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조선 건국의 개략적 설명에 '사대주의'란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당시 줄긋기를 즐겨하시던 역사 선생님은 사대주의에 줄을 그으라 하시며, 그냥 사대주의가 아니라, 실리적 사대주의라 부연 설명을 덧붙이셨다. 하지만 역사 인식의 폭이 단순하던 그 시절, 사대주의면 사대주의지, 실리적 사대주의라는 단어가 가진 이율배반성에 대해 고등학생들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몇 십년이 흘러, <정도전>은 그 시절에 밑줄 그어진 사대주의의 속내를 공들여 설명해준다. 

고려 말에서 조선 건국의 과정을 그려내는 대하드라마 <정도전>은 이제 드디어 이성계의 회군이라는 사건에 이르렀다. 드라마는 '회군'이라는 군사적 사건을 그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위한 야심의 일환이 아니라, 여말의 혼란기에 명분과 실리라는 정치적 입장을 둘러싼 세력간의 팽팽한 정치적 입장 차이로 설명해 내고자 한다. 

귀족 우두머리이자, 실질적인 고려의 실권자였던 이인임을 부정부패의 주구로 척결해낸 최영과 이성계의 연합 세력은 새로이 북방의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명나라에 대한 입장으로 의견을 달리한다. 

(사진; tv리포트)

철령 이북의 고려 지역을 넘보는 명나라에 대해 최영은 명분을 우선시한다. 이제 막 입지를 확보해 가는 명나라를 얕잡아 본 최영은 무장답게, 고려의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요동 지역 정벌을 주창하며, 고려를 황제국으로 격상시킬 것을 선포한다. 그런 그의 결정은, 모처럼 이인임 등의 세력을 척결하고 고려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고 만다. 노회한 무장의 마지막 욕심이 자신은 물론, 한 나라의 운명을 달리하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해 이성계와 유림 세력은 입장을 달리한다. 이제 막 중원의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명나라와의 싸움은 국력이 고갈된 고려에 있어서 곧 그 나라의 운명을 종식시킬 수도 있는 위기로 바라본 것이다. 최영의 명분은 그럴 듯하지만, 현실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군량미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요동 정벌은 무모한 시도라 본 것이다. 물론 명을 정신적 어버이로 가진 유림 세력의 한계를 짚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쇠잔해 가는 고려의 절박한 상황을 더 부각시키며, 그것을 고민하는 젊은 신진 사대부의 고뇌와, 백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이성계를 부각시킨다. 

이러한 최영과 이성계, 유림의 대립은, 언제나 강대국들 사이에서 국가적 위기를 겪어 온 한반도의 역사에선 시사적이다. 
광해군의 실리 외교를 배제한 채 명분에만 몰두하여 결국 병자호란을 일으킨 인조 시대의 무능한 외교 정책을 떠올려 보면, 시대를 달리하여 건국 시기의 조선과 그후 몇 백년이 흘러 오히려 여말 최영과도 같은 그 후손의 무모한 선택의 다른 길이 더욱 선명하게 대비된다.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명분은 그 저간의 사정이 배제된 그 문구로 보면 훌륭하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이인임 등의 핍박으로 왕실 곳간조차 채우기 힘들 정도가 된 고려 말의 그 명분은 허세에 불과하다. 그것은 21세기에도 강경 일변도의 외교 정책으로, 스스로 입지를 축소해 가는 현재의 정세를 비추어 보아도 교훈은 여전하다. 

드라마 속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역성 혁명은 그의 대의라 강권한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인임이 끝내 그를 믿지 못했던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갈등하는 고려의 신하로 그려진다. 정도전에게 자신에게 욕망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며 토로했던 이성계에게 대의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단언했던 정도전의 정의를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역사는 위화도로 간 이성계의 발목을 자연 재해와 역병으로 발목을 잡는 것처럼 그려낸다. 

역사를 온갖 우연적 요소의 집합체로 설명해 낸 슈테판 츠바이크의 주장처럼, 하늘이 뚫린 것처럼 쉬지 않고 내리는 비, 그로 인한 군졸들의 탈영과 역질, 그리고 군량미 부족은 이성계에게 천명을 설득한다. 그리하여,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 그저 누군가의 욕망과 야심으로 인한 획책이 아니라, 불가피한 그 시대적 결론인 것으로써 그려내고자 드라마는 고심한다. 수많은 우연의 사건 들속에서 결국은 그 실체를 드러내고야 마는  필연적인 역사이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 누군가의 야심이나 야망의 집합체가 아니라, 불가피한 역사적 결론이었음을 설명해 내기에 고심한다. 


by meditator 2014. 3. 31. 0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