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이 전 국가적 화두가 되고 있다. 하지만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젓는다. 심지어 나라를 위해 총을 들고 싸울지언정 나를 위해 아이를 낳는 건 '언어도단'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맞는 말이다. 한참 아이를 낳기에 좋을 건강한 시절엔 진학이다, 취업이다 하느라 아이 낳을 엄두를 못내는 세대, 그리고 막상 아이를 낳으려니 임신이 쉽지 않은 시대, 이 아이러니한 세태에 대해 <다큐 시선- 누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가 분석한다. 

왜 비혼주의일까?
33세 한종택씨는 안정된 직장과 함께 집을 옮겼다. 새 침대도 놓고, 전등도 새로 사고 자신만의 공간을 꾸미기에 한창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집은 오로지 그만을 위한 공간이다. 이른바 '비혼주의', 그게 결혼에 대한 그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남자의 36.3%, 여성의 22.4%만이 결혼해야 한다고 한다. 즉, 결혼 적령기 남성과 여성의 2/3가 결혼은 선택의 문제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은 곧 '어른'이 된다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남성에게 어른이 된다는 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의식을 '내면화'한 젊은이들에게 그럴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결혼은 '부담'일 뿐이다. 

 

 

이 '부담'을 현실화시켜주는 통계가 있다.  이 통계에 따르면 고소득의 과반수 이상이, 심지어 10분위의 경우 82.5%가 결혼을 하는 반명, 1분위의 경우엔 겨우 6.9%만이 결혼을 했다. 즉 우리 사회에서 결혼은 곧 '소득'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통계는 증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제 상황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공교육만으로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다면 아이를 낳아 키우는 비용은 줄어든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교육은 온전히 사교육에 의존한다. 또한 직업이나 주거 역시 결혼의 주된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과연 이런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결혼'을 감행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젊은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앞서 한종택씨는 안정된 직장을 가지기 까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미뤄두었단다. 이제 비로소 자신다운 삶을 즐길 수 있는 상황, 그래서 그가 택한 방식이 '비혼주의',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존중해 주길 바란다. 

무자식 상팔자?
그런가 하면 함께 살아도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도 모색된다. 공덕동에 사는 31살의 홍혜은 씨에게는 세 명의 동거인이 있다. 애인과 두 명의 동생, 하지만 이른바 '공덕동 하우스'라는 계간지까지 내는 이 공동체는 '비혼 생활'을 지향한다. 

 

 

자유롭고, 자기 계발을 위한 '비혼'만이 아니라, 더 긴밀하고 건강한 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비혼'을 주창하는 이들, 우리 사회 많은 가족들의 민낯이 그러하듯 누나 동생 사이라도 서먹서먹했던 혜은과 막내 동생은 이 공동체 속에서 서로 말을 트며 누나와 동생의 권위를 넘어서는데 몇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제 아무런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는 이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공동체'를 잘 꾸려 나가며 그 속에서 서로 행복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함께 고심 중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아이가 없다고 해서, 아이를 당장 낳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를 외면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산아 제한의 시절 5남매인 덕에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이들이, 9명으로 확대된 온, 오프라인 공덕동 하우스 일원의 아이에게는 조건없는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막상 공동체의 일원으로 아이를 기르는 문제에 있어서는 비용과 시간의 문제를 들어 난감함을 표명한다. '아이'는 좋아도, 아이를 키우기엔 쉽지 않은 사회다. 
이런 젊은 세대의 생각을 반영하듯 결혼해야 한다가 48.1%인 반면, 결혼하지 않아도 같이 살 수 있다는 비율이 56.6%로 결혼해야 한다를 넘어서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각국이 비혼 가정의 자녀를 기꺼이 사회의 일원으로 보호하고 있는 것과 달리, 사회적 인식이나 제도가 미비한 우리 사회에서 비혼 가족의 출산율은 저조하다. 사회는 '아이'를 원하지만, 정작 결혼한 정상 가족의 아이만을 원하는 아이러니가 바로 우리 사회 낮은 출산율의 또 다른 이면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쉽지 않은 결혼 
그렇다면 그 소위 우리 사회에서 요구하는 '결혼한 정상 가족의 아이'는 어떨까? 
34살의 강종희씨는 오늘도 종종 걸음이다. 동네에서 늦게까지 아이를 맡아주는 어린이집을 겨우 찾았지만 그마저도 늦지 않게 가기 위해서 늘 조바심에 동동거린다. 

엄마를 만난 기쁨도 잠시 이미 해는 져서 어둑어둑한 놀이터에서 아이는 1분만 더를 조른다. 겨우 달래서 들어온 저녁 삼교대 근무를 하느라 부재중인 남편을 대신하여 아이랑 놀아주고 씻겨주고, 다시 내일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그리고 다시 새벽부터 이어지는 하루. 하지만 주변에서 은근히 부담을 주는 둘째는 언감생심이다. 엄마의 출근 시간에 쫓겨 못자고, 먹을 것도 빨리 먹어야 하고, 놀이터에서 실컷 놀지도 못하는 아이를 보면서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아이에게 못할 짓이다 싶다. 아이를 낳으면 시댁에 맡기라는 시부모님의 말씀이 반갑기 보다, 조부모님 품에서 자라는 아이에게 자기가 무슨 엄마 자격이 있을까 싶다. 또한 직장에서는 아이 생각, 집에서는 직장 일 생각을 하며 늘 머릿속이 복잡한 자신의 생활이 답답하다. 

그래도 낳아서 지지고 볶으면 다행일 수도 있다. 29살 김수연 씨는 오늘도 매 끼니 고가의 영양제를 한 움큼 씩 삼킨다. 아이를 갖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시도한 두 번의 시술, 그러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몇 번의 기회, 나날이 그녀는 위축되어간다. 국가에서 비용을 보조해준다고 하지만 빛좋은 개살구, 비용조차 만만치 않다. 아이를 낳으려고 하지만 정작 아이는 그녀에게 쉽게 오지 않는다. 

이건 비단 김수연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 병원 간호사였던 그녀 불규칙한 수면과 식사, 그리고 과로는 그녀의 직장 생활을 정의하는 단어들이었다. 그리고 김수연씨와 같은 조건, 혹은 비슷한 조건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난임'의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임신을 할 수 있는 나이에는 결혼도 안되고 임신은 더더욱 안된다는 사회적 압력을 받으며 우리 사회 출산은 자꾸만 늦어진다. 더구나 난소 기능 검사(AMH)와 같은 조기에 치료가 중요한 난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미처 갖춰져 있지 않다. 결국 정작 아이를 가지고 싶어할 때 아이를 가지지 못하거나 힘든 부부들이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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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아'라는 정책의 역사,
70년대 우리 정부에서는 정부 주도의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거지꼴을 못면한다'가 정부의 주요 시책이었다.  '가족 계획 어머니회'를 내세운 임신 중절을 위한 차가 마을에 까지 가서 낙태를 주도했다.  1980년대 출산율이 2.1%였다면 모집단을 통해 집계된 낙태율이 2.1%였다. 즉 국가가 앞장서서 낙태를 조장했다. 이런 정책은 8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한 자녀에게는 의료 보험 혜택과 새마을 유아원 무료 교육과 육아 보조비, 산모 요양비가 주어졌으며 다산 가족에게는 셋째부터 주민세등의 불이익이 주어졌다. 

'산아'에 대한 국가적인 개입의 역사였다. 이 과정에서 모성은 도구화되었고, 여성은 객체화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고 다를까? 아이를 낳으면 이러저러한 이익을 보장한다는 각 지자체의 홍보성 정책은 과거 정책의 반사판 판박이이다. 여전히 사회와 국가는 여성에게, 엄마에게 매달린다. 우리 사회에서 아이의 출산과 건강, 교육 그 대부분은 여성에게 책임이 전가되어 있다. 경쟁의 한국 사회에서 그 경쟁에서 승리하는 아이를 만들어 내는 건 여전히 '엄마'다. 그런데 그런 엄마의 역할을 충족시킨 자식은 1%도 못되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바로 '엄마 스트레스'로 가임기의 세대에게 온전히 압박감으로 가중된다는 것이 전문가의 해석이다. 그래서 그걸 미리 거부하면 '비혼'이요, 결혼해서 거부하면 '무자녀'이며, 한번쯤 시도해 봤는데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한 자녀'라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줄어든 아이들은 바로 '둘째'이다. 

결국 여전히 19세기와 20세기의 프레임 속에 갇힌 한국 사회의 결혼과 출산에 대한 패러다임이 21세기의 청년들에게 결혼과 출산을 미루게 만든다고 다큐는 결론내린다.  아이를 낳으면 뭘 해주겠다 하기 전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인식의 변화와 조건을 만드는 거 이게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다. 


by meditator 2018. 11. 30. 18:04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가장 쉽고 위험한 방법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는 것이다. 
가장 쉽지만, 이것은 사실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않는 것보다 위험하다. 
                                       -이승우, <모르는 사람들> 중


'가짜 뉴스'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이다. 왜 '가짜 뉴스'가 만들어 지는 것일까? 그것을 맹목적으로 '소비'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어떤 '의도'를 가지고 가짜 뉴스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이들의 '불순한 음모'에 대한 의심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무엇때문에 '가짜'가 만들어지는가? 그에 대한 생각을 <안개속 소녀>를 통해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소녀가 사라졌다.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인 외딴 마을, 크리스마스를 앞둔 며칠 전 소녀 애나 루가 사라졌다. 흔한 10대들의 가출? 하지만 부모들은 '순종적이며 성실했던' 딸이 그럴 리가 없단다. 결국 돌아오지 않는 소녀, 마을 경찰들은 수사를 시작하는데 이곳에 형사 보겔(토니 세르빌로 분)과 젊은 형사가 합류한다. 

이른바 '큰' 사건에 대한 감이 남다른 보겔은 이 외딴 마을의 사건에서 '전국민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 냄새를 맡는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자신을 이런 외딴 마을의 사건이나 맡도록 만들었던 기차역 폭파 사건의 오욕을 만회하기 위해 소녀 실종 사건의 '사이즈'를 키우려 '언론'을 부추긴다. 

찾아오는 관광객이 없이 조만간 문을 닫을 거라는 식당 주인에게 했던 보겔의 장담대로, 아니 그가 언론과 세상에 던져주는 '편집'된 사건에 맞춰 외딴 마을은 북적인다. 어머니의 슬픔은 전국민의 슬픔이 되어 애나의 집 앞에는 애나의 귀환을 비는 촛불들이 줄을 서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관심에 부응할 만한 또 다른 먹잇감, '용의자'가 필요하다 생각했던 보겔은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소년의 카메라에서 자신이 원하는 '인물'을 특정해내 은밀한 척 언론에 흘리고, 어느새 그의 집 창문 밖은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폭죽처럼 터진다. 그리고 언론은 우리 언론이 '가쉽'을 다는 예의 방식으로 용의자의 신변을 낱낱이 까발린다. 

 

 

무엇이 중한디? 사라진 소녀보다 각 자들의 욕망이 
안개에 뒤덮힌 마을, 그 스산한 배경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미스터리'했던 영화는 하지만 보겔의 등장과 함께 '미스터리'보다 더 '미스터리'한 욕망의 용광로로 변화된다. 

노회하면서도 예리한 형사 보겔, 그가 사건을 진두지휘하면서 소녀의 실종 사건은 전혀 다른 각도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사건의 진실이 궁금한 관객와 마치 실랑이를 벌이듯, 그는 과연 '수사'를 하는 것인지, 이 오지로 밀려난 자신의 한풀이를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문제는 보겔만이 아니다. 그의 '초빙'으로 달려온 베테랑 여기자를 비롯한 언론들도, 그런 보겔을 물먹였다는 변호사도 저마다의 '이해 관계'가 먼저이다. 심지어 영화 후반부에 결정적인 단서를 들고 나타난 나이든 여기자의 진심조차 의심스럽다. 그녀가 원하는 건 진실일까? 역시나 보겔과 같은 명예 회복일까? 그런 상황에서 외려 '용의자'로 특정된 가난한 가장의 처지가 안타까울 지경이고,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정신과 상담을 해온 플로레스(장 르노 분)가 '객관적'이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증오'가 중심이었던 과거의 사건가 달리, 오늘날의 사건들이 '돈, 욕망'이라는 마티니 교수(아레시오 보니 분)의 강의는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주제에 가장 가닿는다. 

결국 '사건의 수사', '소녀의 실종'보다 저마다의 이해 관계로 널뛰던 인물들의 욕망은 그것으로 인해 주인공들을 함정으로 밀어넣고, 사건의 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아니 그들의 욕망은 정확하게 또 다른 욕망의 낚시밥이 된다. '소녀'의 가방은 돌아왔지만, 결국 소녀는 딸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과연, 그녀를, 아니 그녀의 시신조차 돌아오지 못하게 만든 건 영리한 범인때문이었을까? 저마다의 욕망에 춤추던 한 편의 쇼와도 같았던 수사때문이었을까? 

 

   

 


<안개속 소녀>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범죄심리학자 도나코 카리시의 베스트 셀러 <속삭이는 자>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출간 즉시 이탈리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600만부가 팔린 이 작품으로 헤밍웨이, 움베르토 에코, 존 그리샴 등이 수상한 프레미오 반카렐라 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학상을 휩쓸었고, 그 여세를 몰아 이 작품의 감독으로 데뷔했다. 

덕분에 영화는 한 편의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듯 128분의 런닝 타임 동안 줄곧 모호한 안개속에서 그 보다 더 의뭉스러운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기 위해 고심한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스토리로 치자면 <너를 기억해>와 비교되며, 뜻밖의 반전은 거의 <유주얼 서스펙트>급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너를 기억해>나 <유주얼 서스펙트>와 달리 이 영화가 '헐리우드' 영화가 아닌 '이탈리아' 영화라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뜻밖의 아이러니한 결말에 이르기 까지 한 편의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끈기를 가지고 진득하게 128분에 집중해야 '노력'이 필요하단 의미이다. 애초에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처럼 썼다는 도나코 카리시 과연 그가 '베스트 셀러' 작가에 이어, 스타 감독이 될 수 있을까? '이탈리아 미스터리'에 대한 우리 관객의 선택이 궁금하다. 

by meditator 2018. 11. 26. 16:44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 서정주, 문둥이 


<붉은 달 푸른 해>라, 이 역설적 제목을 가진 mbc 수목 드라마는, 그 역설적인 제목보다 더 미스터리한 설정으로 시작된다. 운동장, 달리기가 시작되고 아이는 전력질주를 한다. 1등으로 골인, 하지만 소란스러움도 잠시, 자신의 아이를 얼싸안고 돌아서는 학부모들 사이 아이는 홀로 서있다. 그런 것도 잠시, 어느덧 아이는 계단 위에 서 있고, 그곳에서 자신의 몸을 날린다. 

 

 

보호받지 못한 아이
결국 아이는 상담 센터에서 우경(김선아 분)를 만난다. 햇살이란 태명의, 어린 딸이 기다리는 남동생을 가진 만삭의 우경은 자상한 IT업체 대표 남편에 부러울 것이 없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상담하러 온 아이 시완이 말한다. '좋은 게 아닌데, 죽었으니까'. 교통사고로 죽은 자신의 동생을 일러 하는 그 말이 '씨'가 되었을까? 그로부터 11월 22일 2회의 엔딩까지 우경은 아이도 잃고, 남편도 잃고, 무엇보다 자신을 잃었다. 

아이를 학대해 죽이고 그 시체를 불에 태웠다는 패륜 잔혹 범죄, '아이'를 상담하는, 아니 그 이전에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 남달랐던 우경은 주변의 아는 엄마들과 함께 분노하며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1인 시위까지 나섰었다. 그랬던 그녀가 자동차 전용 도로로 뛰어든 아이를 그만 보지 못한 채 치어 죽이고 만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눈에 보인 아이는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대여섯 살 또래의 여자 아이였는데, 막상 사고를 당해 죽은 아이는 남자 아이라니! 그 일로 인해 같은 또래인 자신의 딸과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사고'의 진실, 아이의 정체에 집착하는 우경.

그런 가운데 우경이 1인 시위에 나섰던 그 사건의 엄마가 자동차에 탄 채 불에 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얼마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것, 출소 당일 교도소 앞을 메웠던 그녀를 지탄하는 시위대 행렬, 하지만 그렇다고 누가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까? 그렇게 드라마는 '의문의 죽음, 그것도 아이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의 그물을 펼친다.

 

 

 



그리고 그 그 그물에, 서정주의 시 한 자락을 걸친다. 우경의 차에 죽은 소년의 운동화 깔창 아래서, 그리고 아들을 죽였다던 여자의 가족 사진 뒤에서 발견된 문구, 바로 서정주의 시 <문둥이>의 한 구절, '보리밭에 달 뜨면'이다. 그 시구의 뒤에 이어진 말은 '애기 하나 먹고', '미스터리한 아이의 죽음'은 '서정주의 시구, '아이 하나 먹고'로 이어지고, 드라마의 <붉은 달 푸른 해>의 역설적 어구는 첫 연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와 맥락이 닿는다. 그렇게 드라마의 사건은 시를 통해 상징되고, 다시 시는 의문의 사건에 '해석'의 결을 댄다. 

이렇게 시를 통해 '상징'의 나래를 편 드라마는 3,4화에 이르러 그 시적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결국 자신이 차로 친 소년에 대한 집착, 결국 해프닝이 된 딸의 실종은 우경에게 뱃속의 아이를 빼앗아 간다. 그리고 늘 든든한 보호자인 듯했던 남편도. 그렇게 우경의 가정이 부숴지는 동안, 드라마에는 또 하나의 가족이 등장한다. 고가 다리 아래 방치된 차안에서 발견된 '자살'로 추정되는 가장의 시체, 그런데 그 주은 남편에 대한 아내 동숙(김여진 분)의 태도가 수상하다. 남편의 시체를 확인하는 것보다 지금 직장의 일자리에 연연하던 아내는 죽은 남편이 남긴 돈다발에 눈이 희번덕해진다. 그리고 돌아와 온집안을 뒤집어 찾아낸 건 보험 증서, 그 증서를 들고 아내 동숙은 웃음을 토해낸다. 그런 동숙의 웃음 위로 교차되는 칼을 들고 남편을 향해 달려가다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우경. 그리고 서정주의 시 <입맞춤>, '짐승스런 웃음은 달더라, 달더라, 울음같이 달더라'.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으로만 작구 달아나고
울타리는 마구 자빠트려 놓고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

사랑의 사랑의 석류꽃 낭기 낭기
하누바람이랑 별이 모다 웃습네요.
풋풋한 산노루 떼 언덕마다 한 마리씩
개구리는 개구리와 머구리는 머구리와

구비 강물은 서천으로 흘러 나려……

땅에 긴 긴 입맞춤은 오오 몸소리친
쑥나물 지근지근 이빨이 허허옇게
짐승스런 웃음은 달더라 달더라 울음같이 달더라.


 

 

서정주의 시를 얹어 더욱 모호해진 도현정의 미스터리 스릴러 
<붉은 달 푸른 해>의 도현정 작가, 전작이 바로 sbs의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을 안다면 <붉은 달 푸른 해>가 뿜어내는 상징의 향연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 속에 숨겨진 가족의 비밀을 찾아 그 이름부터 묘한 아치아라 마을도 들어온 한소윤(문근영 분), 그곳에서 그녀는 마을의 권력자로 행세하는 서창권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둘러싼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감지한다. 하지만  그녀가 찾던 언니는 정작 '백골'로 돌아오고, 그 '언니'의 죽음으로 시작된 사건은 결국 마을이 덮고 있던 부도덕한 음모의 폭로로 이어진다. <붉은 달 푸른 해>의 서정주 시처럼, 안개에 뒤덥힌 마을과 비밀을 품은 사람들이 그 자체가 '미스터리'의 퍼즐 조각이 되어 지방 토호의 권력으로 짖뭉개진 그리고 그 속에서 춤추는 인간의 욕망을 차근차근 실밥을 풀듯 풀어나갔던 도현정 작가의 내공은 이제 조승우가 출연했던 <조감도>의 최정규 피디와 <남극의 눈물>의 송인혁 촬영 감독을 만나 다시 한번 날개를 편다. 

드라마는 한 아이의 알 수 없는 자해로 부터 시작되어, 보호받지 못한 아이의 죽음으로, 그리고 그 죽음으로 부터 파생된 환영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히스테릭한 파멸에, 뜻밖에 등장한 가장의 죽음에 환호작약하는 아내로 받아치며 <붉은 달 푸른 해>가 내비치고 있는  붉지 못한 해와 푸르지 못한 달, 보호자가 되지 못하는 부모와 거기서 보호받지 못한 아이라거나, 혹은 우리 고전 설화의 호랑이에 쫓겨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비극적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는  '아이러니한 관계와 존재의 문제'를 제기한다. 거기에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고 죽인 부모의 사건, 거기에 그 어머니를 다시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거둔 아버지의 사건과 그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들이 엇물리며 드라마의 박진감을 더한다. 

 

 

또한 일찌기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삼순 이래 2017년 <품위있는 그녀>의 박복자, 2018년 <키스 먼저 할까요>의 안순진까지, 이제 김선아라는 배우 자체가 '장르'가 되어가는, 히스테릭하게 집착하는 모성성을 가진 우경이 되어버린 김선아의 열연 그 자체만으로도 <붉은 달 푸른 해>는 보는 재미의 충분 조건이 된다. 그에 더해 마지막 엔딩 미친듯한 웃음의 한 장면만으로도 시청자들을 꽉 잡아버린 동숙 역의 김여진 등 발군의 호흡이 더해지며 2018년을 마무리할 '명작'의 탄생을 알린다. 특히나  ocn의 <손 THE GUEST>의 종영이 아쉬웠던 장르 드라마 팬들에게는 '반색'할 소식이다. 







by meditator 2018. 11. 23. 15:49

두터운 외국 장편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아마도 독자가 이 책을 읽고자 하는 그 '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위해서는 절반의 페이지가 넘어가야 하거나, 심지어 2/3정도 되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초반'의 장황한 설명들은 본격적인 '사건'을 위한 치밀하고도 필수적인 주춧돌이다. 1926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간을 2년마다 5편에 걸쳐 만들어질 <신비한 동물 사전> 시리즈에서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가 바로 그 '시리즈'를 위한 장황한 입문서의 역할을 한다.

 

 

돌아온 해리포터 월드
뉴톤 아르테미스 피도 스캐맨더, 줄여서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디메인 분)는 마법 동물학자로 무려 52판에 이르는 <신비한 동물사전>의 저자이다.  후에 그의 책이 마법학교 호그와트에서 교과서로 사용되며 일반 가정에서도 널리 씌이는 책을 쓴 사람답게 동물, 그 중에서도 '마법'의 동물들에 조애가 깊으며 '애호' 정신은 더 깊다. 그런 그가 애리조나 산 천둥새를 고향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미국으로 오면서 1편 <신비한 동물 사전>의 막이 열린다. 

9와 3/4 승강장을 통해 마법 세계로 들어서고 마법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며 지팡이로 갖가지 신비한 마술을 부리고, 벽에 걸린 그림이 살아 움직이고, 도비(집요정)와 유니콘과 불사조가 어우러지는 세계, 그렇게 상상 그 이상의 '마법'적 도구와 배경을 통해 '해리 포터'에 매료되듯이, 금붙이만 보면 정신못차리고 수집하려드는 오리 너구리 같은 '니플러', 피켓이라 불리는 귀여운 푸른 나뭇가지 보우트러클, 코뿔소 저리 가라인 에럼펀트 등의 '진기명기'를 통해 관객들은 대번에 '신비한 동물'의 세계에 매료되어 버린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마법적' 도구와 '마법의 세상'은 진짜 해리 포터의 세계로 낚는 '미끼'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마치 '인간 세상'의 복사본처럼, 이모네의 타박과 텃세를 피해 간 '마법 세계'에서 해리가 만난 마법 세상은 마법사와 '머글(인간), 그리고 학교를 세운 네 마법사의 성향에 따라 그리핀도르, 후플푸프, 레번클로, 슬리데린으로 나뉘어 지고, 이들은 다시 어둠의 마법과 그에 대항하는 '정의'의 세계로 갈라져 끝없이 '대치'하는 갈등과 쟁투의 세계이다. 즉 가장 신기한 마법이라는 관문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곳은 '인간'아니 마법사로서의 자신의 본성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고민, 선택, 그리고 투쟁의 지난한 과정인 것이다. 

 

 

마찬가지다. 그저 신비한 동물을 고향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미국으로 온 뉴트는 뜻밖에 '옵스큐러스(억압된 어린 마법사가 만들어 낸 검은 기운)'로 인해 미국의 마법부로 소환되고 '사형선고'의 위기를 겪게 된다. 그렇게 그저 마법의 동물학자일 뿐인 뉴트는 미국 마법부를 덮친 어둠의 그림자에 대항하며 마법의회 안보국 국장그레이브스(콜린 파렐 분)의 모습으로 암약하던 그린델왈드(조니 뎁 분)를 잡아낸다. 

그렇게 옵스큐러스의 주인공이었던 크레덴스(에즈라 밀러 분)가 마법부의 집중 공격을 받아 산화되고, 주범인 그린델왈드가 체포되며 1편이 마무리되었지만, 그건 그저 '맛보기'에 불과했다. 2편, 완벽무결하게 투옥되었던 그린델왈드는 의기양양하게 영국 마법부 이송 도중 자유로운 몸이 되어 어둠의 세력을 결집하고, 흩어져버린 줄 알았던 크레덴스 역시 영국 서커스단에서 숨어있었다.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온 뉴트는 '오러'가 되어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데 합류할 것을 종용받는다. 

 

 
 

 

나는 누구인가?
뉴트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때론 그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할 수도 있는 마법부의 방식에 동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존경하는 마법학교 덤블도어 교장(주드 로 분)의 부탁으로 순수한 혈통을 중심으로 한 어둠의 마법 조직을 규합하는 그린델왈드를 저지하기 위해 프랑스로 향한다. 물론 거기엔 프랑스에 있다는 티나(캐서린 워터스턴 분)를 향한 그의 마음도 얹혀있다. 

즉, <신비한 동물사전>의 2편,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에는 이렇게 아직 자신의 길을 결정하지 못한 채 그린델왈드로 인한 마법 세계의 분열 책동에 휩쓸려 들어가는 마법사들의 갈등이 그려진다. 정의의 길을 추구하지만 1편에서 크레덴스를 죽음으로 모는 미국 마법부에 대항했고, 그렇게 거침없이 처단을 선택하는 '마법부'의 방식과는 다른 길을 택하려는 뉴트처럼. 

 

 

무엇보다 그런 고민의 중심에는 이미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그 이름이 등장한 마법사의 순수 혈통 가문인 '레스트랭' 가문이 있다.  가문의 아들들에게는 가계도에 얼굴과 이름이 올려져 있고, 딸은 그저 한 송이 꽃으로만 표현되는 가문, 하지만 그 '순혈'의 집안의 혈통은 부도덕한 아버지로 인해 서로 다른 핏줄의 형제들의 얽힌 인연이 드러난다. 

'동생을 죽이는 형'이란 예언을 신봉하는 첫째, 그 핏빛어린 혈육애에는  첫 번째 아내 이후 부도덕하게 취한 두 번째 아내가 낳은 두 아이, 딸과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와 엇갈린 운명의 가족사가 있다. 1편에서 산화되었던 크레덴스의 자기 핏줄 찾기와 뉴트의 첫사랑 레타(조 크라비츠 분)의 자기 정체성 찾기,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는 의문의 남자와 얽혀들며 이 '가문의 비극'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과 갈등, 그리고 선택은 <해리 포터> 시리즈 초반 마법 학교의 입학 이후 각자의 성향에 따라 그리핀도르 등으로 나뉘어졌던 그 시절 이래, 자신의 이마에 새겨진 표식 등으로 인해 어둠과 정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했던 해리의 여정에 대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어디 해리뿐인가, 때론 그의 적으로, 때론 그의 보호자로 끊임없이 그의 정체가 의심스러웠던 스네이프 교수의 비극적 생애 역시 다르지 않다. 또한 인간과 머글의 사이에서 태어나 '순혈' 마법사들 사이에서 늘 조롱과 놀림의 대상이었지만 그걸 자신의 노력으로 이겨내려했던 헤르미온느의 고뇌 등 <해리 포터>의 모든 이들이 각자 자기 앞의 생에 던져진 질문으로 인해 끊임없이 흔들리며 성장해 나간다. 심지어, 그 어둠의 볼드모트조차. 

 

 

그렇듯 해리 포터 시리즈는 덤블도어 교장의 호그와트 마법학교, 그리고 마법학교를 넘어서 마법 세계를 장악하려는 볼드모트의 어둠의 야욕을 배경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고민하는 청춘들의 대서사시이다. 그리고 이제 책이 아닌 극본으로 참여한 조앤 k 롤링의 <신비한 동물 사전> 시리즈는 예의 그 '마법' 세계 청년들의 자기 정체성 찾기를 2편에서 장황하게 펼쳐보인다.

그리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강력한 '오러'의 직책을 거부하던 뉴트는 자신의 눈 앞에서 사랑했던 레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린델왈드를 막아내기 위해 목숨을 잃어가는 걸 보고 결연히 그린델왈드에 대항 전선에 앞장설 것을 결심한다. 어두웠던 자신의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늘 갈등을 느꼈던 레타는 그러나 결국 그린델왈드의 손을 잡는 대신,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여 그의 야욕을 막아선다. 그리고 이미 '옵스큐러스'를 통해 자신이 '어둠'이라 확신했던 크레덴스에게는 뜻밖의 형제가 등장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코왈스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린델왈드에게 매료된 티나의 여동생 퀴니, 반면 아직은 어둠의 속으로 뛰어들지 않은 내기니(수현 분)그렇게 각자 자신의 길을 '선택'하게 된 이들, 그리고 이제 결연했던 불가침의 약속을 깨뜨린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 이 양 자와, 그들의 세력이 마법 세상, 그리고 인간 세상을 배경으로 본격적으로 싸움에 나설 것이다. 

by meditator 2018. 11. 22. 20:31

창사 특집 대기획으로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공정성' 문제를 다뤘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로 부터 시작된 질문은 올해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정규직과 관련된 정규직 젊은이들의 분노와, 한 해 44만 명 수능을 치룬 학생 중 3/4가 응시하는 각종 공시와 관련된 '한국형 능력주의'에 다다른다. 그리고 '시험'을 통한 경쟁은 공정한가라는 회의적 물음으로 1부는 끝을 맺는다. 

그리고 다시 11월 18일 이어진 2부는 1부에 이어, '운'과 '능력'에 대한 질문을 이어간다. 그를 위해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한국 사회에서 '대박'을 터트린 사람들을 인터뷰한다. 그런데 그들의 답은 한결같다. '제가 이만큼 성공한 건 운도 중요하지만 노력이 더 중요해요.' 즉,  '운'이 아니라 '노력'이란다.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을 열심히 한다면 몇 년이 걸릴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아주 큰 규모의 성공은 오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확신해요.
toss 이승건 대표 


심지어 타고난 미모가 없었다면 힘들지 않았겠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쇼핑몰 하늘 대표는 '그 조차도 노력'이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다. 반면 거길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입을 모아 '운'을 말한다. 그 주요한 이유는 '집안 배경'은 본인의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쉽게 '운'인가, '노력'인가 결론에 도달하기 힘든 질문, 그 답을 찾기 위해 이탈리아를 찾았다. 안드레아 파사다 박사를 비롯한 세 명의 연구진은 컴퓨터 안에 1000 명이 20세에서 60세까지 살아가는 가상 세계를 만든 후 이들의 운명을 시뮬레이션해본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파레토 법칙', 즉 상위 20%가 전체 80%의 부를 소유한다는, 이른바 '운칠기삼'의 속설이 '과학적'임을 증명했다. 이들이 분석한 성공 요소는 평균적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 운이 좋으면 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운칠기삼'이 아니다. 이들 학자들이 주장하는 건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운이 없어서 그 능력조차 쓸모없어질 수 있는 '불운의 환경'이다. 즉, '불운을 없애주는' 사회의 역할이다. 

'인간 진화의 사회적 혁신'으로서의 '나눔' 
그 사회의 역할을 살펴보기 위해 제작진은 인도네시아의 라말레라를 찾는다. 화산섬인 람바타 섬 워낙 척박하여 국제 기구로 부터 유일한 생업인 '고래잡이'를 허용받은 이곳에서 남자들은 배를 타고 나가 '작살'로 고개를 잡는다.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작살잡이인 주르비깜인 이 곳, 말린 고래고기가 이들의 주 수입원이다.  작살 하나로 길이 20m의 향유 고래도 잡을 수 있는 작살잡이, 하지만 그가 잡아온 고래는 마을 공동체의 몫이다.

마을 남자들이 배를 타고 돌아오면 몫을 관장하는 마을 어른인 아타몰라가 '공정'하게 몫을 나눈다. 배를 조종한 사람과 배의 소유주에게 머리, 작살잡이에게는 어깨 등 역할과 능력에 따른 분배이다. 하지만 배를 타고나간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다. 참여치 않은 이들도, 심지어 배를 타다 가장을 잃은 가정에도 몫이 돌아간다. 

그것이 가능한 건 이들이 잡은 고래를 그 고래를 잡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바다의 것, 마을 사람 모두의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래 고기가 없으면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척박한 환경이 라말레라 사람들로 하여금, '나눔'을 실천하게 했다. 

 

 

진화 학자는 말한다. 수렵 채집 사회에서 '행운'을 나눠, 불운에 맞서는 '나눔'은 엄청난 '사회적 혁신'이었다고. 능력있는 사람에게 몫을 더 주는 '능력주의'는 환경에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 낸 '나눔'이라는 안전판을 통해 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새뮤얼 보울스에 다르면 인간의 뇌는 '공정함'에 관심을 갇는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최후 통첩 게임 등에서 불공정한 처사에 부딪쳤을 때 뇌에서는 뇌섬엽이 강화되면서 마치 썩은 음식을 봤을 때처럼 불쾌감이 강화된다. 즉, 인간의 뇌는 '공정함'에 대해 관심을 갖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진화'의 시기가 수렵 채집의 소규모 사회, 오늘날 규모가 커진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이 공정함의 본능이 위협받는다. 

'운'을 만들어 주는 사회 
이탈리아 학자들의 시뮬레이션 실험, 학자들인 그 가상 세계의 1000 명에게 5년마다 분배 시뮬레이션을 실시했다. 미국식 능력주의, 랜덤 방식, 그리고 균등 배분 방식 등이다. 

미국식 능력주의는 어떻게 작동될까?  기업 'YC'의 사례를 살표본다. 대부분 사업을 할 경우 필요한 경제적 도움 등을 '인맥'에 의존하는 현실, 그 한계에 주목한 YC는 기업 활동의 엑셀레이터가 되기로 한다. 즉 성공의 '운'이 되어주기로 한 것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방식으로 '미미박스' 등의 업체가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미국 사회는 위계 조직화돤 한국과 달리 테트리스 게임처럼 각자 자신에 맞는 역할을 찾아내면 '기회'가 주어지는 '기회'의 국가이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의 캠핑카 대열과 최근 영화로도 개봉한 LA 라라랜드의 6만여 노숙자 텐트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미국은 '기회'의 땅이지만, 안타깝게도 불운은 온전히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맹점의 그늘이 깊다. 

 

 

실험의 3가지 사례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건 '균등 배분'방식이었다. 즉 자원을 재분배하여 모두에게 기회를 주었을 때 분배는 가장 성공적이었다. 다큐는 이 실험의 성공 사례를 핀란드의 보편 복지에서 찾는다. 

얼마전만 해도 실업 수당 중심의 복지 정책을 펼치던 핀란드는 기본 소득 실험 중이다. 국민 한 명, 한 명의 능력을 고양시키기 위한 기본 소득, 언론 구조 조정으로 실업 중인 무라자씨는 기본 소득 덕택에 재취업에 시달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고자 했던 책 집필을 시작했다. 기본 소득을 받는 처음 몇 달간은 '공짜' 돈을 즐기기도 했지만 곧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을 찾게 되었다며 기본 소득의 의미를 짚는다. 

핀란드는 이런 기본 소득 실험과 함께, 국민의 능력을 고양시키기 위해 무상 교육을 전면 실시한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핀란드로 이민온 한국인 부부, 선행 학습의 필요 여부를 학교 측에 묻자, 학교 측은 당당하게 아이를 가르치는 건 '학교의 몫'이라 답했다며 자신들의 선택을 기뻐한다. 물론 이런 무상 교육과 기본 소득을 위해 핀란드 국민들은 30%~ 80%의 세금이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즉, 세금을 통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 기업인 노키아의 몰락 이후 유럽의 병자라 칭해졌던 시절을 지났던 핀란드, 그걸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청년들의 활력 넘치는 도전이었다. 21살의 오토가 대학을 다니며 현재 두 번 째 스타트업에 도전 중이듯이, 핀란드 전역에서 수 천 개의 스타트 업이 열풍처럼 번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도전'이 가능한 건 바로 세금을 통한 부의 재분배에 기반한 '무상 교육'과 '기본 소득' 실험이다. 

능력은 누구나 다를 수 있다. 그 각자 다른 '능력'이 성공으로 이르게 되는 데는 '운'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큐는 말한다. 그 '운'을 담당해야 하는 건, '하늘'도 아니고, '금수저'도 아니고, 이제는 '사회'여야 한다고. 적어도 젊은이들이 '능력'을 가지고도 좌절하는 사회를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2부작 '운인가 성공인가'가 도달한 결론은 결국 '운을 만들어 주는 사회다. 

by meditator 2018. 11. 19. 16:01

장르물의 본가하면 이젠 누구라도 OCN를 떠올린다. 바로 그 '장르물'이라는 수식어로 오늘날의 OCN이 있도록 만들었던 처음을 만들었던 드라마가 있다. 바로 2010년 '희귀병'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의학과 범죄 수사를 결합한 <신의 퀴즈> 시즌 1이 그것이다. 이즈음이야 의학과 범죄 수사의 결합이 새로울 것도 없지만, 당시만 해도 '법의학 연구소'가, 의사가 수사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은 신선하고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거기에 '희귀병'이라니. 

 

 
그런 취지에 걸맞게 시즌 1은 이런 병도 있었어?라고 할만큼 근이영양증, 포르피린증, 길랭-바레 증후군등 세상의 다양한 희귀 질병을 끌어모아 이 질병을 매개로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10가지 범죄를 다뤄내며 메디컬 수사극의 신기원을 열었다. 

그로부터 2011년, 2012년, 2014년까지 <신의 퀴즈>는 무려 4시즌을 달리며 장수 시리즈가 되었다. 그리고 오랜 공백기 후 2018년 '리부트'되어 11월 5일 화제의 < 손 THE GUEST>의 뒤를 이어 OCN의 수목을 책임지게 되었다. 

반갑다, 한진우!
무엇보다 <신의 퀴즈> 하면, 한진우, 한진우 하면 <신의 퀴즈>라고 연상되듯이, <신의 퀴즈>라는 시즌이 가능하도록 만든 건 바로 류덕환이 분한 초천재 의사 한진우다. 10세에 카이스트에 입학, 로봇 공학을 전공하다 인류 최고의 로봇인(?) 인간을 정복하기 위해 다시 한국 의대에 입학한 천재 의사이다. 그가 촉탁의로 한국 법의관 사무소에 합류하며 시즌은 시작되었다. 

 

 

희귀병을 다룬 메디컬 범죄 수사 드라마, 그런데 정작 주인공인 한진우 자신이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로 지난 시즌들을 이끌었다. 브레티즌이라는 신물질을 실험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과 아들의 친구인 한진우에게 투여했던 시즌2의 사이코패스 정하윤의 아버지, 그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한진우는 엄청난 고통을 받고, 스스로 병을 제어하려다 뇌의 과부하로 인해 이중인격이 되는가 하면 뇌의 절반을 잘라내야 하는 수술의 위기를 겪기도 한다. 시즌 4에서는 극초반 식물인간의 상태로 등장하다 기적적으로 회복하며 활약을 보인다. 그리고 이제 '리부트'의 시작은 시즌 4에서 그를 옭죄었던 음모의 위기에서 벗어나 세상과 인연을 끊은 '자연인' 한진우로 시작된다. 

케이블의 인기 예능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으로 초빙되어 등장한 한진우, 하지만 모양만 자연인이지, 그 예능의 주인공들처럼 자연을 활용한 모습은 커녕, 여전히 그의 오랜 동지이자, 연인인 강형사와 연락을 주고 받는 모습으로 '복귀'에 시동을 건다. 거기에 실제 부검 대신 인공 지능 데이터에 의존하는 '코다스'의 대두로 사무실마저 밀린 채 위기에 봉착한 법의관 사무소에 등장한 의문화 발화 시체에 자꾸 솔깃해지는데. 결국 그는 덥수룩한 수염에 모양새는 영락없는 '자연인'으로 법의관 사무소에 등장하고, 예의 깐족 발랄한 태도에, 자존감 만랩의 천재적 능력을 발휘하여 3개월 촉탁의로 법의관 사무소로 복귀한다. 

시즌 1,2,3,4이끌었던 박재범 작가가 프로듀서로서 총괄하는 대신, 신진 강은선, 김은희 작가가 새로이 집필을 맡은 <신의 퀴즈; 리부트>의 1,2회는 예의 '한진우스러움'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고심한다. 

 

 

<신의 퀴즈>다운, 한진우다운 
법의관 사무소를 뒷방으로 밀어내며 '인공 지능 데이터'에 의존하여 법의학적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코다스'를 새로운 맞수로 등장시키며, 그 팀장인 곽현민(김준한 분)을 내세우며 천재 한진우와 대립각을 세운다. 일찌기 로봇을 연구하다 '인간'으로 돌아선 한진우는 당연히 '수사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해야지'라며 예의 한진우스러운 치기어린 호기로 '코다스'를 말로 찜쪄먹는 한편 , 발화 시체에 대해 '인간 핵폭발'이라는 곽 팀장의 발표에 사체에서 보이는 변색된 부분을 통해 외인으로 인한 발화의 근거를 잡아내며 <신의 퀴즈> 한진우의 진가를 선사하며 시즌의 진정한 개막을 열어보인다. 

또한 법의관 사무소에 갇힌 법의학자가 아니라, 언제나, 아니 시즌 3를 제외하고 호흡을 맞췄던 강형사와 함께 직접 현장을 발로 뛰며 범인으로 추정된 용의자의 집에서 어머니의 두발을 통해 발화 시신의 이식된 신장과 일치함을 밝히는가 하면, 희귀병인 어머니가 복용할 리가 없는 신장 보호제를 통해 유학 심사에서 떨어진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어머니를 이용한 병원의 살인적 신장 이식 수술 과정을 폭로해 낸다. 그 과정에서 한진우의 과학적 관찰력과 천재적 추리력,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발로 뛰는 사건 수사의 과정이 <신의 퀴즈>의 매력을 한껏 살려낸다. 

심지어, 때론 독불장군같고, 때론 안하무인같은 한진우의 대사를 통한 통쾌한 사회 고발과, 아들을 위해 자기 한몸 희생한 어머니와 그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발화 살인'를 기획한 아들의 '신파적 고해'까지 이전 <신의 퀴즈>를 고스란히 빼어 박은 듯 복기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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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한진우' 그리고, 한진우의 아버지같던 장교수님은 안계시지만, 든든한 누님같은 조영실 소장(박준면 분)과 강경희 형사(윤주희 분)의 여전한 파트너쉽이 반가웠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시즌4로 부터 무려 4년 여, 그 시간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여전히 통통 튀기는 한진우도 반가웠지만, 그래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제는 삼십대 중반, 조금은 성숙해진 한진우의 차별화된 모습도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거기에 희귀병을 비롯하여 의학 범죄 수사 드라마에 난무하는 다양한 전문 용어에 대한 '자막' 서비스 등 시즌이 낯설거나 오래돼서 적응이 필요한 시청자들을 위한 전문 장르물의 친절한 정보 서비스도 아쉬웠다. 

1회 1.926%, 2회 2.566%로 모처럼 돌아온 시즌의 첫 술로서는 아직 아쉬운 성과다. 하지만 부디 시즌의 익숙함과 새로운 시도를 적절히 조화하여 다음 시즌을 기대할 수 있는 시리즈가 되길 바란다. 진심으로. 

by meditator 2018. 11. 16. 18:03

시부모님 두 분은 만주에서 만나셨다고 한다. 그곳에서 결혼을 하시고 일가를 이루시고, 해방과 이어진 전쟁의 격변기에서 두 분은 아이들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오셨는데,  시아버님의 형제분은 그곳에 머무르셨고, 시어머님의 동생분들은 고향인 북쪽에 머무르셨다. 그리고 몇 십년 후, 아버님의 동생분, 시숙부님과 그 식솔들은 '조선족'이 되었고, 시어머님은 '이산 가족'이 되었다. 아마도 시아버님이 내려오시지 않았다면, 남편의 일가도 '조선족'이란 이름으로 지칭되었을 것이다. 한반도의 비극적 역사가 품은 '지정학적' 탄생의 슬픈 설화와도 같은 이야기, 하지만 그 '비극'은 현재로 오면 '편견'과 '사회적 문제'로 귀결된다. 그 역사와 현실의 행간에 대해 재중동포인 장률 감독이 '페이소스'짙은 이야기를 건넨다. 


 

사랑, 그 무너져버린 아집의 노래여
시작은 그렇다. 마치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듯 '사랑의 수작', 그 와중에 있는 남자와 여자다. 이른 아침 군산의 터미널, 윤영(박해일 분)과 송현(문소리 분)이 내린다. 이혼을 했다는 선배의 아내 송현에게 다짜고짜 윤영이 군산 행을 제안했던 것, 윤영 때문에 군산까지 왔다며 타박을 하지만 송현도 '이혼'의 잔영이 남은 서울을 떠난 것이 싫지 않은 눈치다. 윤영과 함께라 더더욱. 

그렇게 막 시작하는 연인인 듯한 두 사람은 허르스름한 칼국수 집에서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고, 송현이 먼저 쉬고 싶다며 '민박'을 수소문한다. 그렇게 찾은 민박집, 손님을 가려 받는다는 민박집에 다가선 두 사람을 cctv가 먼저 맞이하고 문이 열린다. 응대하는 건 늙수구레한 남자(정진영 분), 그 남자에게 송현은 대뜸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냐며 반색하고, 윤영은 어쩐지 그 집에 들어서는 뒤가 무겁다. 

아니나 다를까, 민박 집에 들어설 때만 해도 설레이던 커플이었던 두 사람은  민박집 주인 남자의 등장으로 삼각 관계, 아니 노골적인 엇갈림이 시작된다. 방을 하나 더 잡으며 대놓고 윤영에게 거리를 둔 송현은 남자로 인해 상처받은 자신을 치유해 줄 것같다며 민박집 남자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한다. 그런가 하면 송현과의 밀월을 꿈꾸다 상처받은 윤영에게는 cctv의 그림자가 다가서는데. 


 

이 엇갈린 사랑의 계기 중 하나는 '일본'이다. 전라북도 북서부의 중심지인 군산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평야지대의 관문으로 일찌기 고려 말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을 받은 이래, 일제 시대 미곡 반출을 위한 도시로 급성장한 곳이다. 군산에 내리자 마자, '일본같다'며 반색한 송현의 호감은 일본으로 부터 왔다는 교포 민박집 남자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호감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자폐증인 딸을 돌본다는 그의 미담은 '기댈 곳'을 희망하는 윤영의 의지가지할 데 없는 마음을 부풀게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송현의 기대에 대해 윤영이 윤동주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일본이었다는 지적과 함께, 일본스런 군산의 곳곳에 상흔처럼 남겨진 일본 침략의 증거들을 보여준다. 군산의 역사는 의구하지만, 그곳에 관광객처럼 내려온 송현에게 군산은 그녀를 매료시키는 '일본'같은 곳 그 이상이 아니다. 그런 그녀의 부푼 기대 뒤로 무거운 일본어로 고백하는 민박집 남자 아내가 죽음에 이른 사연과, cctv의 주인공이던 민박집 딸(박소담 분)의 외사랑은 결국 '밀월 여행'이던 송현과 윤영의 여행을 '파국'으로 이끈다. 역사로서의 일본과, 일본과 한국의 인연인 민박집 부녀, 그리고 그로 인한 오해의 장벽, 아니 어쩌면 대뜸 일본스럽다며 밑도 끝도 없는 설레임과 호감으로 시작한 섣부른 송현의 군산 여행이 자초한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 '파국'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얽혀있는 '현재형'인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상징한다. 


 

 


군산으로 부터 온 거위 
그렇게 일본과 한국의 '경계'로 등장한 군산, 하지만 그곳은 또 다른 '인연'의 시작이다. 군산 터미널에 내려 익숙해 하던 윤영, 서울로 돌아와 다시 시작되는 '에필로그'이자 어쩌면 '주제'가 되는 이야기가 닿는 지점은 윤영은 왜 군산에 갔을까이다. 

말이 시인이지 시을 쓴 지가 어언 10년, 사업을 하던 아버지에게 용돈이나 타쓰는 허우대 멀쩡한 백수 신세인 윤영, 그러나 그와 아버지는 한 집에 살면서도 '남'이나 다름없는 관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연변에서 일하더 온 도우미에게 대놓고 빨갱이라 욕을 해대고 아직도 해병대 옷을 입고 전우회에 출근하며, 밤이면 그녀의 방 손잡이를 들썩이는 전형적인 '꼰대' 아버지에게 그 누구라고 정을 붙이겠나. 그런 윤영의 마음은 귀가 들리지 않는 아버지의 친구 분께 '돌아가셨다'라는 농 속에 진담처럼 깃든다. 


 

그런 그가 아버지가 마당에서 기르는 거위에게 '영아'라며 말을 건넸다며 '치매'를 걱정하는 도우미의 말을 듣고 아버지가 계시는 전우회에 수박과 참외를 사들고 찾아간다. 그리고 송현과의 밀월을 핑계로 군산을 찾아간다. 

윤영을 영아라고 부르던, 잘 웃으셨다던 어머니의 고향, 군산, 그런데 윤영은 어릴 적 중국인 친구를 둔 아버지 때문에 화교 학교를 다니고, 술이 취해 '거위를 노래하다(咏鹅)를 불러제끼며, 거리에서 연변 동포 시위자의 진위를 대번에 알아볼만큼 '연변'말에 해박하다. 그런가 하면 알고보니 도우미 아주머니의 고향이 윤동주 시인의 고향이었으며 윤동주 시인과 인척 관계라는 사실에 친척이라도 만난 양 반색을 하며 두 손을 잡고, 다니던 치과의 하룻밤을 빌어 저 멀리 윤동주 시비를 지켜본다. 과연 그에게 익숙한 연변어와 친숙한 중국어, 그리고 윤동주 시인에 대한 반가움 이상의 울컥함은 어디로 부터 비롯된 것일까? 군산이 고향이라던 그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을까? 송현이 말하던 윤영의 어중간함은 어디로 부터 비롯된 것일까? 

한중일 식민지 트라우마 
두 남녀의 '사랑의 수작'을 날실로 엮으며, 그로 인해 '주유'하게 되는 군산과 서울을 오가며, 장율 감독은 예의 전작 <춘몽>, <경주>, <이리>처럼 지정학적 공간을 배경으로 그곳에 머무는 인간들의 과거와 현재를 더듬는다. 그리고 그 궁극에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라는 지리적 공간을 배경으로 흩어진 '한민족'의 서로 다른 운명이 빚은 아이러니한 관계를 짚는다. 

윤동주가 작은 할아버지여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살아 오늘날 빨갱이 소리를 들어야 하는 도우미나, 연변 동포 시위에 적극 가담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중국 동포로 착각하는 아줌마에게 참을 길없는 불쾌감을 표명하는 한때 '운동권' 여성, 그리고 그 여성이 무한히 호감을 표명하는 일본스러움과 일본에서 돌아온 재일동포는 2018년에도 지속되는 한중일 관계의 비극성을 드러내 보인다. 


 

왜 우리는 우리를 식민지로 삼은 일본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의적인 반면, 중국이나 중국 동표에게는 '빨갱이'라며 낮잡아 보는 걸까? 6,25전쟁에 참전했떤 역사적 기억 때문일까? 거기엔 유선영 교수가 정의내린 '식민지 트라우마'의 깊은 상흔이 있다. (유선영 지음, <식민지 트라우마>, 2017) 일본이 '서구 열강'의 상징과도 같은 압도적 문명으로 조선을 강타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던 그 압도적 열패감은 이어 일본이 만주로, 중국으로 식민지 전쟁을 확대했을 때 거기서 빚어진 일본에 이은 이등 국민으로서 삼등 혹은 식민지민 중국인을 바라봤던 상대적 우월감, 혹은 민족주의적 히스테리가 유구하게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심지어 여전히 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중국을 호시탐탐 싸구려나 만드는 나라로 얕잡아 보는. 

하지만 그런 우리의 '허위 의식'은 지정학적 조건으로 규정된 얽힌 인연 모두를 '타자'로 만든다. 밤을 도와 비로소 백화의 칼국수 집을 찾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민박집 딸처럼, 혹은 어머니를, 아내를 대놓고 드러내어 그리워하지 못하는 윤영와 그의 아버지처럼, 일본이든, 한국이든, 혹은 중국이든 그 모든 인연을 정착하지 못한 이방인으로 만든다. 

어쩌면 정답은 일찌기 <삼포 가는 길>에서 술집에서 도망쳐 영달이 사준 삼립빵 2개와 달걀 2개를 받고 고향으로 떠났던 그 백화가 백발의 백화(문숙 분)로 어찌어찌 하여 군산 한 귀퉁이에서 일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하며 머무는 곳이 고향이라며 탁배기 잔을 기우는 그 쓸쓸한 정의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마치 유행가 가사의 한 구절처럼. 그러나 우리는 유행가도 아는 그 사실을 떨쳐내지 못한 채 여전히 각자의 가슴에 낙인처럼 떠나온 곳의 이름표를 다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by meditator 2018. 11. 16. 00:28

성인이 된 이후 부모님, 그 중에서도 어머니, 엄마와 '대화'를 해본 적이 있나요? 직장인 평균 부모님께 안부 전화하는 회수 1년에 37통, 한 달 평균 3통, 열흘에 한 통인 셈이다. 아니 횟수만이 문제가 아니다. 통화를 해봐야 3분을 채우기가 버거운 게 현실, 어른이 되어갈 수록, 어른이 되고 나면 점점 더 부모님과의 대화가 어색해지는 상황, mbc스페셜은 부모님, 그 중에서도 언제나 '엄마'의 자리에 머물렀던 엄마를 '한 사람의 인생'의 관점에서 들여다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들여다 보는' 주체는 다름아닌 어느덧 '엄마'가 되어버린 자식이다. 

 

 

시작은 엄마들의 팟 캐스트 방송이다. 45개월, 36개월 고만고만한 아이를 둔 엄마들이 모여 새삼 깨닫게 된 '엄마'를 이야기하며 다큐의 물꼬를 튼다. 김주강 씨는 자신이 아이의 생물학적인 엄마이긴 한데 정말 엄마일까 라는 회의가 든다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워킹맘인 그녀는 아이를 낳기만 했을 뿐 키우는 일은 전적으로 어머님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새삼 드는 생각 우리 엄마는 어떻게 사셨을까. 박경아 씨라고 다르지 않다. 아이게게 해줄 수 있는 반찬이 김과 미역국 뿐이라는 그녀에게 엄마는 '불가능한 존재'처럼 비춰진다. 물론 그 반대도 있다. 박신애씨의 어머니는 다혈질이셨다. 왜 우리 엄마는 맨날 화만 내나 라고 답답해하며 자랐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 시절 엄마는 아빠한테, 그리고 아이들을 키우며 받는 스트레스를 그렇게 푸는 것이셨다. 그러면서 이제 엄마가 된 엄마들은 입을 모은다. 이제 와 엄마에 대해 생각해 보니, 지금 나같았던 엄마는 어떻게 사셨을까? 물어본 적 없는 엄마의 삶이 새삼 궁금하고 애닮다. 

그래도 물어볼 수 있을 때가 좋다. 취미가 가족 촬영인 개그맨 이홍렬 씨, 하지만 정작 어머니를 촬영할 수 없다. 마흔 아홉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기억이 추억 속 카세트 테이프로 그에게 남아있다. 혼자서는 도저히 못듣는다는 테이프 속 어머니는 18번인 오기택의 충청도 아줌마를 부르신다. 그리고 돌아가실 즈음 남기신 말, '엄마가 죽어도 마음 약하게 먹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야 돼', 이제 어머니보다 훌쩍 더 나이를 먹은 아들은 닿지않을 답을 한다. '엄마 나 꿋꿋하게 살았지?'

 

 

엄마와의 인터뷰 -엄마 이전에 여자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엄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딸들이 출동했다. 어느덧 엄마처럼 네 아이를 둔 워킹맘이 된 개그우먼 김지선씨, 남편이 정말 친엄마가 맞냐고 할 정도로 무심한 엄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엄마를 찾는다. 

가난한 남편과 결혼하여 네 아이를 두고, 보험 설계사 일을 하느라 늘 바빴던 엄마, 그래서 김지선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자기 실내화를 빠는 건 물론, 소풍 때 김밥도 스스로 싸서 갔다. 그래서 혼자 자랐다고 생각했다. 라면과 김밥과 설렁탕이 싫어질 정도로 무엇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허기를 때우며 낮밤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셔야 했단다.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숨가쁜 날들, 돌아와 밥도 못먹고 자는 막내가 마음이 아펐던 시절, 그렇게 돈을 벌어야 했던 엄마는 자식들이 무얼 좋아하는 지도 모르고 살아온 그 시절이 안타깝다. 스물 다섯 살에 홀로 된 어머니 슬하에서 아버지가 안계시니 다른 얘들보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썼고, 독한 시집살이에 가난한 집안 살림을 책임지느라 자식들을 보듬어 줄 수 없었던 것이 이제야 딸에게 전해진다. 그 힘들게 살아왔던 날들, 그래도 엄마는 다시 태어나면 기꺼이 지선의 엄마가 다시 되시겠다고 두말 않고 답하신다. 

정아영 씨의 어머님과 아버님이 하시는 가게는 아영씨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별명을 따서 '아땡이네'다. 10년전 분식을 여신 어머니는 이제 50을 넘겨 중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나와 미용 기술을 배워 미장원에 다니던 중, 착해보이던 29의 아빠를 만나 25의 나이에 결혼을 했다. 앙금빵에 우유를 먹으며 통장을 건네주며 한 청혼, 그렇게 만난 신랑과 신부는 아이를 낳고 키우기 위해 자신들이 하던 미용사 일과 그림 그리던 일을 접었다. 그리고 다시 한 여름날 튀김 기름과 씨름하며 삶의 최전선에 계신다. 분식집 주방의 엄마에게서 그 시절 예뻤던 여자 사람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아버지는 고운 손을 지키고 싶었다지만 엄마의 손을 주방일에 거칠어 진 지 오래다.

최규자 씨의 어머님 유한순 씨는 살아가느라 무심해진 딸에게 엄마는 잘있다. 아무 일없다며 먼저 전화를 하시곤 한다. 그렇게 적극적인 어머니는 7순이 넘은 나이에 한글을 배우신다. 알파벳도 배우셨다. 

 

 

'다라이 공장 억순이, 농약 공장 똑순이', 어머니가 쓰신 시에서 어머니가 정의내란 당신이시다. 학교 들어가던 해 전쟁이 나 한글을 배울 기회를 놓쳤고, 오빠와 동생들 뒷바라지에, 결혼하고서는 굳이 글을 안배워도 철 따라 씨뿌리고 거두는 농사 일을 하느라 배울 기회가 없던 어머니, 이제는 틈만 나면 책상으로 달려가 숙제도 하고, 일기도 쓰시는 어머니, 딸은 그런 어머니의 학구열이 새삼스럽고 경이롭다. 저렇게 공부를 좋아하는 분이셨나?

그렇게 배움의 기회를 놓친 어머니가 글을 몰라 제일 서러웠던 기억은 대학에 입학한 아들에게 등록금을 부치러 우체국에 갔던 일, 창구에 써진 글을 몰라 이리저리 헤맸던 기억이 아직도 아프게 남아있다. 하지만 정작 어머니에게 가장 아픈 상처는 자신보다 먼저 둘째 딸을 떠나보낸 일, 끓어오르는 슬픔을 동물의 울부짖음처럼  토해내던 어머니는 그 딸이 다니던 교회의 성경을 며칠 만에 필사를 해내며 그리움을 달래셨다. 그럼에도 딸이 하나 밖에 없어 서운치 않냐는 큰 딸의 말에 어머니는 행여나 딸이 서운할까 생각해 봤자 내 마음만 아프다며 다독이신다. 

다큐는 이제는 엄마가 된 딸을 인터뷰어로 내세워, 이제는 엄마를 한 여자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또 다른 여자 사람 딸의 시선으로 어머니의 삶을 그려내고자 한다. 평범했지만 엄마로 살아냈기에 찬란했던 그 삶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반추한다. 태어나기는 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며 '여자', 그리고 '엄마'가 되었던 분, 이제야 딸은 말한다. 엄마만큼만 했으면 좋겠어. 다시 태어나면 내 엄마가 아니라, 내가 엄마가 되어 엄마를 돌봐줄게. 

by meditator 2018. 11. 13. 05:16

<sbs스페셜>은 창사 특집으로 야심차게 2018년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문제를 다룬다. 바로 운인가 능력인가라는 화두를 통한 '공정성 경쟁'이 그것이다. 

다큐의 시작은 어렵사리 카메라 앞에 선 지난 촛불의 마중물이 된 이대 여학생의 비리 제보이다. 김수경(27) 씨를 통해 우리 사회는 그저 엄마를 잘 둔 덕에 이대 학생이 되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국가 대표에 메달까지 딴 적폐의 상징이 된 정유라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말, 말, 말,  '능력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부터, '이대 딱 한번 갔다. 학점은 나도 의아해'에서, '누가 이대를 가고 싶댔나'로 '청년'들은 공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로 이 시대 청년들이 가장 고통받는 '아킬레스 건'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가고, 그런데 다시 또 죽어라 공부해서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 현실에,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요즘 청년들 말 대로 '뼈를 때렸다'. 

 

 

공정성의 딜레마 
그래서 창사 특집으로 <sbs스페셜>은 바로 이 청년들의 분노, 그 근원이 된 '공정성'을 헤집어 본다. 그리고 그걸 위해 최근 우리 사회 문제가 되었던 정규직 전환 문제를 다룬다. 

상시, 지속 비정규직을 정규직을 전환하겠다는 지난 대선의 문재인 후보의 공약, 이는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고,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되도록 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공약에 따라 일선 학교와 각 공사들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였다. 서울 교통공사 역시 지난 3월 무기 계약직을 대거 정규직으로 전환하였다. 그런데 그 '환영 받던 공약'의 결과는 달랐다. 

역차별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1250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된 교통 공사, 그곳에 다니는 정규직 김성희(31)씨는 억울함을 호소한다. 고시촌에서 2년 동안 세상과 담을 쌓은 채 노력했던 시간, 그 시간을 통해 얻은 능력이 부정당하는 것같다는 억울함. 자신이 '노오력'을 해서 얻은 결실을 누군가는 쉽게 얻는 것같다는 울화통에 '홧병'이 날 지경이다. 

김성희 씨만이 아니다. 중소기업을 다니며 어렵사리 주경야독을 하며 공채를 통해 정직원이 된 자신의 노력이 허무하고, 심지어 배신감을 느낀다고 토로한다. 이런 교통 공사 정직원들의 억울함은 결국 김민철 씨 등에 의한 헌법 소원과 행정 소송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내세우는 건 '공정성'이다. 자신들은 노력을 통해 금메달만큼 값진 사원증을 목에 걸었는데, 왜 누군가는 거기에 '무임승차'를 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분노한다. '시험'이라도 치라며 과정의 공정성을 요구한다. 

이런 절차 상의, 과정 상의 공정성의 문제는 뜻밖에도 12년만에 복직한 ktx 해고 승무원들에게 까지 불똥이 튄다. 이들의 복직 기사에는 청년들의 불만이 폭주한다. 떼를 쓰면 복직이 되는구나'라는 비아냥이 가득하다. '다시 시험을 치라'며 야유한다. 

그런데 그 '비아냥'과 분노의 대상이 된 사람들도 억울하긴 마찬가지다. 교통 공사의 정규직 전환에는 2016년에 벌어진 구의역 사고라는 계기가 있다. 구의역 지하철 9-4 승차장에서 끼니로 준비한 컵라면도 먹지 못한 채 스크린 도어 수리를 하다 진 꽃과 같은 김군, 그처럼 억울한 죽음이 다시 없게 하기 위해 그처럼 스크린 도어 안전 관리를 하던 외주 용역업체 직원이던 박창수(30)씨는 정직원이 되었다.

하청업체에서 최저 임금보다 못한 임금과 대우에서의 불이익을 받던 창수씨는 정직원이 된 이후 책임감이 한층 더해졌다고 답한다. 그의 말처럼 용역업체 비정규직들의 전환 이후 사고가 줄었다. 그러나, 창수 씨의 마음은 어쩐지 불편하다. 주변의 시선이 따갑다. 12년만에 복직하는 ktx 해고 승무원 오미선(39)씨 역시 자신들의 복직을 떼를 써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항변한다. 12년전 시험을 치고 인턴 근무를 하고 1년 후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는 약속이 비로소 지켜진 것이라 항변한다. 

결국 선의에서 비롯된 정규직 전환과, 해고자 복직은 우리 사회 을 vs. 을의 불편한 동거를 낳았다. 

 

 

시험은 공정한 것인가?
이 불편한 동거의 문제를 풀기 위해 다큐는 최후 통첩 게임을 예를 든다. 무작위로 뽑힌 사람들, 그들을 다시 제안자와 응답자로 나눈다. 그리고 제안자에게 주어진 10만원, 제안자는 임의대로 이를 응답자와 나눈다. 

첫 번째 과정, 대부분의 제안자들은 5만원씩 공평하게 나눈다. 제안자들은 그게 안전하고 공평하다 입을 모은다. 이어서 단 5분간의 공공기관 입사 시험 문제로 치룬 시험을 거친 후 다시 재개된 과정, 그런데 시험 결과 성적 순으로 나뉘어진 제안자와 응답자 그룹의 배분율이 달라진다. 줄어든 응답자의 몫, 제안자도 응답자로 이런 불평등한 배분이 공정한 것이라 입을 모은다. 

그러나 다큐는 반문한다. 겨우 5분의 시험만으로 달라지는 '시험'이 공정한 것이냐고. 즉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공정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혹은 역차별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청년들이 내세우는 '시험'을 통한 자격이라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의 무용론을 설득하기 위해 우리 사회 시험의 역사를 논한다. 한국 전쟁 이후 각자의 노력으로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장치로서 등장한 시험, 그 시험은 한국 사회에서 '출세와 보상의 공정한 장치로 자리 잡아 왔다. 더구나 고도 성장기 평균 이상의 제너럴 리스트를 배출해야 하는 산업 사회에서 '시험'은 그 중요성이 더해만 갔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이다. 노량진 고시촌에서 7년째 공시에 매달리는 33살 박승현씨처럼, 너도 나도 시험에 몰려드는 사람들은 많은데 합격율은 낮아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패배자'가 된다는 것이다. 수능 시험자의 3/4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공시에 매달리는 현실, 1.8 %만이 합격 통지서를 받아든 결과는 점점 더 청년들을 무한 노력 경쟁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고 다큐는 말한다. 

더구나 그런 가운데 공기업이나 대기업에서는 그 촘촘하다는 그물 사이로 채용 비리가 빈번하게 벌어진다. 그래서 등장한 국가직무 능력 표준인 NCS, 업무 능력과 연관이 있는지 의심되는, 핀란드 대학생들이 '바보 같다는 시험'을 우리의 청년들은 50분에 50문항을 풀어 내야 한다.  시험의 문제를 또 다른 시험으로 풀어내는 악순환이다. 

<sbs스페셜>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규직 전환과 관련된 역차별, 공정성의 문제를 그 공정성의 잣대가 된 '시험'이 능력있는 사람을 뽑는가라는 근원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풀어내고자 했다. 



시험이 문제가 아니다. 
우선 질문을 던지고 싶다. 자신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채'를 통과한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치룬 '시험'이 무용한 것이고, 시대착오적인 것이니 당신들이 주장하는 '공정성'은 의미가 없습니다 라고 한다면 어떨까? 저 많은 시간을 시험에 '허비'하는 청춘들이 그들이 파고드는 그 '시험'이 업무와 관련되어 유용하다 믿어서일까? 왜 우리 사회에서 사시 존폐와 관련된 반발과, 입시와 관련되어 수능 절대주의가 등장하는 것일까? 과연 이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사시나 수능이 '좋아서'일까?

아니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라는 대중적 믿음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험을 통과해야 그나마 우리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살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절박감이다. 과연 이런 절박한 동앗줄을 선뜻 누구와 나누겠다는 사람이 쉽겠는가. 이 시대 청년들이 매달리는 시험은 그 어설픈 '최후 통첩 게임의 5분간의 시험'이 아니다. 

다큐의 초반에 등장한 정유라, 남들은 다 시험쳐서 가는 '수능'을 부모 덕에 무임 승차했다. 수능도 그런 세상이다. 최근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공사 정규직 전환 사례에서도 보여지듯이 교통 공사 정규직 전환자 중 108명이 재직자의 자녀, 배우자, 친인척이라는 현실이 말하는 건 무엇일까? 과연 이런 상황에서 다큐에서 예로 든 뉴욕 메츠에 이력서를 검토하고 면접으로 수시로 직원을 채용하는 과정의 공정성을 우리 사회가 담보해 낼 수 있을까? 이른바 수능의 보완책으로 마련된 갖가지 수시 요강들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잘 활용하는 계층이 누구일까? 왜 사람들이 그래도 '시험'이 공정하다는 자기 포기적 반응의 속내가 무엇인지 다큐는 한번쯤 헤아려보기라도 한 것인지. 

문제는 '능력에 걸맞는 다른 시험의 형태'가 아니다. 공시을 통해 정규직이 된 사람들이 내세운 억울함의 촛점은  그들의 '시간'과 '노력'이다. 그런 그들에게 당신들이 친 시험이 잘못된 것이니, 양보하라 하면 yes라 할 수 있을까? 즉, 다큐가 내세운 문제 제기 공정성의 문제, 그 사례로 든 공사의 정규직 전환과 관련된 역차별 문제와 후반부에 해법으로 내세운 시험의 시대착오적 무용론은 서로 다른 범주의 이야기다. 즉, 입시 상담을 받으러 온 학생에게 흡사 선생이 과연 니가 대학을 갈 필요가 있을까 라는 원론적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산업 사회적 프레임의 시험 제도와 시스템은 문제가 많다. 하지만 그것과 최근 우리 사회에서 청춘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역차별, 공정성의 문제는 다른 이야기다. 그들은 '시험'을 말하고 있지만, '시험'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 그리고 그에 반해 지극히 좁은 문 사이에서 아귀 지옥을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집단적 반발이다. 그런 청춘들의 고통에 대한 '원론적은 시험 무용론'은 안이하다 못해 비겁하다. 

 

by meditator 2018. 11. 12. 14:44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르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영화를 개봉한 줄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르는, 늘 그래왔지만, 점점 더 모르게 되는 홍상수의 신작 영화 <풀잎들>이 10월 25일 개봉했다. 

 

 

잔잔한 바람에도 열심히 흔들리는 카페 앞 고무 대야 안의 풀잎들, 그렇게 시작되는 영화는 대번에 시를 기억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김수영의 <풀>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골목 안 커피집이 있을 것같은 않은 곳에 자리잡은 커피집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 그리고 거기에 더해 그 근처 식당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우는 풀, 풀잎들 딱이다. 

홍상수도 늙고, 그의 페르소나도 늙고- 단풍
한참 때 통영에서 날리던 노배우(기주봉 분)는 이제 함께 극단을 하던 대표와도 틀어지고, 한 채 있던 집마저 팔아 써버리고 여자 후배에게 방 한 칸을 적선하는 처지이다. 말로는 월세는 내겠다지만 어째 그 말조차 미덥지 않다. 한때는 흠모했을 지 존경했을 지 모를 선배 앞에서 원칙이라 어쩔 수 없다며 나즈막하면서도 완강하게 거절하는 후배, 
그리고 역시나 후배인 듯한 소설가에게 함께 제주도에 내려가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고 청을 넣는 한때는 연극인이었으나 이젠 글을 쓰겠다는 늙수구레한 남자(정진영 분)의 추파인지 청탁인지 모를 말 역시. 글은 혼자 쓰는 거라는 거절에 부딪친다. 

 

 

유지태였고, 김태우였고, 유준상이었으며, 이선균이었던 홍상수의 페르소나들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이제 기주봉이고, 정진영이 되었다. 여자만 보면 어떻게 해보려는 그 예의 습관성 바람은 방식과 방법은 달라졌어도 여전히 그 본성을 놓치지 않는 듯 보이지만, 한때는 잘 나가는 대학 교수였고, 영화 감독이던 그들은 어느덧 현업에서 밀려나고 멀어진 본의아닌 '은퇴자'들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북촌인지 서촌인지, 늘 홍상수의 영화 속에서 배경이 되던 여전히 한옥이 배경이 되는 그곳은 <풀잎들>에서도 여전하다. 오가던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는 인연으로 혹은 한 술집에서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합석을 하고, 술을 나누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방식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때는 그 밤새도록 '연애'를 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며 공회전을 해도 언젠가는 돌아갈 '현장'이 있던 그들과 달리, 이젠 굳이 불러주는 곳이 없는 감독의 페르소나들 때문일까, 어쩐지 동네조차도 삶의 현장에서 멀어진 '노인정'같다. 그 사이에서 미래를 기약하며 한복을 빌려입고 사진을 찍으며 낭랑하게 웃는 젊음들이 불협화음처럼.

그건 비단 홍 감독이 나이가 들어서, 그의 페르소나들이 나이가 든 사람들이어서만은 아니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기세 좋게 청룡 영화상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고, 이어 1998년 < 강원도의 힘>으로 감독상을 거머쥐며 90년대 문화의 대표 주자로 등장했을 그 시절, 홍상수라는 사람의 화법이 통하던 그 시절은 그 '바람'같은, 표리부동한 비도덕적인 인간들이나마 그래도 세상에 발 디밀어 살아갈 여지가 있던 시절이다. 그들이 밤 새워 논하고 어울리던 그 허황되고 공허하던 문화라던가, 인간이라던가, 사랑이던가 하는 것들이 그래도 감독의 비아냥을 받으며 삶의 한 자리로 '포용'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이십여년, 그 바람같던 주인공이 되어버린 감독 자신이 영화 개봉 소식조차 세상에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개인적 사정은 그렇다치고, 거기에 더해 어쩌면 그보다 더 그가 영화를 통해 말해왔던 것들이 '자본'의 세계가 되어버린 영화, 혹은 문화라는 이름의 '상품'의 세계에서 '별책 부록'은 커녕, '잡담꺼리'조차 되어지지 않는 처지 때문일까, 그 어느 때보다 <풀잎들>의 공간은 '멈춰진 세상', 혹은 '방기된 세상'처럼 '무위'롭다. 그런데 그 '무위'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기력하게 전해진다. 

 

 

그리고, 그럼에도 아직 살아가야 할 풀잎들 
그렇게 여전히 살던 근거지 통영을 떠나 서울 하늘 아래 한 몸 뉘일 곳을 찾으며 삶의 터전을 마련하려 한다던가, 무기력한 삶에 여자와 글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 한다던가 하는 풀잎이고 싶지만 어느덧 삶의 잎사귀가 말라가는 '단풍'들의 맞은 편에, 진짜 풀잎들이 있다. 

통영에서 온 노년의 배우와 후배의 대화를, 그리고 까페 밖에서의 글 좀 써보겠다는 한때 연극 배우 선후배를 대놓고 엿듯던 여성(김민희 분), 한때 연극배우인 신참 작가의 같이 제주도에 내려가 펜션을 빌려 글을 함께 쓰자는 노골적인 추파인지, 모호한 수작에 대번에 거절을 하고 애인인 듯한 남자를 따라 나선다. 

하지만 그녀가 따라나선 것은 남동생(신석호 분), 한 식당에서 남동생과 미래를 함께 하고 싶은 여성(한재이 분)과 상견례 아닌 상견레로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런데, 미래의 동생댁이 될 지도 모를 그녀에게 대놓고 남동생을 믿냐, 사랑을 믿냐며 어깃장을 놓는다. 

그런가 하면 그런 그녀의 뒤편에서는 얼마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여성(이유영 분)이 그 사랑하는 이의 동료로 부터 애도와 추궁을 오가는 수모를 겪는다. 그녀를 폄하하는 그 남자 앞에서 하염없이 울며 '사랑'을 고백해야 하는 여성은 영화 속을 떠나, 실제로 홍상수의 영화 중 유일하게 해피엔딩이었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을 통해 만났던 김주혁과 이유영의 사랑을 '배려'해주는 자리와도 같았다. 저 세상으로 흩어져 버린 사랑, 떠나간 사람의 존재가 커서, 떠나보낸 사람은 설 자리조차 없는 세상에, 감독은 사랑했던 이들을 위한 '추모'의 한 씬을 보탠다. 

 

 

그리고 해가 저물어 다시 돌아온 까페, 역시나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두 남녀(안재홍, 공민정 분)가 그 절박한 감정을 지나 연민으로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을 조롱하고 엿듣기만 하던 여성은 커피 한 잔을 넘어 숨겨온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하는  '단풍'들과 그 후배들의 자리에 합석한다. 결국 우리 옛말처럼 간 사람은 간 거고, 삶은 여전히 다시 이어지는 것이다. 엿듣던 여성이 결국은 죽을 것이라고 비아냥대도, 살아가는 이들은 여전히 그 삶의, 인연의 끈을 이어가게 마련이다. 여전히 까페 앞엔 풀잎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따지고 보면, 단풍이래도, 내일 떨어진다 해도, 풀잎은 풀잎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어느덧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90년대의 파릇파릇하던 풀잎이 이제 단풍이 되어가도록 묵묵히 그 세대를 끈질기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고 찬사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사실화처럼 나이가 들어도 제 버릇 개 못주는, 그런데 심지어 이제는 삶의 굴레에서조차 밀려나버린 그 세대를 그대로 그려낸다. 그리고 때로는 얽히고, 때로는 엇갈리며 아직은 눕기에 이른 젊은 풀잎들 또한  놓치지 않는다. 김수영이 그렸던, 아니 '역사 속 민초'라 해석됐던 그의 시 속 풀잎은 아니지만, 여기 또 바람에 연신 나부대는 풀잎들이 있다.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만화경이다. 



by meditator 2018. 11. 12.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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