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홍상수의 영화를 봐온 건 아니지만  2000년대부터 거의 빠짐없이 홍상수의 영화와 함께 시간을 흘러왔다. 그런 그가 만든 2019년작 <강변 호텔>은 그렇게 홍상수의 영화와 함께 시간을 보내온 관객에겐 색다른 감회를 줄만한 영화일 것이다. 김상중과 이선균과 유준상 등에서  어느덧 권해효, 정진영, 기주봉으로 감독의 페르소나가 변화되어져 가는 시간조차 흘러 어느덧 그 '영원할 것 같던 치기'의 시절조차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는 시간의 엄정함에 말이다. 

 

 

호텔의 노시인, 아버지, 그리고 
영화의 시작은 겨울 풍경이 스산하기 이를데 없는 한강 주변의 호텔이다. '노인네'인 주인공은 아들의 전화를 받고 주섬주섬 자신이 벗어놓았던 양말과 바지를 추스려 입는다. 아버지의 방으로 찾아오겠다는 아들을 굳이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 할 만큼 아버지는 안다. 막상 그 방 안에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추레한 가를. 

모처럼의 호출, 호텔 커피숍에서 이루어진 부자들간의 해후는 쉽지 않다. 방에 핸드폰을 두고 나와 서로 다른 자리에 앉은 아버지와 두 아들은 같은 공간에서도 쉬이 조우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이 엇갈려온 시간처럼. 

아들을 기다리다 잠이 들었던 아버지는 밖으로 나와 호텔 주변을 거닐다 강변에 서있는 두 여성을 발견한다. 잠깐 사이에 내린 눈으로 다른 세상으로 변해버린 그 눈 속에 서있는 두 여성에게 다가간  '시인'이라는 노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찬사를 다하는데. 

그리고 다시 돌아와 발견한 두 아들에게 노시인은 뜬금없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두 아들을 불렀다는 생뚱맞은 유언의 현장 분위기를 조성한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사이라지만 새삼스레 이름을 풀어주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던 이 부자들의 사이의 속내는 얼른 보내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과 달리 늦은 시각 주변 음식점에서 이루어진 거나한 막걸리 잔의 순배 속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아내와 두 아이를 남겨두고 '바람'이 나서 집을 떠나버린 아버지, 그 아내의 정의로는 '인간적으로 가치가 1도 없다'는 아버지, 그래도 나이가 들어가는 아들들은 '아버지'라며 아버지의 호출에 응할 수 있는 넉넉함을 가지는 연배가 되었다. 물론 이혼을 했다는 소식도 전하지 않는 처지이며, 아버지 때문인지 본인의 경험때문인지 결혼에 대한 회의를 달리할 생각은 없지만.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아들들에 대한 미안함, 책임감 대신 자신이 살아왔던 삶에 대한 소신으로 대신한다. 결혼과 자식들에 대한 책임감 대신, 굴레 대신 '자유'를 택했다는, 그 소신으로 택했던 사람과의 시간 역시 결국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으로 족하다는 아버지. 

 

 

제 버릇 개 못준다는 홍상수의 인생론 
어쩐지 죽음을 예감하고 아들들을 불러 한번 보고 싶었던 아버지인 남자는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해묵은 회한 대신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예우로 찾아와준 아들들보다, 당장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두 여인에 '미혹'된다. 심지어 아들들을 빨리 보내고 싶을 만큼. 그리고 결국은 아들들을 내버려 두고 두 여인에게 다가가 시인지, 끄적거림인지, 묘사인지 모를 글자들을 늘어놓구 그녀들의 '환심'을 얻으며 함께 자리를 하는 목적을 달성한다. 그녀들이 강변 호텔을 서성이던 그때부터 내내 줄곧 그의 마음을 집요하게 사로잡았던 그 '욕망'의 성취이다. 

영화는 결국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르기는 커녕, 죽는 날까지 가장은 둘째치고, 아버지로서의 존재보다, 숫컷으로서의 욕망이 우선하고 열중했던 한 남자의 생애를 '관조'한다. 일찌기 아내의 정의처럼 사람 고쳐쓸 수 없다더니, 제 버릇 개 못주고 죽는 날까지 그가 평생 그래왔던 것처럼 '여자 주변을 추근거리다' 생을 마감한다. 그래도 사람이 죽는 순간에는 자기 삶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홍상수 감독은 그럴 여지의 싹을 잘라버린다. 자기 세대인지, 아니면 남성일반인지, 그도 아니면 '인간 일반'인지, 저렇게 살다 죽는 게 인간이란다.  묘하게도 바로 그런 죽음의 순간까지 '변하지않는', 아니 '변하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을 감독이 통쾌하게 '관철'하고 나니 뜻밖에 거기서 하나의 철학이 탄생한다. 

물론 그 맞은 편의 철학도 감독은 놓치지 않는다. 두 여성, 송선미와 김민희가 분한 관계에서 상흔을 입은 두 여성은 끊임없이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며 그 상흔을 보다듬고 부연 설명하고자 애쓴다. 아니 어쩌면 노시인의 뻔뻔한 자기 변명이나, 두 여성의 마치 상처입은 개가 자기 상처를 핥듯 애처로운 자기애나 결국은 '인간'이란 종족이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자존'의 다른 표현일 지도.  가장 본능적이고, 혹은 '관계 중심적'이라 하면서도 결국은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자기 포장적 속성까지 하얀 눈으로 포장된 세상과 달리 인간들의 모습을 나신처럼 드러낸다. 마치 원효가 해골의 물을 마시고 저잣거리로 나가 득도하듯, 홍상수는 충실하게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 그걸 변명하지 않고 줄기차게 말해오다 보니 어느 덧 '통찰력 넘치는 득도'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며 차세대 유망주 감독으로 등장하고, <극장전>, <오 , 수정>,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통해 당대성의 한 축을 대변하는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인간, 그 중에서도 남자의, 특히 지식인 남자의 위선을 까발리고 '도덕'의 포장을 벗겨낸 본능에서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던 모습을 그려내며 권위에 도전했던 젊은 감독은 25년을 바라보는 시간 동안 줄기차게 그 '가감없는 남자'의 모습에 천착해 왔다. 날카로운 비판자였다가, 집요한 스토리텔러였다가, 어느덧 달관한 담론자가 되어버린 홍상수와 그의 영화, 되돌아 보면 언제나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솔직했고, 언제나 주류인 적은 없었지만, 심지어 최근엔 그의 사생활과 겹쳐 더더욱 '아싸'를 넘어 '부도덕'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지만, 하지만 자신의 아들들 앞에서 뻔뻔하게 자신은 자유롭게 살아왔다고 강변하는 노시인처럼, 홍상수와 그의 영화는 '도덕'이 기승을 부릴 수록 '부도덕'이 범람하는 2019년이기에 더더욱 그 단단한 솔직함이 서늘하게까지 느껴지는 삶의 '촌철살인'이다. 

by meditator 2019. 3. 31. 1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