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은 2005년 이미 <친절한 금자씨>를 통해 '여성'에의한 '남성' 세계에 대한 조롱과 '복수'를 신랄하게 펼쳐낸 바 있다. 그런 박찬욱 감독이 동성애 소설로 이미 널리 알려진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 스미스>를 각색하여 <아가씨>로 돌아왔다. 



왜 일제시대였을까?
21세기인 현재에도 여전한 여성 차별과 '여혐'이 논란이 되는 이즈음, 박찬욱 감독이 <아가씨>를 통해 보여준 여성 간의 사랑과 연대, 그리고 남성 지배적 문화에 대한 비판과 조롱은 시의적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 속 배경은 현재가 아닌 일제시대다. 왜 하필 그 시대가 배경이 됐을까? 



박찬욱 감독이 일제 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데는 아마도 이 영화의 원작인 <핑거 스미스>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핑거 스미스>는 대영제국의 황금기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1837년에서 1901년까지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이 시대는 대외적으로 거침없는 식민지 확장을 기반으로 하여, 국내적으로는 산업 혁명의 성공과 함께 '해가 지지않는'번영의 시대를 뜻한다. 하지만, 그런 황금기의 이면에는, 소설 속 여주인공인 모드의 탄생지인 정신병원으로 상징되는 정신적 아노미를 겪는 지배 계급과 또 다른 여주인공 수잔의 근거지가 되는 빈민굴로 대변되는 극심한 빈부 격차가 존재한다.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도입된 히데코(김민희 분)의 이모부(조진웅 분)가 탐닉하고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 되는 음란 소설은, 역시나 소설 속 삼촌의 주업을 본딴 것으로 당시 영국을 지배하는 계급의 부도덕성을 상징한다. 영화는 겉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사실은 악취가 풀풀 풍기는 시대로, 절묘하게 일제 시대를 치환한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인 귀족처럼 행세하며, 가장 교양있는 척하며 사실은 음란 소설에 탐닉하고, 일본인 귀족들을 불러모아 그를 파는 낭독회를 여는 이모부는 '친일파'의 부도덕성을 가장 절묘하게 상징해 낸다. 이미 우리가 익히 공감하고 있는 바이기에 덧대어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가씨>의 친일파는 우리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적대적 의식을 갖게된 그들이라기 보다는, 감독이 '여성 연대'의 주제를 위해 편의적으로 불러온 영화적 장치의 느낌이 강해보인다. 즉, <암살>의 친일파와, <아가씨>의 친일파는 동일한 캐릭터임에도 우리에게 전달되는 뉘앙스가 달라진다. 심지어 소설 속 빅토리아 시대의 귀족보다도 덜하다. 즉 소설 속에서 두드러진 계급 구도는 오히려 영화 <아가씨>로 오면 히데코 개인을 억압하는 '남성성'의 상징으로 더 두드러진다.

부도덕한 남성 지배의 상징으로 도입된 일제 시대라는 영화적 장치,  그 속의 상징적 인물인 이모부의 캐릭터, 그리고 그에 의한 이모의 죽음과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히데코에 대한 학대는 소설 속 복잡했던 인간들의 관계를 '남성'과 '여성'의 구도로 단순, 혹은 명확하게 구분짓는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이 <핑거 스미스> 였듯이 수잔이라는 빈민굴 출신의 소매치기를 중심으로 풀어냈던 젠더와 계급의 이중적 갈등은 선뜻 이쁜 히데코에 무장해제되어버린 숙희(김태리 분)를 통해 단선화된다. 

적나라한 사랑에 기반한 여성의 연대?
또한 번역 이후 800여 페이지를 넘는 복잡다단한 서사의 소설과 그 서사를 따라 요동쳤던 주인공들의 희노애락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던 결론은 3부의 스릴러적 구조를 통해, 통쾌한 여성 연대를 통한 결국은 찌질한 남성 일군에 대한 복수로 마무리된다. 박찬욱 감독은 숙희에서 히데코로, 그리고 마지막 반전을 통해 두 여인의 운명에 대해 허를 찌르며 한 편의 통쾌한 복수극를 마련하고자 했지만, 1부의 숙희의 화법이, 2부 히데코로 넘어오며 나름 반전의 묘미를 마련했지만, 이미 2부 마지막 죽으려는 척을 하는 히데코를 숙희가 애닮아 구하려 하면서, 영화의 결말에 대한 긴장감은 풀어지고 만다. 



그런데 나름 화자를 바꾸어 가며 1, 2부를 나누어 결국은 통쾌한 복수극을 벌인 두 여성의 행보, 그 기저에는 '사랑'이 있다. 소설 속 핑거 스미스(소매치기) 수잔은 귀족 모드를 사랑함에도 자신이 떠나온 '가난'의 유혹 혹은 존재론적 계급 의식에 따라 모드 대신 '돈'을 쫓는다. 모드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속 히데코가 숙희를 정신병원에 넣는 것은 잘 짜여진 각본의 일부였지만, 소설 속 모드는 자신의 생존을 우선한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들의 '이기적'인 선택이 단선적일 뻔한 러브 스토리에 인간적 고뇌를 얹어, 소설을 풍부하게 만든다. 사랑에의 미혹과 존재론적인 고뇌를 겪고, 그 이후에 만난 두 사람은 비로소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결실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아가씨>는 두 시간 반여의 짧은(?) 상영 시간의 제약으로 그런 복잡다단한 서사 대신, 미혹되어 가는 두 사람의 표정과, 적나라한 합일의 과정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대신, '스릴러'로서의 관객의 흥미를 끌기위한 화자를 바꾸어 가는 서사로 대신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영화적 재미가 정작 <아가씨>라는 이야기의 본질이 되는 '사랑'을 의심하게 만든다.

영화 속 히데코와 숙희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감독은 공들인(?) 섹스신으로 그려내지만, 그걸 통해 관객은 적나라한 두 배우의 몸과 함께, '학습 도감'과 같은 성애를 보게 된다. 감독이 애써 적나라하게 두 배우를 통해 그들의 사랑에 접근하려 하면 할 수록, 오히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랑'을 설명하려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는 마지막 해방된 두 여인의 섹스신에서도 마찬가지다. 굳이 일전에 히데코가 소설을 통해 등장시켰던 '구슬'을 올라가기도 힘든 테이블 위에서 시연을 펼치는 장면은, 두 여성의 해방감 이전에,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흔히 여성 동성애를 다뤘다는 면에서 <아가씨>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나, <캐롤>과 비교되곤 한다. 이미 빈번하게 언급된 두 영화를 차치하고, 오히려 여성 동성애는 아니지만, 최근 여성간의 동지애를 다룬 노희경 작가의 <마이 디어 프렌드>와 비유해 보고 싶다. <디어 마이 프렌즈>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동성애가 아닌, 오랜 여성 친구들의 이야기다. 드라마 속 정아(나문희 분)가 교통사고를 냈을 때 친구 희자(김혜자 분)는 선뜻 자신이 그 죄를 대신하려 한다. 오랜 두 친구가 까페에서 마지막 찻잔을 나누고 함께 손을 잡고 경찰서로 향하는 모습은 비록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오랜 세월 우정을 기반한 '연대'의 감정을 충분히 전달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 히데코와 숙희는 '사랑'을 기반으로 '연대'를 하고, 그 '연대'에 의지하여 그들을 압박한 '남성'들에게 통쾌한 한 방을 선사한다. 

여기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은 적나라한 '미혹'을 보이지만, 어쩐지 '선언'적이고 '설명'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이 먹인 '한 방'은 통쾌하고 신랄하지만, 마치 각론이 부실한 이론서처럼,  한 편의 성명서를 읽은 느낌이 든다. 

더욱이 아이러니한 것은, 영화의 주제 의식은 선언문처럼 이성적인데 반해, 영화를 풀어가는 화법은 지극히 탐미적이다.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도, 그리고 부도덕한 이모부의 문화 생활도 '관음적'이다. 물론 원작이 되는 <핑거 스미스>에서도 두 여인의 사랑만큼, 음란 서적에 대한 궁금즉이 들만큼 '탐닉'은 집요했다. 하지만, 도덕적이고 계몽적인 주제 의식을 가진 <아가씨>의 화법으론 이율배반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by meditator 2016. 6. 10.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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