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천명>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된 인종을 끝까지 향초를 이용해 독살하려던 대왕대비 문정왕후의 시도는 최원과 다인의 기지로 밝혀져, 결국 왕 앞에서 목숨을 구걸해야 했고, 자신의 아비가 최원을 죽였다 하여 그를 사랑했지만 그의 곁을 떠나려 했던 다인은 최원과 결실을 맺고 최원과 함께 백성들의 병을 돌보며 행복하게 살았다. 어떤 한 점의 의혹도 없는 말끔한 해피엔딩이었다.

하지만,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명쾌한 엔딩을 보면 씁쓰레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에서는 문정왕후의 최후의 독살시도조차 막아내고 승리를 거둔 인종의 재위 기간이 단 8개월에 불과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사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이덕일의 <조선 왕 독살 사건>을 비롯한 책에서는 인종의 죽음을 문정왕후에 의한 독살로 결론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명>의 엔딩은 딜레마에 빠진다. 드라마 상에서는 문정왕후의 단말마같은 독살 시도를 막아낸 것으로 그려졌지만, 조선의 '서태후'라는 별명을 얻은 문정왕후가 과연 거기서 멈췄을까? 또 하나, 그런 문정왕후가 뻔히 궁궐에 살아있는 걸 알면서도, 그런 위험 요소가 옆에 있는 걸 알면서도, 다인과 최원은 백성들을 위해 의술을 펼치겠다고 궁궐 밖을 나오다니! 지금까지 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깝지 않게 여기던 두 사람의 행보치곤 너무 비논리적이지 않나? 결국 독살로 죽을 지도 모를 왕을 놔두다니, 이건 최원의 성격 상 '직무유기'라 느낄 거 같은데?

 

(사진; tv리포트)

 

언제나, 역사적 사실과 거기에 기초한 드라마에는 상상력과 허구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마치 역사가가 역사를 자신만의 잣대로 해석하듯,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 또한 또 한 사람의 역사가가 되어 역사를 해석해야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가능한 한 사실에 위배되지 않게 사실을 해석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이번 주 종영한 <장옥정, 사랑에 살다(이하 장옥정)>가 끝난 후 주연 배우들은 인터뷰를 통해 악녀로 그려진 장희빈과 무기력하기만 한 숙종을 재해석했다는 것으로 <장옥정>의 의의를 설파했지만, 그 드라마가 장옥정과 숙종을 복원하기 위해, 또 다른 인물들을 왜곡하고 폄하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일본의 역사관이 끊임없이 문제가 되는 핵심은 바로 그들 자신이 2차 대전의 패전국이었다는 피해자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핍박을 가했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은 채,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에, 역사는 왜곡되고, 그 속에서 피해자들은 지속적을 상처입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천명>은 중종 연간 말기와 인종 연간 초기의 정치 세력의 격돌이라는 밑그림에,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의 독살 시도라는 야사의 주장, 그리고 거기에 왕을 지키려는 내의원 의원과 의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합집산이라는 상상력을 얹은 작품이다.

실제로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등을 보면, 드라마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세자를 죽이려던 문정왕후가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 아니게 그려져 있다. 자기 주변의 측근에만 의지하고, 자객을 부리는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 낮은 수준의 악당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드라마 <천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자 죽음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문정왕후를 그려 내고 있다. 게다가 단순하게도 이 드라마를 끌고가는 역동적 동인이 오직 이거 하나다. 최원이 하나의 미션을 '클리어'하면, 왕후가 또 하나의 시도를 하고, 그걸 해결하면, 또 사건을 벌이고. 그러다 보니, 20부작의 드라마가 단순해져 버렸다. 언제 어떤 회차를 봐도, 디테일은 달라도 흐름은 똑같다. 등장인물들은 언제나 똑같은 표정으로 비슷한 대사를 친다. 최원은 위기에 빠졌고, 다인은 그런 최원이 안타깝고 그런 식이다. 게다가 결국 드라마가 미션을 부여하는 문정왕후와 그것을 해결하는 최원 세력의 대결로 되다보니, 당연히 어떤 불운의 그림자도 없는 착한 편의 화려한 승리로 마무리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8개월 후에 인종이 죽고, 그의 세력이 '을사사화'를 통해 모조리 제거가 되건 말건.

 

 

(사진; 헤럴드 경제)

 

과연 <천명>을 통해 제작진이 그리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지막 회, 다인과 최원이 함께 복창을 하듯, 백성을 인술을 펼치는 휴머니스트 의원 최원의 이야기였을까? 그도 아니면 <추노>에 버금가는 도망자 버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딸을 위해서는 궁궐도, 도적들의 산채도, 감옥도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이었을까? 하지만 이 궁금증은 마지막 회에 가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비록 처음엔 거절했지만, 위험에 빠진 것을 알고는 그토록 목숨을 걸고 왕을 구하려 하던 최원이 뜬금없이 백성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논리도 이해가 되지 않고. 죽음에 이을 때까지 천하의 임꺽정에서 금부도사까지 무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며 화려한 무술 씬을 장황하게 선보이다 죽음에 이른 문정왕후 무사의 존재감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장옥정>으로 돌아가서, <장옥정> 제작진 측은 장희빈의 재해석이라고 주장했지만, 드라마를 통해서 보여진 것은 <해를 품은 달>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어설픈 시도였던 것처럼, <천명>에서 진하게 드리워진 , 조선판 도망자의 원래 버전 <추노>의 영광을 재현하려던 무리수였다.

차라리, 도망자 버전 내의원이라는 어설픈 흉내를 내지 않고, 내의원이라는 캐릭터에 어울리는 버전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다면 어땠을까? 결국은 역사에서 패배자가 될 인종과 그의 세력들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위해, 문정왕후와 인종의 대결을 사악한 마녀와 순한 피해자의 대결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서 오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운을 남겼다면 어땠을까? 시작할 때의 <천명>은 충분히 '봉황'을 그릴듯이 보였다. 하지만, 충분히 감동적이고 풍부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납작하게 만들어 단순하게 마무리 해버린 <천명>이 그린 것은 '참새'인 듯 하여 아쉽다.

by meditator 2013. 6. 28. 09:54

8회에 이른 <천명>은 시청률 조사 기관과 지역에 따라, 아슬아슬하게 동시간대 1위이거나, 1위를 놓친 성적을 보인다. 하지만 수치상으로만 보면, 아직 10%를 밑도는 시청률은 1위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천명>이란 드라마가 품은 욕심에 비하면 보잘 것없다 하겠다. 더구나, 기사로는 연일 여자 주인공 송지효의 배신이 부각되지만, 실제 드라마를 보면, 홍다인의 이중첩자 역할이 극중에서 그다지 부각되거나 극의 흐름 상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도 않으니, 기사에 낚여 본 사람들은 십중팔구 '에이, 시시해~' 하기가 십상일 언론플레이만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쯤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운명에 빠진 세자(임슬옹)에 대해서라든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의술을 펼치는 최원(이동욱)에 대해 왈가왈부가 좀 나와줘야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의도적인 기획사의 기사이거나, jyj의 준수가 부른 ost말고는 화제성이 없으니, 제작진 입장에서는 답답할 만도 하다.

 

 

첩첩산중의 사건들, 어찌 풀어낼꼬

드라마 <천명>에서 가장 두드러진 스토리는 내의원 민도생의 살해와 그 용의자로 도망자의 신분이 된 최원의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 뒤에는 대비인 문정왕후와, 그의 소생이 아닌 오랜 기간 세자 신분으로 아픈 중종을 대신해 정사를 돌보고 있는 이호의 대립이 있다. 여기에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겠다는 직접적 욕망이 두드러지지만, 그 이면에는 후에 인종이 될 이호를 옹립하는 대윤과 문정왕후의 아들을 옹립하고자 하는 소윤의 외척간의 갈등, 나아가 을사사화의 원인이 되는 권신내부의 권력 독점에 대한 쟁투가 깔려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문정왕후를 전제적 권력을 휘두르는 악녀처럼 묘사하면서, 자신의 핏줄로 대를 이으려는 전형적인 왕가의 세습을 둘러싼 갈등으로 하나의 축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에 반해, 후에 인종이 될 이호를 조광조 이래 끊임없이 정권에 도전하다 희생된 아직은 재야 세력에 불과한 사람 세력의 일원이라는 개혁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으로 캐릭터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이렇게 내의원 살해 사건의 실질적 배경은 권력 혹은 왕좌를 쟁취하기 위한 쟁탈전이다. 거기에 최원은 엄한 희생양이 된 것이고, 희생양에 걸맞게 아픈 딸이 있다는 비극적 요소가 강화된 사연이 덧붙여진 것이다.

그러기에 <천명>이 재미있기 위해서는, 궁중 내부의 권력 쟁투와, 최원의 도망, 혹은 의술, 그리고 사연이 평형이 된 시소처럼 팽팽하게 진행되어야만 드라마의 제목처럼 <천명>의 주제가 살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천명>은 마치 손님을 초대해 놓고 요리 경험이 없는 요리사가 할 수 있는 모든 요리를 준비한 것처럼, 저렇게 복잡한 구도에다가, 임꺽정이 몸담고 있는 흑석골 도적패의 이야기를 덧붓이고, 궁녀 홍다인의 개인사에, 최원과 홍다인, 그리고 흑석골의 소백의 삼각관계 까지 얹었다. 어디 그뿐인가 양념처럼 이정환의 무대뽀 캐릭터에 최원 동생과의 로맨스까지. 아니다. <허준> 뺨치게 극적인 최원의 의술 깜짝 쇼도 종종 빼먹지 않고 등장한다. 정치에, 궁중 암투, 의학, 로맨스, 추격까지, 사극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천명>에서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마치 부페에 가서 이것저것 잔뜩 집어 먹었는데 헛배가 부르고 뭘 먹었는지 모르겠는 것처럼 70여분 동안 한 바퀴 휭~ 돌면서 많은 일이 일어났음에도 보고 나면 뭘 봤는지 모르겠다. 기사에선 송지효가 이중첩자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지도 모르겠고, 세자는 손을 부들거리며 고뇌하는데, 그 고뇌가 다가오지도 않는다. 심지어 최원은 번번히 사건의 중심에 서는데, 뭐 어찌 또 도망가겠지 싶다.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걷고 만 <뿌리깊은 나무> 와 <천명>

여기서 뜬금없지만 <뿌리깊은 나무>란 드라마를 거들떠보자.

이 드라마에서도 <천명>처럼 권력을 둘러싸 심오한 담론도 있고, 권력 내부의 암투도, 거기에 배경이 되는 재야 세력의 도전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추격씬도 만만치 않았고, 러브 스토리도 빠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뿌리깊은 나무>가 <천명>과 전혀 다르게 시청자들의 열광적 지지를 얻었던 것은 <추노>를 통해 연기력 하나는 인정받은 장혁 보차도 연기를 못해보이게 할 만큼, '우라질!' 욕설 한 마디로 압도해 버린 세종 역할의 한석규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적할 만해 보이는 정기준 역의 윤제문이 있었다. 사실 <뿌리깊은 나무>가 말하고자 했던 담론은 상당한 사상적 지식을 요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 배우들의 연기는 기본적으로 이 드라마를 끌고가는 기본적 주제를 충실히 전달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천명>의 한계는 안타깝게도 욕심껏 내지른 스토리를 끌고나갈 힘있는 배우들이 없다는데 있다. <천명>이란 드라마을 시청하다보면, 가장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이 김유빈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눈밑까지 시커멏고, 얼굴을 누르끼기한 아이가 잘 보이겠다고 이정환(송종호)의 신발을 닦아주는데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 그런데 어쩌랴, 유빈이가 주인공이 아니니.

<천명>이란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부각된 주인공은 최원이지만, 실질적으로 이 드라마를 뒷받치고 갈 사람은 세자 이호이다. 이호는 끊임없이 도망을 치고 드러나는 의술로써 드라마를 이끌어 가지만, 세자는 자신의 신념과 왕권 사이에서 고통받는 젊은 개혁가의 모습을 그려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임슬옹의 연기는 노력은 가상하나 수준인 것이다.

(제발 부탁하건대, 세자의 클로즈 업을 자제해 주셨으면, '나 연기해요'라는 임슬옹의 연기를 보느라 손발이 남아나질 않으니까)

주인공 최원도, 세자 이호도, 모두 연기를 못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시청자들을 설득시키고 감동시킬 내공은 없다는데 한계를 드러낸다. 적어도 두 사람 중 한 사람만이라도, 특히나, 세자의 경우, 조금 더 내공있는 배우가 문정왕후 와의 팽팽한 기싸움을 벌였다면 아마도 <천명>이 조금 더 재밌지 않을까 라며 자꾸 드라마를 보면서 욕심을 내게 만든다.

그나저나 풀어놓은 이야기 보따리는 산더미에, 배우들 연기는 그럭저럭이니, <천명>이야 말로 1등을 해도 등두릴 여유는 없어 보인다.

by meditator 2013. 5. 17. 10:26

수목 드라마 kbs2의 <천명>과 mbc의 <남자가 사랑할 때>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청률 1등을 다툰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두 작품 모두, 겨우 10%대이거나, 10%에 못미치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 요즘 시대의 화두가 '아버지'라고, 그래서 아픈 딸 '랑이'를 위해 감옥을 탈주하고, 또 그 딸을 살리기 위해 딸을 놔두고 돌아서야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아역 김유빈의 연기와 맞물려 충분히 이목을 끌어낼 수 있는데, 어쩐 일인지 <천명>의 반응은 영 거북이 걸음과 같다. 그런데 막상 <천명>을 보고 있노라면 거북이 뒷걸음질 같은 시청률이 종종 이해가 간다. 아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니까.

 

최원이 추노의 대길이였어?

방영하기 전부터 '조선판 도망자'라고 흐드드하게 알렸듯이, 4회에 접어든 <천명>의 주인공 최원(이동욱 분)은 도망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최원의 도망자 내공은 무술 실력이 출중한 조선의 추노꾼 대길이 저리가라잖아! 저 사람 헐랭한 내의원 의관 아니었어?

게다가 최원은 동료 의원 민도생(최필립 분)의 살해 혐의를 받고 의정부 앞 마당에서 갖은 추국을 받던 죄인이었다. 조선시대 추국이 어떤 것이었나? 실제 많은 추국 당사자들이 그 과정에서 형장에 이르지도 못한 채 추국의 고통 그 자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종종 있던 바로 그 무시무시한 고문 아니었나 말이다. 도망을 가는 최원의 옷 허벅지 부분이 피에 물들어 있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드라마 상에서 최원은 '주리틀기'를 당한 것으로 나온다. 주리틀기는 다리를 묶어 놓고 그 방향과 반대로 힘을 주는 것으로 심할 경우에는 다리뼈가 으스러진다는 무시무시한 고신 방법인 것이다. 심지어 나중에 의금부 도사 이정환이 증명해 주듯 감옥에 갇힌 최원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여 먹은 것이 없다는데, 제 아무리 딸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갑자기 도망자 신분이 되자, 능력치가 너무 올라가 보이니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씁쓸해 보인달까. 심지어 조금 전에 물에 빠져 죽어가던 최원이 금세 도망간 길을 순식간에 역주행해서, 관원들이 오기 전에 딸이 숨어 있던 곳까지 돌아온 모습은 해도 해도 너무 했달까?

최원의 도망 과정은 화려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빼어난 연출로 그림같은 장면을 완성했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개연성에서 접고 들어가서 봐줘야 하니 몰입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문정왕후와 왕세자 사이의 긴장감이 아쉬워

아마도 이 드라마 제목이 천명인 이유 중 하나는 중종의 뒤를 이를 후계자로써의 '천명'이 누구에게 주어져야 하는가라는, 중종의 큰 아들이 왕세자여야 하는가, 당시 조정의 중심 세력이던 문정왕후의 아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가라는 권력 간의 생사가 달린 쟁투를 극의 배경으로 깔고 가기 때문 아닐까.

그리고 지금은 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도망을 다니는 최원이 개인의 목적을 넘어, 왕세자의 구명,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의 왕으로의 등극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극 중에서 왕세자가 왕의 큰 아들이라는 적통으로의 정당성 이상의 존재감이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천명>이란 드라마에서 이미 문정황후나 그 세력의 존재감은 너무나 크다. 반면, 그에 비해 왕세자의 존재는 너무나 미미하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문정 왕후를 연기하는 중견 연기자 박지영과 왕세자 이호를 연기하는 아이돌 출신의 임슬옹의 연기에서 너무나 비교가 된다.

임슬옹의 연기를 발연기라고 낙인 찍을 수는 없지만, 왕후와의 대치씬이나, 최원과의 조우하는 씬에서, 오랜 세월 의붓 모후의 그늘에서 숨죽여 온, 하지만 자신의 사상이 확고한 미래의 젊은 왕을 조금 더 풍부하게 표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이돌을 기용하는 건 상관없지만, 그의 연기력으로 담을 수 없는 배역으로 인해 드라마의 흐름이 깨어지는 건 고스란히 시청자들에 대한 민폐로 남는 것이 아닌지. kbs2 수목 드라마는 지난 번 <아이리스>에서도 같은 실수를 범하더니, 이번에도 똑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장담컨대, 아직 사극에 익숙치 않은 이동욱의 최원이 캐릭터를 잡기 이전에, 왕세자 역의 배우가 조금 더 노련한 연기로 문정왕후와의 대립적 각을 보였다면 지금처럼 <천명>이 10%를 넘지 못하는 시청률로 고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천명>을 버티어 가기에는 취약하다. 문정왕후와 왕세자 간의 권력 투쟁이 좀더 실감나게 다가오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럴 듯한 도망씬으로 시청자의 눈을 호리는 건 <추노>로 족했다. 그리고 되돌아 보면, 추노도 도망씬으로만 시청자를 호린 건 아니었다.

 

한 마디 말 밖에는 하지 않는 단선적 캐릭터들

문정왕후 역의 배우와, 왕세자 역의 배우가 가지는 내공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도 하지만, <천명>이란 드라마가 사건 전개가 빠르고, 도망씬등이 박진감 넘치게 전개 됨에도 불구하고 종종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결정적으로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가 너무 단조롭기 때문이다.

문정왕후는 몹시도 노회하게 나오지만, 줄곧 그녀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왕세자 너는 죽고, 내 아들이 왕위에 올라가야 해'이다. 이건 최원의 '내 딸을 살려야 해'라는 도돌이표 대사랑 똑같다.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홍다인도 다르지 않다. 1,2회에서는 자기랑 별 이해 관계도 없는 최원을 나쁜 놈이람 몰아 붙이더니, 이젠 그가 은인이라며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하겠다고 나선다. 캐릭터의 변화가 아니냐고? 그를 나쁜 놈이라고 몰아 붙일 때나, 목숨을 구하겠다고 나설 때나, 홍다인의 태도는 다르지 않다. 마치 단세포 동물처럼 그거 하나만 생각하며 달린다. 도망자로 달리는 건 최원만이 아니다. 홍다인도 종횡무진 달리기는 마찬가지다.

사건은 장황하지만, 모든 캐릭터들이 등장할 때마다,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문정왕후가 왜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릴려고 하는지, 그녀가 왕세자가 착해보이는데도 그를 꼭 죽이려고 하는지 중간 과정은 없이 물불을 안가리고 왕세자의 죽음을 향해 달리는 건, 홍다인이나 마찬가지다. 최원을 잡으려고 애를 쓰는 이정환(송종호 분)이나, 도망가는 최원이나, 상황만 다를 뿐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목표를 향해 달리는 그 캐릭터에서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사람만 다를뿐.

그나마 그의 속내가 미묘하고 복잡해 보이는 캐릭터는 왕세자이지만, 안타깝게도 배우의 연기력이 캐릭터의 다층성을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천명>을 보다보면 종종 지루해 진다. 사건은 궁금하되, 인물은 궁금하지 않다. 도망가겠지, 구하려고 애쓰겠지, 죽이려고 하겠지 라며 지켜보는 드라마는 매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음에도, 도돌이표처럼 같은 노래만 반복하고 있는 천명이 아쉬운 이유다.

by meditator 2013. 5. 3. 09:44

이게 다 이병훈 감독 때문이다, 라고 해야 할까? 사극에서 '하오체'를 버리고, 현대극과 똑같은 말투를 쓰게 만든게 바로 이병훈 감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뜬금없는 개그 코드도, 주인공 커플의 '로맨틱 코미디'같은 러브씬도 다 이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욕은 이분께 돌아가야 할까? 하지만 '청출어람'이라고, 제 아무리 스승이 '바담 풍'이라 한들, 제자들은 제대로 스승의 뜻을 이해했다면, '바람풍' 했어야 하거늘, 요즘은 제자들이 한 술 더 뜬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고? 바로 새롭게 등장한 퓨전 사극들이야기이다.

 

얼마 전 종영한 이병훈 감독 '마의'에는 싸이의 강남 스타일 중 가사 일부- '낮에는 정숙하지만, 밤에는 놀줄아는 여자'-가 대사로 등장한다. 그러더니, 얼마 전 시작한 <장옥정>은 장희빈을 새롭게 조명하겠다며 그녀를 졸지에 조선판 패션 디자이너로 만들어 버렸다. <마의>때 저 대사는 대사를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라며 화제가 되었지만, <장옥정>의 패션 디자이너 설정은 대중들의 차가운 반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 되어버렸다.

말 그대로 , '퓨전'이란 서로 다른 두 장르를 뒤섞어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마의>와 <장옥정>의 차이가 무엇이었을까? <마의>의 퓨전은 애교 수준이었다면, <장옥정>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혹은 실재하는 역사를 전복시킨 이질감이 도를 넘었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낯설었달까.

 

'낯설게 하기'는 실제 존재하는 미학 용어이다. 어떤 상황, 혹은 조건을 뒤틀어 냄으로써, 그 주제에 대한 환기를 시키고, 오히려 주제를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낯설게 하기를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냥 낯설어 버린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가 되어버린다. <장옥정>은 퓨전이라는 장르의 역사 해석을 넘어, 역사 왜곡이란 생각을 시청자들이 해버리게 되니, 깜짝쑈를 넘어 외면을 받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 <천명>이란 드라마 역시 어쩌면 <장옥정>으로 갈 것이냐, <마의>로 갈 것이냐의 기로에 놓인 듯하다. 드라마의 제작진은 <천명>의 퓨전적 설정들, 주인공 최원의 헐랭한 캐릭터라던가, 여주인공인 의녀 홍다인과의 로맨틱 코미디같은 아웅다웅을 <마의>의 애교로 받아들이길 원하는 듯하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장옥정>의 패션 디자이너급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를 어쩌나?

 

 

사극을 임하는 시청자의 태도 이러면 너무 거창하지만, 사극을 보려고 마음 먹은 사람들에겐 기본적으로 그 시대에 대한 다른 기대감이 있다. 오늘날과 다른 옷, 말투, 다른 행동거지, 그리고 다른 세계관, 무엇보다 자유로운 개인의 존재가 부각되는 현재와 달리, 엄격한 신분체제 하의 그 시대 사람들이 살며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자 해서, 사극을 보는데, 현대극과 다를바 없는 인물들이, 현대극과 다르지 않는 대사를 치며, 현대극에서처럼 자유롭게 행동하며 사건을 만드는데, 굳이 사극을 볼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극이란 이름을 내걸고 오늘날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은 말투를 쓰며, 오늘날과 비슷한 고민을 하며 비슷한 패턴의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고답적인 사극의 숨통을 튀어주는 정도를 넘어선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천명>은 중종 연간 후계 구도를 둘러싼 문정왕후와, 세자 시절의 인종간의 피튀기는 세력 싸움을 배경으로 한 흥미진진한 구도를 배경으로 한다. 거기에, 그의 할아버지가 세자를 지키려다 팔목을 잃고, 이제는 병든 어린 딸을 보살펴야 하는 내의원 최원의 이야기가 곁들여져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그런데 이미 첫 회에서 충분히 극적인 스토리들이, 번번이 주인공 최원의 허허실실을 넘어 로맨틱 코미디의 백수 스타일의 느슨한 캐릭터로 인해 충돌을 일으킨다. 주인공이 오히려 극의 긴장감을 잃게 만든달까?

 

jtbc의 <꽃들의 전쟁>이 청나라에 굴복하는 인조의 이야기로 첫 회를 이끌어 전체적인 배경을 보여주며 긴장감을 고조시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와 달리 <천명>은 첫 회부터, 시청자들은 모후와 세자 세력간의 숨막히는 긴장감에 집중하려다가, 자꾸 주인공만 나오면 흐름이 깨지니 극의 재미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저 권력에 무심한 지고지순한 딸바보로만 그려내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천재임에도 그 능력을 숨기기 위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지나치게 주인공을 '나이브'하게 그려내다 보니 오히려 극적 몰입감을 저해하게 만들어 버렸다. 천재가 범인인 척 하는 주인공은 이미 현대극에서도 유행이 좀 지난 캐릭터가 아닌가. 제 아무리 '딸 바보'라도, 조선시대의 '딸 바보'랑 오늘날의 '딸 바보'는 달라야 한다. 굳이 '뽀뽀'를 연발하지 않아도, 주인공의 측은한 눈빛에, 딸을 구할 수 있는 의서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시청자들은 공감할 수 있다. 현대의 아빠 코스프레는 과하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가장 연기를 잘 한 사람이 아역과 문정황후란 이야기가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두 사람만이 가장 사극답게, 사극톤으로 연기를 하고 있으니까. 그만큼, <천명>이란 사극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그 흐름을 깨는 과도한 퓨전 스타일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최원 역의 이동욱이나, 홍다인 역의 송지효가 역량이 안되는 것도 아니고, 조금 더 <천명>의 색채에 맞는 톤의 연기로 돌아가보면 어떨까.

by meditator 2013. 4. 26. 09:30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