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한적한 삶을 이어가던 조르주와 안느 부부, 그 평화로운 삶에 '도둑'처럼 아내 안느의 병이 찾아온다. 반신불수가 된 아내를 돌보는 일은 온전히 남편 조르주의 몫,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하는 게 수치스럽고, 남편은 이제 정신조차 온전해지지 못하는 아내를 감당해야 하는 게 버겁다. 그러나 정작 딸마저도 그런 두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들에게 닥친 잔인한 운명에 남편 조르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여기까지가 미카엘 하케네 감독의 2012년작 <아무르>의 이야기이다. '존엄'하고 싶지만 노년을 덮친 '병마'로 인해 '존엄'도, '관계'도 허물어져 가는 노부부, 그 중에서도 남편의 극단적 선택을 감독은 역설적인 제목 '아무르'로 설명해 냈다. 이 작품으로 미카엘 하케네 감독은 2013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비롯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전세계적 찬사를 받았다. 

 

 

<아무르> 이후 
남겨진 남편은 어떻게 되었을까? 바로 이게 개봉한 <해피 엔드>를 여는 질문이다. <아무르>에서 음악가인 남편 역을 맡았던 배우 장 루이스 트레티냥이 전작에 이어 칼레 지역의 성공한 부르주아 '로랑' 가문의 아버지로 돌아왔다.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아내를 보낸 남편 조르주에게 점점 아내와 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명색이 로랑 가문의 수장이지만 이제 실질적인 일은 딸 앤의 몫이다.

그런데  <해피 엔드>의 이야기는 각도를 좀 튼다. 그리고 지평을 넓혔다. 로랑 가문에 새로운 일원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외과 의사로 일하는 아들 토마스(마티유 카소비츠 분)의 딸 '에브(팡틴 아후뒤엥 분)'이다. 전처와 함께 살던 딸은 그 전처가 약물 중독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면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다.

엄마가 아파서 아빠 집으로 온, 아니 사실은 딸인 자신을 방치하고 외면하는 엄마에게 약을 먹이며 그 과정을 자신의 sns에 중계한 '이상 심리'을 보이는 소녀 에브는 지금처럼 자신을 둘러싼 일상을 sns에 보고하는데 그러면서 로랑 가문의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병으로 무너진 개인의 존엄의 문제를 다뤘던 <아무르>, 하지만 노부부, 나아가 그 각자 개인의 존엄이라는 '실존적 문제'는 로랑 가문이라는 '가족의 관계'로 위상이 바뀌어져가면서 '관계'가 무색하게 흐트러져 버린 현대 '가족'의 민낯이 드러나보여진다. 

 

 

죽음만이 해피엔드? 
아내를 그렇게 보낸 아버지 조르주 로랑은 아내와 같은 그림자가 자신을 드리워가는 걸 절감하며 스스로 자신을 '처리'하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한밤중에 조용히 차를 몰고 나가 나무에 돌진한다거나, 그 사고로 인해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자신의 이발을 위해 찾아온 이발사에게 자신을 죽여줄 것을 문의한다거나, 그의 모든 촉각은 스스로 존엄할 수 없는 자신의 죽음으로 향해있다. 가족에게는 가문을 대표하는 어른이지만 그런 가족의 기대는 이제 조르주에게 번거로울 뿐이다. 

병든 아내의 말년을 책임진 아무르처럼, 손녀 에브도 엄마를 '책임'졌다. 일찌기 여름 캠프에서 친구에게 시험해 본 방식으로, 자신이 기르던 엄마가 싫어하는 애완 동물에게 실험해 본 그대로 엄마에게 실행한 것이다. 엄마와 딸의 관계라지만 에브가 아주 어릴 때 오빠의 죽음 이후로 무너져 버린 가정, 아버지는 집을 떠났고, 엄마는 딸을 방치하고 외면했으며 우울증에 허덕였다. 그리고 그 결말은 이제 막 소녀 티가 나기 시작한 '에브'로 하여금 할아버지와 같은 선택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소녀가 감당할 수 없었던 모녀 관계에 대해 소녀가 선택한 최선의 '해피엔드'였을까? 

할아버지와 손녀의 같은 선택, 그리고 이제 또 할아버지와 손녀는 같은 곳을 바라본다. 존엄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끝내기 위해 고심하는 할아버지와, 엄마와의 전쟁같은 생활을 끝내고 비로소 '가족'다운 가족을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한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 하는 에브.

로랑 가문으로 들어온 에브가 다시 한번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이다. 죽은 오빠 대신 새엄마가 낳은 동생도 생기고, 그 동생을 이젠 자신이 돌봐주겠다며 의지를 다졌던 에브, 하지만 아버지는 바람을 피며 모처럼 맞이한 에브의 평안에 위기를 드리운다. 더는 누구를 죽이며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에브'는 그래서 이번엔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이 위태로운 현실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다른 가족이라고 나을까. 아버지 대신 사업을 돌보는 딸 앤은 모든 촉각이 일로 수렴된다. 그리고 자신의 유일한 아들 피에르(프란츠 로고브스킨 분)을 승계자로 만들기 위해 다그친다. 하지만 사업을 위해 '사랑'도 기꺼이 이용할 줄 아는 앤과 달리 유약한 피에르는 사업에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알콜 의존적이다. 

사고를 내서 휠체어에 의지하는 처지이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성대하게 치뤄진 조르주의 생일 파티, 그리고 이어진 앤의 약혼 파티, 도시의 명사들이 초대된 남보기엔 부러울 것 없는 한 도시의 내로라하는 가문, 그러나 정작 자신을 내버려두라며 난리를 치다 어머니의 약혼에 이민자들을 초대하여 백인 부르주아 파티였던 약혼식장에 찬물을 끼얹은 피에르의 해프닝을 뒤로 하고, 조르주는 조용히 손녀 에브에게 자신의 휠체어를 밀게 한다. 바다를 향해서. 

 

 

개인적인 존엄과 실존의 문제였던 <아무르>의 죽음은 이제 그 파장이 가족으로 커지며 개인을 넘어선 관계에 대한 회의로 넘어간다. 한 지방의 명망있는 가문이라 일컬어지는 로랑 가문, 하지만 그 가문의 실상은 피폐하다. 스스로 아내를 죽인 할아버지, 엄마를 죽인 손녀, 가정이 있지만 변태적인 섹스에 탐닉하는 아버지, 부도덕한 방식도 마다하지 않는 워커 홀릭 딸, 그리고 약물 중독인 손자, 아니 더 심각한 문제는 저마다를 짖누르는 문제가 '가족'이라는 관계를 통해 전혀 소통되거나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손녀 에브는 가족으로 소통할 수 없는 걸 엄마에게 했던 행동을 중계하듯 sns에 중계하며 아이러니한 집착을 보인다. 

<아무르>에서 실존의 고민은 피폐한 결론이었지만 존엄을 향했다면 이제 시간이 흘러 <해피엔드>로 오면 개인의 존엄은 관계 속에서 더욱 피폐해지고 고립되어져 드러난다. '가족'은 존재하지만 소통하지 않고, 현대 사회의 sns는 소통하지만 치유하지는 못한다.   거장 미카엘 하케네가 그린  2019년의 현실이다. 

by meditator 2019. 6. 29. 17:54

마을도 수몰되고, 마을 사람들도 수몰되었다,  '사이비'에.  댐 건설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반목하던 주민들, 그들을 '통일'시킨 건 뜻밖에도 종교였다. 마을 청년 병률의 집에 나타나 법에 무지한 마을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마을에 '신앙공동체'의 터를 일구었던 최장로, 최경석(천호진 분), 그가 내세운 성철우 목사(김영민 분)는 '안수 기도'로 기적을 행했고 그 기적에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수몰 예정 지구로 지정되어 받은 보상금을. '천국'으로 향하는 신앙공동체를 일굴것이라던 그들의 기대는 최경석이 숨겨놓은 돈가방 속으로 들어갔고, 자신의 기적이 한낱 사기꾼의 '협잡'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게 되고 폭주한 성목사는 최경석의 눈앞에서 그 '돈'을 태웠다. 교회와 함께, 그리고 자기 자신도. 뒤늦게 나타난 월추리 사람들 교회와 함께 불타오르는 자신의 전재산 앞에 발을 동동구르며 자신을 '사이비'로 부추긴 동네 주민들의 멱살을 잡고 난리를 치지만 이미 모든 것은 화염이 휩쓸어 가버린 뒤였다. 그렇게 '사이비'에 현혹된 주민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사이비에 현혹되어 죽음 보다도 더한 대가를 치룬 사람들
  '사이비 종교 집단'을 전면에 내세운 <구해줘 1>과 달리 지난 5월 8일 첫 방송을 시작한 <구해줘 2>는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 만든 에니메이션 <사이비>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사이비>는 이미 2014 한국 평론가 협회를 비롯하여 해외 유수 영화제에 초청 및 2015 쟈그레브 국제 에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소름끼치는 명작으로 회자된 작품이었다.

16부작의 드라마로 돌아온 100여분 남짓의 에니메이션, 그 달라진 서사의 구비를 위해 서주연 작가와 <도어락>의 이권 연출은 평범한 사람들의 동네 '월추리'를 배경으로 '사이비'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 덕분에 드라마가 중반을 지나서는 13,4회차에 이르기까지 드라마는 순진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사이비'의 맹신도가 되어가는가를 설득하기 위해 이른바 성목사를 앞세운 최장로에 사람들이 넘어가는 과정을 너무도 실감나게 그려내는 '고구마'의 전개로 시청자들의 한숨을 자아내게 했다. 

그리고 16회, 초반 10분만에 '신앙 공동체'를 일구자며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세운 교회도, 그 교회를 만드는데 앞장선 최장로도, 성목사도 죽어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아비규환에 빠진 마을 사람들, 드라마는 16부의 시간을 이끌어온 주인공들인 '사이비'에 현혹된 사람들이 받은 '현실의 벌'로 마무리된다. 

 

 

3년후 파출소장이 신고를 받고 찾아간 집에서 붕어(우현 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된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파출소장이 찾아나선 월추리 사람들, 마을에서 그래도 대우받던 이장은 이제 그가 용돈을 주던 딸한테 용돈을 받아 술을 사마시는 처지가 되었다. 그 마저도 자신이 준 돈으로 술을 사마시면 이젠 용돈도 없다는 악다구니를 들으며. 그런 그를 견디지 못한 아내는 집을 나갔다.  양계장은 이제 닭을 키우는 대신 주인의 지청구를 들으며 빚을 갚기 위해 치킨 배달 오토바이를 몬다. 그 밝았던 대구댁은 얼굴에 갈짓자를 그린 채 이제 식당에서 일한다. 한 마을에서 동고동락했지만 그들은 붕어의 장례식에 가지 않는다. 아니 갈 수가 없다. 보상금을 날려먹은 자신의 처지에 어디, 보상금은 물론 빚마저 진 처지에 어디 남의 장례식이나 다닐 깜냥이 아니라, 아니 어쩌면 살아있지만 '사이비'에 빠진 처절한 대가를 치루며 사는 자신들의 처지가 붕어와 다를 바 없다 여겨져서일 지도. 
그렇게 드라마는 '사이비', 그 결과물을 참혹하게 그려내며 시즌 2를 마무리한다. 

아니 어쩌면 <구해줘2>는 종교의 그릇에 담겨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의 '사이비'같은 신념에 호도되어 자신을 어떻게 망가뜨려가는지이 꼽 월추리 사람들만큼의 사연으로 그려내었다. 그래서, 종교였을 뿐이지, 그것이 '도'였든, 혹은 또 다른 신념이었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확증 편향'에 의거 저렇게 자신을 늪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게 만들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음을 울린다.

<구해줘2>를 빛낸 배우들 

목사; 뭐 찾으시냐고?
장로; 보면 몰라 김민철이 이 새끼가 이래놓고 갔잖아
목사; 상관없는데? 내일 신앙공동체하고 교회 자리 새로 알아볼껀데?
장로; 너냐? 너가 내 돈 갖고 갔냐? 내 보상금 니가 갖고 갔냐고?
목사; (웃음)
장로; 이 새끼 봐라? 얼굴은 순진하게하고서 이 새끼가 내 돈을 갖고 튀어? 이 새끼가 하자있는 새낀줄 알았는데 이 정도인 줄 몰랐네? 너 미쳤지?
목사; 미친 건 너지? 그러니까 지선이 애비로 나를 협박했겠지. 아니 내가 그런 걸로 겁먹을 줄 알았어?
장로; 그 새끼도? 니가 죽였어?
목사; 으으으으응
장로; 나 이새끼가 주 아버지 믿는 새끼가 살인을 하네? 와 이 새끼 완전 쓰레기네? 이거
목사; 쓰레기는 너지? 그 자식은 심판 받았거든

 

 

15회, 드디어 서로의 존재를 알고 교회에서 마주친 최장로와 성목사, 두 사람이 서로를 쓰레기라 비아냥거리고 이기죽거리는 이 장면이야말로, <구해줘2>에서 가장 빛나는 씬이다. 사이비의 산을 넘어 스스로를 늪에 빠뜨린 월추리 사람들의 서사가 씨실이었다면 그 씨실 위에 '사이비'의 그림을 그려내며 드라마의 가속을 붙여낸 건 바로 '사이비'의 주범 최장로와 종범 성목사였다. 

점잖은 법대 교수로 등장하여 대번에 협잡꾼으로 얼굴을 바꾸며 천연덕스럽게 월추리 주민들과 목사를 눙치고 등쳐먹는 사기꾼 최경석, 이미 2018년 <황금빛 내 인생>으로 kbs 연기 대상을 거머쥐며 '연기'에 있어서는 수식어가 필요없는 배우 천호진임에도 새삼 그를 '갓호진'으로 연호하게 만들었던 사기꾼 최경석의 캐릭터는 16부작 <구해줘2>의 결정적인 동력이다. 

그런 천호진이 분한 최경석이 주동력으로 <구해줘 2>를 이끌어 가는 가운데, 원작에서 딸과 아내를 학대하는 나쁜 아버지의 캐릭터가 드라마로 오며 나쁜 오빠로 변화된 캐릭터를 맡은 김민철 역의 엄태구는 <구해줘2>의 또 다른 동력이 되었다. 이미 < 밀정>< 택시 운전사>를 통해 단 몇 씬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던 조연 연기자였던 엄태구는 이제 명실상부 주연 배우로서 드라마을 이끌어 내는데 손색이 없는 존재로 자신을 드러냈다. 동생마저 한번도 오빠라 부르지 않았던, 운이 나빴지만 그 나쁜 운을 자신의 악다구니로 더 나쁜 사람이 되어 버텼던 김민철에 대한 연민은 전적으로 엄태구 배우의 몫이다. 

하지만 정작 <구해줘2>를 통해 가장 돋보인 배우를 꼽으라면 성목사 역의 김영민 배우가 아닐까?  이미 연극계에서는 내노라하는 배우인 그가, <나의 아저씨>에서 남의 아내를 옅보는 찌질한 갑 도준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이제 스스로 자신의 기적에 함몰되어 파멸의 길을 걷는 확신범 성철우로 만개했다. 

물론 천호진, 엄태구, 김영민만이 아니다. 결국 안수 기도에도 불구하고 폐암으로 죽어간 아내의 시신 곁에서 하늘나라로 떠난 아내가 행복할 것이라며 기도를 올리는 칠성 아재의 소름 끼치는 기도 연기는 원작에서 김민철 대신 사이비의 동굴에 갇힌 인물로 엔딩을 장식한다. 그렇게 <구해줘2>는 주연 배우들과 함께 조연 배우들 전체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저마다의 사이비의 역사를 열연해 내며, 작품도 좋고, 연기는 더 좋았던 2019년의 명작으로 <구해줘2>를 기억하도록 만든다.  

by meditator 2019. 6. 28. 16:26

공포 문학 장르로 연신 투고했지만 좋은 답을 얻지 못했던 작가 지망생은 자신이 아르바이트했던 고서당의 경험을 살려 '라이트 노벨'을 써보았다. 검은 색 긴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여주인공 시노카와 시오리코의 '순정 만화 풍' 삽화를 표지로 한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은 이 무명의 작가 미카미 앤을 680 부가 팔린 베스트 셀러로 만들어 주었고, 라이트 노벨로 시작된 작품은 7권에 이르러 명실상부한 '소설'로 인정을 받으며 드라마, 에니메이션으로 재탄생되었다.

2019년 지금까지의 리메이크 작 중 가장 시오리코답다는 평가를 받는 <일일시호일>, <립반윙클의 신부>의 쿠로키 하루를 여주인공으로 할머니에 이어 양장점을 통해 추억을 길어 올렸던 <미나미 양장점의 비밀> 미시마 유키코 감독이 다시 한번 세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고서당 바블리아를 통해 들고 왔다. 

 

 

난독증 청년 고서점을 찾다 
시작은 뜻밖에도 할머니때문에 '책 트라우마'를 가진 청년 다이스케(노무라 슈헤이분)로 부터 시작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분의 물건을 정리하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책을 만졌다가 뺨을 맞을 정도로 혼난 기억을 살려낸 다이스케. 그는 그 이후로 글만 있는 책을 읽지 못하게 되었다. 그 사건만 빼놓고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식당을 운영하시며 다이스케에게 언제나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셨던 할머니, 문득 그렇게 좋은 분이 왜 그때 그 책때문에 그토록 화를 내셨을까란 의문점에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를 들고 비블리아 고서당을 찾는다. 

고서당을 찾아온 난독증의 청년, 그런데 고서당의 주인은 시노카와 시오리코, 돌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다쳐 동생의 도움을 받아 서점을 운영하느라 쩔쩔매던 시오리코는 청년 다이스케를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하게 되고. 다이스케는 그 조건으로 자신은 혼자 읽지 못하는 '그후'를 함께 읽어주기를 내세우는데. 

나쓰메 소세키의 '그후'를 들고 찾아갔을 뿐인데, 그 책으로 부터 할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추론해 내고, 숨겨진 사연까지 예상해낸 고서당 주인 시오리코, 제목처럼  7권으로 마무리된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은 고서를 사고 파는 주요한 업무 외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줄어들고 있는 '고서'에 대한 수요를 주인 시오리코의 박학한 고서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추리'라는 '부업'으로 이끌어 간다. 

원래 서점의 주인인 할아버지가 사제가 되는 대신 차렸기에 성서(bible)의 라틴어 이름인 '비블리아'를 가게의 제목으로 삼았다지만 오타쿠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원조'국가 답게, '고서'라고 하기가 무색하게 나쓰메 소세키로 부터 시작하여 다자이 오사무, 에도가와 란포 등 일본 근대 작가들을 섭렵하여 셰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세계를 '고서'를 매개로 주유한다. 그리고 방대한 7권으로 이루어진 각 권마다 '고서' 들이 등장하고 그와 엮어진 '사람'들의 사연이 등장한다. 심지어 여주인공의 어머니는 '책'을 쫓아 집을 나갔다는 사연처럼 그 어머니를 닮은 여주인공 처럼 등장인물 등중에는 '취미' 그 이상으로 '고서'에 연연한다. 

 

 

책을 매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영화는 이렇게 씨줄과 날줄로 책과 엮어진 사람들의 사연을 다이스케가 가져간 '그후'로 부터 풀려나가기 시작한 다이스케 할머니의 '러브 스토리'로 압축시킨다. 과거의 젊은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가게를 찾아온 손님이었던 작가 지망생 다나카 요시오(히가시데 마사히루 분), 가게를 찾아온 첫날 실수로 정신을 잃은 다나카에게 친절했던 젊은 안주인 고우라(카호 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두 사람은 '다자이 오사무의 <판도라의 상자> 책을 통해  감정을 쌓아간다. 그러나 이미 남편이 있던 고우라와 작가라는 재능의 한계와 집안의 반대에 부딪친 청년 다나카의 사랑은 '비극'으로 마무리되고, 두 사람의 관계는 마지막 포옹을 한 각자의 손에 들려있던 '나쓰메 소세키'의 <그후>와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으로 상징된다. 

그 사실을 알리 없는 손자 다이스케가 <그후'를 통해 할머니의 과거를 따라 고서당의 주인 시오리코와 만나듯이, 자신의 감정을 토해놓듯 쓴 '사소설'이라는 장르의 선구자 다자이 오사무 <만년>은 새로운 등장인물 다나카 요시오를 통해 다이스케는 물론, 오타쿠를 넘어 책의 세계에 갇혀있다시피 했던 시오리코로 하여금 '사랑'에 눈뜨게 만드는 가교의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

한 청년의 슬픈 실연의 상처를 다룬 <그후>, 그리고 부잣집에서 태어났음에도 끊임없는 자기 혐오로 부터 비롯된 자살 시도를 되풀이 하며 자신의 감정을 토해놓은 작품을 썼던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 등 책을 통해 사랑을 읽고, 책을 통해 사랑과 자아를 살피게 하며 <비블리아 고서점 사건 수첩>은 50년전에 씌여진 러브레터를 찾아 과거 여행을 떠나 할머니의 첫사랑 찾기를 하는 <레터스 투 줄리엣>처럼 손자 세대의 사랑과 과거의 사랑이 씨줄 날줄로 교차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또한 어쩌면 상투적일 수 있는 청년과 유부녀의 불장난같은 사랑은 작가 지망생인 청년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읽어나가는 작품들을 통해  그리고 결국은 발표되지 못한 그의 '사소설'을 통해 로맨틱하고 아련한 러브 스토리로 승화된다. 긴 호흡의 소설을 짧은 시간의 영화 속에 녹여내느라 때로는 등장 인물들의 감정선에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그 조차도 고서점이라는 현실적이지 않은 공간, 거기에 모여드는 현실에서 한 발 비껴선 인물들, 그리고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희석되며 다하지 못한 과거의 사랑과 그로 인해 책에 집착하게 되는 인물들의 사연이 포장된다.

홋카이도의 시골 마을 소라지의 와이너리, 고베의 고즈넉한 골목 끝에 자리잡은 미나미 양장점을 통해 사랑과 안식을 이야기 했던 미시마 유키코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한 발 성큼 비껴서서 상상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 아름다운 이야기에 젖어들고 싶다면  볼만한  영화이다. 무엇보다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이라면 '일독'해볼만하다. 

by meditator 2019. 6. 26. 21:14

이제는  드라마계의 전설이 된 <응답하라> 시리즈, 그 신드롬의 시작은 <응답하라 1997>이었다. 19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에 열광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첫 수능을 치른 우리나라 교육 제도의 희생양이 된 세대, 군대 가기 전에 카세트 테이프를 듣다가 제대를 하니 MP3를 듣는 세상을 만난 세대, 바로 X세대이다.

 

 

도무지 어디로 튈 지를 몰라서 정의내릴 수 없다고 했던 당돌한 아이들, 87년 6월 항쟁과 88 올림픽을 경과하며 한층 자유로워지고 한결 풍요로워진 한국 사회 속에서 스타를 향한 팬덤 문화와 소비적 열풍에 앞장 서며 '문화 자본주의'를 만끽했던 세대 대 그 '자유'로웠던 젊은이들이 어느덧 마흔 줄의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 이 '어른'이 된 X세대의 처지가 난처하다. 한때는 어디로 튈 지 모를다는 당돌한 세대였던 이들이 이제 '윗분'들이라는 보수를 자처하는 세대와, '자신'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내세우는 '아랫것들'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6월 23일 SBS스페셜은 '지금까지 이런 다큐는 없었다'며 1800 직장인을 위로하는 초밀착 리얼 오피스 스토리, <마흔 팀장님은 왜 그럴까>를 통해 어느덧 사회의 중견이 되어버린 X세대의 고충을 다룬다. 

낀세대 팀장님의 고뇌는?
44살 이현승씨는 가구 회사의 디자인 팀장이다. 아침부터 시작된 전무님의 호출, 백화점 매장 중심으로 상품을 판매하던 회사는 최근 2030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신규 브랜드를 런칭했다. 이제 2달 하지만 생각만큼 오르지 않는 매출로 인해 윗선에서 불만이 '하달'되었다. 하지만 이 팀장의 고뇌는 이제부터가 더 큰 산이다. 기성 세대의 관점에서 '매출이 곧 회사의 인격'이라며 '매출' 중심으로 요구된 사항을 팀원들에게 설득할 일에 이 팀장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매출'을 놓고 세대간 다른 의견, 그 사이에 낀 이 팀장은 윗선의 의견을 젊은 팀원들에게 설득력있게 전달해야 하고, 아랫 세대의 주장 또한 완곡하게 전달해야 하는 '동시 통역'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처지이다. 피하지 못하면 즐겨라가 이 팀장까지의 세대가 일을 대하는 시각이었다면, 요즘 젊은 세대들은 피하지 못할 일이 오며 그만둬 버리니 그 세대간 달라진 입장 사이에서 낀 세대 팀장은 이쪽 설득하랴, 저쪽 의견 전달하랴 고충이 많다. 그러다 퇴근하고 돌아가면 나는 누가 위로해 주지 라며 외로움을 느낀다. 

 

 

또 다른 40대, 온라인 영업 팀장인 이규훈 팀장은 아침 일찍 출근하여 하루의 업무를 시작한다. 그보다 늦게 온 팀원, 팀장은 팀원이 일찍 오고 싶을 거라 하지만 , 정작 팀원의 생각은 다르다. 그렇게 출근 시간도 되기 전에 일찍 나와 업무를 시작하는 팀장님이 멋지고 존경스럽지만 왜 이런 것까지 하나 라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니. 말 그대로 한 회사 서로 다른 '동상이몽'이다. 

첨단의 IT를 기반으로 한 회사라고 다르지 않다. 수평 문화를 내세우는 배달앱 회사는 직제를 없애고 모두 '~님'으로 호칭을 통일했다. 40대 팀장급의 김성회 씨도, 김성회 님이요, 부사장인 박기웅 씨도 박기웅 님이다. 하지만 수평적 호칭에 사내 수평적 문화는 생각보다 여의치 않다. 회사 한쪽에 나란히 앉은 김성회 님과 박기웅님, 두 사람 사이에 비어있는 한 자리처럼 두 사람 사이의 '여백'보다 더 큰 '여백'이 젊은 사원들과의 사이에 놓여 있다. 

밀레니얼 세대가 버거운 X세대 
19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의 자유분방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른바 X세대들이 어느덧 사회의 중견 세대가 되었다. 마흔 줄의 '팀장' 급이 된 세대,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그들은 사회에 나와 직장 생활을 하며 '나중에 저 선배처럼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뼈저리게 하며 지내왔다. 그래서 '꼰대 상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맘이 강하다. 그래서 '아랫 사람' 눈치도 많이 본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쉽지 않다.  '꼰대'와 '선배' 사이의 고뇌가 오늘도 그들의 주름을 한 겹 더한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X세대 팀장님들을 좌절시키는 세대는 이른바 '밀에니엄 세대'이다. 198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하여 자라면서 글로벌 금융 위기를 보고 자란 세대들, 그들은 조직에 헌신적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야근이 곧 애사심의 표현이라는 것 더더욱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야근을 할 수도 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남아서 좀 더 하고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윗선의 지시로 억지로 해야 하는 야근은 그저 시간을 때우는 것일 뿐이라며 단호하다. 미티에서 전달되는 윗선의 지시에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팔짱을 끼고 그게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지 셈해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밀레니엄 세대'를 보면서 팀장님들은 왜  저 정도도 안할까 속이 탄다. 

 

 

이 두 세대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직장에 대한 소속감'이다. 평생 직장이 없어진 시절을 맞이한 밀레니엄 세대에게 선배 직장인들이 몸바쳐 직장에 헌신하는 자세가 받아들여 질리 없다. 외려 나만의 경계를, 나만의 시간을 회사가 침범하는 게 달갑지 않다. 일과 삶의 균형을 조율하며 살아가고 싶은 세대의 취향을 존중해 주길 바란다. 

'소속감'과 함께 달라진 문화의 간극도 크다. '술 잘 마시는 사람이 일 잘 하는 사람'이라는 윗 세대의 사고방식은 '언감생심'이다. 점심 시간에 같이 식사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화합'을 위해 시작된 자리가 대부분은 결국 '근황 토크'의 딱딱한 자리로 변모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소통'을 내세운 대화가 결국은 선배의 '나 때는 이러지 않았다.', 혹은 '나는 이렇게 했다'는 식의 훈계조의 이야기로 쏟아부어지고 후배는 듣고 있게만 된다. 

프랜차이즈 식당업체 새로운 메뉴 개발을 두고 세대간 간극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 막걸리 위에 생크림이 웬말이냐는 기성 세대의 반응과 달리, '비쥬얼'을 중시하며 SNS인증샷을 우선하는 젊은 세대에겐 '대박 아이템'이 되었다. 이렇게 '맛'도 중요하지만 '그럴듯해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는 젊은 세대의 달라진 입맛, 나아가 가치관에 결국 한때 X세대였던 40대 중견 간부들은 그 '변화의 속도'를 버거워 한다. 과연 그 '변화의 속도'를 달라진 세상을 제대로 따라내고 있는가 라는 번민도 깊어진다. 그럼에도 달라지는 세상, 그 방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오늘도 '낀 세대'로서 고군분투한다.

지금까지 이런 다큐는 없었다며 야심차게 40대 팀장 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간의 '전쟁'과도 같은 조직 갈등을 다룬 <SBS스페셜> 초밀착 리얼 오피스 스토리를 내세운 만큼 생생한 '조직'내의 목소리들이 전달되었다. 한국이라는 한 사회, 한 회사에 몸담고 있지만 그저 나이가 달라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회적 성장 배경과, 서로 다른 경제적 환경을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서 빚어지는 갈등에 대해 다큐는 생생한 사례를 바탕으로 '세대 갈등'을 그려내고자 한다. 무엇보다 이제는 기성 세대가 되어가는 586 세대와 그런 기성 세대와는 다른 사회 경제적 환경으로 인해 한층 개인주의화되고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젊은 세대의 전선에 더해, 그 사이에 끼인 한때 X세대였던 40대 중견 세대를 부각시키고자 한 점은 신선한 시도이다. 

by meditator 2019. 6. 25. 04:41

이제 각 지자체에서 문화적 사업에 지원을 하는 건 새로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와 함께 각 지역마다 지자체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화적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는 다양한 공연이 일년 내내 펼쳐지고 있다.

성남 지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 중에서도 성남 아트 센터의 대표적 브랜드가 된 건 바로 이제는 영화도 한 편 보기 힘든 '만원' 한 장으로 연극을 관람할 수 있는 '시리즈-연극 만원'이다. 일찌기 이재명 전 시장 시절 '만원의 행복'으로 시작된 이 연극 시리즈는 지난 9년간 단 한 번의 '인상'도 없이, 은수미 시장 취임 이후에도 '시리즈-만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만원'이라고 해서 얕잡아 볼 게 아니다. 이미 '무조건 예매'해야 하는, 조금만 늦으면 좌석을 'get'하기 힘든 공연으로 이미 입소문이 자자한 터 대학로에서 이미 화제작으로 검증받았던 작품, 스테디 셀러로 오랫동안 회자되었던 작품들, 박근형, 임영웅, 서재형, 이해제 등 유명 연출가의 작품 등 '만원'으로 가치 매길 수 없는 좋은 작품들이 '지자체'의 지원에 힘입어 시민과 만난다. 

지난 6월 14일부터 16일까지 성남 시민과 만난 공연은 <우리 노래방 가서 .... 얘기 좀 할까>이다. 2008년 초연 이후 공연 배달 서비스 <간다>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공연되었던 이 공연은 최근 <극한직업> 등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진선규, 김민재 등의 출연작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우리 노래방 가서....얘기 좀 할까?(이하 우리 노래방 가서)> 공연의 개막은 따로 경계가 없다. 마치 '경계 없음'이 이 연극의 특징이라도 되는 양, 놀이터, 그 앞에 노래방으로 연상되는 무대 장치에 걸터 앉아있는 청년 한 명이 슬그머니 객석 쪽으로 내려와 청소를 시작한다. 관객들에게 '발 좀 들어 보세요'라며 천연덕스럽게 말을 붙이며 청소를 시작하던 그는 다짜고짜, 자기 자신도 어색한 이런 컨셉이 바로 '연출'의 의도임을 대놓고 폭로하며 공연을 연다. 

이어진 그의 폭로, 노래방이라는데 뒤쪽에 놀이터가 들어앉아있다는 것이다. 정말 가운데 노래방으로 연상되는 공간이 있고 그 뒤에 시소, 구름다리, 그네가 나란히 놓여 있다. 연출 왈, 사람들이 꼭 노래방 와서 노래만 하란 법이 어디있냐고, 그러면서 놀이터를 들여놨다는 것이다. 바로 이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조합, '노래방'과 '놀이터'의 조합, 바로 이런 무대 장치가 연극 <우리 노래방 가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통한다. 

 

 

노래방에선 무엇을 할까? 
그런 어울리지 않는 장치의 '아이러니'는 등장한 첫 손님으로 이어진다. 띵똥 벨 소리와 함께 등장한 중년의 남자는 다짜고짜 노래방 직원에게 '밥'을 시킨다. 노래방인데 노래가 아니라 밥을 시키는 손님에 어이없어 하는 직원의 의사를 무시하고 천연덕스럽게 밥을 시킨 중년 남성은 노래를 하기는 커녕, 밥을 먹으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리고 등장한 아들, 

예상되듯 중년의 아버지와 대학생 아들의 불통, 연신 시간이 없다는 아들과 싫다는 아들에게 억지로 자신이 먹던 밥까지 권하며 어떻게든 '대화'의 실마리를 풀어보려는 아버지, 하지만 아들은 왜 이야기를 하겠다면서 노래방으로 불렀나며 타박을 할뿐 아버지와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연신 불안한 듯 들여다 보는 핸드폰, 

그 전 날 아들의 자취방까지 찾아갔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불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나마 조용히 편하게 아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노래방'을 고른 것이다. 그리고 이건 앞서 노래방 안에 들어찬 놀이터와 같은 이치이다. 노래방이라고 꼭 노래만 하란 법 어디 있나? 밥도 먹을 수도 있고, 대화도 나눌 수도 있고.

대화가 필요해
그런데 그 '대화'라는 게 과연 서로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대화가 될까? '노래방'에 단 둘,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은 연신 말을 뱉어 내놓지만 그 말들은 그 좁은 노래방이란 공간 속에서 튕겨질 뿐 좀처럼 상대방에게 닿지 못한다. 

하나의 노래방, 그곳에 들린 서로 다른 커플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여자 친구, 그리고 아버지와 연인, 연인이던 중년의 여성과 그 친구들, 그리고 딸까지 모두들 '노래방'에 와서 '노래' 보다 '대화'를 하고자 애쓴다.

 

 

그렇게 노래방이 소통하지 못한 커플들의 '대화'의 장으로 배치된 것처럼, 배경인 듯 보이던 놀이터는 소통하지 못한 개인들의 답답함을 풀어내는 '해우소'같은 공간이 된다. '노래방'에서 '소통'의 답답함을 느낀 '커플'에서 튕겨져 나온 개인들은 '화장실'을 핑계로 놀이터에서 '번민'한다. 

오래도록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다가 이제야 연인을 만나 새 출발을 해보려는 아버지,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속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아버지가 창피하기만 한 아들, 그러나 정작 그 아들 역시 노래방에 여자 친구를 끌고오다시피 하여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이별'을 당하고야 말고, 그토록 아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연인에게 아버지 역시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데, 

사실 연극 속 에피소드들은 일상적인 우리 사회 관계들의 단면들이다. 소통 부재인 부자지간, 일방적인 연인 관계, 새출발이라기엔 과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중년의 연인들, 이들 평범한 이야기들이 놀이터가 배경인 노래방이라는 공간을 통해 '소통의 부재', 혹은 '소통의 어려움'을 드라마틱하게 드러낸다. 

물론 연극은 '소통의 부재'를 매개로 '해피엔딩'을 향해 방향을 튼다.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는 세상 더할 나위없는 순애보의 주인공이 되고, 과거의 그림자에서 여전히 짖눌려있던 중년 여성은 이제는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딸을 보며 새 출발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전반부에서 '소통의 부재'를 전면에 내세웠던 연극은 그 '부재'를 노래방에서 울려퍼지는 '마이웨이',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등을 통해 중년의 해피엔딩으로 급선회한다. 덕분에, 아들의 집착적인 소통의 부재는 생뚱맞은 에피소드로 끼워진 모양새가 되어 버린다. 

최근 각 지역 문화 공간에 올려진 연극의 주고객은 상당수가 중년의 관객들이다. 그에 따라 대학로에서 화제가 되었던 작품들 역시 이들 연령 고객층을 배려하게 된다. 거기에 중년의 정서를 울려줄 추억과 그 시절 노래들이 빠질 수 없다. 덕분에 '소통의 부재'를 주제 의식으로 삼았던 <우리 노래방 가서>는 결국 뒤늦은 중년 커플의 사랑의 결실로 흐뭇하게 마무리되기 위해 모처럼 노래방에서 해후한 중년 여성들이 자신들이 대학을 다니던 당시 인기가 있었던 걸그룹의 노래를 부르는 '맘마미아 버전' 동창회를 거쳐 노래방 직원의 열창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며 해피엔딩으로 도약한다.

시끌벅적하게 웃고 즐기다 나와서 생각해 보면 재미는 있었는데 과연 이 연극이 중년 커플의 러브 스토리를 말하고자 하는 건지, 닿을 수 없는 소통의 부재를 말하고자 하는 건지 헷갈리는 건 타겟층에 맞도록 기획된 연극들의 딜레마이다. 

by meditator 2019. 6. 21. 02:23

'아이구 죽겠다', 우리에게는 일상화된 하소연이다. 하지만 저 '빈 말'이 진짜가 되는 순간이 다가온다면. 6월 17일 <mbc스페셜> 지난 3월 9일 고인이 된 송영균 씨의 '죽어가는' 모습을 담았다. 

 

 

1987년생 송영균, 스물 여덟이 되던 해, 화장실에서 피를 쏟았다. 자고 일어나니 침대가 온통 피범벅이 되었다. 대장암 4기.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공익 인권 변호사를 꿈꾸며 로스쿨에 입학한 지 3개월만의 일이었다. 

스물 여덟의 대장암, 그리고 4년 
대장암입니다. 정액을 보관해야합니다. 불임이 될 수도 있어요. 성기능을 잃을 것 같습니다. 간에도 전이가 되었네요. 무려 열 개의 종양이 있어요. 이런 선고가 매일 내려졌다고 한다. 직장을 자르고, 간에서 폐로 전이된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다섯 번째 수술을 했다. 그렇게 4년 여가 흐르고 이제 그는 더 이상 항암 치료를 받지 않는다. 두 세달에 한번씩 찾는 병원, 이번에도 어김없이 골반이 아프더니 종양이 자랐다. 암수치도 올랐다. 수술을 거듭하면서도 다녔던 로스쿨이 이제 한 학기가 남았다. 거의 다 끝났다 싶었는데 못끝낼 것 같다. 

이렇게 증상과 상황을 나열하면 송영균씨는 그저 말기암 환자일 뿐이다. 하지만, 송영균 씨는 말한다. 그렇게 사는 것도 삶이고, 삶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고. 다큐는 인생의 마지막 길을 최선을 다해 뚜벅뚜벅 걸어가고자 하는 송영균 씨의 일상을 지켜보는 제작진의 시선, 그리고 그와 함께 송영균 씨 자신의 셀프 카메라가 맞물리면서 진행된다. 

 

 

암으로 인해 자신이 꿈꿨던 로스쿨 이후의 삶을 실현할 수 없게 되면서 송영균 씨는 고민했다. 죽을 때까지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삶을 만끼하는 사람들은 미처 생각지못한 고민, 아니 사실 결국은 누구나 같은 종착지이지만 먼 미래일 거라는 섣부른 예단으로 인해 하지 않는 고민, 하지만 송영균 씨에겐 절박한 과제, 책을 좋아하고 그래서 많은 책을 섭렵했는 그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은 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철학, 죽을 때가지 읽기'

단 한 글자도 안 읽어도 책을 읽은 거 같을 수 있도록 10p의 책 소개를 10시간 넘게 작성했다. 하지만 그는 나와주는 사람들이 고맙다고 한다.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걸 알려줄 수 있어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줘서. 그렇게 송영균씨는 삶의 끄트머리에서도 살아갈 이유를 스스로 찾아냈다. 점점 더 악화되는 상황, 몸이 그 지경인데 뭔 독서모임이냐고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 커져갔다. 하지만 송영균씨는 호흡이 가빠지면서도 자신의 집에서 모임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먼 미래는 없어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책을 일어준만큼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쁘다고 한다. 

 

 

잘 살았다고 수고했다고 축하받고 싶어요 
그러나 암은 늘 그를 이겼다. 그가 건강해지고 싶은데, 암이 건강해져 가고 커져만 갔다. 그의 몸의 주요한 부분을 정복해 버렸다. 더는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송영균씨는 이제 죽음을 준비한다. 

아무 생각없이 의도없이 찍었던 사진이 죽음의 자리에서 덩그러니 올려져 있는 것이 싫어 친지와 함께 영정 사진을 찍기 위해 어릴 적 동네를 찾았다. 일상의 한 장면처럼 찍겠다는 포토그래퍼의 의도에 그는 늘 그랬듯이 환하게 웃는다. 

그가 31개월 되던 해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자신의 짧은 삶을 회고한다. 아버지가 없어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간, 항상 아르바이트를 해야했고, 어머니를 도와야 했던,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하지만 이제 죽어가면서 두고갈 가족을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웠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거둔다. 

그리고 10년 동안 가게 문 한번 안닫고 치열하게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던 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구두까지 챙겨신고 한껏 멋을 부린 영균씨, 어머니의 사진 속에, 기억 속에 멋들어지게 뿌듯한 아들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그리고 한껏 챙겨입은 정장으로 손수 음식을 해서 마지막 파티를 준비한다. 2018년 연말, '영균이 드리는 저녁 한 끼', 사랑했던 사람들, 그가 자신의 투병기를 올렸던 sns의 친구들과 함께, 이제는 더는 할 수 없을 한 끼를 자신에 대한 좋은 기억을 담아가도록 하기 위해 마련한다. 2018 '영균 어워드'라는 갖가지 기지 넘치는 상들의 수상과 함께.

숨쉬기가 힘들어 쎅쎅거리면서도 이어갔던 독서 모임, 입원의 권유에도 휴대용 산소 마스크로 버틴 나날들, 하지만 결국 119가 왔다. 3월 9일 4년 9개월 동안 그를 괴롭히던 암으로 부터 송영균 씨는 자유로워졌다.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주도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적극적인 안락사'를 고민했던 영균씨, 우리의 실정으로 인해 대신, 그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거부하겠습니다'라는 서명으로 대신했다.

 

 

암과의 전쟁에서는 비록 암이 승리를 거두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삶에서 끝내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않았던 사람, 송영균 씨는 그저 말기암 환자가 아니라, 삶의 끝에서 '잘 죽어갔던( well dying)'  선구자로 오래오래 귀감이 될 것이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가 바라던 대로 꽃피는 화려한 봄날 그의 추도식을 마련했다. 그가 좋아하던 와인잔을 들고 , 그에 대한 기억을 나누고, 그가 쓴 글을 읽으며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다. 수고했어, 영균 !

마지막 셀프 카메라에서 송영균 씨는 말한다. '너무 슬픈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전 참 열심히 살았어요. 최선을 다했어요. 되돌아 보니 즐거웠던 일도 많았네요. 잘 살았다고 수고했다고 축하받고 싶어요'

고령화, 가족 해체와 맞물려 최근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자기 주도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른바 웰 다잉(well dying), 지난 2009년 대법원에서 인정한 '존엄사' 등 우리 사회에서도 이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mbc스페셜이 마련한 송영균의 씨의 '웰 다잉'(well dying)은 의료적 존엄사를 넘어 삶의 한 과정으로서 죽음에 이르는 시간에 대한 자기 주도성을 부각시킨 문제적 작품이다. 

by meditator 2019. 6. 18. 05:22

보좌관? 보안관도 아니고, 익숙한 직명인데, 드라마의 제목이 되니 낯설다.  아마도 그건 그 직명이 늘  ㅇㅇㅇ 의원의 보좌관처럼 그 누군가의 종속 변수로 자리 매김되었던 존재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의 부분으로, 혹은 누군가의 그림자로 있는 듯 없는 듯 여겨졌던 '보좌관'이 수식어를 떼고 '주인공'이 되어 돌아왔다. 6월 14일부터 방영한 jtbc의 <보좌관> 10부작이다. 

 

 

<라이프 온 마스> 이대길 작가의 진검승부 
tvn의 <싸우자 귀신아>에 이어 원작 영드를 앞섰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 ocn의 <라이프 온 마스>의 이대일 작가와 <추노> 로 사극 액션 드라마의 한 획을 긋고, <동네의 영웅>, <미스 함부라비> 등을 통해 신선한 소재의 사회비판적 시각을 가진 연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곽정환 피디의 만남,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보좌관>은 기대작이다. 거기에 모처럼 드라마로 돌아온 이정재가 야심만만한 보좌관 장태준으로 중심을 잡고, 김갑수, 김홍파, 정진영, 정웅인  등 다양한 색채의 조연진들이 포진되었다. 이 정도면 '금상첨화'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과연 번안극이었던 <라이프 온 마스>의 이대일 작가가 새로운 장르라 할 수 있는 국회의원 보좌관을 중심으로 하여 풀어낸 '정치' 이야기를 제대로 써낼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우선됐다. 하지만 1회, 차기 총선 공천 유력주자로 물망에 오르는 유능한 보좌관 장태준을 통해 여당 대표 자리를 놓고 벌이는 두 의원 송희섭(김갑수 분)과 조갑영(김홍파 분)의 총성없는 전쟁을 엎치락 뒤치락 긴장감넘치게 풀어내며, 역시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는 정의를 증명해 낸다. 

 

 

보좌관이 된 장태준 
정치 지망생이었던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의 꿈은 집안을 기울게 만들었을 뿐이다. 짐만 될 뿐인 가족,  그저 믿을 거라곤 자신의 머리, 그래서 들어간 경찰대, 하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권력'과 '불의'에 장태준은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렇게 시작된 초선 의원 이성민(정진영 분)의 보좌관 생활, 그러나 정의로우나 욕심이 없는 무소속 초선 의원의 보좌관 처지는 높은 야심을 가진 장태준이 뛰어놀기엔 너무 좁은 어항이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다음 정착지는 대한당 4선 의원 송희섭, <보좌관> 1회는 그렇게 장태준이란 말을 타고 대표 자리를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리는 송-장 파트너쉽의 묘수를 보여준다. 

하지만, 말이 파트너지, 얼굴 마담은 송희섭이지만, 그 뒤의 모든 일은 장태준의 것이다. 야당 대표 자리를 장태준으로 인해 송희섭에게 넘긴 조갑영은 국정감사를 통해 다시 한번 '공격'을 준비한다. 준비가 무색하게 파행된 국감 현장,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손에 넣으려면 불가능한 것을 해야' 한다는 장태준답게 기지로 송희섭을 파업 현장으로 밀어넣고, 그걸 빌리로 파행된 국감을 재개시킨다. 그렇게 다시 한번 유능한 보좌관 장태준의 면모를 증명하며 <보좌관>의 서막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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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 드라마로서의 <보좌관>
무엇보다 <보좌관>의 매력은 드라마에서 그동안 늘 '조역'의 자리에 머물렀던 보좌관이란 직무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이다. 정치의 주역 국회의원, 국감의 현장 그 뒤편에서 국회의원 300명 그 뒤에 포진한 2700명 보좌관들의 일하는 모습을 조망하며 누가 움직이나, 누가 일을 하는가라는 '전문직으로서의 보좌관'의 모습을 드라마는 박진감넘치면서도 실감나게 그려내며 새로운 전문 분야를 설득해 낸다. 

또한 이런 전면에 내세운 보좌관이란 신선한 주역을 중심으로 풀어내는 흥미진진한 캐릭터들의 향연이 <보좌관>의 진짜 볼 거리이다. 몰락한 집안 자신의 머리 하나를 믿고 경찰대에 이어 보좌관이 된 장태준이란 입지전적 인물의 정의와 부도덕을 오가는 갈등은 그간 '선'이거나, '악'이거나 정형화된 캐릭터에 싫증난 드라마 팬들의 환호를 불러올 만 하다. 

어디 그뿐인가, 오래 활동했음에도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던 배우 신민아에게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발탁한 조갑영에게 물 먹이는 일쯤이야 얼마든지 라는 대한당 비례 대표 초선 의원인 변호사 강선영는 아마도 두고두고 기억될 대표 캐릭터가 아닐까. 강선영만이 아니다. 전직 언론인 출신의 코피 쯤이야 다시 닦고 일하면 그뿐이라는 윤혜원(이엘리야 분)에서, 신참 인턴 강도경(김동준 분)에, 동료인지 적군인지, 아군인지 선을 오가는 오원식(정웅인 분), 고석만(임원희 분), 김형도 (이철민 분) 등의 보좌관 캐릭터에, 언제든 말을 갈아탈 준비가 되어 있는 송희섭과 조갑영 등 노회한 정치꾼들의 모습은 화룡점정이 되어 현실 정치의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미드처럼 10부작으로 종결되는 <보좌관>은 시즌제를 예고하고 있다.  1회, 4.375, 2회, 4.545 시청률 상승세는 물론, 시청자들의 호의적 반응으로 볼 때 시즌제를 선언한 드라마의 미래가 밝다. 현장의 정치를 현실에서 일하는 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려내고자 하는 <보좌관>, 이 새로운 시도가 침체기에 빠져들고 있는 한국 드라마의 활력소가 되길 바래본다. 

by meditator 2019. 6. 16. 16:16

<평일 오후 3시의 연인>, <우리 가족 라멘샵>의 배우 사이토 타쿠미가 감독이 어 찾아왔다. 7월 4일 개봉 예정인 <13년의 공백>이다. 첫 작품이이라지만 이미 2017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대상, 20회 상하이 국제 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3회 시드니 인디 영화제 최우수 각본상 등 우수 영화제에서 연출력과 감독성을 인정받았다.  출연진도 화려하다. 이 영화로  2017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수상한 마스타 코지를 비롯, 우리에겐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으로 알려진 <어느 가족>의 릴리 프랭키 등 최근 일본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청춘 스타와 연기파 배우의 '협연'과 배우로 출연한 사이토 타쿠미, 칸노 미스노, 마츠오카 마유 등의 연기도 관전 포인트이다. 

 

 

'그사람'이 되어버린 '아버지'
어쩌면 이야기의 시작은 우리가 어디선가 보거나 들었던 '그런'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마츠다 마사토 씨, 가끔은 아들과 캐치볼도 해주는 평범한 아버지인 듯하지만, 사실 무능력한 가장이다. 학교에서 상을 받은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도박장을 찾아야 하는, 하지만 그 '도박'으로 생긴 빚을 갚지 못해 집으로 조폭들이 찾아와 가족들이 맘 편하게 밥 한끼 먹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아버지이다. 

카레 냄새를 숨기지 못해 빚쟁이들의 조롱을 받던 어느 저녁, 담뱃값을 놔두고 아버지는 담배를 사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13년, 아버지가 있어도 가난했던 가정의 형편이야 말해 무엇하랴. 아버지 대신 가장의 짐을 떠안은 어머니는 밤낮으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빈 자리는 남겨진 아이들의 몫이었다, 다친 어머니가 못한 일을 해야 했던 형제들, 책상 앞에만 매달리던 형의 눈빛은 한층 매서워졌고, 아버지가 있을 때도 물려받아 허름하고 어깨가 다 나올 정도였던 동생의 티셔츠는 여전히 더 낡은 채 더 마른 동생의 몸에 걸쳐져 있다. 

그렇게 코지와 요시유키 형제와 어머니는 13년의 세월을 견뎠다. 아버지는 '그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13년만에 찾아온 아버지, 아니 아버지의 소식, 13년이 무거웠던 세 모자는 그 누구도 '그 사람'을 찾고 싶지 않다. 
 

 

아버지가 싫습니다, 그런데
마츠다 가족의 비극사를 담담하게, 하지만 그래서 그 비극의 여운이 울렸던 1부, 하지만 영화는 오프닝을 열었던 마츠다의 장례식장 상황의 블랙 코미디를 통해 '반전'을 꾀한다. 똑같은 '마츠다' 씨의 장례식장이라지만 조문온 방문객이나 친지들의 구성만으로도 극과 극의 대비를 보여준 모습, 거기서 살아 생전이나 죽어서도 '초라하고 볼품없는' 그 사람 마츠다가 단적으로 보여진다. 

승려의 독경 등 장례식의 절차가 끝나고 통과 의례로 시작된 조문객들의 '조문사', 본의 아니게 몇 되지 않은 조문객으로 인해 요상한 면면의 조문객들이  '그사람'과 어떤 사연으로 엮이게 되었는가가 드러난다. 

'웃다 보니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블랙 코미디의 전형처럼 도박장의 동료, 직원, 경마 친구, 오갈데 없어 함께 살게된 동거인, 병실 이웃 등이 구구절절 때론 구차하고, 종종 어이없는, 심지어 막무가내인 에피소드들이 일본 영화 특유의 '코믹'한 해프닝으로 이어지며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두 아들 코지와 요시유키의 표정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집을 나간 아버지가 다르게 살지도 않았다.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가서도 여전히 마작을 하고, 경마를 하며 살던대로 살던 아버지, 하지만 여전히 무능력하고 세상 쓸모없어 보이던 아버지가 그의 '친구'인지 모를 조문객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조금씩 달라진다. 결국 마지막 가족 대표로 답사를 하게 된 코지, '아버지가 너무나 싫습니다, 그런데 조금은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며 울먹이고 만다. 

 

 

장례식은 그 자체로 영화의 좋은 소재다. '장례식' 자체가 영화가 된 영화로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1996), 그리고 같은 해 임권택 감독의 1996년작 <축제> 등이 있다.  일본 영화의 고전으로 치는 아타미 주조 감독의 <장례식(1984)>도 빼놓을 수 없다. 장례식은 말 그대로 죽은 사람를 보내는 의식이다. 그리고 그 의식은 각 나라와 지역의 풍습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보여진다. 죽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제 '이승'과 이별을 하는 통과 의례지만, 동시에 그것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이별'의 과정이다. 

임권택 감독은 <축제>를 통해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를 통해 가족간에 얽혀진 악연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같은 가족이라지만 처지가 달랐던 삼촌과 조카가, 할머니의 장례라는 공간을 통해 해후하고, 장례 과정의 해프닝을 통해 저 밑에 숨겨두었던 앙금들이 드러나며 한 판 굿처럼 풀어지며 결국 엔딩의 사진 한 장처럼 웃으며 '화해'하는 '해피엔딩',

죽은 자가 펼쳐놓은 마당에 산 자가 자신의 묵은 해원의 굿풀이라는 점에서 <축제>의 그것과 <13년의 공백>은 비슷하지만, 같은 '화장'이라지만, 다른 장례 풍습처럼 그 '해원'의 뉘앙스가 다르다. 

자신들을 버리고 간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자식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자신의 아이를 유괴해 죽인 범인을 어렵사리 용서하고 찾아간 신애(전도연 분)는 그만 그 범인이 이미 신께 귀의하여 용서를 받았다는 말에 그간 견뎌왔던 분노를 폭발하고 만다. '신'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해원, 그걸 용서할 수 있는 건 역시나 '사람의 몫'이고, 그럴 수 있는 건 결국 '용서받을 자'에 달려있다. 

자신들을, 어머니를 그토록 고생시킨 아버지, '그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아버지',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그 시절의 아버지가 필요했던 아들들, 그들이 13년만에 만난 아버지를 '수용'할 수 있게 만든 건, 그럼에도 '아버지'였던 아버지의 삶이다. 죽은 뒤에서야, 13년이 흘러서야 알게된.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버렸지만 버리지 않았던 '아버지'로 인해 코지와 요시유키는 자신들의 미움이 사실은 그리움이었음을 13년만에야 '시인'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뒤늦게 아내에게 도착한 통지서 한 장은 그녀를 고통 속에 밀어넣었던 13년을 '용서'하는 계기가 된다. 

 

 

근현대사의 가족사가, 혹은 개인사를 뒤틀어진 많은 문제들은 아픔의 왜곡으로 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아픔을 바로 볼 수 없도록 만드는 고통의 시간, 그 '트라우마'는 어느새 왜곡되어 '어깃장'을 넘어, 또 다른 '질곡'의 시작이 된다. 아버지가 싫어 돈을 벌기 위해 대기업에 들어간 아들, 아버지가 집을 떠나, 아니 사실은 아버지가 있어도 야구 선수가 될 수 있었을까 싶지만 야구 선수는 커녕 자기 몸에 맞는 티셔츠도 입고 자라지 못한 아들, 그들은 어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아버지의 상실'에 상처받은 아이의 그 상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 우스꽝스러운 장례식을 통해 비로소 그들은 '아버지'를 마주하고, 미움으로만 독해했던 그리움을 시인하고, 아버지를 상실했던 유년의 정체로 부터 자유로워진다. 장례식에 차마 가지 못한 아내 역시 비로소 미움에 봉인해둔 남편을 바라볼 여유를 가진다. 

아버지로 인해 그들을 속박했던 '카르마'로 부터 놓여나는 시간이 된 장례식. 아버지가 부재했던 13년의 시간, 그 시간은 '아버지'의 상실이지만, 동시에 코지와 요시유키가 잃었던 시간이다. 실제 있었던 사연을 1부와 2부로 나뉘어 전혀 다른 극적 구성으로 '실화'의 메시지를 자신만의 색채로 표현해낸 사이토 타쿠미 감독에게 첫 작품으로 '연출'상이 수여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던 작품. 특히 2부, 한 편의 블랙 코미디와도 같았던 장례식을 통해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을 변주하여 가족의 해원을 여운있게 풀어낸다. 

by meditator 2019. 6. 16. 02:59

평사원의 94.9%, 주임, 대리급은 98%, 과장급 89.7%, 우리 사회 직장인들의 평균 95%가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한다고 한다. '타버리다, 소진하다'는 뜻의 번아웃 증후군은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마치 에너지가 방전된 것처럼 갑자기 무기력해지는 증상을 나타내는 심리학적 용어로 2019년 세계 보건기구는 '번아웃 증후군'을 '만성적인 직장 스트레스'로 정의내렸다. 

6월 3,4일에 걸쳐 2부작으로 방영된  ebs 다큐 프라임은 만연해 가는 번아웃 증후군에 대처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모색해 본다. 바로 <휴식의 기술>이다. 

 

 
당신은 일이 아니다 -번아웃 사회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일하던 알렉스 수정 킴밤은 일주일에 50~60시간씩을 일하다 번아웃에 이르렀다. 일하는 시간이 많기도 했지만, 업무와 관련 해도 해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미처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늘 시달렸다. 무한 경쟁 사회 자신이 맡은 일에 있어서, 그리고 고객을 응대함에 있어 최선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언제든 누군가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는 강박이 과로를 당연하도록 만들었다. 알렉스만이 아니다. 일을 다하고 쉬어야지 하지만 일을 다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 사람들은 항상 일을 하고 있다. 

광고 대행사를 운영하고 잇는 47세의 강준구씨는 신혼 여행을 제외하고는 20년 직장 생활을 하면서 3일 이상 휴가를 써본 적이 없다. 휴가를 가도, 집에 있어도 늘 그는 일하는 중이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달린 거 같지만 해가 바뀌면 마치 택시 미터기를 0으로 꺾듯이 마라톤이어야 할 인생 여정을 100m 달리기를 420번 하듯 달려온 시간, 결국 그의 몸이 자신을 공격하는 '자가 면역 공격'을 당하고야 만다.  후배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시대를 달려온 이들은 자신들이 재수 학원에 붙여졌던 '오늘 쉬면 내일 뛰어야 한다'던 문구가 바로 자신들 세대를 대변한다고 입을 모으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견 직장인들. 

IT업계의 프리랜서 40세의 차경묵 씨의 책상 위에 타이머가 놓여있다. 20분 돌아가고 울리는 벨, 그는 5분을 쉬고 다시 타이머를 돌린다. 그렇게 타이머 8바퀴에서 16바퀴로 돌아가는 일상, 만약 자신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아이가 생기고 '가장'이라는 중압감이 프리랜서라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지난 몇 년간 개운하게 잠을 자본 적이 없다. 연달아 마시는 커피로 반 수면 상태에서 일을 해왔다. 자신의 몸에게 미안해졌던 상황, 결국 호흡 곤란이 왔다. 쉬며 자기 자신을 돌보라지만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17살 IT업계에 들어와 20년 동안 자신을 위해 가져본 적이 없다. 아니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쓸줄 몰랐다는 게 그만이 아니라 그와 동종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소회이다. 

명상하는 물리학자로 알려진 미나스 카파토스는 오늘날 현대인들은 재능은 많지만 행복하지는 않다고 단언한다. 과도한 경쟁 체제 속에 놓인 사람들, 미나스는 반문한다. 그 경쟁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고,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니냐고.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할 거 같은 강박, 목 말라 죽어가는 현대인들 앞에 물 한 컵과 1억 원이 놓여있다면, 과연 무엇을 선택할까? 라고 그는 묻는다.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 휴식을 주는 사회
과로 사회의 상징적인 나라와 같았던 일본, 저출산으로 인해 노동 인구가 줄어 상대적으로 일하는 세대의 노동 하중량이 늘어났다. 그와 함께 휴식에 대한 갈망이 다앙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근 도쿄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휴식법이 등장했다.  사람이 흰 보자기 위에 앉아있으면 도우미가 그를 보자기로 감싸고 동여매기 시작한다. 이른바 성인 보자기, 오토나마키이다. 따스한 엄마 자궁에서 놓여난 아기들에게 엄마 자궁과 같은 환경을 제공하려 속싸개로 꽁꽁 싸매듯 어른들을 싸매고 뉘여준다. 그렇게 한참을 자고난 사람들, 모처럼 숙면을 취했다고 편안해 한다. 보자기에 동여매져서야 숙면을 취하게 된 현대인들, 

이런 '휴식 산업'만이 아니다. 2019년 노동법을 개정하며 초과 근무를 제한하고, 동일 노동, 동일 임금제를 취하는 등 일하는 방식에 대한 사회적 시각의 변화를 '법'으로 반영했다. 정부만이 아니다. 기업들도 '휴가, 휴식'에 주목하고 있다. 과거 무조건 많이 일해야 한다던 방침에서 변화하여 충분한 휴식과 휴가가 외려 기업의 생산성을 높여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변화의 움직임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워케이션', 업무차 간 출장 과정에서 개인에게 '휴가'의 시간을 제공하는 식으로 일과 휴식을 함께 할 수 있도록 일정을 배려해 주기 시작했다. 

도쿄에서 건설 컨설턴트로 일하던 쿠리야마 타카시, 역시나 번아웃을 경험한 그는 30살이 될 때가지 자기 삶의 연표를 그려봤다고 한다. 30살이 될 때까지 하고 싶었던 일보다 할 수 밖에 없었던 일을 해오며 살아왔던 삶, 그래서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이 해오던 일에서 벗어났다. 카이야마 밸리 위성 사무실에서 귀촌한 동료들과 함께 마을 일을 하고 이쓴ㄴ 수나다 리사 역시 마찬가지다. 도시 생활에서 늘 피로감을 느끼던 그녀는 철 따라 피고지는 꽃을 보며 살아가는 지금이 바로 나답게 살아가는 삶이라, 행복이라 자부한다. 하지만, 모든 도시인들이 쿠리야마나 수나다처럼 자신이 하던 일을 그만 둘 수는 없다.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번아웃 증후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휴식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 마음 챙김
자신이 하던 일로 부터 탈출할 수 없는, 혹은 탈출하고 싶지 않은 직장인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의외로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다. 그저 하루 적게는 5분에서 10분만 투자하면 된다. 바로 '명상을 통한 마음 챙김'이다. 

미국의 실리콘 밸리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40세의 김미루 씨, '빠르게 실행하라'는 슬로건의 회사에서 그녀 역시 5년 전 번아웃을 경험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MBA를 밟고, 승진을 해왔던 시간들, 남들이 보기에 좋다는 걸 얻기 위해 자신을 바쳤던 시간,  '이렇게 살아도 되나'라는 우울감에 한없이 빠져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로 부터 5년이 흐른 후 그녀는 달라졌다. '해커톤(해킹과 마라톤의 합성어, 일과 관련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비지니스 모델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일상화된 생활에서도 거뜬하다. '명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여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사내에서 직원들과 함께 '마음 챙김'의 시간을 가지며 '스트레스' 의 반복인 업무적 긴장감을 풀어낸다. 이렇게 명상으로 부터 시작된 '마음 챙김'은 이제 식생활로 이어져 건강한 삶의 토대가 되고 있다. 

어번 리저널 공원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 참석한 구가야 아키라 씨는 정신과 의사이자, 뇌과학자이다. 하루 10시간 환자들과의 상담 등 정신 노동에 집중하는 그에게 마라톤이라는 육체적 강도가 높은 운동은 정신적 피로를 풀어내는 과정이 된다. 또 하나 그에게 중요한 스트레스 해소의 방식은 바로 '명상'이다. '명상'을 통해 뇌를 휴식하게 만든다. 집의 기둥에 해당되는 뇌를 활성화시키는 핵심 회로인 DMN(defalt mode network)는 피로가 누적되면 과열되고, 휴식을 취하면 늦어진다. '명상'과 같은 과정을 통해 뇌는 휴식을 취하면서 자신이 받아들였던 정보를 '기억'으로 축적하고 강화한다. 또한 감정 인식과 감정 기억을 좌우하는 '불안'과 '우울'도 가라앉게 된다. 

심지어 캘리포니아 대학의 앨리사 에델 박사에 의하면 명상에 의해 세포 속 염색체를 보호하고 덮개 역할을 하는 텔로미어가 길어지고 활성화된다고 주장한다. 


타인에 대한 연민 -그런데 내가 치유됐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던 차경묵 씨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1박2일 라이프 쉐어를 하기로 했다. 함께 한 사람들은 저마다 '고민의 화두'를 가지고 있다. 가지고 있던 핸드폰과의 잠시 이별인 디지털 디톡스로 시작된 모임, 익숙한 것과 거리 두는 시간을 가지고 대신 그 시간 동안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을 만나는게, 심지어 전화조차도 두렵다며 자신의 속 이야기를 꺼내든 차경묵씨, 얘기 나눌 상대가 마땅치 않다던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익명'의 사람들에게 허심탄회하게 자신을 꺼내든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대방에게 공감하고, 조언을 했을 뿐인데 '나 자신'이 치유되는 느낌이라고 하는 참여자들,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 이유를 스탠퍼드 대학의 '연민과 이타심 연구 센터'의 제임스 도티 박사는 '연민'에서 찾는다.  일찌기 달라이 라마는 '연민을 가질 때는 이기적이어도 괜찮은 유일한 시간'이라고 했듯이, 타인을 돌보고 친절하게 대할 때 정작 그 혜택이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민이란 무엇일까? '관계의 동물'인 인간, 나와 다른 사람 사이, 그 사이에 교감이 모자라면 '냉담'이 되고, 지나치면 '전염' 상태가 된다고 한다. 이 두 상태가 지속되면 '번아웃'에 빠질 위험이 높아지는데, 나와 타인 사이의 적절한 교집합이 바로 '연민'과 '공감'이다. 

하지만 그 시작은 '자신'이다. 우선 자신에게 친절해 지는 것, 자신의 말을 잘 듣는 것, 자신을 위한 휴식을 갖는 것, 스스로에 대한 저항을 멈추는 '명상'의 시간을 통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 상대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하는 '연민'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휴식의 기술>은 '번아웃'을 피해갈 수 없는 사회를 사는 이들을 위한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과학적'인 지침서이다. 또한 '번아웃'을 조장하는 사회에서 도망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구명 보트'이자, 휴식할 줄 모르는 사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휴식할 줄 모를 것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자구책'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9. 6. 12. 00:19

우리 사회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성선설, 혹은 성악설, 착하거나, 혹은 나쁘거나, 하지만, 그런 '본성'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고 봉준호 감독은 말한다. 결국 '인간'을 규정짓는 건 그가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한 인간의 선함, 혹은 악함, 그러한 것은 그 인간이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해체'되고 '사회적'으로 규정될 뿐이라고 영화 <기생충>을 통해 말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시장 썩은 생선 속에 버려진 아이 '그루누이', 체취가 없는 그를 아이들은 두려워했다. 두려워하다 못해 죽이려고 까지 했다. '냄새'를 결핍하고 태어난 아이 그루누이, 그가 가진 평생의 소원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게, '냄새'는 그 사람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가장 '본원적인' 요소다. 그리고 바로 그 '인간'을 표현해 주는 가장 '본원적인' 요소, '냄새'로 부터 봉준호 감독은 '우리 사회의 경계'를 도출해 낸다. 즉, 어느덧 본원적이 되어버린 '사회적 존재'들에 대해 논한다. 

글쓴이가 학교 다니던 시절, 꼭 한 반에 한 명씩 정도 아이들이 짝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를 대변하는 건, '냄새', 당시만 해도 한 주에 한번 목욕탕을 가는게 꽤나 '문화적인 행사'였던 시절이었음에도, 유독 그 '아이'들에게선 옆 자리에 앉아있기 힘들 정도로 오래 씻지 않아 나는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냄새는 그 아이의 가난을 상징했다. 그렇게 가장 원초적인 '냄새'로 상징되는 사회적 계급, 그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낙인'으로 부터 '차이'는 시작된다. 체취로 부터 구분되는 계급이라 이보다 더 '계급'으로 고착된 사회를 절묘하게 상징해 내는 '수단'이 있을까. 

 

 


상하로 재편된 설국열차 
우리 사회에 많은 '사업'들이 스쳐지나갔다. 무슨무슨 체인점에서 부터, 갖가지 전문점까지, 다들 시작은 '대박'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제일 '수지'맞는 장사가 '폐점 물품 처리업'이라는 웃픈 현실처럼, 저 '대박' 아이템들은 '한 철 장사'도 채 넘기지 못한 채 무수한 가장들을 신용불량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비슷해 보이는 연배의 기택(송강호 분)과 근세(박명훈 분)가 공교롭게도 함께 '카스테라'집 사장님이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 사회에선 '우연'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 시작이 imf였든, 혹은 또 다른 '정리 해고'였든 우리 사회 평범했던 다수의 가정들이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져 왔다. 

그렇게 한때 사장이었지만 이제는 무기력한 가장들과 함께 '가정'도 무기력해진다. 아내는 돈을 벌어보지만 그 '푼돈'이 사업을 들어먹은 내리막길의 가정을 구하기는 역부족일 터이다. 충숙(장혜진 분)이 방안 한 가득 늘어놓은 수세미나, 박사장 집 안살림을 도맡하 했던 국문광(이정은 분)이나, 지하를 면치 못하는 충숙네 가정 형편이나, 박사장 집을 나서자 대번에 얼굴에 빛 쟁이들의 흔적을 남긴 국문광을 보면 알 수 있다. 

부모가 그럴 진대 아이들이라고. 우리 사회 '교육'이 곧 부모의 경제력에 비례한다는 건 이젠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군대 까지 다녀온 아들이 여전히 대학 문턱도 밟지 못하고 있고, 딸내미가 그나마 다니던 학원조차 쉬어야 하는 건 아이들이 공부를 못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을 번듯하게 밀어부칠 부모의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은 '순박'하다. 아버지가 방구석에 등짝을 보이고 무사태평 누워있고, 엄마가 기껏 수세미나 짜고 있는데도, 여전히 '가족'이란 울타리가 무사하다. 그러나 그 '순박하고도 여전한 가족'이란 울타리가 얼마나 허망한 지 드러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봉준호 감독은 가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체되지 않는 가족을 통해 이후 그들이 뛰어든 범죄가 그들의 타고난 '범죄'적 성향으로 부터 비롯되지 않았음을 변명한다. 

 

 

가난한 지하 가족에게 찾아든 돌멩이, 아니 행운, 아들 기우(최우식 분)의 친구 민혁(박서준 분)은 자신이 교환 학생을 다녀오는 동안 가장 믿을만한(?) 친구로 대학도 가지 못한 기우를 점찍었다. 그렇게 해서 기우가 문지방을 넘은 박사장네, 어리숙한 박사장의 아내 연교(조여정 분)를 다혜(현승민 분)의 맥 한번 짚는 것으로 설득시킨 기우의 다음은 인터넷으로 아동 심리를 마스터한 딸 기정(박소담 분)이었고, 그 뒤를 이어 기택, 그리고 결국 충숙까지 온가족이 '완전 취업'의 행운을 얻었다. 덕분에 가족은 '필라이트'에서 '아사히'로 격이 달라진다. 모두가 실직이었던 가족이 그저 '직업'을 얻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얻은 일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의 실직이다. 기우로 부터 시작하여 드디어 충숙까지 박사장 네로 진입에 성공한 기택네, 그리고 그런 기택네로 인해 박사장 네서 밀려난 국문광네 부부의 비밀, 지상과 지하를 오르내리는 이 두 가족의 엇갈린 희비극, 그리고 그런 두 가족의 '사기'에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안락한 삶에 천착해 있는 박사장네, 단지 그들에게 경계를 넘나드는 저들의 냄새가 불편할 뿐인 그 지상과 지하의 위계는 흡사, 상하로 재편된 '설국열차'와도 같다. 계급에 따라 구분되었던 칸은 우리 사회 사람들을 볼모로 사로잡은  '집'이라는 '칸'을 통해 적나라하게 재편된다. 

 

 

계급이 존재를 만든다
하지만 기택네 가족의 행운은 안전하지 않았다. 지하에서 지상의 박사장네로 '안착'한듯한 가족의 흔적은 '냄새'로 남았고, 그들의 완전 범죄는 비오는 날 찾아든 국문광으로 인해 흔들린다. 

아니, 애초에 기택네도, 문광네도 시작이 '사기'였다. 행운의 돌때문이었을까, 기우의 학력 위조부터 몹시도 순탄했다. 서울대 문서 위조학과가 있으면 가야 겠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아버지, 범법 행위를 하는 자식들을 자랑스러이 말하는 이 가장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아니 지하에 사는 그들의 궁상이 너무도 옹색해 이 가족의 범법 사실을 잊게 만든다. 아니, 사기를 치고도 너무도 천연덕스러운 그들의 철면피스러움이 그들의 '죄'를 눙친다. 

문광네라고 다를까. 기택처럼 '사업'을 한답시고 다 들어먹고 이전 주인이 만들고 숨긴 반공호 지하실에 숨어든 문광의 남편 근세, 빛을 등진 그 생활에 어느덧 삶의 총기마저 잃고, 지하의 생활에 만족하다 못해 모르스 부호로 박사장에게 헌사를 남기는 그는 자본주의의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가 되는 현상)이다. 

 

 

그들은 '박사장'네에 기생한다. 제 아무리 온 가족이 손가락을 빨 정도로 옹색해도, 빚쟁이에 시달려 갈 곳이 없어져도 기택네와 문광네가 저지른 짓은 사기다. 그런데 그 '사기'에 의탁하여 '박사장'네 가정의 평정은 유지된다. 가르치던 과외 선생이 어학 연수를 가도 딸 다혜의 과외는 순탄하게 이루어지고, 정신없는 아들의 돌출 행동은 잘 다스려졌다. 요리는 물론 살림이라고는 젬병인 아내의 살림살이 역시 사람이 바뀌어도 빈틈없이 메워졌다. 물 한 잔을 들어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만큼 박사장을 만족시키며 사장님을 모시는 수행기사 역시 냄새의 경계를 빼놓고는 무리가 없다. 백수 가족을 하루 아침에 온 가족 취업으로 만든 '문서 위조'라는 통과 의례만 빼놓는다면 '사기'의 실체는 애초에 논할 바가 못되고 만다. 

기생충 박사로 알려진 허민 박사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최대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게 바로 기생충의 마음이라 정의내린다. 인간을 숙주로 살아가는 기생충, 허민 박사는 길이 10m가 되도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 힘든 기생충을 예로 들었지만, 인간의 장 속에만 1000 종류가 넘는 균이 있다는 사실만 봐도, '공존'의 현실은 역력하다. 나아가, 인류 그 자체도 지구에 붙어 사는 기생충에 불과하다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영화 속 상하의 설국 열차는 적나라한 우리 사회 공존의 현실일 뿐이다. 다만 그 공존이 박사장네가 인간이고, '꼬리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사람'인 대신 '기생충'이 되어야 한다는, <설국 열차>처럼 뜨거운 '혁명'의 기치가 아니라, 웃게 되지만 어쩐지 돌아서니 먹먹해지는 '블랙 코미디'이다.

멀리서 보면 웃기지만, 가까이 들여다 보면 슬플 수 밖에 없는 현실은 경계를 타고넘나드는 냄새처럼, 결국 그 '경계'의 선을 타넘나들다 '파국'을 맞이한다. 경계라지만 기생충과 인간의 경계가 아니라, 결국은 사람과 사람의 경계인 것을, 인간과 기생충일 때 '익스큐즈'되던 것들이, '사람'으로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 사람과 사람으로 섞여지는 순간, '아비규환'의 결과를 낳는다. 결국은 사람과 사람으로는 '공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능했지만 순박했던, 그러나 자신과 가족의 '기생충' 됨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기택은 도피인지, 유배인지, 혹은 격리인지 모를 선택을 한다. 먼 훗날 자신이 돈을 벌어 그 집을 사서 아버지를 지하에서 올라오도록 하겠다고 기우는 여전히 그 지하방에서 마음을 먹는다. 잔혹 동화로 끝난 <기생충>, 혁명이 사라진 <설국열차>, 더 고착화된 빈익빈 부익부의 자본주의 사회의 만화경이다. 

by meditator 2019. 6. 7.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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