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본의 아닌 언택트한 삶이 이어지는 상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적 혼란'을 불러온다고 한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여러 가지 일들, 그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평소와는 다르게 이끌어 낸다. 아마도 미래의 누군가가 이 시대를 '우울의 시대'라 정의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없이 마음이 가라앉고, 그로 인해 행동마저 위축되는 증상,  '코로나'가 사라지면 없어질까? 어쩌면 코로나 그 이전, 이미 우리의 삶으로 부터 '우울'은 배태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 남편과 주변으로 부터 '정신병리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낙인찍힌, 그래서 정신병동으로 강제 이송될 위기에 처한 한 여성으로 부터 그 답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바로 <어디갔어 버나뎃>의 버나뎃 폭스이다. 


 

사회 부적응 주부 버나뎃 
한적한 시카고의 교외 주택가, 정갈하게 손질된  단독 주택들이 이어진 이곳에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블랙베리 덩굴을 뒤집어 쓴 집 한 채가 있다. 옆 집에 사는 오드리가 정원사를 앞세우고 찾아와 이 덩굴을 쳐낼 것을 요구하는 처지에 몰린 이 집에는 버나뎃 폭스(케이트 블란쳇 분)가 그의 남편 빌리(빌리 크루덥 분),  딸 비(엠마 넬슨 분)와  함께 살고 있다. 

버나뎃 폭스가 '문제 인물'로 취급당하는 건 집을 손보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다. 마치 반사회적 인격 장애라도 가진 것처럼 이웃은 물론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그녀, 교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딸이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 사회에서 그녀는 '은둔형 외톨이'이다. 그런데 그저 '은둔'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하교하는 딸을 데리러 간 버나뎃의 과격한 행동이 동네 주민의 '가해자'로 '소문'의 주인공이 되게 만든다. 

'소문'을 불평할 것도 아니다. 오드리 등을 비롯하여 주변 엄마들을 '각다귀'라 부르며 '적대적'으로 대하다 못해 '각다귀' 운운하는 플랜카드까지 내건 버다뎃의 태도는 충분히 주변 사람은 물론, 남편에게 조차 쉽게 이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게 온라인 비서 '만줄라'에만 의지해 극단적으로 세상과 '단절'을 적극적으로 해왔던 버나뎃, 그런 그녀의 삶에 '변화'가 들이닥쳤다.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 이 집을 떠나 기숙학교로 갈 딸이 졸업 기념으로 엄마, 아빠와 함께 남극 여행을 제안한다. 바쁜 남편이 거절하기를 원했지만 하나 밖에 없는 딸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할 수 없었던 남편이 얼버무리고, 결국 결정된 가족 남극 여행은 그 자체로 자신을 '사회'로 부터 격리시킨 버나뎃에게는 '멘붕'이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가같은 블랙 베리 덩굴 지지대를 잃은 버나뎃 쪽의 언덕이 폭우에 한참 학부모 모임으로 들썩이던 오드리네 집으로 쏟아져 내렸다. 

거기다 그간 버나뎃이 유일하게 의지해 왔던 온라인 비서 만줄라가 러시아를 기지로 한 국제 범죄 집단이라며 FBI가 들이닥치자 안그래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버나뎃과 관련한 '사건'들을 전해들으며 우려가 깊어졌던 남편 빌리는 이제 버나뎃에게 정신과 강제 입원 같은 조치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FBI,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대신 정신과 치료진을 앞세운 남편, 버나뎃은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그런데 버나뎃이 사라졌다. 하늘로 솟은 듯, 땅으로 꺼진 듯 버나뎃의 자취가 없어졌다. 버나뎃은 어디로 간 것일까? 


 

사라진 버나뎃 
드러난 사건 자체로만 보면 사회 부적응에 우울증이 심해 '자살' 우려가 있는 주부의 실종이지만, 그 속내에는 '좌절한 건축가이자, 독박 육아로 지친 주부' 버나뎃이 있다. 

지금은 흉물같은 시애틀 교외의 집에 사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사람과의 접촉을 꺼리는 이상한 사람이지만, 한때 버나뎃은 이미 20대의 나이에 건축계의 아이콘이 되었던 천재적인 건축가였다. 그녀가 건축한 집이 곧 '이슈'가 되었던 시절, 그래서 당대 내노라하는 중견의 남성 건축가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젊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야심찼던 젊은 건축가 버나뎃의 열정은 그녀가 건축한 집이 단 몇 달 만에 '철거'되는 '사건'과 함께 주저앉아 버렸다. 

남편과 함께 LA를 떠나 시애틀로 삶의 근거지를 옮겨온 버나뎃, 하지만 새로운 곳에서 건축가로 새로이 시작해보려 하기도 전에 그녀의 삶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고 싶었던 버나뎃, 하지만 거듭된 몇 번의 유산, 겨우 태어난 아기는 생사조차 불투명했다. 자신의 일은 전폐하고 오로지 아이를 키우는데만 전력하는 과정에서 성공을 거두느라 가정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떤 남편과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그렇게 안팎으로 상처를 받은 버나뎃이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단절'이었다. 하나 뿐인 딸 '비'에게는 세상 둘도 없는 엄마였지만, 딸을 제외한 모두에게 버나뎃은 '철벽'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시간은 동시에 불면과 불안과의 싸움이었다. 


 

버나뎃, 자신을 넘다 
서점에 가면  '우울'을 주제로 한 서적들이 넘쳐난다. 안그래도 집단에서 고립된 원자화된 개인의 우울이 20세기의 대표적인 병리 현상이었는데, 코로나 팬데믹은 그런 사회적 경향성에 '가속 패달'을 밟았다. 우울증이라 대변되는 '불면'과 '불안'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대표적  '방어 기제'이다. <어디갔어 버나뎃>은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상실감에 빠진 한 여성의 상황으로 우리 사회 보편의 '아픔'을 길어낸다. 

하지만, 영화는 그 아픔에 천착하는 대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말하듯 버나뎃의 인생 역전을 통해 아픔을 승화시킨다. 우연히 식당에서 예전 동료를 만났던 버나뎃, 그 동료에게 두서없이 그리고 장황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하자, 동료는 명쾌하게 '진단'을 내렸다. '버나뎃, 너는 다시 건축을 해야 해. 너같은 예술가가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니 당연히 고통스럽지.'

그렇다면 사라진 버나뎃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저 처음에는 정신 병원 입원이라는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버나뎃, 딸과의 약속했던 남극 여행선에 우선 몸을 싣는다. 사람과 부딪치기조차 힘든 버나뎃에게 심지어 해류에 따라 요동치는 남극행 여행선은 그 자체로 '지옥행'이었다. 

하지만, 토해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다시피 했던 배의 창문을 통해 그녀의 눈에 띈 남극의 빙산, 그 순백의 세계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끌리듯 다가선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게 된 남극 연구원을 통해 전해들은 '남극 기지 재건축'의 소식이 오랫동안 침잠했던 건축가로서의 버나뎃을 깨운다. 

오랫동안 버나뎃이 외면해 왔던 건 건축가로서의 정체성이었다. 자신의 실패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한 발자국도 나설 자신이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연속되는 유산은 그녀에게 자존감마저 앗아가 버렸다. 오로지 아이를 지킨다는 맹목적인 모성만으로 버텨왔던 버나뎃, 자신을 괴롭히는 정신병적 징후조차도 외면했던 버나뎃이 남극의 빙산 앞에서 비로소 '자신'을 직면한다. 

뉴욕 타임즈 84주 연속 베스트 셀러를 차지했던 마리아 샘플의 동명의 원작은 영화와 달리 편지, 이메일, 문자 메시지, FBI서류로 구성된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이 색다른 구성의 원작을 <비포 선 라이즈> 시리즈와 <보이 후드>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버나뎃이라는 여성 캐릭터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물론 건축가로서의 좌절과 모성으로서의 상처를 '사회 부적응'에 우울증 주부로, 그리고 다시 건축가로서의 열정을 되살려낸 인간 승리의 '강약'을 매력적으로 표현해 내는데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배우의 역할이 지배적이다. 

남극 바다에서 대번에 자신의 열정을 되살렸다는 상황은 '코미디'라는 장르에도 불구하고 '우연적'이거나, '작위적'이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거기서 '방점'이 찍혀야 하는 건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나 자신'이라는 지점이다. 영화는 그런 '나와의 직면'을 위해 남극이라는 장치를 보다 드라마틱하게 활용하며 보는 이들에게 스스로 자신을 가둔 울타리를 벗어나라 독려한다.  

by meditator 2020. 10. 12. 0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