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 공주의 저주로 일곱 난쟁이가 되어버린 일곱 왕자에, 마법 구두를 신고 모습이 바뀐 공주라니, <백설 공주>와 <빨간 구두> 등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동화 속 이야기들이 '변주' 되었다. 그 설정만으로도 궁금해 지는 애니메이션 <레드 슈즈>이다.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만 보면 '디즈니'인가? 싶은 애니, 거기에 클로이 모레츠, 샘 클레플린 등이 목소리 연기를 했다 했는데 <라푼젤>, <겨울 왕국> 등의 캐릭터를 만드는데 참여한 김상진 디자이너와 이 이야기로 2010년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홍성호 감독이 힘을 모아 만든 '토종' 애니메이션이다. 

 

   

 

신선한 이야기 
스토리 공모 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답게 이야기의 시작은 신선하다. 동화 속 캐릭터들이 모여사는 동화의 섬, '페어리테일 아일랜드', 그곳에 마법에 빠진 공주를 구하는데 앞장 선 일곱 왕자들이 있다. 마법의 멀린, 힘의 아더, 심지어 투명망토까지 패션니스타 잭, 후라이팬이 무기로 셰프 한스, 그리고 무엇이든 뚝딱뚝탁 천재 발명가 삼형제 피노, 노키, 키오. 어벤져스급 동화 속 캐릭터들이 일곱 명의 왕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합쳐 괴물에 대항하여 '공주'를 구해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공주'는 젊고 아름다운 공주가 아니라 마귀 할멈같은 요정? 이에 실망을 하자 요정은 그들을 그만 '일곱 명의 난쟁이'로 만들어 버린다. <개구리 왕자>의 이야기처럼 아름다운 공주의 입맞춤을 받아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단다. 

당연히 아름다운 공주님을 찾는 이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의 집에 아름다운 공주님이 나타났다. 바로 <백설공주>의 그 '스노우 화이트' 공주님, 그런데 난쟁이가 되어버린 왕자님처럼 공주님에게도 사연이 있다. <백설공주> 속 이야기처럼 왕국에 나타난 아름다운 마녀에게 '혼'이 나가버린 아버지, 그 아버지가 실종됐다. 왕국의 사람들은 사라져버렸고 공주는 겨우 도망을 쳤다. 그런데 여기서 왕국을 빼앗긴 스노우 화이트 공주님은 <백설공주>에 나오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공주가 아니라 건강하고 튼튼한 공주라는 거. 

세상에서 누가 젤 이쁘니에 대답해 주던 거울은 건재하지만, 독이 든 빨간 사과는 이제 레드 슈즈가 열린다. 아니 열려야 하는데 그래서 그 마법 슈즈를 신고 마녀가 영생을 누려야 하는데 그게 영 시원찮다. 그런데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몰래 궁에 들어온 공주, 때마침 나무에서 열린 빨간 사과, 아니 레드 슈즈, 공주는 독이든 사과를 먹고 정신을 잃는 대신 레드 슈즈를 신고 늘씬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공격하는 마녀를 피해 도망을 치다 도착한 곳이 바로 일곱 남쟁이, 아니 일곱 왕자들의 집.

 

   

 

아름다움을 묻다 
<레드 슈즈>의 주제 의식은 선명하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과 진짜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걸 풀기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 속 이야기들이 자유자재로 '변신'한다. 

아름다운 공주인 줄 알고 마법에 걸린 요정을 구하려던 '자칭 아이돌급' 왕자들은 자신들이 구했던 공주가 공주가 아니라 요정이라는 걸 실망한 순간 마법에 걸리고 만다. 그리고 다시 '아름다운 공주'를 찾아 헤매는데, 그들은 여전히 '아이돌급'이었던 자신들의 인기, 그 바탕이었던 잘생김, 힘셈, 멋짐의 '자부심, 더 나아가 '자뻑'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며 자신들 앞에 나타난 아름다운 공주의 마음을 얻고자 고심한다. 

반면 성문을 밧줄 하나로 거뜬히 넘나 들었던 튼튼하고 우람한 공주는 사과가 변신한 레드 슈즈를 신고 아름다운 공주로 변신한 후, 자신의 '아름다움'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될 수 있음에 매료되어 간다. 난쟁이 집에 '무전취식'한 신세지만 일곱 왕자들은 그녀의 미모만으로 모든 걸 허용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아름다운 공주라 하자 서로 앞다투어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애쓴다. 아버지를 찾고자 들른 마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그녀의 미모에 홀려 모든 걸 용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 새로운 아름다움에 빠져들수록 <빨간 구두>의 원작에서처럼 '레드 슈즈'는 그녀의 발에서 벗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보이는 아름다움'은 정작 '위기'를 가져온다. 그녀가 자신의 영생이 걸린 '레드 슈즈'를 가져갔다는 걸 알게된 마녀가, 그리고 그 마녀의 부추김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자신의 파티에 초대하고 싶은 에버리지 왕자가, 아니 무엇보다 그 '아름다움'에 천착하고 싶은 욕망이 공주에게, 그리고 어느덧 그녀가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 위기를 불러온다. 

결국 영화는 보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는 용감함과 그 용감함을 담보해 낼 수 있는 건강함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걸 스스로 선택해 내는 원작과는 다른 스노우 화이트 공주의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캐릭터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잘록한 허리, 높은 굽의 레드 슈즈에 현혹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낼 수 있는 '의지'적 인간형으로서의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다. 

 

 

어쩐지 유치한 구성 
그렇게 <레드 슈즈>는 '동화의 섬'을 배경으로 우리가 익숙한 <백설 공주>, <빨간 구두>, <개구리 왕자> 등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변주하며 21세기 형 동화의 가능성을 연다. 난쟁이가 되어버린 왕자들의 사랑 찾기와 독사과가 '변신'한 레드 슈즈의 딜레마, 드러난 아름다움과 주체적인 건강함 사이의 선택 등의 주제 의식은 '고전적 캐릭터'들을 통해 풍성한 상징으로 영화를 채운다. 

하지만 기발한 변주와 신선한 캐릭터의 구성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가 진행되면서 아쉬움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목숨을 걸고 괴물 용에 맞서 요정 공주를 구할 만큼 용감했던 일곱 왕자들이 스노우 화이트 공주의 사랑을 얻기 위해 보이는 모습은 너무 찌질하지 않은가.  심지어 그들이 마법사 멀린, 아더 왕, 잭과 콩나무의 잭, 한스와 그레텔의 한스 등으로 부터 비롯된 캐릭터라는데 보여지는 모습은 그저 철들지 않은 자뻑남들 뿐이다. 아무리 동화의 나라니 다 가능하다 하지만 얼굴에 팩을 붙이고 나타나 미모 어쩌고 하는 잭 왕자에 이르면 한숨이 나온다. 

주인공 왕자 캐릭터들만이 아니다. 공주를 파티에 초대하기 위해 병력까지 동원해 일곱 난쟁이의 집을 공격하는 에버리지 왕자의 모습은 어느 개그 프로그램의 등장 인물같다. 자신을 찾아온 마녀의 한 마디에 넘어가 공주를 향해 무모한 전투를 벌이는 에버리지 왕자는 기발한 상상력과 잘 변주된 캐릭터들의 서사를 '유치'하게 만들어 버리고 만다.  심지어 마녀의 마법 한번에 나무 괴물로 변해버린 왕자와 신하들이라니. 

여성 캐릭터의 건강함과 주체적 설정에 비해, 남성 캐릭터들의 단선적인 표현들은 결국 영화 전체 구성을 엉성하게 만들고 만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와, 각자 자신들의 딜레마를 극복해가는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는 갈등을 위한 갈등, 위기를 위한 위기를 겪어내며 결국은  역발상의 로코로 귀결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자기 극복 과정을 거친 사랑의 성취와 달리, 그 과정에서 야심만만하게 포진시켰던 일곱 왕자의 캐릭터들은 주인공 멀린을 제외하고는 소모적으로 마무리된다.

클로이 모레츠가 참여했다는 홍보와 달리 대부분의 관이 '더빙'판으로 배정된 배급에서도 보여지듯이 아동용이라고 규정했기에 '쉽게' 가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었을까. 디즈니의 유려한 애니메이션이 아이들은 물론 성인들을 매료시키며 많은 관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는 상황에서, 기발한 설정과 신선한 캐릭터로 잘 다듬어진 <레드 슈즈>라면 조금 더 '진지'한 접근이었다면 더 많은 성인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by meditator 2019. 7. 31. 04:34

남자들의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수중 발레), 이 어울릴 것같지 않은 조합을 그린 영화가 뜻밖에도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이 처음은 아니다. 아직 쓰마부키 사토시가 꽃미남이던 시절, 해체 위기에 몰린 남고 수영부에 갖가지 사연으로 잔류하게 된 다섯 명이 돌고래 조련사를 선생님의 맞아 꼴찌들의 반란을 그려냈던 2002년작 <워터보이즈>를 유쾌했던 영화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얼'만한 감동이 있을까? 2010년 AFI 디스커버리 채널 실버닥스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고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한 편의 다큐가 있다. 바로 <맨 후 스윔>이다. 다큐는 평생 수중 발레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왔던 평범한 직장인들, 마흔 줄의 그들이 이제는 상관없을 것같은 성장과 도전이라는 화두를 안고 비공식 세계 남자 선수권 대회에 참여하는 과정을 그려냈었다. 

 

 

이 다큐는 2018년 이제는 <드립 투> 시리즈로 익숙해진 롭 브라이든이 자신보다 잘 나가는 아내의 바람을 의심이나 하는 공허함에 시달리다 우연히 수중 발레 팀을 만나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영국 영화 <스위밍 위드 맨>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리고 이제 2019년 <다이빙; 그녀에 빠지다>, <세라비, 이것이 인생>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배우 질 를르슈가 메가폰을 잡아 '프랑스 버전'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이 찾아왔다. 다큐에서 영국 영화로. 이제 다시 프랑스 버전으로 거듭 '리부팅'되고 있는 남자들의 수중 발레 도전기, 그 중에서도 프랑스 버전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뜻밖에도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을 여는 건 뜬금없는 동그라미와 네모론이다. '철학'의 나라답게 남자들이 수중 발레를 하게 되는 상황을 퍼즐 네모에 동그라미를 집어넣으려고 하는 '난센스'로 풀어낸다.  아이가 네모난 퍼즐에 동그라미를, 동그란 퍼즐에 네모를 집어넣으려고 애쓰다 신경질적으로 퍼즐을 집어던지고 자리를 떠나버리는 오프닝, 그 오프닝에 이어 등장하는 건 주인공 베르트랑(마티유 아말릭 분)과 그의 가족이다. 

백수 2년차 한 눈에 보기에도 제 정신이어 보이지 않는 베르트랑의 초췌한 몰골, 거기에 시리얼에 약을 말아먹어야 할 정도인 매우 건강하지 않은 상태, 가계를 책임지는 아내, 아버지라지만 도무지 아버지 대접을 해주지 않는 아이들, 그렇게 매우 건강하지 않은 그가 우연히 아이를 케어하기 위해 간 체육관에서 남성 수중 발레단 모집 광고를 본다. 

 

 

그 무엇에도 권태로워보이던 베르트랑은 홀리듯 수중 발레단에 신청을 한다. 마치 동그라미가 네모를 만나듯. 하지만 정작 그가 가서 만난 그 '수중 발레단'은 '오합지졸'이란 말로도 설명이 모자란 '루저남'들의 모임이었다. 아마도 원작 다큐, 영국 리메이크 <스위밍 위드 맨>,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중 가장 '루저'한 주인공들을 들라면 그건 아마도 프랑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일 것이다. 

백수 2년차 우유에 약말아 먹는 심각한 우울증 환자 베르트랑, 하지만 그런 베르트랑은 로랑(기욤 까네 분)에게 자기보다 더 우울증이 심각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로랑은 감정 조절이 안되는 듯 매사가 비관적이며 신경질적이다 못해 벌컥벌컥 화를 내곤 다 때려치우라며 사라지곤 한다. 하지만 외적으로 보면 직장도 있는 그의 형편이 제일 나은 편이니. 이 수중 발레단의 형편이 어떨지는 뻔하다. 

자칭 로커라지만 노인들 게임장 막간 공연이나 따라다니며 딸이 다니는 학교에서 식당일을 하며 불법 주차한 트레일러를 끌고 전전하는 시몽(장 위그 잉글란드 분), 수영장을 파는 사장님이라지만 도대체 수영장을 판 지가 언제적인지 자금에 쪼달리다 못해 보험을 타기 위해 자신의 차에 불을 지르는 해프닝을 벌이는 마퀴스(베누알 포엘부르데 분), 거기에 수영장 잡일을 하며 호구 취급을 받는 티에리(필리페 카테린는 분)까지 멀쩡한 사람이 없다. 심지어 스리랑카에서 온 아바니쉬(발라잘방 타밀셀방 분)는 프랑스어로 대화가 안된다. 그런 그들의 현재 유일한 미덕이라면? 제 아무리  싸우고 화를 내도 다음 시간에 다시 그곳 풀에 모여 수중 발레 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로 온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에는 남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들에게 수중 발레를 가르치는 강사 델핀(비르지니 에피라 분), 그녀의 캐릭터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읽힌다. 남자들이 물 속에 들어가 수중 발렌지 자맥질인지 모를 불분명한 연습을 하는 동안, 강사 델핀은 다이빙대에 앉아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읽는다. 한때 듀오 로 수중발레 메달리스트, 동료의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 현역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그녀는 알콜 의존증 치료 모임에 나가고 있다. 

스포츠 센터에서도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수중 발레 아저씨들에게 같은 센터의 수구 팀이라도 나타나면 한껏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며 독려하는 델핀, 그리고  ​​​​​​​알콜 의존증 치료 모임에 나간 그녀는 환희에 찬 얼굴로 자신의 알콜릭을 극복하게 된 계기는 바로 사랑이라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사랑이란 수영장에 나타나 너를 좋아해 본적도 없다며 더는 주변에서 얼쩡거리지 말라며 그녀를 '스토커' 취급을 하는 남자였다. 마치 초원의 빛 속 한 구절처럼 '빛의 영광'이여, 라며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 오합지졸 수중 발레단을 한껏 멋진 팀인양 포장하고, 자신의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를 관계를 아름답다 말하는 델핀의 '현실 부정',

하지만 그런 '현실 부정'은 그녀만의 인식이 아니라, 매주 열심히 수중 발레를 한다 모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로커가 아닌 자신의 현존재도, 가족의 아픈 과거도, 무능력한 현실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비껴서있는 수중 발레 팀 모두의 상태이다. 가라앉아가면서 여전히 스스로 헤엄치지는 못하고 있는.

 

 

이대로 가라앉거나, 헤엄치거나 sink or swim
그런 팀에게 사건이 생겼다. 그들의 강사이자, 위로였던 델핀이 수영장에 나타나 그녀를 스토커로 몬 남자 때문에 다시 알콜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급기야 강사직을 내팽개쳐 버렸다. 그때 '수호 천사'로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견원지간같았던 수구 팀의 감독, 휠체어에 앉은 아마도 한때 델핀의 파트너였던 아만다(레일라 벡티 분), 

하지만 수호천사인 줄알았던 아만다는 델핀과 딴판이었다. 그녀를 죽이고 싶다 할만큼 혹독한 훈련, 그저 시간을 때우던 그들을 몰아붙이며 제대로 해보라며 다그치던 그녀, 덕분에 본의 아니게 본격적으로 훈련을 하게 된 팀은 농담처럼 시작한 노르웨이 세계 선수권 대회를 향한 꿈에 구체적으로 다가간다. 

영화는 원작의 다큐처럼 배불뚝이 루저남들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여 기적처럼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는 '기적'을 그려낸다. 하지만 영화가 주목하고 있는 건, 자기 자신의 초라한 현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한 채 비껴서있던 이들이, 수영복마저 훔치는 해프닝을 벌이면서도 그 '도전'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수용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자존심만 내세우던 베르트랑은 동서의 가구점에 나가 '갑질'을 견디며 일을 하기 시작한다. 어릴 적 아버지를 닮아 어머니에게 외면당했던, 하지만 미워하며 닮듯이  어머니처럼 자기 자신도 감정 조절을 못하던 로랑은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수용한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노래가 없을 뿐 로커의 자존심을 내세우던 시몽은 더는 로커가 아닌 자신의 현존재를 수용한다. 그는 무대 대신 수중 발레의 독무에서 로커로서 만개했고, 그의 조명 동료 역시 가장 화려한 조명으로 그와 그의 팀을 빛냈다. 그렇게 가라앉는 대신 조금씩 삶이 물장구를 치던 이들은 그 삶의 도전처럼 버거웠던 수중 발레의 도전을 성공적으로 해낸다. 

남자인 그들이 수중 발레를 한다는 것 자체가 혹 '게이'가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받았던 시간,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시몽의 낡은 트레일러를 몰고 노르웨이를 향한 길을 떠났다. 그리고  1등을 했어도 다시 그 길을 따라 돌아온 그들, 주변 사람들은 반겼지만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던 그들에 대한 기사 한 줄 나지 않는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 '찰라'의 영광을 기억한 그들의 오늘, 발걸음은 가볍다. 그들은 저마다 이제 삶을 헤엄쳐 나갈 수 있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엔 그저 투닥거리기만 했던 이들이 어느 틈에 동트는 노르웨이의 언덕에서 함께 어깨를 겯고 환희를 나눌 수 있는 동지가 된 시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한없이 찌질했던 그들의 울컥한 인간 승리, 거기엔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배우들의 협연이 빛난다. 

by meditator 2019. 7. 27. 22:14

결벽증있던 사춘기 소녀 브라이오니는 자신이 좋아하는 언니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 분)를 로비(제임스 맥어보이 분)가 성추행하는 거라 오해했다. 그 아직 사랑을 모르던 소녀의 오해는 사랑했던 연인, 하지만 제 아무리 캠브리지대 의대를 나왔어도 가정부 집안의 아들이었던 로비를 순간 범법자로 만들어 전쟁터로 끌려가게 만들고 만다. 소녀의 섣부른 예단, 그리고 어른들의 편견어린 판단은 두 청춘 남녀의 사랑과 삶을 송두리채 '산화'시키고 만다.  1930년대 영국, 그리고 이제는 영화로도 유명해진 덩케르크 해안을 배경으로 한 2차 대전의 전장 속에서 그래전 다하지 못한 순애보는 <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의 여운으로 <어톤먼트(2007)>를 기억에 남긴다. 

그렇게 <어톤먼트>의 원작자 이언 매큐언은 제도와 규범, 그 틈바구니 속에서 비집고 나온 불완전한 '인간', 그 중에서도 특히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논한다.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지만 자신이 성장하며 쌓아온 고정관념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 두 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그려낸 <체실 비치에서>, 사회적으로 그럴듯한 지위를 가진 두 남자를 통해 드러난 '도덕적 자충수'를 통렬하게 그려낸 <암스테르담>, 우연히 맞닥뜨린 사건을 통해 우리가 믿는 사랑과 도덕, 그리고 신념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런 사랑> 등의 작품을 통해 유수한 문학상을 수상함은 물론 전세계 평론가와 독자들이 사랑하는 작가가 되었다. 

 

 

이언 매큐언 원작의 <칠드런 액트> 
바로 그 이언 매큐언의 13번째 장편 소설 <칠드런 액트>가 영화로 찾아왔다. 더구나 작가의 40년지기이자, <어톤먼트>의 기획을 맡았던 리처드 이어가 감독을 맡았고, 거기에 작가 자신이 ' 소설에 나왔던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 , 생각을 영화로 옮기는 지적, 감성적 도전'으로 각색을 맡았다. 그리고 그런 걸출한 제작진의 의도를 엠마톰슨이 연륜있는 내공으로 발화시켰다. 

엠마 톤슨이 분한 피오나는 헌신적인 판사다. 남편 잭(스탠리 투치 분)과 함께 하는 일상조차 그녀의 일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남편은 그녀와 함께 할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접어두고 뒤로 물러서야만 하고 피오나는 샴 쌍둥이 분리 수술 등그녀가 맡은 사회적 이슈가 되는 중대한 판결에 있어서 한 치도 법리적 빈틈을 만들지 않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집중한다.

그런 그녀에게 맡겨진 가정 법원의 또 하나의 사건이 배당됐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17살 9개월 여호와의 증인인 소년 '애덤'이 수혈을 거부하고 죽음에 이를 지도 모를 상황에 대해 그녀가 판단을 내려줘야 하는 것이다.  파탄 위기에 놓였던 가정을 '종교'를 통해 회복시켰던 부모들은 종교적 교리에 따라 수혈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하지만 소년을 치료하는 의료진은 더 이상 소년의 수혈을 지연시키면 이대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며 그녀를 설득한다. 과연, 피오나는 이 솔로몬의 재판과도 같은 상황에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앞서 샴 쌍둥이의 재판에서 두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대신 한 명의 생명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명 존중의 원칙을 선택한 피오나, 하지만 정작 부모들은 자신의 한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며 언론에 그녀를 비난한다. 거기에 더해 늘 그녀의 일 앞에서 돌아섰던 남편이 그녀에게 '바람'을 필 것이라며 최후 통첩까지 하는 상황, 이 혼란스러운 형편속에서 피오나는 여태 그녀가 해오던 관행을 깨고 당사자인 소년을 만나기 위해 소년이 입원한 병실을 찾는다. 

강변의 들판에 내 사랑과 나는 서 있었지.
기울어진 내 어깨에 그녀가 눈처럼 흰 손을 얹었네.
강둑에 풀이 자라듯 인생을 편히 받아들이라고 그녀는 말했지.
하지만 나는 젊고 어리석었기에 이제야 눈물 흘리네


판사가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에 해맑게 반기는 소년, 그 소년의 순수한 마음에 피오나는 판사라는 자신의 처지를 잠시 잊은 채 소년의 기타 반주에 맞춰 예이츠의 '버드나무 정원을 지나'라는 노래를 부른다. '다가올 삶과 사랑을 생각해 보'라며 조금만 더 있으라며 만류하라는 소년을 두고 병실을 떠나온 피오나는 그 '소년'의 남겨진 사랑과 삶을 염두에 두며 '수혈'을 하도록 판결을 내린다. 

샴 쌍둥이의 판례에서 처럼 '생명존중의 원칙'에서 최선이었다 생각하며 내린 판결, 하지만 피오나가 내린 판결은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맞이한다. 18세가 된 이후의 무한하게 펼쳐진 미래를 향해 뻗어나가라 내린 결정, 하지만 소년이 맞닦뜨린 건 자신이 맹종했듯이, 종교적 결정에 순종했던 부모가 정작 소년의 수혈을 하는 순간 보여준 찰라의 '반색'이었다. 자신이 더 이상 죽지 않는다고 했을 때 행복해하는 부모의 모습으로 인해 자신이 믿어왔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소년은 반대 급부로 자신에게 '생명'을 준 피오나에게 집착하며 심지어 그녀와 함께 살겠다며 그녀의 뒤를 쫓는다. 

 

 

최선의 결정 이후에 남겨진 반전의 결말 
17살 9개월의 티없는 아름다움에 순간 매료되었던 피오나는 그가 자신에게 보내온 시를 읽고, 그가 남긴 전화 메시지를 들으며 미소를 짓지만 판사로서 재판의 당사자였던 소년의 접근을 완고하게 거부한다. 그녀의 이동 재판을 따라 비를 맞으며 찾아온 소년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도운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온정'이었다. 자신의 일에 헌신적이며 원칙적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믿으며. 

하지만, 그 '최선'의 선택은 생각지도 못한 결론에 이른다. 그녀의 크리스마스 연주회가 있던 날 그녀에게 도달한 전언은 충격적이다. 동료 변호사의 반주를 하다말고, 물기어린 목소리로 애덤과 함께 불렀던 '어리석었기에 이제야 눈물을 흘리네'를 부르고는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렇다면 피오나는 다른 선택을 해야 했을까? 샴 쌍둥이가 그냥 그대로 있다가 둘 다 목숨을 잃게 놔두고, 소년 역시 종교적 교리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게 하도록 해야 했을까? 피오나의 결정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리고 작가 이언 매큐언은 그런 제도와 법으로 다 책임질 수 없는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딜레마에 대해 고민을 해보자고 한다. 

영화 속 피오나 부부, 아내에게 바람을 핀다며 집을 나가 버린 사람은 남편이다. 다시 돌아온 남편에게 피오나는 분노한다. 그러자 남편은 나는 잠시 결혼을 방기했지만, 당신은?이라며 반문한다. 어떻게든 부부로써 화목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던 남편과 달리 피오나에게는 일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일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생명을 담보로 한 것이니 그녀로서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객관'을 넘어선 인간적으로 번민해야 할 지점에 작품은 시선을 둔다. 

 

 

한없이 싱그러운 미래가 열려있을 거 같은  애덤에 피오나는 남편 앞에서 '그저 멋진 소년이라구요' 절규하듯 매혹되었다. 하지만 판사로서의 도덕적 규범이 우선하는 피오나는 자신의 직분 이상을 넘어서지 않았다. 그녀는 비난받을 그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런 그녀의 결정 앞에 그가 믿었던 모든 것이 흔들려버린 소년 애덤은 그녀에게 새로운 기대를 걸었지만 좌절하고 만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오늘날 우리가 만능처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법'과 '제도'의 규범 속에 담을 수 없는 이면의 변수들에 대한 '헤아림'과 '관용'이다. 그건 곧 '단호한 지성'에 대한 반추이다. 그리고 그런 '행간'에 대한 반추는 오늘날 '옳음'의 이름으로 서로 선을 긋고 그 선 안에서 돌아보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여지를 내민다. 어리석어서 눈물을 흘리기 전에 한번쯤 돌아보는 시간, 바로 <칠드런 액트>이다. 

by meditator 2019. 7. 24. 17:35

도쿄대에 합격할 정도의 실력이라는 AI가 있다. 이 대학에 갈 수준이라는 AI와 우리의 고등학생들에게 같은 유형의 국어 문제를 풀도록 했다.

' 알렉스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쓰이는 애칭이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라라는 여성의 애칭은 다음 중 어느 것일까?'

남자, 여자, 알렉산드라, 알렉스 등 예시의 4문항 중 정답은 알렉스이다. 이 기사를 읽은 여러분들은 맞추셨는가? 대학가는 AI는 이 문제를 비롯하여 9문제를 풀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등학생들은 어땠을까? 이런 유형의 문제를 푼 학생들의 30%가 정답을 비껴갔다. 무엇을 물어보는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학생들, 애칭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이냐고 반문하는 학생들, 선생님은 요즘 학생들의 경우 교과서의 글을 읽고 요약을 하라고 하면 그런 요약은 인터넷에 치면 다 나온다며 하려 들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하신다. 인터넷에 치면 다 나온다는 중심 내용, 거기에 있어서일까? 중심 내용을 정리할 수 있는 학생들을 쉽게 찾을 수 없단다. 

 

 

독서하면 뒤쳐져요. 
실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만 되도 당당하게 밝힌다. 자신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심지어 도서관에 와서 수다를 떨면서도 책을 왜 읽느냐며 해맑게 반문한다. 다큐를 연 유치원도 아직 다니지 않을 것같은 유아들을 상대로 한 독서 수상 광경, 엄마 품에 잠든 아기에게 500권의 독서 상장이 주어진다. 아마도 지금 책을 안읽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들도 저 시절은 아니더라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시절에는 '책'과 친근했을 것이다. 집안의 서가에는 엄마가 사모은 각종 전집류가 쌓여 있었을 것이며 빈번하게 도서관에 엄마 손을 잡고 다녔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던 아이들이 왜?

우리나라 국민들의 독서 관심도는 저 어린 시절을 넘어서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어른이 되면 더한다.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읽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독서 교육에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중학교만 가도 그 '독서 교육'의 관점이 달라진다. 그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교과와 연결되어 가시적 교과가 있기를 바란다. 

그러다 입시 경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 강남 국어 학원에 밤새 줄을 선 학부모의 말처럼 '독서'를 하면 뒤처진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수학, 영어 문제 한 문제라도 더 읽어야지, 어디 책을 하는 시기가 되는 것이다.

책읽을 시간이 없는 입시 교육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자발성이 없고 반강제적으로 책읽기를 시작했던 우리나라의 독서 교육이 문제다. 기생충 박사로 유명한 서민 박사, 책을 안읽어도 되는 우리의 교육 환경에서 서민 박사는 책을 읽지 않고도 대학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박사의 진단에 따르면 초등학교 시절 많이 읽어라 하는 독서조차 숙제로 만드는 우리의 교육 환경이 아이들로 하여금 책에 학을 떼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 시절 많이 읽어라 해서 질려버렸다는 것이다. 

청소년의 경우 국가간 학력 비교 평가(PISA) 읽기 영역에서 2006년 읽기 영역에서 1등을 했던 한국, 하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급격하게 순위가 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체 순위가 아니다. 하위권 학생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의 32.9%가 하위권에 속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교과서를 읽고 이해하기 힘든 비율이 전체의 1/3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난 2018년 수능 국어 파동같은 해프닝이 벌어진다. 당시 너무 어려워 문제가 된 국어 문제, 

 

 
일반적으로 수능 1등급 커트라인이 90점을 상회하는데 2018년에는 80점을 겨우 넘어 문제가 됐었다. 출제 기관에서는 이 정도는 충분히 풀 수 있으리라 냈던 문제, 하지만 점점 떨어지고 있는 우리 고등학생들의 독해력은 이런 문제 앞에 '멘붕'이 되고 만다. 그러다 보니 이제 수학, 영어 외에 국어도 중요하다며 학부모들은 강남의 유명 입시 학원에 밤을 새워 줄을 선다. 훌륭한 국어 강의를 들으면 해결이 될까?

그 유명한 국어 강사의 강의 시간, 한참 한국 단편에 대해 설명하는 중, 한 학생이 진지하게 질문을 했단다. '그런데 선생님, 역마살은 어떤 부위예요?' 수능 국어는 어휘력, 이해력, 사고력, 독해력이 필요한데 어린 시절부터 부모들이 일일이 떠먹여준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결과물은 이제 국어 학원마저 줄을 서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디지털 시대의 난독증 
어른이 되면? 가끔 읽기는 읽는데 승진 등에 도움이 되는 목적형 독서를 하게 된다. 한국 성인 중1/4가 일년에 한 권도 책을 읽지 않는다.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과학적인 한글 덕분에 문자 해독률은 높지만 문맥을 이해하는 능력(문해력)은  OECD 평균 이하이며, 그중 22.4%는 초등학생 수준 이하이다. 

대학생인 이수민씨는 이와 관련된 고민이 있다. 책은 당연히 읽기가 힘들고, 기사문도 길어지면 이해가 안된다. 그러다 보니 세 줄 이상 넘어가면 읽지 않는 습관이 들어 버렸다. 당연히 쓰는 것도 힘들다. 간단한 글도 쓰다 보면 걸리고, 하다못해 자소서 등의 문항을 쓰다가도 #버튼에 의존하게 된다고 한다. 

이수민씨는 자신들이 책을 읽다가 안읽은 세대라 정의내린다.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때부터 책을 안읽은 세대, 더 이상 책을 읽으라고 잔소리를 듣지 않은 시절부터 책으로 부터 자유로워진 세대, 대신 스마트폰을 손에 쥔 세대이다. 

한때 독서광이었다먼 김귀희씨 이제 아이 둘의 엄마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으려 해보지만 좀처럼 책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시선이 머무르는 시점이나 시간을 통해 읽는 방식을 검사하는 아이 트래킹에 참여했다. 

그 결과 한때 책을 즐겨 읽었다던 김귀희씨는 어느덧 그녀가 즐겨보는 스마트폰을 보듯이 시선을 세로로 하여 스냅샷을 찍듯이 책을 읽고 있었다.  문장을 따라 꼼꼼하게 보지 않고 Z자형, F자형으로 건너뛰며 전형적인 디지털 읽기 방식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책의 내용을 깊게 이해살 수 없으니 당연히 책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또한 독서는 인간의 진화적 특성에 어긋난다. 인간종으로의 진화는 20만년 전, 하지만 문자의 발명은 6천년 경, 늘 주변을 살펴야 하는 산만한 DNA를 가진 인간들에게 책읽기 자체는 쉽지 않은 미션이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그럼에도 진화적 특성을 이겨내면서까지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미 UCLA 난독 연구 센터 매리엔 울프 박사, 하루에 5~10만 단어를 처리하는 디지털 시대, 하지만 그 디지털의 방식은 '깊은 독서'를 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한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씨는 우리 삶에 도움을 줄만한 한 영혼이 우리에게 들려주고픈 말을 정리해놓은 것이라 책을 정의한다. 읽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내 속에서 어떤 변화가 오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책을 통해 얻어지는 공감', 그것이 깊은 독서의 첫 번째 관건이다. 저자, 혹은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여러가지 '추론'을 하며 '생각'을 하게 된다고 메이앤 박사는 주장한다. 

책을 읽는 순간 우리의 뇌는 변화한다.  전두엽이 활성화되며 사고력, 창의력, 기억력, 감정 조절 능력이 깊어진다. 이를 통해 쌓이는 배경 지식, 많이 읽을 수록 더 많은 배경 지식이 쌓이고, 이는 다음 독서의 기반이 된다. 그리고 그 배경 지식와 함께 뇌의 회로는 보다 정교해지고 복잡해지며 견고해진다. 

예전에는 나이가 들면 머리가 굳는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말하는 뇌과학자들은 없다. 하다못해 저글링만 해도 뇌의 회로는 변화한다. 노인이 되서 굳는게 아니라, 안써서 굳는 것이다. 뇌를 활성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독서'다. 



난독의 시대, 어떻게 읽을까? 
물론 이견도 있다. 책을 사지 않을 뿐, 책을 읽지 않는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웹 소설 작가 문화류씨 아예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는 레이아웃에 맞춰 디지털 세대의 작가로 최근 각광받는 문화류씨는 자신들의 독자의 경우 한 달에 7,8권의 웹 소설을 소비한다며 종이로 된 책을 안살 뿐 자신들의 세대는 웹 소설 등으로 다른 '독서'의 세계를 열고 있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디지털의 시대 책은 좋고, 디지털은 나쁘다라는 이분법 자체가 무의미한 시대다. 매리엔 박사는 5살에서 10살 시절에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고, 11살에서 15살 무렵테 책과 디지털의 세계를 접목해 나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라 권유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독서'가 낯설어지는 시대, 과연 어떻게 다시 책과 친해질 수 있을까?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 씨는 친구가 되려면 시간이 걸리듯 책과 친해지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라고 권유한다. 일년에 몇 권을 읽어치우려 하지 말고 한 권이라도 꼭꼭 씹어 먹듯이 읽으라고 권한다. 

기생충 박사 서민 박사의 주장은 파격적이다. 이미 어릴 적 반강제적인 독서 교육으로 책을 멀리하게 된 시절, 차라리 어릴 적에 '규제'를 하여 책을 읽고픈 욕망을 극대화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손승훈 교사는 책을 읽으며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진다고 한다. 교과서를 보거나 EBS 문제집을 풀면서 고단하던 눈빛이 책을 읽고 거기서 재미를 느끼게 되면 변한다며, EBS 문제집을 적당히 보고 시간을 나눠 책도 좀 읽는게 수능 성적이 향상되는 지름길이라며 팁을 제시한다. 실제 박성경 학생의 경우, 처음엔 공부 시간을 빼서 책을 읽는게 부정적이었지만 3개월 정도 꾹 참고 책을 읽다보니 문제 푸는 시간이 늘어났다고 자신의 성공 사례를 덧붙인다. 

단,  손교사는 서울대 권장 도서목록 이런건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이 좋아할만한 책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독서를 한다면 대번에 50권을 사들이는 것도 피해야 할 일 중 하나란다. 일주일에 두 권씩 사 들이면 어느 틈에 그 책들을 읽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같이 읽는 것도 한 방법이다. 보령의 '책읽는 마을', 대전의 '백북스', 전국에 여러 독서 모임이 활동중이다. 스마트폰을 보던 지하철의 시간을 활용하여, '지하철에서 책읽기 모임'도 있다. 

홍천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독해력을 높이기 위해 독서 동아리를 장려했다. 친구랑 함께 책을 읽고 노는 시간이라고 시작한 아이들, 자신이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 어느덧 전교생의 70%가 참여하는 83개의 독서 동아리가 활동중이다. 심지어 고3이 되어서도 여전히 주말 오후에 함께 책토론을 즐긴다. 동아리의 학생은 말한다. '책을 싫어하는 이는 없다. 단지 좋아하는 책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고. 

by meditator 2019. 7. 22. 16:52

새로운 수목 드라마들이 시작되었다.  일찌감치 9시에 포문을 연 건 로맨스 사극이다.  조선 시대 연애 소설가가 된 대군에 여자 사관이 된 당시의 세상 관심 많은 노처녀, 조선 시대에는 불가능할 것같은 이 캐릭터들을 내세워 <솔로몬의 위증>팀의 강일수, 한현희 피디와 김호수 작가가 다시 뭉쳤다.  티저만 보면 <성균관스캔들>이요, <해를 품은 달>같다. 앞서 <봄밤>이 시청률과 화제성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종영한 상황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야기를 펼쳐보기도 전에 '사극'이라는 장르에 맞지 않는 주연 배우의 연기가 발목을 잡으며 방영 2회차 만에 선두 자리를 내주고 만다. 

kbs2는 손현주, 최진혁 두 배우을 앞세워 <추적 60분>을 10여년간 쓴 내공의 정찬미 작가가 <우리가 만난 기적>의 조웅 피디와 함께 장르물 <저스티스>로 돌아왔다. <추적자> 이후 믿고 보는 장르물의 배우가 된 손현주가 이번에는 '악마'같은 재벌이 되었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악'과 손을 잡은 변호사로 최진혁이 나섰다. 배우들의 면면은 믿을만한데, 이젠 법정을 배경으로 재벌과 진실을 파헤치는 변호사의 이야기가 신선하지 않은게 문제다. 결국 그 '신선하지 않은 소재'를 어떻게 요리하느냐가 문제인데, 주연 배우의 연기가 아쉽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선방했던 <단 하나의 사랑>을 선택했던 시청자들에게 <저스티스>의 요릿법은 진부했을까? 아니면 난해했을까? 안타깝게도 첫 방의 6%대 시청률은 2주차에 바로 4%대로 떨어지고 만다. (1회 6.1%, 4회 4.8%,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닥터 탐정, 산업 안전 의학 장르물의 선방 
뜻밖에도 방영 2주차만에 선두 자리를 탈환한 건 sbs의 <닥터 탐정>이다. <리턴>의 박진희, 봉태규라지만, 상대작들에 비해 캐스팅이 제일 약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작품, 심지어 전작 <절대 그이>는 2%로 소리소문없이 종영했다 할 만큼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았기에 이른바 전작의 혜택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역시 드라마는 누가 나오느냐, 어떤 소재이냐를 떠나 잘 만들고 볼 일, 새로 시작한 수목 드라마 중 그나마 서사와 연기 등  완성도 면에서 나았다고 평가를 받는 <닥터 탐정>의 1위는 그래서 드라마의 존재론을 역설한다. 

<저스티스>가 <추적 60분>작가라면, <닥터 탐정>은 <그것이 알고싶다>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 <sbs스페셜>, <궁금한 이야기 Y>를 통해 다큐 연출에 잔뼈가 굵은 박준우 피디의 첫 드라마 도전이다. 그리고  박피디와 함께 산업  의학 전문의 출신 송윤희 작가가 자신의 장기를 살려 <사회 고발 메디컬 수사극>으로 첫 도전을 했다. 

그렇게 '다큐'의 경험이 풍부한 제작진답게 <닥터 탐정>의 장기는 바로 생생한 현실감이다. 굳이 4회 말미에 덧붙인 '에필로그'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알고싶다>등을 통해 쌓인 '현실'의 결과 산업 의학 전문의만이 그려낼 수 있는 UDC, 미확인 질환 센터의 '닥터 탐정'들의 미시적 세계가 '드라마'를 통해 풍성하게 그려진다.

덕분에 어쩌면 또 하나의 <검법 남녀>? 인가 혹은 또 한편의 재벌 비리 드라마인가 싶었던 드라마는 산업 현장이라는 현실감을 살려내며 새로운 장르물의 탄생을 예고했다. 특히 3,4회 방영된 지하철 하청업체 재해 사망 사고는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는 구의역 사망 사고 사건을 복기하게 하는 한편, 거기에 그들을 산업 재해의 피해자로 되도록 만드는 각종 불법 유기 용제의 오남용을 강요하는 하청업체의 현실을 낱낱이 고발해낸다. 

거기에 중간에 투입돼음에도 불구하고 퇴장한 배우가 떠올려지지 않을 만큼 열연으로 연기력을 증명했던 박진희가 한때 TL그룹 며느리였지만, 이제는 딸조차 빼앗긴 '닥터 탐정'으로 돌아왔다. 천재적인 능력에 놀라운 집중력을 가진 직업 환경 전문의,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그런 능력은 1회, 기업이 정부의 법망을 피해가는, 노조의 반발을 무마하는 '수단'으로 등장한다. 깊은 밤 모두가 퇴근한 현장에 도둑 고양이처럼 등장한 닥터 탐정 도중은은 셜록급으로 '법망'을 피할 수 있는 산업 안전의 꼼수를 전파하고 돈을 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산업 안전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던 도중은이 그녀를 따스하게 대해주었던 이웃 정하랑(곽동연 분)이 TL메트로 하청 업체 직원으로 과도한 업무와 산업 재해로 추정되는 병에 걸린 것을 목격하고 이기적인 태세를 전환한다. 결국 그 병으로 인한 지하철 사고로 하랑이 숨을 거두고 그의 죽음을 놓고 TL이 갖은 꼼수를 부리며 사건을 은폐하려 하자 도중은은 떨쳐 일어선다. 자신의 딸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거절했던 UDC의 팀장 자리를 수락한다. 

다만 그 어떤 드라마도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산업 현장과 다큐의 현실감이 <닥터 탐정>의 장점이라면, '다큐'에 '감정'만 불어넣는다고 드라마가 되는 건 아닌 법, 현실보다도 더 현실같은 이야기를 강조하기 위해 드라마가 불을 지핀 '신파'가 때로는 드라마의 집중도를 떨어뜨리며 '입봉'의 과욕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잠시 출연했음에도 존재감을 드러냈던 곽동연을 비롯하여 <리턴>에서도 그랬지만 캐릭터로 승부하는 봉태규와 함께 박지영, 류현경 등 '한 연기'하는 출연진들의 연기가 그런 아쉬움을 보완해 주지 않을까.

 

 

기간제 교사가 된 변호사 
돈을 위해 산업 안전을 이용하던 닥터 탐정이 한 청년의 죽음을 기화로 정의의 산업 안전의 수호자로 변신했다면, 여기 승리를 위해서 '편법'쯤이야 껌처럼 여기던 대형 로펌의 간판 변호사 기무혁(윤균상 분)는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기간제 교사로 변신한다. 

자신이 소속된 로펌 대표가 던져준 사건, 천명고의 한 여학생이 사고를 당하고 사고 현장에서 잡힌 남학생이 유력한 용의자가 되었는데, 로펌대표는 적당한 선에서 형량을 정하고 마무리하라고 했는데, 의욕이 앞선 기무혁은 '무죄'를 주장한다. 그나 법정에서 그의 변론에 뜻밖에도 용의자였던 남학생이 부정을 하고 심지어 옥상에서 추락하며 사건은 미궁에 빠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기무혁은 변호사로써 윤리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정직'처분가지 당하게 된다.  

보육원에서 자라 가진 것 없는 사람은 자신조차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기무혁이 갖은 고생으로 얻게 된 대형 로펌의 변호사, 그는 그렇게 얻은 것을 한 순간에 허망하게 허물어 뜨린 천명고 사건, 이제 여학생의 죽음으로 살인 사건이 된 사건에 의혹을 느끼는데, 그 의혹을 안고 찾아간 여학생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천명고 학생들의 위선적인 태도는 그로 하여금 기간제 교사라는 모험의 계기가 된다. 변호사 출신의 명석한 기간제 교사와 위악적인 학교, 학생들간의 살인 사건을 둘러싼 진실 게임은 장르물의 신선한 지평을 연다. 

알고 보니 로펌의 대표 아들이 다니는 사립고, 거기에 학교의 주인이 '재단'이라는 신참 기간제 교사 기무혁의 아부에 통쾌하게 호응하는 재단 이사장, 그리고 해도 되니 한다며 대놓고 가난한 아이를 폭력적인 싸움에까지 이용하며 '왕따'시키는 아이들, 거기에 어른 뺨치게 위선적인 학생들까지, <솔로몬의 위증>의 암울한 사립고와 <스카이 캐슬>의 위악적인 교육 현실이 다시 한번 소환되며 거뜬히 2회만에 두 배의 시청률로 뛰어올랐다. (1회 1.814%, 2회 2.413% 닐슨 코리아 전국 케이블 기준)


by meditator 2019. 7. 19. 15:59

얼마 전 지인이 하소연을 했다. 초등학생인 아들이 유투브를 즐겨 보길래 책을 좀 읽으라 했더니, 아들 왈, 엄마는 석기 시대의 도구를 가지고 21세기를 살아갈 수 있느냐며 되레 반문을 했단다. 말문이 막힌 엄마, 그 분이 아니더라도, 집집마다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핸드폰' 사용을 둘러싼 갈등을 한번 이상 겪어보지 않은 집이 없을 듯하다. 

우리나라 만이 아니다. 애플의 주주들이 들고 일어났다. 학생들의 스마트폰 사용량이 3시간을 넘으면 자살율이 35%가 증가하고, 5시간을 넘으면 71%가 증가한다며 애플은 이런 청소년들의 스마트폰 중독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의 스마트폰 사용을 넘어선 중독, 과연 그에 대한 해결책은 어디에서 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런 사회적 고민에 대해 <시사 기획 창>은 색다른 실험을 통해 답을 찾고자 한다. 기존의 많은 과학적 실험들이 스마트폰이 인간에게 끼치는 해악에 대해 접근했던 것과 반대의 시도를 해본 것이다. 

 

 

스마트폰 없는 3개월 
초등 저학년이 37%, 고학년이 74%, 중학생이 92%, 고등학생이 되면 93%의 학생들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가 신체의 일부처럼 스마트폰과 함께 한다. 학생들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게임을 하거나(30.8%), 메신저을 하거나(24.1%), 웹툰을 보며 (16.6%) 시간을 보낸다. 2018년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중 29.3%가 스마트폰 과의존 증상을 보이고 있으면 남학생 28%에 비해 여학생 30.7%로 그 비율이 높다. 

​​​​​​고양시의 덕양 중학교, 전교생이 900여 명이 넘는 이 학교 역시 학생들의 스마트폰 사용이 골치꺼리다. 그에 따라 2016년 학교와 학생들이 모여 만든 생활 협약에 따라 학교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자제하기로 결정하고 매일 아침이면 학생들의 스마트폰을 걷는다. 하지만 이런 협약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생들은 불만을 제기하기도 한 상태, 결국 다시 협약을 유지하기로 하였지만 학교에서 사용을 하지 못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하루 5~6시간, 심지어 주말에는 10시간에 이르는 학생들의 스마트폰 중독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중2 성원이의 경우, 방학이 되자 사용 시간이 부쩍 늘었다. 게임, sns, 유투브, 메신저 등의 용도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성원이, 수시로 울리는 알림을 들여다 보느라 해야할 과제를 다 못하기 했다는 성원이는 오늘도 이어폰까지 연결한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 가족과의 대화는 물론, 식사 시간에도 집중을 하지 못한다. 친구가 와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주 보며 대화는 커녕 둘이 나란히 누워 게임을 하다 간다. 

지원이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엄마가 지원이를 깨우는 시간은 오후 4시, 그나마 오늘은 빠른 편이다. 겨울 방학에 들어서면서 밤새 스마트폰을 하느라 낮밤이 바뀐 지원이, 나가는게 귀찮고 할게 없다며 스마트폰만 하느라 엄마조차 귀찮아질 지경이다. 엄마도 지원이의 상태가 심각한 건 알지만 괜히 잔소리하다 관계가 더 나빠질까 마찰을 피하다 보니 이렇다하게 제재를 못하는 상황. 

 

 

 

 

이에 <시사 기획 창>과 학교는 연세대 의대 정신 과학 교실의 도움을 얻어 3개월간 스마트폰 절제하기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전교생을 상대로 하여 이 프로그램에 참여자를 신청한 결과 다행히도 16명이 지원을 했고, 박나린, 장성원, 강산, 이찬영, 변평화, 신지원, 지준영 등 최종 7명이 참여하기로 했다. 

또한 이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3개월 동안 뇌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알아보기 위해 영상 촬영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로 했다. 
영상 촬영 그 대상은 우리의 뇌, 그 중에서도 전두엽이다. 전두엽은  학습 능력을 담당하는 우리가 인간으로 인간다움을 드러내는 이성적 사고 판단을 담당하는 부위다. 전두엽 내 혈액 속 산소 포화도 변화를 측정하여  자기 조절과 억제 능력, 작업 기억 능력을 데이터화 한다. 

실험은 참가한 학생들과 부모들이 함께 스마트폰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스마트폰 뿐만이 아니라 다른 미디어 기기 역시 평일 1시간, 주말 2시간으로 실험의 효과를 강화시키는 약속도 했다., 아이들만이 아니다. 아이들의 효율적인 실험을 위해 부모들 역시 집에서는 필요할 때만 스마트폰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각자 핸드폰을 '보관 상자'에 담고, 대신 전화, 문자만 가능한 이른바 효도폰을 받는 것으로 실험이 시작되었다. 

28일째 되는 4월 17일 중간 점검이 이루어졌다. 지하철 탈 때 심심하다는 등 스마트폰이 없는 생활의 불편함이 토로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서서히 다른 활동을 찾아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모와 아이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엄마가 아이에게 접근하는 것이 한결 쉬워졌다며 웃는다. 가족끼리 스마트폰을 하는 대신 야외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났단다. 

그리고 71일이 되는 5월 30일, 그간 아이들의 전두엽 이미지 촬영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과 그냥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대조군의 학생들을 함께 촬영한 결과, 자기 조절 억제 능력에서 대조군의 학생들이 파란 색인 것과 달리,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은 노랑 색을 띠며 자기 조절 억제 능력이 향상되었음을 보였다. 반면 작업 기억 능력의 경우 실험군의 학생들이 파란 색, 대조군의 학생들이 노란색을 띠었다. 이는 실험군의 학생들이 머리를 덜 쓰고도 과제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정보 처리의 효율성이 증가한 것이다. 

불과 몇 달 사이 스마트폰을 쓰지 않았을 뿐인데 학생들의 전두엽 기능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이는 곧 우리 학부모들이 가장 관심있어 하는 학업 능력의 향상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 지금까지 해왔던 실험과 반대로 해본 실험, 불과 몇 달 사이에 달라지는 아이들의 뇌를 통해 지금이라도 더 늦지 않게 우리 아이들의 건강한 뇌를 향한 시도가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결론은 명확해 진다. 

 

 



디지털의 격차는 접근 금지의 격차로 부터 
학자들은 사춘기가 전두엽 발달이 활발뇌가 재건축되는 시기라 정의한다. 그런 시기에 뇌발달이 불균형은 이후 학업은 물론 미래의 삶에 있어서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기에 일상의 통제력을 찾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 즉 정신적 항체를 키우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페북의 좋아요 기능을 만들었던 저스틴 로젠스키, 그는 바로 이런 sns의 기능이 '가짜 즐거움의 맑은 종소리'라며 반성한다. 그리고 페북을 나와 구글에서 일했던 트리스탄 해리스와 함께  '인도적 기술 센터'를 만들어 디지털 중독 사회의 해법에 앞장서고자 한다. 

트리스탄은 오늘날 우리는 우리 삶의 1/4를 인공 사회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통탄한다. 거대 미디어 기업은 인간의 취약한 부분을 공략하여 유혹적 방식으로 붙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무작위로 오는 알림은 도박과도 같은 중독성이 있고, 관심에 목마른 청소년은 좋아요를 통해 마치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스마트 쉼 센터에 찾아온 상담 학생의 사례를 보면 전학으로 친구가 없던 청소년이 온라인 페친을 통해 외로움을 달래려 하고 1000 명이 넘는 페친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다 그들과의 직접적 관계를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반대하는 부모와 갈등을 빚다 가출까지 시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대 의대 정신건강 의학과 전홍진 교수에 따르면 2014년 스마트폰 과다 사용으로 상담을 한 청소년 150명의 경우 밤을 새면서 까지 확인을 해야 할 정도로 불안, 초조가 극심했고, 우울증 증상까지 드러났다고 한다. 

정작 스티브 잡스의 아이들은 아이패드를 몰랐고, 빌 게이츠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13살이 되어서야 핸드폰을 사줬다는데, IT 산업의 메카 실리콘 벨리에서는 오늘날 디지털의 격차는 '기술에 대한 접근 제한이 새로운 격차로 귀결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실리콘 벨리의 사라토가 고등학교, 공립학교 중 최상위 등급에 속하는 이 학교에서는 총기 사고 등 미연에 발생할 수 있는 사고 시 알림을 위해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허용하기는 한다. 하지만, 교실 한 쪽에 스마트폰 포켓을 마련하여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학생들이 그곳에 스마트폰을 보관하도록 한다. 만약에 수업 시간에 스마트폰을 포켓에 넣지 않고 보면 바로 뺏기고, 교장에게 인수되어 학칙에 의거 벌을 받게 된다. 

이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한국인 인병진 교사네 집 풍경은 실리콘 벨리 사람들이 디지털 기기에 대한 접근 제한에 대한 태도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초등학교 자녀는 아예 핸드폰이 없으면 고등학생인 아들도 핸드폰이 있지만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인교사네 집, 노트북을 비롯한 디지털 기기는 거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게 이집의 규칙이다.  침실에서는 전자 기기를 사용할 수 없으며, 고등학생이 되서도 다음날 학교에서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밤 10시면 취침을 해야 한다는 인교사네 집의 풍경은 아이의 스마트폰 사용을 어쩌지 못하는 우리네 가정의 풍경과 참 많이 다르다. 


by meditator 2019. 7. 17. 04:06

오늘날 '가족'은 해체 중에 있다. 개인의 안전판이 되어주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개인이 믿고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최후의 보루였다. 하지만, 그 '최후의 보루'가 흔들리고 있다. 사회면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직계 존비속으로 인한 각종 사건 사고는 우리 사회 기본 안전망이었던 '가족'이 더 이상은 보호막이 되고 있지 못함을 증명하고 있다.  거기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족만들기의 과정인 결혼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비혼'을 젊은이들은 당당하게 선택하고 있다. 

번거러워진 가족, 하지만 홀로 사는 삶도 녹록치 않다. 해결책이 있을까? 이러한 현대 사회의 고민에 대해 '대안적'인 모색을 하는 이들이 있다. 7월 14일 <sbs스페셜>이 찾아간 도봉구 안골 마을의 간헐적 가족 공동체 '은혜'가 그 주인공이다. 

 

 

엄마를 찾지 않는 아이들 
다큐를 여는 건 여느 가정에서 볼 수 있는 아침 기상, 엄마가 아이들을 깨운다. 그런데, 아이들이 너무 많다. 한 층을 올라가 또 다른 가정인가 했는데, 거기서도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이들이 '가족'이 아니란다. '가족' 대신 이들이 쓰는 명칭은 '부족', 이 부족에만 아이들이 9명이 있단다. 

가족도 사라지는 현대 사회에서, 석기 시대에나 있을 법한 부족이 있다. 이 '부족'의 아이들은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스스로 오늘 있을 '무수골 탐방' 준비를 하는 동안 '엄마'를 찾지 않는다. 심지어 어른도 지치기 십상인 산길을 오르는 내내 투정 한번 부리지 않고 어른들 사이를 누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이 이번에도 엄마가 아니다. '이모'란다. 

젖은 옷을 갈아입히고, 땀에 젖은 머리를 묶어주는 유치반 아이들 4명을 오늘 보살피는 사람은 '이모', 한 달에 한번 아이들의 이모가 되어주는 정영경씨다. 이렇게 이모가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사이 엄마는 공동체의 또래들과 여유롭게 산행을 즐긴다. 

14가구 50명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안골 마을의 소행주, 거기에는 평소에는 각자 개인의 삶을 살지만 가끔씩 서로에게 가족 역할을 하는 간헐적 가족 공동체 '은혜'가 있다. 

그들이 처음부터 함께 모여살았던 건 아니다. 일주일에 한번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 공부도 하고 밥도 먹고 하던 모임,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들은 이렇게 뜻이 맞는 사람들끼지 함께 모여살면 어떨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단다. 

혼자 오래 살다 보니 깊이 쌓이게 된 외로움, 공부하고 경쟁하며 살아가느라 친구 관계조차 깊게 맺지 못하던 현실에서 그들은 그 어려움을 세상이 요구하는 '결혼'이라는 과정 대신에 '공동체'라는 대안을 통해 풀어내고자 하였다. 

 

 

뜻을 모아 '소행주'
소규모 연합 공동체들이 모여 함께 살아보자는 결의를 하고 함께 집을 짓기 시작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작게 모여살았던 사람들 중 막상 땅을 사고 집을 짓는 '자본주의적' 과정을 함께 할 수 있는 경제적 합의를 함께 할만한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 그런 경제적 난관에 대해 공동체 '은혜'는 융통성 있는 방침을 마련했다. 집을 지을 수 있는 돈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들은 돈을 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대신 매달 '월세'를 내는 것으로 뜻이 있는 곳에 길을 마련했다.

2016년 5월 지상3층, 지하 1층의 공동체 주택 소행주가 완공되었다. 싱글들의 삶, 그 특성을 존중하는 공간, 하루 종일 일하는 엄마가 돌아와 '독박 육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공동 육아'의 시스템, 거기에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지하의 강당까지 소행주는 그렇게 '공동체'의 삶을 열었다. 

집을 짓는 것말고 난관은 또 있었다. 싱글들의 모임에서 시작된 공동체 만들기, 하지만 '소행주'를 만들며 '아이'들과 함께 사는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그래서 그들은 '이모'가 되었다. 한 달에 한번 싱글의 이모들이 아이들을 돌본다. 방과 후에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운동을 하고, 들놀이를 보살핀다. 이젠 아이들도 유치원,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를 찾는 대신, 오늘은 누가 날 돌보는지 묻는다. 

그런데 아이를 돌보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지하 1층, 지상3층 나무로 된 계단을 맘껏 뛰어 다닐 수 있는 아이들에게 '소행주' 자체가 무한한 놀이 공간, 아파트에서처럼 '뛰지 마라', 잔소리 할 일도 없다. 놀 꺼리가 없어 일일이 놀아줘야 하는 고달픔도 없이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리다보면 어느 틈에 잘 시간이 되어버린다. 꼭 '이모'가 아니라도 아이들끼리 놀다보면 지나가는 '어른'들이 끼어들어 함께 어울린다. '이모'의 역할은 그저 아이들끼리 '분쟁'의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지켜봐 주는 정도,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잘 시간이다. 그러면 돌아와 그제서야 엄마와 인사를 하고, 엄마의 몫인 시간은 한 달로 치면 4시간, 엄마에게는 '천국'인 공동체다. 

엄마로서의 시간을 빼앗기는 대신, 공동체의 뜻이 맞는 사람들끼지 모여 좋아하는 일을 한다. 여자들끼지 요가를 한다. 싱글들끼리 오붓한 옥상의 족욕 타임도 빠질 수 없다. 거기에 어른에서 부터 아이까지 함께 모여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영화 제작도 하는 등 다양한 취미 활동이 빠질 수 없다. 공동체가 함께 모이는 날은 웬만한 파티에, 행사 못지 않게 시끌벅적 '난장'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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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이혼해도 '가족'은 남아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내내 홀로 지내던 크리에이터 최미정 씨가 찾은 공동체 '은혜',  홀로 지낸 시간이 길어 과연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라는 그녀의 의문과 달리, 공동체의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그녀를 맞이한다. 아이들에게는 그저 또 한 명의 이모다. 일주일을 공동체에서 보낸 공동체의 사람들이 바리바리 싸준 먹거리를 들고 떠나던 최미정씨는 '제가 생각했던 사람들과 많이 달랐어요, 여기 사람들은', 하며 결국 눈시울을 붉힌다. 

물론 처음 부터 다른 관계 맺기가 쉬운 건 아니었다. 습관의 차이는 원칙을 만들어 쉽게 고쳐졌지만, 각자 성격의 차이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번 보던 사이가 함께 집을 짓고 사는 관계가 되었고, 이제 그런 공동체의 실험도 어느덧 3년이 되어간다. 

없던 아이가 생겨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들어온 부부가 이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부의 이혼으로 혼란을 겪던 아이가, 다른 이모 삼촌들의 위로로 자신이 버림받은 게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는 곳, '이모'의 노릇은 쉽지 않지만, 대신 '가족'이 생겨나는 곳, '가족'조차 없어져 가는 시대에, '부족'을 만들어 사는 마을, 공동체 '은혜', 그 실험은 아직 진행중이지만 '고독 사회'가 가진 고민의 한 대안임에는 분명하다. 

by meditator 2019. 7. 15. 16:34

크레인 가족의 5남매는 어린 시절 잠시 머물렀던 고택에서 저마다의 안좋은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이들은 결국 다시 그 '고택', 힐하우스로 돌아온다. 바로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힐하우스>의 내용이다. 오래된 집, 그곳에서 있었던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고통받지만 그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  <힐하우스>는 '오래된 그리고 기묘한 분위기의 집을 배경으로 한 '호러' 장르의 대표적 작가인 셜리 잭슨의 대표작이다. 심지어 미스테리 스릴러, 공포 환상 문학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딴 상이 제정됐을 정도다. 그런 셜리 잭슨의 또 다른 '고택'을 배경으로 한 작품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가 이번에는 영화가 되어 찾아왔다. 

 

 

마녀가 되어버린 언니 
셜리 잭슨의 또 다른 대표작 <제비뽑기>, 한 마을에서 77년의 전통을 이어온 제비뽑기, 그런데 이 '제비뽑기'는 다름아닌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을 뽑아 마을 아이들이 정성스레 쌓아올렸던 돌로 쳐죽이는 것, ' 우리 모두의 삶에 보편적인 몰인간성과 무의미한 폭력성이 있다는 것을 불쾌하게 각색해서 보여주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도는 이런 서사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마을이 있다.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고택, 그 곳에 고립된 채 살아가는 자매, 메리캣(테이사 파미가 분)과 콘스탄스(알렉산드라 다다리오 분). 몇 년전 그 고택에서는 살인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으로 두 자매의 부모가 독살당했다. 삼촌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하반신을 못쓰고, 정신적 충격으로 그 날의 시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살인 용의자가 된 건 바로 큰 딸 콘스탄스, 그녀는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언니 콘스탄스를 마녀 취급을 하고, 이들 자매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표시한다. 

 

 

언니 콘스탄스는 그때 이후로 '광장 공포증'을 겪어 집밖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 그래서 동생 메리캣이 일주일에 한번 장을 보러 마을에 간다. 홍해 바다 갈라지듯 그녀가 등장하면 피해서는 마을 사람들, 그것도 모자라 대놓고 욕을 하는 아이들,  물건은 파지만 벌레보듯하는 가게 주인과 손님들, 그리고 겨우 한 잔의 커피를 마시러 들어간 까페에서 만난 언니의 옛 연인은 대놓고 그녀와 언니를 조롱하고, 그곳의 노인들 역시 혐오감을 대놓고 드러낸다. 그러던 마을 사람들의 악의는 결국 블랙우드 저택에서 일어난 화재 현장에서 불붙으며 광란의 카니발을 벌인다. 

콘스탄스와 메리캣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흡사 중세 시대 마녀 사냥을 떠올리게 한다. 중세 시대 누가 마녀가 되었을까? 마녀 사냥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여자', 그 중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여자들이다. 가난한 과부, 병든 소녀, 그리고 버림받은 여인들이다. 사회로부터, 그리고 그 사회의 중심이 된 남자들로부터 외면받은 그들은, 그리고 그들의 처지는 '마녀'라는 이름 아래 잔혹한 '살해'의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블랙우드 가문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심지어 살해 용의자가 된 콘스탄스와 메리캣은 더할 나위없는 마을 사람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아마도 중세 시대부터 이 가난한 마을 사람들과 달리 '부'를 누려왔던 블랙우드 가문에 대한 계급적 적대감을 두 자매에 대한 '마타도어'로 치환시킨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 '비극'의 실체가 중요하지 않다. 77년된 <제비뽑기> 속 마을의 전통 그 유래가 중요하지 않듯, 마치 까마귀들이 병든 동료가 발견되자 마자 쪼아죽이듯 그렇게 쪼아대는 그 '악의적 관습'이 마을을 사로잡는다. 심지어 한때 언니와 사랑해서 야반도주를 하려다 아버지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소방대원조차 '진실'대신 동생 메리캣에 대한 극도의 혐오로 자신의 상처를 대신한다. 

 

 

보호받지 못한 자매 
그리고 그 맞은 편에 마법적 주술에 의존해서 자신을 지키려 안간 힘을 쓰는 메리캣과 블랙우드 성에 갇혀 박제된 인형처럼 살아가는 언니 콘스탄스가 있다. 그런데 그런 아슬아슬한 두 자매의 보호막이 사촌이라며 찾아온 찰스(세바스챤 스탠 분)를 통해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스테이시 패슨 감독이 2013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바 있는  <커피 한 잔이 섹스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풀어냈던 동성의 관계는 영화 속 언니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메리캣과 그런 메리캣에게 '사랑해'라며 보상해 주는 언니의 관계를 통해 긴장감있게 전환된다. 그리고 이 미묘한 자매애는 사촌이라며 등장하는 '남자' 찰스을 통해 '이방인'에 대한 긴장감 이상의 성적 긴장감을 낳으며 '블랙우드'가 파국의 또 새로운 단초가 된다. 

'남자', 아니, '남성'으로 인한 자매의 위기, 그리고 그건 그동안 본인들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비밀'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왜 콘스탄스가 사랑하는 이와 떠나려다가 떠나지 못했는지,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 날 밤 블랙우드가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니 그 이전에 '블랙우드'가의 비극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찰스'의 등장은 그의 얄팍한 잔꾀가 도발한 잔잔했던 자매의 일상을 궤멸시키는 것을 넘어 위기의 순간 그를 '아빠'라며 부르며 절규하는 두 자매를 통해 봉인되었던 진실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봉인된 진실에는 마을 사람들조차 부럽다 못해 질시하고, 저주했던 '부'의 상징 블랙우드 가가 무색하게 '가족' 내에서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 여성이 있다.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의 상처는 결국 '가문'의 비극을 낳고, 다시 '세상'의 보호마저 닫힌 그녀들은 안식처인지 감옥인지 모를 '블랙우드'로 침잠한다. 

영화는 아름다움이 '호러'가 되는 색채감이 넘치는 미장센을 통해 '블랙우드'가의 비극을 상징해 낸다. 그 비극 속에서 주술에 자신을 맡긴 기괴한 소녀와, 인형처럼 박제되었던 언니의 이질적인 자매의 끈끈한 사랑 속에 숨겨진 블랙우드 가문의 비밀을 미스테리의 한 축으로 하며, 거기에 이 자매들을 '마녀 사냥'으로 몰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증오의 카니발을 끼얹으며 보호받지 못한 소녀들의 비극은 절정에 이른다. 

by meditator 2019. 7. 14. 01:24

지난 5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는 <근대 미술가의 재발견1; 절필시대>를 전시하고 있다. 이미 그 이전에도 이쾌대 우리 근대 미술계에서 잊혀진 혹은 방치된 예술가들을 복기하는 전시회를 꾸준히 이어왔던 국립 현대 미술관은 <근대 미술가의 재발견1; 절실시대>를 통해 일제 시대와 6.25라는 역사적 격동기에서 본의 아니게 자신의 예술을 더는 이어갈 수 없었던 미술가들을 소환하여 미술로서의 근대사 읽기를 시도한다. 그리고 이는 사회와예술, 나아가 존재와 예술이라는 거대 담론을 향해 한국 미술사가 해나가야 할 진중한 과제를 향한 성실한 답변의 일환이다. 

1층과 2층, 총 3부로 이루어진 전시회는 근대 화단의 신세대; 정찬영, 백윤문, 해방 공간의 순례자; 정종여, 임군홍, 현대 미술의 개척자; 이규상, 정규 등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는 낯설은 이름, 그리고 그 이름만큼이나 우리가 만날 수 없었던 그들의 그림들, 하지만 그 그림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우리 근대 미술의 지평이 그저 몇몇 명망가들로만 이루어진 그런 것이 아닌  다양한 시도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더구나 최근 미술사를 수놓았던 인물들이 '친일'이라는 오명을 달고 퇴진하게 되는 위기에서 더더욱 반가운 시도이다. 

 

 

근대 화단의 신세대 
3부의 전시회를 여는 건 여류 화가 정찬영이다. 1929년, 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당시 유행하던 채색화 기법의 <지반, 또는 수련>, <설중백로>로 연이어 입선하며 미술계에 등장, 이후 그런 채색화의 기법에 자신만의 세밀한 묘사를 더한 <모란>, <여광> 등으로 여성 최초로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의 특선 작가가 되었다. 특히 자신의 딸을 모델로 하여 나물 바구니를 옆에 두고 애처로이 앉아있는 <소녀>는 1935년 창덕궁상을 수상함은 물론 식민지하 조선의 심성을 대변한 작품으로 높게 평가받았다. 

결혼의 조건이 그림을 계속할 수있었던 것일 만큼 예술에의 의지가 강했던 정찬영, 그녀는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기 위해 공작을 그릴 때 창경원에 나가 직접 데생을 하거나 했지만 그 자체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구경거리가 될만큼 화제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혼 두 둘째 아이를 잃게 되면서 그 아픔으로 붓을 놓게 된 정찬영, 이후 그녀의 그림은 식물학자인 남편 도봉섭의 식물서에 식물세밀화를 통해 만날 수 있었지만 그 마저도 남편의 납북으로 더는 그녀의 그림을 만나볼 수 없게 되었다. 가장 촉망받는 여류 예술가였지만 '가정'과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붓을 접어야 했던 근대 여성의 자화상이다. 

 

 
정찬영과 함께 전시된 백윤문, 도화원 집안에서 태어나 대를 이어 순종의 어진을 그렸던 화가이다. 김은호에게 사사하였으며 정찬영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채색화 화풍의 그림을 그렸던 화가, 정찬영이 여성적이며 섬세한 필치로 채색화를 접근했다면, 백윤문은 그와 반대로 김홍도의 풍속화처럼 당시 남자들의 생생한 생활의 모습을 담아내며 자신의 미술 세계를 이끌어 가다 1942년 건강상의 이유로 무려 35년 동안 붓을 접게 되었다. 이후 기적적으로 1977년 건강을 되찾아 78년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지만 불과 2년 후 유명을 달리했다. 

현대 미술의 개척자 
근대 미술의 신세대의 맞은 편 공간에 펼쳐진 건 지금의 우리에게도 신선한 현대 미술의 화풍을 개척한 이규상과 정규의 작품 세계이다. 김환기, 유영국, 그 이름만으로 걸출한 우리나라 모더니즘 미술의 대표자들이다. 김환기의 그림이 십억을 넘는 낙찰가를 호가했다는 기사를 아직도 접하게 될 정도로 여전히 '핫'한 것과 달리, 김환기, 유영국과 함께 한국 모더니즘 미술, 나아가 추상 미술을 이끈 세 사람이라 당대 칭해졌던 이규상은 자신의 그림을 알아주지 못한 시대를 만나 가난에 그림마저 절필하는 불우한 삶을 살게 되었다. 

1930년대 당시 일본에서는 서양의 모더니즘의 화풍을 이어 받아 다양한 미술적 시도가 융성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에 미술로 유학했던 이규상이 그런 화풍을 이어받은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 하지만 이규상은 그런 모더니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호안 미로의 초현실주의를 받아들여 그걸 자신의 작업 세계에 풀어놓는다. 기독교적 세계관, 이를 선과 원 등의 추상적 대상을 통해 풀어내고자 했던 이규상, 하지만 그런 '난해한' 그의 작품은 전시회를 통해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으며 동시대인들에게 외면을 받게 되고 하지만 추상적 주제를 향한 그의 예술적 열정은 더해만 가며 결국 그를 세상과 멀어지게 만들었다. 

반면 역시나 같은 모더니즘 계열의 추상화로 작품 세계를 열었던 정규는 초창기에는 교회, 소년같은 구상적 이미지를 선으로 구획된 단순화시킨 추상적 이미지로 만드는 작품들에 집중했지만, 불모지와 같은 추상화단에 머무르지 않고 판화, 도예, 그리고 도예 작품을 활용한 벽화로 자신의 작품 영역을 확장시켜나가며 우리 미술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해방 공간의 순례자 
<근대 미술가의 재발견1; 절필시대>가 시사하고 있는 바는 크다. 우리가 이름조차 몰랐던 근대 미술가들의 그림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전시회지만, 그 그림들을 통해서 우리는 해방공간과 분단의 시대를 살아갔던 '선인'들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이기에 예술가로서의 생을 다하지 못했던 사람도, 너무 앞서가서 외면받아 좌절했던 선각자도, 하지만 이런 근대인들의 초상들 중에서도 어쩌면 정말 이 전시회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해방 공간의 순례자'라는 제목으로 찾아온 두 사람 정종여와 임군홍이 아니었을까란 생각들게 전시회를 보고나서면 들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2층의 양 홀을 가득 메운 그들의 작품이 그러하거니와, 작품들의 면면이 우리 미술사에 이런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걸출하고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들의 이름도, 그들의 그림도 낯설기만 할 뿐이다. 

화가 임군홍,  하지만 그에게는 화가 말고도 다른 수식어의 직업이 많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정규적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던 임군홍, 독학으로 공부하여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미술계에 얼굴을 내밀었다. 연속 입선에 미술학도들과의 동인전으로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한편, 가장으로서 여행사를 운영하던 그는 1939년 이래 중국으로 가 중국의 풍물을 인상주의, 야수주의 등의 다양한 기법을 통하여 자신의 그림에 담았다. 

 

 

도화서 가문 출신의 백윤문이 평소에는 수묵 담채의 기법을 좋아했지만 당시 미술의 트렌드를 따라 조선화단에 인정을 받기 위해 채색화 그림을 그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을 하였듯이 일본 유학파 등이 주축이 된 조선 화단은 특정 트렌드가 중심이 되었고, 그런 조선의 화단과 거리를 둔 임군홍은 중국인의 거리와 풍물을 중심으로 자유로운 화풍을 진작하여 우리 미술계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고학으로 일본 유학을 마치고 조선미술전람회에 1936년 입성을 시작으로 1938년부터 44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입선과 특선을 거듭했던 대표적인 작가 정종여, 전시회장 1층 전면을 가득 메운 괘불도, 25살에 그렸다는 이 그림에서 보여지는 화풍은 호방하며, 일본 화단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수리에서 보여지는 기상은 우리나라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상이다. 또한 중국의 고전을 답습하던 전통화에서도 금강산과 지리산, 가야산 등 우리 산하의 정경을 실사화로 그려내었던 화가, 그만큼 정종여가 해방 이전과 후 한국 화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그러나, 색달랐던 임군홍도, 호방했던 정종여도, 그 이름도, 그의 그림도 우리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자진 월북, 혹은 납북되었기 때문이다. 각각 1972년, 1982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에서 '공훈 예술가'의 칭호를 받으며 활동했던 이 두 사람, 그래서 그들은 본의 아니게 남한 화단에서 '절필'의 작가가 되었다. 이제 북한 최고 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역임한 김원봉의 월북 이전 독립 운동의 공으로 '서훈'조차 제기되고 있는 시점, 한국 화단의 블랙홀이 되었던 월북 화가들의 작품을 '절필 시대'를 통해 복기하는 건 그래서 반갑고도 소중하다.  본의 아니게 절필이 된 그들의 절필 이전의 작품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근대 화단의 본 모습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by meditator 2019. 7. 11. 22:01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얻거나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그루밍 성폭력', 그루밍 성폭력이 심각한 이유는 그 피해자들이 미성년자나 교회 신도등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라는 것조차 인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성폭력이 이루어져 사태를 심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미투' 운동이 확산되며 자신이 당한 부당한 성폭력에 대해 차마 드러내지 못하던 사람들이 용기를 내기 시작하고 최근 교회 내 성폭력 사건들을 빈번하게 사회면에서 만나게 된다.

<시사 기획 창>은 이러한  그루밍 성폭력 중 교회 내  성폭력 문제를 다룬다. 다큐 프로그램에서 이러한 사례를 다룬건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하지만 <시사 기획 창>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왜 성폭행 목사의 문제가 자꾸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가 그 원인을 기독교 교단의 온정주의적인 카르텔의 문제로 짚어보고자 한다.  또한 범람하지만 통합되지 못하는 교단 내의 문제가 이러한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목사의 권위를 이용한 성추행, 성폭력 
대부도에 자리했던 요양원, 그곳은 박모 목사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그곳에 환자였던 장애인 여성은 오랫동안 박목사에 의해 성폭력을 당해왔다. 뺨 때리며 이곳에서는 사람이 죽어나가도 모른다. 너를 봐줄 사람이 없다며 강제로 성폭행을 하던 목사, 그에게 당한 건 요양원 장애인만이 아니다. 

요양보호사로 그곳에 왔던 유모씨, 술을 마시고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성폭행을 당한 걸 알게 되고, 가정주부였던 그녀는 목사가 가족에게 알린다는 협박으로 그로부터 8년동안 요양원에서 목사에게 폭행과 성폭행을 당하며 요양원 식구들을 보살피며 살아가야 했다. '아버지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며 중얼거렸다고 발로 밟고 폭행을 하던 목사, 오죽하면 목사가 볼모다시피 데려온 노모가 그녀가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고 실어증에 걸리기까지 하셨다. 심지어 그녀의 통장까지 압수하여 경제적 이권까지 빼앗았다. 

목회자는 하나님 아버지가 정해주신 자리라 자신의 말을 안들으면 아들 딸까지도 멸망한다며 복종하고 순종하라며  권위적으로 굴던 박목사, 다른 목사의 도움으로 탈출한 피해자들은 그 설교를 통한 세뇌에서 놓여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소연한다. 그의 신적 권위 앞에 하나님 말씀에 따라 다 '아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폭력과 성폭행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지만, 여전히 연인 관계라 주장하며 뻔뻔하게 버티고 있는 박목사.

 

 

치유하려 찾은 곳에서 성추행 
부산 광역시에서 이모 목사는 교회 상담 센터를 찾아온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성폭력을 하여 고소당한 상태다. 
마음이 상처를 안고 상담 센터를 찾아온 젊은 여성들, 개인적 위기를 겪으며 종교적 감화를 하는 이 목사에게 의지하게 되자, 몸이 따뜻해야 한다며 아랫배를 만지고, 애정이 필요하기에 치료한다며 스킨쉽을 하는 등 마음을 치유한다는 명목으로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이어갔다. 

심각한 건 이목사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2년전 다른 교회에서도 성추행으로 목사직을 그만둔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모가 찾아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으며 평생 사죄하며 살겠다며 무마를 했었다는 정황, 그러나 그는 사죄 대신 다시 상담 센터를 열고 성추행을 일삼았다. 심지어 피해 여성이 문란하다는 식의 소문을 내며 명예훼손이라 반발하다 고소를 당하자 그제서야 목회 활동을 접었고 이후 징역 3년을 판결받고 수감중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면직된 상태가 아니라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오면 다시 목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범죄를 저질러도 면직만 안되면 여전히 목사 
인천의 한 교회 매주 일요일마다 담임 목사 퇴진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 사태의 발단은 이 교회의 담임 목사 아들로 청년부를 맡았던 김목사가 청년부 여성들을 장기간 성폭력을 해왔다는 것, 이에 충격을 받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이곳에서 모여 퇴진 예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피해 여성들이 미성년자이던 때부터 목사와 신도라는 종속 관계를 이용하여 비밀 연애라며 성적 접촉을 해왔던 김목사, 막상 그 사실이 알려지자 간통죄도 폐지된 마당에 1000 명이랑 연애를 해도 무죄라며 뻔뻔하게 주장하던 그는 심지어 피해 여성들을 꽃뱀으로 매도하기 까지 했다. 

목사라는 신뢰감을 받탕으로 심리적 지배 하에 오랜 시간 동안 인지하지 못한 채 당했던 피해자들, 중학교 때 부터 스승이라 믿고 따랐던 사랑한다, 평생 볼 사람이다라며 피해자들을 구슬렀다.  영적, 성적으로 멘토같던 그 목사로 인해 치료를 받지만 쉽게 사람을 믿지 못하며 대인 기피를 하거나 심지어 죽고 싶다며 힘들어 한다. 피해자들 만이 아니다. 딸을 교회로 인도하고 함께 그 일이 벌어진 교회 사택을 찾기도 했다던 엄마는 자신이 딸을 그렇게 만든 것같다며 고통스러워한다. 

청소년 보호법을 비롯하여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 5가지 죄목으로 고소를 당한 상태, 하지만 그 역시 목사직에서 면직 당하지 않아 처벌을 받은 후 다시 목사를 할 수도 있다.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그런 김목사를 방치했던 그의 아버지 담임목사인 또 다른 김목사, 퇴진 집회를 벌이는 신도들은 물러나라 하지만 정작 교회 측 신도들은 문자 메세지를 내세우며 단지 나이차이 나는 연애라 주장하며 그루밍 성폭력을 부인하며 아버지인 목사의 사임을 반대한다. 당연히 담임 목사는 끝까지 교회를 지키겠다는 입장. 

 

 

용서하고 사과하면 품어주는 교회 카르텔 
현재 교회법에 따르면 이단을 주장하거나, 불법적으로 교목 활동을 하지 않는 한 면직되지 않는다. 일반 직장들이 금고 이상의 형벌을 받았을 때 면직시키는 방침과는 다르다. 그러기에 중범죄로 징역을 살아도 목사직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중대한 사안이라면 목사들의 모임인 노회에서 재판을 거쳐 면직될 수 있다. 하지만, 목회자 성범죄 중 면직된 사례는 단지 5건에 불과하다. 

2004년 상습적 성추행으로 교인들이 목사 면직 청원서를 제출하여 교회를 떠나게 된 전모 목사,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홍대 지역에서 개척 교회를 이끌고 있음이 밝혀졌다. 2012년부터 7년째 목회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 반발이 거세지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측은 목회에 지장없는 형식적인 솜방망이 징계를 내렸을 뿐이다. 그러자 성추행 위로금으로 지불했던 돈에 대해 반환 소송까지 벌였다. 

물론 반대의 사례도 있다. 한신 대학교 대학원 교수로 술을 마시고 혼자 자던 여학생을 성폭행한 박모 교수에 대해 학교측은 진상 조사를 거쳐 징계 위원회에서 파면을 결정했고, 노회는 면직을 결정했다. 재판으로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먼저 '목사직'을 면직시킨 상징적이고 이례적인 사례, 

그러나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곳에서 가서 목회를 하고, 심지어 이 교단에서 면직당하면 다른 교단으로 옮겨 다시 목사가 되기도 하는 현실, 교단의 수가 너무도 많은 상황이 이러한 목회자의 부도덕한 조건을 방기한다. 

그와 함께 과거에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진심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사랑으로 품어주어야 한다는 이른바 기독교적 온정주의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온정주의의 이면에는 목사는 목사편이라는 교회 카르텔이 존재한다. 

그러나 송원영 건양대 심리 치료학과 교수는 이러한 용이한 사과와 용서의 온정주의가 오히려 성범죄자를 방조하고 부추길 수 있다고 경고한다. 권위적으로 다가가 지속적으로 오랜 기간 피해자를 괴롭히는 그루밍 성폭력 가해자, 그에 대한 쉬운 용서는 그 자신이 스스로 합리화하는 계기가 되고, 그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범죄는 정교화되고 대담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에 대해 교단을 초월한 성범죄 등 중범죄에 대한 통합적 법안이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교단'이 모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 그래도 범교단적 데이터 베이스라도 마련해야 하지 않겠냐는 자성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무려 900만명, 가장 많은 신도수를 가지고 있는 종교, 기독교, 과연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성범죄 목사들과 관련하여 상식적이고 사회적인 책무를 스스로 짊어질 수 있을까?

by meditator 2019. 7. 10.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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