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억이라는 엄청난 제작비와 김명민, 유안인 등 쟁쟁한 출연진으로 화제를 모은바 있는 <육룡이 나르샤(이하 육룡)>는 변함없는 월화 드라마의 강자이다. 하지만, 시청률 1위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막상 시청률로 보면 13.5%(닐슨 코리아 기준)로 제작비와 출연진 대비 궁색한 실적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그에 반해<육룡>에 비해 조촐한 규모와 덜 화려한 (?) 출연진으로 시작한 <화려한 유혹>은 10회 9.6%(닐슨 코리아 기준)로 비록 1위 수성을 하지 못했지만 꾸준한 2위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대에 미치지 못한 <육룡>이 연출과 번잡한 전개로 호불호가 갈리는 반면, <화려한 유혹>은 2위에도 불구하고 나무랄데 없는 연출과 출연진의 호연으로 칭찬이 마를 날이 없다. 입지가 좁은 1위와 여유로운 2위의 현실이다. 




'욕망'을 향해 달리지만 '사랑'에 걸려 넘어지는 군상들
칭찬이 자자한 <화려한 유혹>, 작가가 <황금 무지개>, <메이퀸>의 작가 손영목으로, <화려한 유혹> 역시 mbc 주말 드라마였던 앞의 두 드라마의 얼개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부모 대의 얽힌 악연이 그 자식대에까지 이르러 영향을 미치고, 그 악연의 시작인 '욕망'은 대를 이어 서로의 관계를 일그러지게 만들면서 사건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듯, <화려한 유혹>은 현재 정치의 막후 실권자로 자리매김한 강석현(정진영 분)이란 인물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그가 정치 인생에 족적으로 남긴 그림자는 그의 자식들 일도, 일란, 그리고 배다른 자식 일주, 강석현의 보자좐이었다가 강석현의 불법 자금의 죄를 뒤집어 쓴 채 스스로 목숨을 거둔 진정기의 아들 진형우, 그리고 진정기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폐인처럼 살다 죽은 운전기사 신기사(정인기 분)의 딸 은수에게 그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당연히 통속극답게 이야기는 '복수'로 부터 시작된다. 남편의 의문사와 자신에게 까지 드리워진 전과자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편의 무죄를 밝히고자 강석현의 집에 들어간 은수,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강석현에게서 찾고 그의 가노가 되어 호시탐탐 '전복'의 기회를 노리는 형우는 <화려한 유혹>속 갈등의 엔진이 된다. 그리고 그 엔진의 추동 맞은 편에, 노회한 강석현과, 아버지의 후광 아래 자신의 욕망을 향해 달리는 그의 아들 일도와 딸 일주가 있다. 상위 1%의 정계 집안과, 그 집안의 궤멸을 향해 움직이는 또 다른 '복수'의 열망이 여느 통속극처럼 드라마를 끌어간다. 

그리고 빠짐없이 '사랑'도 추가된다. '동화'처럼 시작되어 '잔혹 동화'로 끝장난 은수와 형우, 거기에 얽힌 일주의 어린 시절의 사랑, 그리고 이제 강석현 집에서 은수를 만난 형우가 매몰차게 은수를 몰아붙이지만, 그녀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듯이, 그리고 그런 형우를 보며 어린 시절 은수에게 저지른 짓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던 일주가 하루 아침에 안면을 바꾸듯, '욕망'을 향해 달려야 하는 그들은 저마다의 '사랑'에 걸려 넘어지기 시작하면서 <화려한 유혹>의 재미는 배가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서 사랑의 백미는 강석현의 사랑이다. 여느 통속극의 부도덕한 과거를 가진 어른의 세대의 대표적 인물인 강석현은 이제 치매끼가 있는 그가 은수를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청미로 오인하여 애닮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이루지 못한 과거의 회한어린 사랑을 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정계의 실력자였던 처가의 후원을 등에 업고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 하던 강석현, 비서였던 청미, 그녀를 사랑하게 된 강석현은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리고자 하였다. 또한 그가 그때 버리고자 했던 것은 그저 사랑만이 아니었다. 정치에서 성공하고자 자신이 배웠던 바를 독재 정권을 위해 '곡학아세(曲學阿世)했던 부도덕한 자신의 정치 생활을 버리고자 했던 도덕적 결단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사랑했던 여인도, 자신의 신념도 지키지 못한 채 여와 야를 오가며 정치의 배후 실권자로 살아남았고, 이제 그에게는 심장이 아픈 상흔으로 그 기억이 남게지게 되었다. 

그렇게 끝까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부모 세대의 대변자인 여타 통속극과 달리, 이전 자신의 행위와 사랑에 대한 회한을 가진 강석현, 그리고 그것을 공감되게 연기하는 정진영의 존재로 말미암아, <화려한 유혹>은 여느 통속극의 궤도를 벗어난다. 이미 <메이퀸>과 <황금 무지개>를 통해 개발 독재 시대를 생존해 왔던 부모 세대의 전사를 서사적으로 펼친 바 있던 손영목 작가의 내공이, 정진영이란 배우를 통해 본래의 의도대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통속극에서 통속 심리극으로의 진화 
거기에, '욕망'을 향해 달려야 하면서도 '사랑'으로 인해 궤도 이탈을 하는 젊은 세대의 갈등, 그리고 그들에 대항한 또 다른 욕망의 포진이, 여느 통속극들이 '막장식'의 사건으로 극을 풀어가는 것과 달리, <화려한 유혹>도 형우에 대한 피습, 은수의 납치, 일주에 대한 폭력 등 여전한 막장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전개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과 사건의 사이에 개연성있는 인물들의 심리 전개와 갈등을 충분히 집어넘음으로써, '심리극'으로서 진화한다. 덕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욕망'과 '사랑'으로 인해 각 인물은 선과 악 그 어느 편으로 섣부르게 폄하할 수 없는 저마다 개연성있는 인간으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11월 3일 10회 마지막, 강석현과 식당에서 단 둘이 앉아 청미인 척 했던 은수를 목격한 일주가, 다음 날 은수를 강석현의 치매를 빌미로 돈을 뜯어내려는 파렴치범으로 모는 장면, 은수를 둘러 싼 강석현과 형우 모자, 그리고 은수의 통장의 돈을 확인하기 까지, 등장인물들 사이에 숨막히는 긴장감과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인물들의 심리가 변화되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진화된 통속심리극으로서의 <화려한 유혹>의 면모를 드러낸다. 

통속극의 묘미는 인간의 민낯을 드러내는 친숙한 그 지점에 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통속극들은 인간의 민낯이란 미명 하에, 욕망의 점철로 이어지고 섣부른 권선징악의 주제 아래, 막장식의 전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화려한 유혹>이 현재까지 보인 성취는 주목할 만 하다. 똑같은 이야기도 어떤 그릇에 담아, 어떤 시선에서 어떻게 요리하는가에 따라, 진짜 인간의 민낯을 제대로 드러내며 섣부른 권선징악 대신, 인간의 한계와 회한, 반성을 담아낼 수 있는 가를 <화려한 유혹>은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부디 이 실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뻔한 통속극의 진화가 이루어 지기를. 
by meditator 2015. 11. 4. 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