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배경은 영화 속 이야기를 보완해 주는 중요한 장치다. 허구인 서사를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실재의 공간들, 그리고 역시나 허구의 인물을 현실로 떠받쳐주는 튼실한 토대가 된다. 그러기에 공간의 왜곡이나, 서사와 인물을 떠받치는 거짓 공간인 cg의 어설픔이 허구인 서사와 인물을 들통내는 전제 조건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속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배경 화면의 어긋남이나 어설픔에 방해받기는 하지만, 거기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결국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인물들을 통해 발현되는 서사이니깐. 


그러나 종종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배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중요한 서사가 된다. 이 감독의 2007년작 <밀양>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을 찾는 신애를 서둘러 맞는 것은 남편 고향의 햇살이다. 그리고 그 햇살은 영화 내내 중요한 시선이 되어 신애를 따라다닌다. 영화의 제목인 밀양 scret sunshine과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밀양 密陽, 이 의미의 어긋남이 곧 영화의 주제 의식을 대변하고, 그 주제 의식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빛과 어둠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서두를 나지막히 흐르는 강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무심히 흐르는 듯한 강물 위로, 꽃잎처럼 늙고 젊음 생명이 진다. 그럼에도 변함없는 흐름. 그 속에 휩쓸려 버린 생명을 통해, 휩쓸려 버릴 삶을 통해, 관객의 처연함은 깊어진다. 그렇게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서사만이 아니라, 그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빛과 물등 자연의 물성을 통해 그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간다. 


한 폭의 동양화같은 자객 섭은낭
현재 상영되고 있는 허우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단란한 황실의 가족, 그리고 그 가족을 지켜보는 대들보 위의 섭은낭을 통해 이 이야기가 '자객'인 섭은낭의 이야기임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자객이 되어버린 섭은낭과 그녀를 자객으로 만들어 버린 그녀의 고향 위박의 위태로운 운명을 지켜보다 보면, 조금씩 그 인간사의 이야기를 넘어 차오르는 풍경이 있다. 그리곤 어느덧 그 인간사의 운명마저 부질없게 만들어버리는 한 폭의 동양화를 만난다. 

흔히 동양화를 '여백의 미'라 칭한다. 화폭 가득 자연이 압도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공간이 압도한다. 자연의 풍경을 배경으로 더 많은 공간이, 자연의 풍성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한 끝에 궁색하게 자리잡은 인물들이 끼어든다. 겨우 고개를 자세히 들이밀면, 그 점같은 인물들의 제각각 사연이 보인다. <자객 섭은낭>도 마찬가지다. 

단란한 황실 가족과 그들을 지켜보는 섭은낭, 그리고 사부를 찾아가 차마 아이때문에 그를 죽일 수 없었다는 섭은낭과, 그런 섭은낭에게 마음의 문제를 언급한 씬처럼, 이후 위박에서의 인물들의 씬은 곧이곧대로 보여진다. 오늘날 영화들이 현란한 카메라 웤을 통해 인물을 다 설명해내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인물들의 대사와 때론 클로즈업이 등장하지만, 쉽사리 그것만으론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과, 느리게 그들을 잡아가는 화면에서 복잡한 그들의 속내를 짐작할 뿐이다. 



오히려 그들의 위태로운 관계와 운명을 드러내는 것은 드러내는 것은 영화 속 배경이다. 마치 삼국지에서 유비가 쫓겨난 익주의 느낌을 준다. 험준한 산세에 둘러싸인, 그리고 이는 조정과 이웃 지역, 그 어느 곳도 믿을 수 없는 위박의 운명과 사연을 이룬 등장인물들의 존재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영화는 내내 씬과 씬을 가르며, 때론 설명하고 때론 예고하듯 한 폭의 동양화같은 자연을 통해 섭은낭과 주변 인물들의 서사를 그려낸다. 칠흙같은 동굴, 안개가 드리운 길, 평화로운 농촌의 풍경은 그 자체로 영화적 언어가 된다. 

야곰야곰 등장하기 시작한 이 언어는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인물들의 서사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섭은낭과 정혼자였던 전계안, 두 사람의 이별을 만들고 만 전계안의 모친과 그 쌍둥이 사부, 그리고 거기에 협조한 전계안의 친인척이자 고위관료인 섭은낭의 부모, 더 나아가 그런 비극적인 운명을 잉태하게 만든 위박이라는 지역의 운명. 그 급박하게 전개되는 영화적 전개와달리 무심한 듯 흘러내리는 우물의 물처럼, 엄숙하게 등장하는 자연은, 위태로움에도 그 어떤 관리의 말도 믿을 수 없는, 아니 정확하게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위박의 운명처럼, 어쩌면 자연의 숙명 앞에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인간사의 숙명을 드러낸다. 

위박은 작은 지역이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도모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서 누군가는 조정에 잘 보여서 위박의 앞날을 기약하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웃과 손을 잡아 조정에 맞서자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위박의 앞날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위태로움을 조장하는 것은, 위박의 지정학적 위치이지만, 거기에 힘을 보태는 것은 결국 인간들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섭은낭의 사부가, 그 원하지 않은 삶의 포한을 누군가의 삶을 거두는 '복수'를 통해 거두려고 하듯, 전계안의 정비 역시 지아비를 배신하는 삶을 선택한다. 섭은낭의 아비와 어미 역시 뒤늦게 자신들의 딸인 섭은낭이 자객으로 돌아왔음을 알고, 그녀에게 그런 삶을 넘기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하지만, 그것이 뒤늦은 후회인 것처럼 지정학적 운명의 위태로움을 치닫게 하는 것은 '인간사의 어리석은 선택'이다. 하지만, 깍아지른 아득한 벼랑 위 자연의 엄숙함 속에 그저 한 마리 새에 불과한 듯한 사부의 모습처럼, 그런 인간의 선택이 자연의 숙명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인간사를 압도하는 무위자연
그렇게 영화는 인간사를 압도한다. 위태로운 위박의 운명 앞에, 기약할 길없는 지도자의 미래 앞에 사랑하는 첩을 끼고 고뇌하는 전계안의 고뇌를 엿보는 것은 섭은낭만이 아니다. 그 대사없는 긴장감의 틈을 비집고 들어서는 것은 뜻밖에 귀뚜라미 소리의 파격(?)이다. 그리고 이런 파격은 활을 맞고 본의 아니게 허름한 농가로 몸을 피한 섭은낭 아비 일행을 맞이한 한가로운 농촌 풍경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구구절절 섭은낭의 갈등을 설명하지 않지만, 그 행간을 채운 엄숙하지만 무심한 자연을 통해, 결국 '복수'의 칼날을 거두고, 그와 동시에 애증의 마음도 풀어낸 채 조용히 길을 떠나는 섭은낭이 내린 결정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동양화는 그저 그림이 아니다. 그 화면을 지배하는 자연과 거기에 곁들여지는 자그마한 인간사를 통해, 무위자연無爲自然, 즉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경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자연의 무기력함이 아니다. 인간사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연의 거스를 수 없는 힘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객 섭은낭에서, 인간사의 힘이란, 사부 등의 '인위적으로 도모하고자 하는' 복수'의 방식을 말한다. 하지만, 그 인간사의 힘이란 영화 전반에서 종종 압도하는 자연의 풍경 속에서 무기력하다. 그리고, 사부는 섭은낭에게 인간사 정에 휘둘려 다하지 못한 무공이라 했지만, 오히려 섭은낭은, 그저 애써 인간사의 풍경을 거스르지 않으려 함으로써 더 높은 무공을 보인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지만, 자연처럼 인간사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무위자연의 경지를 보인 것이다. 

<자객 섭은낭>은 익숙치 않은 영화적 화법으로 말한다. 최근 몇 년간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더 이상 우리의 스크린에서 만날 수 없듯이, 빠르게 전개되는 사건, 화끈한 보상처럼 주어진 결말, 분명한 메시지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자객 섭은낭>은 모호한 이미지처럼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습관화된 화법을 내려놓고 영화에 침잠한다면, 이른바 '힐링'이라 말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좋은 영화는 좋은 그림처럼, 영화를 보고 나서도 내내 새롭게 이야기할 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다. 그저 위박의 위태로운 운명에 견줘 감독 허우샤우시엔의 고국 대만의 운명이라는 즉자적인 해석을 넘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 선택, 그리고 인간사와 자연의 내밀한 철학까지 무궁무진해서 보는 이의 혜량에 따라 그러낼 수 있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내보인다. 아마도 그래서 이 영화를 본 눈밝은 관객들이 또 이 영화를 보러가고 싶다고 하는가 보다. 

by meditator 2016. 2. 17. 16:54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