘촘히 지켜본다. 하지만, 그저 지켜보는 것만이 아니다. 166번지에 수십년을 살아온 토박이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제 시대 요정과 요릿집등으로 융성했던 이 마을의 역사와, 그리고 이제 세월이 흘러 재개발이 무산되는 바람에 유지될 수 있는 낡은 한옥의 전사를 샅샅이 훑는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저 아직도 버텨내고 있는 한옥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대신,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우려를 담고 지켜본다. 그래서, 그 낡은 골목의 담벼락 하나, 낡은 가구 하나가, 이제 사라지만 다시는 복원하기 힘든 소중한 것임을 문화재 전문 위원의 전문가적 소견을 얹어 명시한다. 애써 동네 주민이 버린 낡은 자개 장롱조차 끌어들이는 그 오래된 한옥 마을을 지키겨 애쓰는 젊은이들의 노력을 그려내며, 전통의 유지를 강조한다. 그리고, 집값이 오르면 버터낼 도리가 없는 오래된 세탁소 주인의 말을 통해, 이곳이 부디 안녕하기를 원하는 소망을 대신한다. 




<sbs스페셜>은 단원고 아이들의 교실을 존치하자고 소리높이지도 않는다. 그저 루시드 폴의 '내 몫까지 살아내 주렴'하는 나즈막한 목소리를 배경으로, 친구들을 잊지 못한 채 힘들어 하던 졸업생이 애써 용기를 내는 모습을 담는다. 특례 입학의 논란 뒤로, 대학을 가는 대신, 친구들을 돌려준다면 그걸 택하겠다는 졸업생의 눈물섞인 토로를 전한다.  특례입학이나, 보상금, 그리고 교실의 유용이란 편협한 잣대 뒤에서 여전히 아이들을 잃은 상처에서 한 발도 나올 수 없는 학부모와, 사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졸업생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저 600일이란 시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노란 리본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다큐3일>도 마찬가지다. 섣부른 젠트리피케이션의 우려 대신, 익선동 166번지의 가치를 부각시킨다. 그곳의 낡은 흙담벼락이, 그리고 동네 주민이 이제는 쓸모 없다 버린 자개 장이 사라지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유산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거기에 깃들여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곳을 훼손시키지 않고 지키려는 젊은이들의 통해, 젠트리피케이션의 거센 물살에 대항해야 할 의미와 가치를 상기시킨다. 

<sbs스페셜>과 <다큐 3일>은 편견과, 무지, 그리고 물질적 이기심에 외로 꼬아진 세상 사람들의 고개를 주물주물, 돌려 놓으려 애쓴다. 

by meditator 2016. 2. 29. 14:53

2월, 꽃샘 추위가 시작되는 달이다. 새싹이 피어오르는 봄을 시샘하듯, 청춘들의 새로운 도약에 발을 걸어 넘어 뜨리는 계절이다. 매해 2월이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디뎌야 하는 젊은이들이지만 불황 사회 속 그들을 맞이하는 건 새 직장 대신, '백수'라는 처연한 이름표이기가 십상이니, 청춘의 꽃샘추위는 스쳐지나가지않고 오래도록 그들을 괴롭힌다. 예술을 전공한 학생들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아니 더 잔혹하다. 




전국 대학 중 연극 영화과는 65곳 정도, 해 마다 여기서 배출되는 졸업생이 2400명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연기'를 전공한 이들은 그 이후 어떤 행보를 걷게 될까? 2014 예체능 출신 대학생들의 취업률은 41.4%로 계열 별 최하위를 기록한다. 하지만, 여기서 더 심각한 것은 전공 관련 취업률이 겨우 5.1%에 불과하다는 참혹한 현실이다. 그래서 언제인가 부터 사시, 행시, 언론 고시와 함께 '연예 고시'라는 말이 생겨났다. 2월 14일 <다큐 3일>은 바로 그 '연예 고시'의 한 현장을 72시간 목도한다. 

잔혹 동화 취업 오디션
서울 예대는 N포 세대 꿈을 찾는 청춘들이라는 부제를 단 '앞으로 페스티벌'을 열었다. 형식은 '축제'이지만, 사실 그 내용은 졸업을 앞둔, 하지만 아직 그 어느 곳에서도 '캐스팅'의 기회를 얻지 못한 '백수' 예비생인 졸업생들을 위한 '취업 오디션'이다. 연예 관계자 100 명을 초대하여 졸업생, 그리고 졸업을 했지만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취업 재수생들들의 끼와 재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학교 측에서 마련한 것이다. 

이 '취업'을 위한 무대에 17몀의 학생들이 지난 3년간의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취업'이라는 냉엄한 현실 앞에, 도우미를 자청한 선배들도, 그리고 이 무대를 총괄하는 교수도, 허투루 말을 내뱉을 수 없다. 오히려 한 마디, 한 마디가 눈물을 쏙 빼놓는, 그리고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을 뒤집어 엎을 만큼 찬 서리일 뿐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런 질타에 주저앉을 수 없다. 그러기엔 그들이 맞이할 현실이 어떻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기회를 그나마 잡지 못한다면, 그들은 지난 3년 자신이 선택했던 '꿈'의 시간이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카메라가 지켜보는 학생들의 72시간은 절박하다. 그들의 초초함은 깊지만 꿈으로 달려온 3년, 혹은 졸업을 하고도 무기력하게 보냈던, 또는 먹고 살기에 쫓겨 연습조차 할 수 없었던 시간이 그들을 이해시키지는 않는다. 결국 된서리를 맞고 애써 준비했던 무대가 없어지거나, 스스로 포기하거나, 다시 새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벼랑 위에 선 절박함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범대를 다니다, 연기과를 다니는 동생의 삶이 부러워 선생의 길을 마다한 채 늦깍이로 합류한 나이든 졸업 예비생은 비록 앞으로의 시간이 막막한 줄 알지만, 지난 3년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자신의 인생을 달리보고, 다시 살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가 미워 자책하고, 좌절한 학생들도, 결국 무대에 선 그 시간 속에서, 결국 자신이 이 길을 벗어날 수 없음을 절감하기도 한다. 오히려 그 벼랑 위에 서보니 지금 이 기회가 아니더라도, 이 길을 가야겠다는 다짐이 굳건해 지기도 한다. 



그렇게 꿈을 향한 마지막 기회일 수 있는 페스티벌의 준비 기간이 끝나고, 연예 기획사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졸업생, 졸업 예비생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그러나, 기회는 그들의 열정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날 공연을 펼친 학생들 가운데, 기회가 주어진 것은 단 10 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캐스팅도 아니고, 그저 연예 기획사 2차 오디션을 볼 기회. 연기를 사랑하는 마음, 꿈을 위해 달려온 시간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한 '잔혹 동화'다. 그리고 이는, 서울 예대만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장르를 선택한 모든 대학생들에게 돌아갈 동일한 '답안지'이라는 데서 더 잔인한 현실이다. 
by meditator 2016. 2. 15. 15:37

영세 자영업자에게 폭거를 휘두르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상가 임대차 보호법'이 2015년 5월 13일 개정되었다. 개정된 '상가 임대차 보호법'은 임대인에게 '권리금 회수 기간'을 보장해 줄 뿐만 아니라, 2015년 5월 이후 계약한 상가는 5년의 계약 기간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법으로 임대 자영업자들의 권익을 조금 보장했다고 하는 '상가 임대차 보호법'이 실시되고, 현실은 조금 나아졌을까? 2월 2일 <pd수첩-건물주와 세입자, 우리 같이 좀 삽시다>는 법 시행이후에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고 있는 임대 자영업자들의 현실을 다뤘다. 




바람잘날없는 싸이 건물, 그 소란의 뒤안길
한남동에 위치한 싸이가 소유한 건물은 그곳을 임대한 임차인과의 소송이 언론에 고스란히 노출됨으로써 전국민적 관심사로 등극한 곳이다. 2015년 3월 건물주인 싸이가 세입자를 내쫓으려 한다는 보도로 인해 싸이는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지만, 그후 법이 건물주 싸이의 손을 들어주자, 하루 아침에 손바닥 뒤집듯한 대중의 시선은 이제 나가지 않고 버티는 임차인을 호되게 몰아붙였다. <pd수첩>은 여론의 따가운 질타를 맞으며, 하지만 해가 바뀌어서도 그곳을 사수하고 있는 그 건물의 임차인들을 취재한다. 

한때 차를 매개로 미술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동의 공간으로 관심을 끌었던 미술관 까페, 그러나 현재 이곳은 언제 들이닥칠 지 모르는 강제 집행으로 불안에 떠는 까페 주인들만이 남겨져 있다. 정부와 사회에서 외면받은 젊은 아티스트들을 발굴하여 대중과 호흡할 수 있도록 애썼던 까페 주인들은 이제 그간의 쟁의 과정에서 누적된 감당할 수 없는 비용과, 언제 들이닥칠 지 모를 '폭력적' 철거에 대한 불안으로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나갈 수 없다. 아니 나갈 곳이 없다. 

이 미술관 까페 주인들이 일본인 원주인과 계약을 맺었던 이유는 바로 일본인 원주인이 일본의 관행대로 10년 이상 장사할 수 있게 해준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그런 조건에 안심하고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거액의 초기 자본을 들여 미술관 까페를 만들었고, 오랜 시간을 걸려 입소문을 얻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건물을 사들인 싸이는 그간 미술관 까페가 일구어온 역사를 하루 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재건축을 빌미로 '퇴거'를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건물주와 임차인의 길고 지리한, 그리고 때론 폭력적인 법적 공방이 벌어졌다. 

법은 싸이의 손을 들어 줬다. 이들이 상가 임대차 보호법 이전에 계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건물주인 싸이의 입장에서 유리한 방식으로 '언론'에 공표되어, 임차인들은 '법'적 판결을 받았는데도 안나가고 버티는 나쁜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나갈 수 없다고 한다. 

이들은 말한다. '건물주가 우리를 피고로 만들었습니다. '임차인 따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건물주가 중요하다면, 그간 월세를 꼬박꼬박 내고 어렵게 운영해온 우리도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말한다. 건물주가 '갑'이 아니라고, 그곳에 몸담고 실제로 그곳을 일구어온 자신들은 건물주와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할 존재라고. 

하지만 이들의 안타까운 호소와, 벼랑 끝 외침에 건물주 싸이는 답이 없다. 혹자는 b급 정서를 대변한 음악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은 싸이의 넓은 혜량을 바래보지만, 미술관 까페와의 법적 공방에서 싸이는 그저 '돈'으로 자신을 확인하고, 임차인을 상대조차 하지 않는 건물주일 뿐이다. 상가 임대차 보호법이 개정 되기 이전에 계약을 했던 이들에게 개정된 상가 임대차 보호법은, 그저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 거기에, 건물을 소유한 사람이, 즉 자본을 가진 사람이 '갑'이라고 하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정서는 이들의 벼랑 끝 싸움을 더욱 막막하게 만든다. 



젠트리피케이션? 아니 그저 폭력적인 상업화. 
서촌. 경리단 길, 이 두 곳의 이름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를까? 떠오르는 핫 플레이스? 신선한 맛집? 최근 새로운 서울의 가볼만한 동네로 각종 sns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회자되는 이곳,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질 수록, 이곳에서 오래도록 터전을 잡고 살아왔던, 혹은 이곳을 지금의 핫플레이스로 만들기 위해 지난한 시간을 투자해 왔던 영세 상인들의 앞날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진다. 

서촌의 한 제과점, 시아버지 대부터 해왔던 제과점 벽이 철거반의 마구잡이 철거로 마구 뜯어진다. 그 앞에서 서촌의 상인들은 목놓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한다. 심지어 철거를 강행하려는 철거반의 바짓가랭이를 붙잡고 애걸복걸하기 까지 한다. 제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허물지 말아달라고. 

북촌을 넘어 서촌으로 대중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그곳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왔던 영세상인들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아졌다. 원래 건물주, 혹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자, 새로이 건물을 사들인 건물주들은 그곳을 '서촌'답게 만들어온 이들을 하루 아침에 거리로 내몬다. 소문난 손맛으로 지방에서 손님이 찾아드는 생선구이집에게도, 대를 이어 운영해온 제과점에게도, 그리고 40여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이제는 희귀해져 가는 싸전에게도 자비란 없다. 서촌만이 아니다. 경리단길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찾아들었던 조그만 태국 음식점도 예외는 아니다. 

누군가는 임대차 보호법 이전의 계약이라서 그렇다 치지만, 개정된 임대차 보호법이란 법도, 건물주의 '돈'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법 조항은 있지만, 막상 그 조항에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실질적으로 임차인을 보호하는 장치는 무기력하다. 즉, 법을 어기는 건물주에 대한 법적 제약은 미미하고, 자신의 건물이라며 철거반까지 동원하고, 각종 꼼수를 내세우며 임차인을 몰아내려는 건물주의 '갑질'은 언제나 우위를 점할 수 밖에 없다. 하루 아침에 7배에서 10배에 이르는 세에 임차인은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서울시가 나서보지만, 호응하지 않는 건물주로 인해 중재는 공중으로 붕 뜬다. 


<pd수첩>은 이렇게 법 개정이후에도 여전한 서울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적'인 임차인 분쟁의 본질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이에 전문가는 이런 현상은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에 진입해 결국 지역을 활성화시키며 결국 저소득층 주민을 몰아내게 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조차 없는 '폭력적 상업화'라고 단언한다. 즉, '돈'의 '갑질'로  그 지역을 문화적으로 특징지어져 왔던 영세 상인들을 무기력하게 무너뜨리는 현실에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사회적 용어 조차도 무색하다는 것이다. 

'돈'이 되는 곳을 찾아 하이에나처럼 들쑤시고 다니는 '자본'의 세력들은 갈수록 가치가 없어지는 은행과 주식 대신, 이른바 핫플레이스라며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동네 골목길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신종 포식자로 등극한 '건물주'들은 오로지 '돈'을 위해 오래도록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그곳을 그곳답게 만들어온 사람들을 '내용증명'과 '퇴거 명령'으로 하루 아침에 불법자로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 이에 불응하면 건물에 가림막을 치는 등 장사를 할수 없는 훼방을 놓으며 임차인의 손발을 묶어 버린다. 무엇보다, '돈'으로 그곳을 샀다는 건물주의 주인 의식은 그곳이 '돈'이 되도록 만든 임차인의 삶과 지난 시간에 대해서는 안하무인이다. 심지어 임차인의 동등한 주인 의식은 괘씸죄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이런 곳에서는 'b급 문화의 전도사' 아티스트도, 그 누구도 그저 돈을 가진 주인, 건물주일 뿐, 이렇게 '돈놓고 돈먹기'가 된 거리에서, 더 이상 '문화'가 생존할 수 없다. 일본이 자랑스레 내보이는 100년 된 식당 전통이 무색하다. 

결국 <pd수첩>이 도달하는 곳은 우리 사회를 이루는 본질적 논리의 문제다. 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 기업에 자본을 가진 자본주인가? 아니면 기업을 기업답게 피땀 흘려 만든 노동자인가 처럼, 건물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그 본질 말이다. 하지만 건물의 주인은 돈을 주고 건물을 산 사람이라는 우리 사회의 인식은 그곳에 자기 자본을 들여, 오랜 시간 피땀 흘려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만든 임차인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명문화된 법은 3년이면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하는 임시직 사원을 3년이 되기 전에 해고하는 약삭빠른 현실앞에, 헛점투성이로 임차인을 옭죄일 뿐이다. 

by meditator 2016. 2. 3. 16:18

신년 특집으로 방송된 <sbs스페셜-엄마의 전쟁> 1부, <나는 나쁜 엄마입니까?>는 일요일 밤 11시가 넘어 늦은 시간 방영된 다큐임에도 다음 날 검색어를 오르내리며 화제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엄마라면 느낄 절박한 고민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제성'을 불러 일으키며 시작한 <엄마의 전쟁>은 2부 <캥거루 맘의 비밀>에 이어, 1월 17일 3부 <1m의 기적은 일어날 것인가>로 3부작를 마무리하였다. 




엄마들의 끝나지 않는 전쟁?
시작은 '맘충'으로 불려진다는 이 시대 엄마들의 끝나지 않는 전쟁이다. 이른바 '애착 육아'라고, '적어도 3년은 아이를 품 안에서 키워야 하며, 3초도 눈을 떼서는 안된다'라는 아이와 엄마의 '애착 형성'을 아이의 성격 형성에 근간으로 삼는 '육아 방식'이 이 시대 대표적 육아 방식이 되면서 '엄마들의 전쟁'은 시작되었다.는데서 다큐의 문제 의식은 시작된다.

그래서 엄마들은 아이를 키우는데 전력을 투구해야만 하고, 그런 극성스런 엄마들의 육아 방식에 대해 일부에서는 '몰지각한 신인류', '맘충'이라고 모욕적인 표현까지 쓰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정작 들여다 보면, 그 '전쟁'에 휘말린 '엄마'들의 사정도 녹록치 않다는 것이라는데 다큐의 시선은 놓여져 있다. 

그리고 '애착 육아'가 중요한 사회에서, 자신의 일과 육아, 그리고 가정이라는 두 마리, 혹은 세 마리의 토끼를 쫓는 엄마들의 일상은 '분초'를 다투는 말 그대로 '전쟁'이요, 그런 엄마들의 빈 자리에 어김없이 2부에서 등장한 '캥거루맘'이라 지칭되는 '황혼육아'가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 의식은 그럴 듯하고, 막상 다큐를 통해 보여진 현실은 적나라한데, 막상 3부까지 마무리된 <엄마의 전쟁>은 어쩐지, 마치 그 예전 대학 역사개론 시간에 한 시간 내내 사건을 쭈욱 나열하고는 그 시대의 역사를 흐뭇하게 쫑내버리는 어떤 역사 교수님이 떠오른다. 이것도 엄마의 전쟁이요, 저것도 엄마의 전쟁이요, 이렇게 엄마들은 '전쟁' 중에 있다. 이상 끝! 뭐 이런 식인 느낌?



엄마들의 중구난방 전쟁
1부 <나는 나쁜 엄마입니까?>가 방영된 이후 화제가 되었던 것은 제목 그대로 다큐에 등장했던 엄마들이 나쁜 엄마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제작진이 의도한대로 우리 시대의 워킹맘의 '적나라한 가족 사진'이 가감없이 보여졌다. 연세대를 나와 국내 굴지 대기업에 근무하는 워킹맘의 24시간이 모자른 육아하며,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동원된 다섯 명의 '아이 돌보미 어벤져스'군단까지 현실은 절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시기에 도움이 안되는 어벤져스 덕에, 발을 동동 구르며 책임을 져야 하는 35살 양정아 씨의 상황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안타까움에 비례하여, 그 다음 등장한 33세 간호사 남궁정아씨는, 그렇게 아이와 육아라는 양 손의 떡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는 양정아 씨에 비해 마치 '가정'과 '육아'보다, 자기 자신을 더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물처럼 보여져 시청자들의 비난을 샀다. 정말 다큐를 보다보면 그녀의 남편 말처럼, 그녀는 가정을, 그리고 아이를 위해 그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은 인물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2부에 등장한 한때 사교계 여왕이었으나, 이제는 딸이 데리고 온 손자들과 씨름을 하며 하루를 보내야 하는 황복심씨의 딸 역시 논란이 되었다. 다큐의 시선은 '자고로 얘들은 때리면서 키워야 한다'는 엄마 세대 육아와 그런 엄마와 달리, 아이의 이유식을 위해서는 5만원 어치의 소고기도 아까워 하지 않는 딸 세대의 육아 방식의 차별성을 보여주고 하였지만 정작 다큐 시선 속에 보여진 것은 어쩐지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딸의 육아 방식이다. 

그래도 1부에서는 현실에서 절박한 워킹맘의 육아 전쟁과, 이어진 2부에서는 요즘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황혼 육아의 가치관 전쟁을 다룬 점에서 일련의 당대성과 시사성을 가진 '엄마의 전쟁'이었다. 그러다, 이 다큐의 마무리가 되어야 할 3부에 와서 다큐는, 정작 1,2부에서 제기한 문제를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튼다. 스물 셋에 시집와서 30년이 넘는 대가족을 건사하느라 일에 파묻혀 사는 일개미 엄마 김미숙씨와, 그녀의 베짱이 남편, 그리고 13명의 아이들로 이루어진 대식구에 워킹맘까지 하는 함은주씨의 고달픈 일상으로 침전해 버린다. 물론 1부도, 2부도 그리고 3부도 여전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엄마의 전쟁'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전쟁도 전쟁 나름이지, 이렇게 쭈욱 '엄마가 전쟁'을 하고 있다라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서로 이해하고 다가가면 다 해결되는가?
전쟁이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 어떤 상대를 대상으로 해서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3부작 <엄마의 전쟁>이 중구난방이 되어버린 이유는 바로, 이 다큐는 제작하는 제작진이 이 시대 엄마들이 '전쟁'을 하고 있는 사실에는 공감을 하면서도, 그 전쟁의 '주적'이 누군인지에 대한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데서 비롯된다. 

즉, 간호사이면서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고 싶어서 대학원을 가고자 하는 엄마의 욕구는, 그녀의 모성성의 부재로 욕을 먹을 일이 아니라, 정작 연세대를 나오고 대기업을 다니면서도 직장을 계속 다녀야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엄마의 고민과 동일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사회적으로는 '여성'도 동등한 인력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며, 그 능력을 펼쳐야 한다고 하면서, 막상 그 현실에서 그런 '욕구'를 가진 엄마를 '나쁜 엄마'의 여론 재판으로 내몰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애착 육아'가 대세라고 하면, '애착 육아'가 가능하게 회사에 놀이방을 마련하고, 엄마가 일을 하며서도 아이를 마음 놓고 키울 수 있게 제도를 마련하면 된다. 한때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엄마를 새삼스레 집에 불러들여, 부모 자식 세대의 가치관 전쟁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식 둘 데리고 와서 엄마에게 한동안 치대다가, 그 이유가 엄마가 외로워서 함께 있고 싶어서라고 핑계댈 것이 아니라. '황혼'에 육아가 짐이 되지 않는 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해야 한다고 '다큐'의 시선과 방향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엄마들의 전쟁'이라는 보이는 현실만 찍다보니, 자기 계발의 욕구를 가진 엄마를 '나쁜 엄마'라 규정짓고, 아이 돌보미 어벤져스나 황혼 육아를 해프닝처럼 그려낼 뿐이다. 



그러니 3부에서 예능처럼 1m의 밧줄이 등장하여, 서로 조금 더 이해하고 친해보자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부추키는 나라, 하지만 정작 아이를 많이 낳은 엄마는 가난에 시달린 아이들에게 죄인이 되고, 하루 종일 그 아이들 뒤치닥거리와 돈벌이에 심신이 지쳐간다. 13명의 아이들도 부족해 돈을 벌러 나가야 하는 나라의 엄마에게 필요한 게 주말의 휴식일까? 

그저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처럼, 조금 더 이해하고 다가가면 해결 될 문제일까? 간호사 엄마와 아빠가 서로 이해하고 다가가면 어떤 해결책이 가능할까? 아이돌봐줄 사람이 없어 동동 거리는 워킹맘에게 이해하고 다가갈 사람은 주변 사람들일까? 국가일까? 사회일까? 그러니 결국 대한민국에서 전쟁에 시달린 엄마가 선택할 길은 '어벤져스'와 같은 돌보미 영웅들이 등장하거나, 그게 아니면 윤현숙씨 처럼 네덜란드로 이민을 가야 하는 것이다. 현실의 문제를 주변의 '인정'과 이해로 마무리한 또 다른 '가족주의'의 전횡이다.  나름 현실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던 <엄마의 전쟁>이 그래서 그 어느때의 sbs스페셜보다 아쉬움이 남는다. 


by meditator 2016. 1. 18. 17:12

1월 10일 방영된 <다큐3일>에서는 신선한 기획이 시도되었다. 세계를 주무르는 두 강대국, 미국과 중국, 지지않은 해와, 떠오르는 해와 같은 두 나라의 각각 한 장소를 배경으로 72시간의 다큐 3일이 마련된 것이다. 또한 이 기획이 특별한 점은, 미국은 일본의 제작진이, 그리고 중국은 한국의 제작진이 참여함으로써, 두 나라를 바라보는 일본과 한국의 관점의 묘한 이질감이, 똑같은 72시간이지만 전혀 다른 질감의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꿈이 빚어지는 곳 창사의 중식당과 뉴욕의 24시간 빨래방

우선 먼저 방영된 것은 한국의 <다큐 3일> 제작진이 마련한 중국 창사에 자리잡은 중국 최대, 세계 최대의 중식당을 배경으로 한 72시간의 기록이다. 그간 우리나라 예능을 통해 종종 얼굴을 비춘 이 후난성 창사시에 자리잡은 세계 최대의 중식당은 자금성을 본딴 엄청난 규모로, 연간 80여만 명의 손님이 찾아드는 성황리에 영업을 하는 중이다. 처음에는 비싼 가격으로 일부 부유층만을 상대로 하는 식당처럼 인식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런 인식이 경제 호황과 더불어 생활수준이 높아진 중국인들의 '인기'를 얻어, 이제는 결혼힉을 비롯한 창사시 중국인들의 행사 전담 식당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결혼식 이벤트가 주말마다 ㅂ러어지며 해마다 이곳을 찾는 손님이 늘어나고 있는 이 식당엔 요리, 서빙에서부터 설겆이까지 450여명의 직원들이 곳곳에서 쉴사이없이 움직이고 있다.

 

한국의 제작진들이 중국의 가장 큰 식당에 촛점을 맞추었다면, 일본 NHK 제작진은 미국 뉴욕의 빨래방에 시선을 맞춘다. 뉴욕 퀸스 지역의 24시간 빨래방, 일찌기 신대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넜던 유럽인들의 열망은 이제 아시아, 남아메리카, 중동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로 확산되어 여전히 뉴욕을 '꿈'의 도시로 만든다. 그리고 그곳에서 빨랫감을 가지고 모여드는 다양한 국정의 사람들은 그 여전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자, 현주소이다.

 

똑같이 '꿈'을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임에도 중국과 뉴욕이 전하는 정서는 다르다. 말이 '차이나'라는 한 나라지, 중국사는 중국이란 대륙의 구심점과, 그 구심점에서 벗어나 각자 자신의 영역, 혹은 새로운 구심점을 생성하려는 무수한 민족의 쟁투이다. 중국의 역사 이래 가장 오랜 '한족'의 통치를 성공했다는 현 '차이나'에도 불구하고, 변방에서는 '한족'의 전횡에 맞서 자국의 독립을 고소원하는 티벳을 비롯한 다수의 소수민족들이 존립한다. 그런 현대사의 구심점으로 이제 세계 경제 대국으로 세계 경제의 구심점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국, 그리고 그 차이나머니의 가장 큰 혜택을 받으며 성장한 창사시의 중식당에는, 차이나드림을 가지고 모여든 450명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72시간 지켜보는 중국의 가장 가까운 이웃 한국의 제작진들이 있다.

 

제작진에 눈에 비친 경제 호황 속의 중국, 그리고 그 증거인 창사시의 중식당은 몇 천 명의 손님들을 끌어모아, 위안화를 뿌리며 거나하게 벌어지는 결혼식으로 보여진다. 그런가 하면, 그런 경제 호황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일하는 450명의 직원들은 마치 우리나라 경제 발전기 고향을 떠나 어려운 가족을 돕기 위해 일찌기 일터로 떠난 6,70년대의 젊은이들을 보는 시점과도 같다. 한편에서 휘황한 이벤트와, 그 이벤트의 한 편에서 십대의 어린 나이에도 공부를 접고 가족을 떠나 한 푼이라도 벌며 자신의 꿈을 기원하는 직원, 그리고 아이들은 물론, 부부마저 떨어져 살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실을 당차게 견뎌내는 또 다른 직원들을 통해, 경제 부흥과, 그 경제 부흥기의 물결을 타고 저마다 자신의 분홍빛 미래를 꿈꾸는 중국인들의 허니문을 절묘하게 그려낸다.

 

 


 


신흥 강대국 중국과 지지않는 태양 미국,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

그렇게 중국 창사의 대식당이 분명치는 않지만 그래도 '분홍빛 장미빛 미래'의 꿈을 향한 72시간이었다면, 일터가 아닌, 빨래방이라는 정처없는 공간에 카메라의 촛점을 맞춘 뉴욕의 NHK제작진이 보여준 '아메리칸 드림'은 어쩐지 삶의 '비상구'같은 느낌이 강하게 밀려온다. 다친 엄마를 대신하여 폭력이 난무하는 자신들의 할렘가 주거 지역을 피해 그래도 안전한 빨래방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와 빨래를 하는 동안 마음껏 놀게 해주는 흑인 할머니, 국가 부도 사태를 겪은 그리스를 피해 미국으로 돈을 벌러온 그리스인, 위험을 무릎쓰고 미국으로 건너온 멕시코인, 하지만, 그런 위험을 무릎쓴 이주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이 되도록 여전히 미국 시민이 되지 못한 남미의 청년, 20여년 뉴욕에 살면서 퀸즈 지역의 변화를 몸으로 겪어낸 백인 원주민, 미국의 경제 위기 때 노숙자의 위기를 거쳐 다시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가장, 불과 72시간이지만, 24시간 빨래방을 통해 좁게는 뉴욕 퀸즈 타운, 그리고 그곳을 통해 보여지는 현재의 미국, 나아가 세계의 현실이 빨래를 하러 들르는 정처없는 이 공간을 통해 적나라하게 전달된다.

 

한국과 일본의 제작진이 사전에 상의 하에 장소를 결정한 것인지, 아니면 각자 방송국의 결정이었는지, 절묘하게도 중국의 대식당은 이제 막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한 신흥 부국 중국의 흥분과 흥청거림, 설레임이 담겨있다면, 2001년 쌍둥이 빌딩 폭파 테러와, 2008년의 경제 위기를 겪었음에도 여전히 세계 경제의 중심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자유'와 '부'에 대한 열망을 가질 수 있는 꺼지지 않는 아메리칸 드림으로, 정처없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자유'와 꿈을 찾아 날아드는 세계 각국의 이미자들의 집합소 미국을 '빨래방'이라는 '부유(浮流)한 공간을 통해 절묘하게 그려낸다. 중국이란 부의 구심력이던지, 저마다 다른 인종의 원심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열정은, 거대한 중식당과 삭막한 24시간 빨래방을 통해 절묘하게 묘사된다.

 

또한 어린 나이에 꿈을 찾아 식당의 궂은 일을 마다치 않는 직원이나, 생이별을 마다하지 않는 부부의 애틋한 사연에 촛점을 맞춘 한국의 72시간이 한국식의 '정(情)과 '신파' 사이의 절묘한 줄타기를 했다면,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까칠한 미국 중년의 질문마저 가감없이 담아낸 NHK의 관찰자적인 시선은, 결코 녹록치 않을 아메리카 드림의 현주소인 양 '거리감을 쉬이 접지 않는다. 어쩌면 '한국'이 바라보는 신흥 강대국 중국과, 일본이 바라보는 그럼에도 지지않는 태양 미국에 대한 은밀한 속내가 은연 중에 드러난 것일 지도 모른다.

by meditator 2016. 1. 11. 15:46


*대표적인 남성 잡지의 표지에 테이프로 발목이 묶인 여자를 차에 실은 남자를 싣는 나라

*여성에 대한 혐오와 심지어 강간 욕구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소라넷 등이 버젓이 인터넷 공간에서 활개치는 나라

*십오년이 넘게 대학교에서 '성의 이해'라는 강의의 명목으로 남성 중심의 성적 편견을 강의하는 나라

*지난 6년간 '데이트 폭력'으로 삼일에 한 명씩 여성들이 살해당하는 나라, 그런데 그에 대한 대처는 '스토킹 처벌법'?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 하지만 남녀 성평등지수 115위, 인도, 네팔보다 뒤진 나라,  대한민국




자생적으로 패미니스트가 된 그녀들
과연 이런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은 어떻게 해야만 할까?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답적으로 쉽게 변화되지 않는 남성 중심 사회에, 저돌적으로 안티가 되고자 하는 여성들이 있다. 그리고 12월 20일 <sbs스페셜-발칙한 그녀들>은 남성 중심사회에 전사된 그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시작은 말 그대로 발칙한 그녀들이다. 대놓고 '여성 납치'가 연상되는 표지를 실은 우리나라에서 인기있는 남성 잡지에 표지 모델로 선정되었으나, 거부한 것으로 화제가 된 정두리 씨, 하지만 그녀의 남다른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늦은 밤 열리는 파티, 이름하야 '젖은 파티', 그곳에 프랑스 유학 중 잠시 귀국한 정두리씨가 하얀 천사의 복장을 하고 파티를 주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잡지의 발간자이기도 하다. 이름하야, '젖은 잡지'.

그녀가 내세운 '젖은', 이라는 수식어는,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단어이기 때문이란다. 그녀의 '젖은' 잡지의 표지는 바로 그녀가 거부한 남성 잡지의 바로 그 여성 납치를 연상케 하는 그 장면을 패러디한 것으로, 소복을 입은 그녀가 남성으로 연상되는 대상의 간을 핥고 있는 모습이다. 즉 이렇게 그녀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소비'한 그녀들의 이야기를, 여성들의 입장에서 적극 해석하고자 한다. '젖은' 파티의 주역은 술 취해 흥청거리는 남자들이 없는 여성들이다. 

또 한 명의 패미니스트는 독일 유학 중 거침없이 섹스 토이샵을 드나드는 은하선이다. 섹스 토이의 사용 후기를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그녀는 이미 대학 시절부터 성 칼럼니스트로 시작하여, <이기적 섹스>의 저자로, 그리고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과 함께 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은하선의 오르가슴 투나잇'을 통해 여성의 성적 욕망을 양지르 끌어내고자 애쓰는 인물이다. 

'발칙한 그녀들'의 마지막 주자는 2014년 7월 광화문 광장에서 웃통을 벗어제친 채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외친 송아영이다. 그녀가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는 가슴을 드러내는 '토플리스' 시위는 'FEMEN'이란 여성 인권 단체의 시위 방식이다. 

이렇게 도발적인 혹은 발칙해 보이는 그녀들과 함께, 그래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괜찮은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배우 박철민이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의 시작은 온화한 하지만 몹시 조심스러운 박철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래도 자신은 아내를 사랑하는 보통의 남성이고, 대한민국에는 자신과 같은 남성들이 대다수라고 생각하는데 왜 그렇게 '발칙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표현하냐고, 완곡하게 그녀들의 '발칙함'에 발을 걸고 넘어진다. 

하지만 그런 '완곡한' 하지만 정두리의 방식에 또 다른 '성의 상품화' 아니냐고 정곡을 찌르는 박철민의 생각에, 돌아온 대답은 '성의 상품화'가 왜 나쁘냐는 것이었다. 즉, 밤만 되면, 아니 밤이 되지 않아도 대한민국을 온통 휘감은 남성 중심의 성의 상품화에서, 여성들이 자신들이 즐길 수 있는, 혹은 그녀들의 욕망이 대변될 수 있는, 그리고 그것이 그 누구를 대상화시키지 않는 성을 상품화 하겠다는, 그녀들의 대답은 말 그대로 '발칙하다'


하지만, 다큐는 그런 '발칙함'의 선정성에서 한 걸음 더 들어선다. 어릴 적 호된 시집 살이를 하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데리고 방에 들어가 때린 척 하는 아버지를 보며, 남성의 폭력성에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정두리씨, 그리고 대학 시절 '광클'을 해야만 들을 수 있던 '성의 이해' 강의가 알고보니 여성 폄하 심지어 여성 혐오가 만연한 수업이었다는 걸, 그런데 자신을 제외한 다수의 학생들이 웃으며 그걸 듣고 있다는 사실에 더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다는 은하선씨, 그리고 2014년 7월 이전 이미 여러 다른 방식으로 세월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였지만, 세상의 외면을 받았었다는 송아영씨, 남성 중심의 세상이 막아선 벽에 그녀들은 '계란'이 되어 바위 치기를 시작한 것이라고 다큐는 그녀들의 '패미니즘'의 시원을 밝힌다. 

그렇게 현실의 문제에서 시작된 그녀들의 패미니즘은 정두리씨의 경우,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내세운 '잡지'와 '파티'와 같은 형식의 모임으로, 그리고 은하선씨의 경우에는 그렇다면 내가 써보는 여성 중심의 성 이야기로, 나아가 남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항이 아닌 여성의 욕구에 대한 적극적 발견으로, 그리고 이미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FEMEN처럼 자신을 무기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발전'해 간 것 뿐인 것이다. 


남성 중심 사회의 절박한 고공 농성
평범한 남성의 입장을 내세우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성의 상품화나, 왜곡된 시각이 아니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박철민은 펼쳐놓은 정부의 강력 규제에도 불구하고 번연한 소라넷 등의 버젓한 활개와, 그에 반해 등장한 '매놀리아'의 페북 삭제 등의 편협한 현실에, 거리를 가득 메운 남성 중심의 성 상품화와, 그리고 크레인에 올라가듯 하다하다 마지막 수단으로 자신의 몸을 내세운 것이라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평범하다고 생각한 자신의 세계를 넘어 세상을 감싼 여전히 강고한 '남성 중심의 벽'과, 이젠 그 벽을 타고 무성하게 자란, '여성 혐오'의 줄기들, 그리고 그런 줄기들을 끊어 내기 위해 자신이 전사된 그녀들의 절박함이 이해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방송 마지막 생명이 위협을 느끼는 우크라이나의 성 산업을 반대하다 프랑스로 망명한 국제 FEMEN 회원들처럼, 여성 혐오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대한민국에서 자신을 드러낸 보인 송아영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복싱을 배우듯, 그녀들의 현실은 위태롭다. 발칙함으로 시작된 그녀의 도발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외로운 고공 농성으로 마무리된다. 


by meditator 2015. 12. 21. 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