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표절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신경숙 작가는 2008년 <엄마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지하철에서 놓쳐버린 치매끼 있는 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 희생해온 모성에 대한 애도와 헌사가 작품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작품은 아버지 세대에 대한 헌사를 다루었던 <국제시장>처럼 당대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심지어 외국에 번역까지 되어 한국의 대표적 문학 작품으로 알려졌다. 


<국제 시장>의 아버지, 그리고 <엄마를 부탁해>의 어머니가 여전히 환호와 칭송을 받는 것은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며 이 시대를 뒷받침해온 부성과 모성에의 경의이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 이런 작품들이 여전히 당대의 '베스트 셀러'가 되는 것에 당혹감을 주는 것은, 그 세대가 결과한 현재에 대한 반성 없음에 대한 아쉬움과,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부성'과, '모성'이 존재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현실감때문이기도 하다. <국제 시장>을 경유하여, <가시 고기>로 좌초한 '부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여전히 내려지지 않은 채, 모성 역시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엄마를 부탁해>를 쉬이 넘어서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8월 21일 밤 조용히 찾아온 단막극 한 편에, 이 시대에 새롭게 생각해 볼 '모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다. 



우리 시대의 모성이란?
<알젠타를 찾아서>는 자신의 키보다 몇 배자 더 긴 장대를 들고 질주하는  장대높이 뛰기 선수 승희(이수경 분)의 땀방울과 좌절로 시작된다. 대한 체대 4학년, 눈부신 우승 성적과 기록을 뒤로 하고 대학에 들어온 오래 승희는 한번도 좋은 성과를 거둔 적이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학교 때부터 수술을 받기 시작한 그녀의 무릎은 운동선수로서의 그녀의 앞길을 막는다. 육상 연맹의 간부인 아버지는 압박하고, 그저 장대높이 뛰기만을 하며 줄기차게 달려왔던 그녀에겐 운동 이외의 삶은 생소하고 멀게만 느껴진다. 다시 한번 좋은 성적으로 국가 대표가 되고자 하는 승희, 하지만 그녀의 몸과 기록은 그것을 받쳐주지 못하고, 결국 금지된 약물에의 유혹까지 받는다. 

승희가 은밀하게 약물까지 거래하려던 것을 알아챈 아버지, 자신이라도 나서서 딸의 코치가 되겠다던 아버지는 한때 한국 육상계의 스타였고, 세계 무대에서 활약했던 강진아가 시청 코치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승희를 그녀에게 맡기고자 한다. 그 이유는 바로 강진아가 승희를 낳은 엄마이기 때문이다. 

강진아를 찾아간 아버지는 그저 엄마이기 때문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매몰차게 거절하는 강진아에게, 승희가 약물에 손을 대려 했다는 사실을 전하며 매달린다. 마지 못해 승희를 받아들인 코치, 그리고 사실은 엄마 강진아. 

<알젠타를 찾아서>의 친엄마 강진아는 한 마디로 '나쁜 년'이다. 국가 대표 유망주였던 그녀가 자신의 코치였던 승희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까지 하자 더 이상 국내에선 선수로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강진아는 한 살 배기 승희 대신, 자신의 운동을 택했다. 자신이 죽었다고 하라며 어거지로 어린 딸을 지금의 승희 의붓 엄마인 팀 후배에게 맡기고 강진아는 외국 행을 택한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엄마와는 전혀 다른 삶으로서의 엄마이다. 어떻게 어린 딸을 버리냐는 후배의 말에 강진아는 말한다. 이렇게 승희의 엄마로서 한국에 주저앉아 버린다면, 평생 지금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살 것이라고. 강진아는 그래서 후회하는 삶대신, 딸을 버리더라도,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극중 제목으로 등장한 알젠타는 600만년 전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던 전설적인 새 아르젠타비스 마그니피센스를 뜻한다. 키가 2미터 양쪽 날개 끝까지까지의 길이가 8키터에 달하는 이 새는 몸이 너무 무거워 스스로 하늘을 날지 못해, 행글라이더처럼 언덕을 달려 바람을 이용해 하늘을 날았다고 전한다. 그 전설적인 새 아르젠타비스는, <알젠타를 찾아서>의 극중 어린 딸로 인해 육상 선수로 재도약할 수 없는 엄마 강진아를 상징한다. 그래서 엄마 강진아는 자신의 무거운 날개인 어린 딸을 버리는 것으로 도약에 성공한다. 극중 엄마가 가진 날개, 그리고 딸에게 남겨진 새의 목걸이는 '성공'을 위해 분리된 '모녀' 사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드라마는 자식마저 버린 나쁜 엄마 강진아를 그저 나쁜 엄마 대신,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한 엄마 이전에 한 사람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국가 대표가 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운동 선수 승희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결국 이해한다. 극중 강진아는 심장 판막이 다 망가져 수술 시기를 놓친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딸을 보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올 용기를 낸 것으로 그려진다. 비록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가 승희에게 남긴 상자에서 보여지듯이 한시도 딸 승희를 잊지 않았음 또한 보여준다. 그리고 엄마 강진아는 자신을 희생하여 딸을 기르는 대신, 이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 슬럼프에 빠진 승희에게 길을 제시하고 떠난다. 

비록 아이를 '케어'하지 않지만, 결국 아이가 스스로 설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는 엄마, 그것은 그간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지향해온 모성상에 전적으로 위배된다. 오히려 <알젠타를 찾아서>의 엄마는 우리가 보았던 서구 영화의 아버지 상에 더 부합된다. 아이를 돌보지는 않았지만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부성, 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변화된 모성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나날이 증가되어 가는 일하는 엄마들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제시할 수 있는 방향일 수도 있다. 더 이상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자신을 희생하며 살 수 없는 엄마들의 세대, 그 엄마들에게 여전히 <엄마를 부탁해>가 모성의 이상향으로 그려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케어는 할수 없지만, 삶의 본보기와 가능성을 열어주는 새로운 모성상으로서의 <알젠타를 찾아서>의 엄마 강진아가 비록 극단적이지만, 이 시대 생각해볼 모성상의 가능성이다. 그런 면에서 <알젠타>를 찾아서는 그저 승희의 인간 승리가 아니라, 이 시대 새로운 모성상의 구현에서 생각해 볼 만한 드라마가 되었다. 
by meditator 2015. 8. 22. 1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