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에서 5회를 거치며 상승세를 보이던 <쓰리데이즈>의 시청률이 7회 11.3%(닐슨)로 하향 곡선을 그었다. 전회 12.9%로 동시간대 1위를 차지했던 거에 비해 1.7% 하락한 수치이다. 동시간대 경쟁작인 <감격시대>가 1위를 차지했다고는 하지만, <감격시대> 역시 전회 12.1%에 비해 0.6% 하락한 상태에서  <쓰리데이즈>가 보다 하락폭이 컸기때문에, <쓰리데이즈>의 시청자들이 다른 드라마로 채널을 돌렸다고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6회에서 7회에 걸쳐 전개된 내용에서 <쓰리데이즈>의 하향 요인을 찾는 것이 정확하리라 본다. 굳이 한 회의 방송분에 따른 시청률을 분석해 보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쓰리데이즈>의 시청률 하락 현상이 마치 우리 사회 정치를 대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 이다. 


(사진; 메트로)



<쓰리데이즈>가  정치 드라마였어?
5회 중반에서 6회 중반에 걸쳐 <쓰리데이즈>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의 축을 지나 본격적으로 98년 양진리 사건을 둘러싼 정치 세력간의 입장 차이를 조명하는데 주력했다. 
재신 그룹이라는 자본가가 정치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손을 잡은 여당 대표와 합참의장이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덮기 위해 현재의 대통령을 압살하려는 음모를 장황하게 설명해 나간다. 6회 마지막 합참의장이 건물에서 떨어져 죽는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7회, 드라마는 그 사건의 범인으로 추정되는 신규진 비서실장이 합참의장을 살해하는 사건에 집중하는 대신에, 그와 벌인 정치적 입장 차이를 보인 설전에 촛점을 맞춘다. 또한 그 이전에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과 동일시했던 대통령과의 입장 차이를 장황하게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동지였던 두 사람이 어떻게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자 애쓴다. 

그 장황했던 정치적 이견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장면은, 결국 <쓰리데이즈>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미스터리를 푸는 장르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정치적 담론을 이 작품의 주제로 하고자 하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의 의도에 대해 여러가지 반응이 있지만, 가장 즉자적으로 나타난 반응 중 하나는 <쓰리데이즈>가 정치드라마였냐?는 반문이었다. 이 반문이 내포한 뉘앙스는 부정적이다. 그저 대통령을 저격한 범인을 찾는 재미로 드라마를 보아왔는데 골치아픈 이야기를 한다는 속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저격 사건의 배후를 파헤치다보면 당연히 정치적 내용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했을 텐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라마를 통해 설명이 되기 시작하니 뜨악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얼마나 '정치'에 대해 피로감 혹은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사는 것도 고달프고, 매일 접하는 정치판도 시끄러운데, 굳이 드라마를 통해 그런 것을 또 복기해야 하냐는 볼멘 입장인 것이다. 

'나꼼수'를 통해 지난 총선 당시 정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김어준씨는 사람들에게 일갈한다. 당신이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모든 고민과 문제들이 결국은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만, 신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철저하게 개별화된 존재로 규정되어버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사는 것도 힘들고 고달픈데 그런 거창한 문제까지 신경을 써야 되느냐는 것이 하나의 흐름이다. 그래서, 신문도 끊고, 뉴스도 포털에 나온 단신만 거들떠 봐도 감지덕지한 상황에서, 뉴스도, 다큐도 아닌 드라마에서 정치 이야기를 정색하고 논하니, 채널부터 돌리고 보는 식이 되는 것이다. 

(사진; 메트로)


정치 이야기도 하기 나름?
<쓰리데이즈>가 6회에서 7회에 걸쳐 폭로하고자  했던 정치적 속살은 묘하게도 지금까지 몇번의 선거를 통해 반복되었던 야당의 정권 비판과도 닮은 면이 있다. 드라마는 친절하게 반복 설명하면서 이동휘 대통령과 그들이 98년 당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다시 그것을 밝히려는 이동휘 대통령을 주저앉히고자 하는 지를 덧붙인다. 하지만 굳이 반복하고 덧붙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벌써 '아'하면, '어' 하고 안다. 벌써 그런 세월을 살아온 게 몇 년인데, 몰라서 이러고 있는게 아닌데, 드라마도, 야당도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며 가르치려 든다. 

<쓰리데이즈>는 아버지 세대의 과오를 바로 잡으려는 옮은 어른과, 아버지 세대의 과오를 넘으려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룬 이른바 '건전한' 역사적 시각을 다룬 드라마이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했으면 좋겠는 드라마이다. 하지만, 좋은 주제와, 건강한 의식을 가진 드라마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시청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마치 학창 시절 그 좋았던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시간이 지겨웠던 것처럼, 정치가 남의 일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에, 사실은 이런 거야를 곧이 곧대로 가르치려 드는 드라마에 채널을 고정하며 견딜 시청자가 얼마나 될까? 더구나 트렌디한 젊은이들에게, 자기 삶의 문제에 빠져있는 젊은이들에게 장광설이라니!

그 좋은 주제 의식을 드라마적 재미로 살리기 위해 한태경이라는 경호관의 신분을 지닌, 하지만 과거사의 책임을 지닌 아버지를 가진 젊은이와, 진실을 밝히려는 대통령을 극중 인물로 합류시켰지만, 그들이 드라마의 중심 스토리 밖에 빠져있고, 지금처럼 장황하게 주변 인물들의 입을 통해 주제에 접근하는 식이라면 인내심의 한계치를 넘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김어준의 <나꼼수>로 돌아가보자. 그렇다면 그때 당시 그렇게 원자화되고 개인주의화된 사람들에게 어떻게 정치 팟캐스트 <나꼼수>가 인기를 끌었을까? 재미가 있어서다. 그리고 듣다보면 비록 방송이라도 명확하게 딱 꼬집어 주는 사안들이 속시원하고, 선동적인 걸 뻔히 알면서도 끌리게 되는 것이다. <나꼼수>가 정치사에 있어서 어떤 평가를 받는가를 차치하고, 당시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붐을 이룬 것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멧 데이먼의 영화 '본시리즈'도 있다. 영화는 주구장창 싸움박질만 하는데도, 우리는 그 영화를 통해 미국이라는, 이 시대 절대 권력의 속살을 소름끼치게 절감할 수 있었다. 옳은 이야기를 하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옳은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쓰리데이즈>도, 현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가르치려 들지 말고, 설명하려 들지 말고, 드라마를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다면 보여주어야 한다. '쟤네들이 이렇게 나뻐', '쟤네들한테 이렇게 당했네' 만 중언부언하지 말고, 그렇게 나쁜 얘들한테 우리는 이렇게 맞서싸우고 있어, 이렇게 싸우는 사람들도 있어 를 보여줘야 보는 사람들도 신이 나서 맞장구치게 되는 것이다.

물론 7회에 이르른 <쓰리데이즈>는 중간중간의 장황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덕을 더 많이 가진,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훌륭한 담론의 가능성을 지닌 드라마이다. <쓰리데이즈>가 성공적인 드라마로 남아 이런 시도가 앞으로도 계속 더 많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장르물에도 불구하고, 기껏 어렵게 획득한 대중적 관심을, 주제에 대한 확신만으로,  안이한 전개 방식으로 놓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에서 몇 자 덧붙여 보게 된다. 


by meditator 2014. 3. 27. 15:09

7회 마지막,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고, 하지만 그 피를 보고도 자신은 멈출 수가 없다고 이동휘(손현주 분) 대통령은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한태경(박유천 분) 경호관 이런 나를 지켜줄 수 있습니까 라고. 대통령의 말이 끝마침과 동시에, 아래에 자막이 씌여진다. 사건 발생 72시간 경과. 한태경 경호관의 아버지가 죽고 대통령의 저격이 일어난 후로 3일, 이제 전쟁의 서막이 마무리되었다.


<쓰리데이즈>의 시작은 우연히 한태경 경호관에 의해 포착된 대통령 암살 음모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암살은 16년전 대통령이 팔콘의 컨썰턴트로 활동하던 시기에 가담한 양진리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그 시절 양진리에서 살아남은 함봉수(장현성 분)는 경호실장이 되어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한태경의 총에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커다란 사건의 시작이었다. 

한태경의 아버지 한기준을 통해 98년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대통령 이동휘가 그날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고, 그날 이동휘와 함께 그 사건에 가담했던 재신 그룹, 여당 대표, 그리고 합참의장은 그 날의 진실을 덮어두기 위해 이동휘 대통령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쓰리데이즈>의 이야기는 회를 거듭해 가면서 마치 눈덩이가 굴러가듯 그 존재감을 부풀려 가고 있다. 매회 양진리 사건의 이야기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듯하지만, 회마다 그 이야기는 살을 붙여 가면서 덩치를 키운다. 7회에 이르러 비로소 대통령 이동휘가 한태경의 아버지 한기준을 만나기 전까진 사건의 진실을 외면하거나, 무지했었다는 것을 밝히고, 6회에서 김도진이 이동휘의 문책에 자신도 몰랐던 일이라며 발뺌했었던 일이 거짓이라는 것도 드러났다. 그러면서 왜 16년이 지나서야, 98년의 사건이 전면에 드러나고, 대통령이 자신의 자리를 걸면서 그것을 이제야 밝히려 하는가도 명확해 졌다. 단순히 대통령 암살 사건을 밝히는 스토리는 이제 한 나라의 운명을 건, 혹은 한 시대를 가름하는 입장 차에 따른 거대한 담론이 되어간다. 

또한 양진리 사건의 진실을 알게된 비서실장 신규진이 대통령을 설득하고, 참모총장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존재를 정권과 동일시하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다는 것과, 대통령이 그를 자신이 없으면 낙동강 오리알이라고 대놓고 무시하는 것과 달리, 대통령을 걸고 딜을 할 야심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또 한 사람의 악인을 등장시킨다. 

그렇게 대통령의 최측근 신규진 비서실장마저 정권과 자신을 버리려는 대통령에 실망한 채 대통령 죽이기에 나서면서, 재신 그룹의 김도진의 '얼마나 힘이 센지' 보여주는 과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98년 문서가 재신 그룹 산하 재신일보를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지고, 그에 맞춰 발빠르게 여당 대표의 독려(?) 하에 대통령 탄핵 결의안이 가결된다. 함봉수 실장의 암살 시도에서 목숨을 구한 것도 잠시 이동휘 대통령은 그의 정치적 생명의 위기를 맞는다. 본격적인 대통령 죽이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대통령을 죽이고자 하는 세력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는 시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 대통령과, 아들에게 유언 한 자락 남기지 않고 죽어가면서도 기밀 문서의 안위를 걱정했던 아버지가 하고자 했던 일이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굳혀가는 한태경의 조우가 이루어진 시점이기도 하다. 대통령을 죽이고자 하는 세력들이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에 맞선 이동휘 대통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려 하고, 그런 이동휘 대통령의 곁에서 한태경이 함께 할 여지가 생김으로써 또 하나의 전선이 구축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대통령이라도 걸리적거린다면 없애버리려는, 그리고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경 유착된 '갑'의 세력과,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일 망정, 그것을 밝히고 사죄하겠다는 반성하는 기성 세대와 아버지의 오류에 치욕스러워 외면하고 주저앉기 보다는 그것을 지양하겠다고 나선 젊은 세대간의 역사적 전선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대통령은 물론 전혀 이동휘 같지 않다.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대뜸 대통령의 비리가 특검을 통해 폭로되고, 탄핵까지 이르는 과정은 너무도 우리에게 익숙하고 현실적이라 소름이 끼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실 속에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이동휘의 등장은 어쩐히 드라마임에도 으쓱해진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비리의 주범이었다는 사실에도 주저앉지 않는 젊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달리는 청년 한태경의 어깨를 도닥여 주고 싶다. 현실 속에서 가장 현실적이지 않은 싸움을 시작한 이동휘와 한태경 두 사람의 싸움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겼으면 하고 소망하는 건, 아직은 다 내리지 않은 우리 마음 속의 깃발 같은 거다. 


by meditator 2014. 3. 27. 01:56

이동휘를 비롯한 김도진 등이 만난 그 장소, 렘브란트의 야간 순찰이 그려진 맞은 편에 또 한 편의 그림이 걸려있다. 바로 프란시스 고야의 <아들을 삼킨 사투르누스>가 그것이다. 


사투르누스

이 그림은 고야가 은둔했던 자신의 집(퀸타 델 소르도)의 벽에 그린 '검은 그림' 연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1층 식당 벽에 그려졌던 것이다. 

여기서 괴물처럼 묘사된 사투르누스는 로마의 농경신이지만, 로마 신화의 많은 신들이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차용해 와서 만들어진 것처럼, 실제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동일시된다. 사투르누스, 즉 크로노스는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에게 자신의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식들이 태어나는 족족 그들을 먹어치운다. 테메테르, 포세이돈, 헤라 등이 사투르누스의 먹이가 되어버어 그의 뱃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고야는 이 그림을 통해 신화의 재현을 넘어 자신의 아들을 먹어버릴 정도로 타락한 기성세대의 폭력성을 그려내고자 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시민과 애꿏은 젊은 군인들을 희생시킨 다국적 기업 팔콘사와, 그와 작당한 재신그룹, 그리고 정부 각층의 인사들을 이 그림보다 더 적절하게 상징할 수 있을까.

그림은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로 끝나지만, 신화는 그 후일담을 전한다. 막내 아들로 태어난 제우스는 다행히 목숨을 건지고, 힘을 키워 아버지 크로노스를 죽이고, 그의 뱃속에 들은 형제들까지 구한다. 과연 재신 그룹과 그 일당들의 시커먼 뱃속을 폭로하고, 그들에게 무고하게 희생된 죽음들을 되살려 낼 오늘의 제우스는 과연 누구일까. 그들 중 하나인, 마치 사투르누스의 아들로 태어나지만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죽인 제우스처럼, 김도진에 의해 대통령이 된, 그들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난 이동휘일까, 좀 더 포괄적으로  기성 세대와 다른 순수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진 한태경일까. [아들을 잡아먹은 사투르누스]의 후일담은 드라마를 통해 확인해 보면 될 것이다. 


6회까지 진행된 <쓰리데이즈>에서 악의 최종 보스로 등극한 사람은 재신 그룹의 김도진이다. 드라마에서 김도진과 이제 그의 반대편에 선 이동휘가 만나는 장소가 한 군데 더 등장한다. 바로 김도진의 집무실, 자신이 바랬던 바와 달리 양진리 학살 소식을 접한 이동휘는 김도진의 집무실을 찾아가 그의 멱살을 잡는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뒤에 배경으로 등장한 그림이 있다. 바로 리베랄레 데 베로나의 [디도의 자결]이다. 


대표적인 르네상스 회화인 이 그림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아스] 4권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트로이의 왕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아이네이아스는 점령된 트로이를 피해 배를 타고 도망치다 디도가 여왕으로 있는 카르타고에 도착하게 된다. 에로스의 화살을 맞은 여왕 디도는 아이네이아스를 사랑하게 그가 카르타고에서 살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로마를 건국하라는 신탁을 받은 아이네이아스는 디도가 매달리는 걸  뿌리치고 카르타고를 떠나고, 그가 떠나던 날 디도는 자신을 버리고 간 디도를 원망하며 그가 준 선물 더미에 불을 지르고 그 위에서 칼로 자결하며 생을 마친다.

[디도의 자결]의 메시지는 배신 혹은 임무에 희생당한 사랑이다. 
즉 그 그림 앞에서 멱살을 잡이를 한 김도진과 이동휘, 98년 그들은 팔콘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양진리 사건의 이해 당사자로 밀월 관계를 유지하지만, 김도진이 그의 궁색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양진리 사람들과 군인들을 희생시킨 순간, 그 밀월 관계는 파국을 예고한다. 
자신이 대통령 이동휘를 만들었다고 믿는 김도진은 이동휘에게 말한다. '왜 그러셨어요? 그간 좋았잖아요,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하지만 이동휘는 말한다. 먼저 배신을 한건 자신이 아니라고. 김도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반발하는 이동휘를 구슬르기 위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대통령 이동휘는, 김도진의 말처럼, 양진리와 같은 일을 다시 만들지 않기 위해, 외국과 자본가들의 손에 농락당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대통령이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신을 했다고 말하는 김도진과 이동휘, 과연, 화염에 휩싸인 채 배신에 떨며 자결에 이르는 디도는 누구일까. 경호실장의 총에 희생될 뻔하던 이동휘는 스스로 그 화염을 뚫고 나온 디도와도 같다. 매회 밀고 밀리는 이동휘와 김도진의 일진일퇴 속에 그 귀추가 주목된다. 

by meditator 2014. 3. 25. 18:59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란 그림이 있다. 

대사들
 이그림의 원제는 [장 드 댕트빌과 조르주 드 셀브]로, 그 중 댕트빌은 프랑스아 1세가 영국에 파견한 대사이고, 그 옆의 댕트빌의 친구 셀브는 역시 프랑스 대사로 베네치아에 파견된 성직자이기에, 제목이 [대사들]로 명명된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그림이 그려질 당시 약관 스물 아홉의 나이로, 그 나이에 대사로 임명될 정도라면 창창하게 출세 가도를 달리던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림 중앙에 비스듬히 그려진 물체가 있다. 바로 해골이다. 젊은이들의 그림에 해골이라니! 이 해골이 상징하는 것은 당연히 죽음, 그리고 그를 통해 되돌아 본  인생의 덧없음이다. 이렇게 르네상스 시기의 그림, 혹은 꼭  그 시기의 그림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명화라 칭송하는 많은 그림들에는 그려진 사물 이상의  철학적 혹은 종교적 상징을 띤, 퍼즐처럼 숨겨진 의미들이 꼭꼭 숨겨져 명화의 맛을 더해준다.

그런데, 매회 다음이 어떻게 이어질 지 전혀 가름할 수 없는 <쓰리데이즈>를 보노라면, 자꾸 그림들이 눈에 띤다. 게다가 그저 등장인물들의 배경을 장식하기 위해 쓰였다기엔 그 명화들이 숨겨놓은 의미가 심상치 않다. 이제 <쓰리데이즈>에 등장한 명화들을 통해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재미를 찾아보자.

함봉수(장현성 분) 실장의 암살 시도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이동휘(손현주 분) 대통령은 비서실장이 청수대의 비상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등 각종 기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그들을 즉각 소집한다. 

그리고 경호관과 비서실장을 대동하고 재신 호텔에 나타난 이동휘 대통령, 그가 걸어가는 복도의 끝에 니콜라스 랑크레의 [유년기(childhood)]가 걸려있다. 


니콜라스  랑크레의 이 그림은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등 네 시기를 다룬 연작 [the four ages of man] 의 첫 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그림은 유모가 뒤에 서서 갓난 아기를 안고 있고, 그 앞에서 조금 큰 아이들이 유년기의 아이를 바퀴 달린 기구에 태운 채 끌어주고 있다. 
드라마에서 이동휘 대통령은 그 그림을 멀리한 채 김도진 일행을 만나러 비장한 표정으로 걸어간다. 그런 그를 랑크레 그림의 아이로 치환시켜 보면 어떨까? 그간 김도진을 비롯한 여당, 군대, 국정원의 비호를 받으며 무리없이 대통령 직을 수행하던 이동휘가 그림 속에서 자기 보다 큰 언니, 오빠들이 밀어주고 끌어주는 아이에 해당되었다면, 이제 그 그림이 걸린 복도에서 비장하게 걸어가는 이동휘 대통령, 98년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이동휘 대통령은 그림 속과 같은 누군가 보호해 주는 시절과 이별이자,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는 홀로서기에 나선 대통령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음, 김도진 일행을 만나러 간 방안에는 그 유명한 렘브란트의 [야간 순찰]이 붙여져 있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민병대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와 그 대원들이 모금을 하여 의뢰한 그림으로 원제는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의 중대]이지만 그 보다는 어두운 배경과 그 배경에 감싸인 듯 어둡게 처리된 인물들로 말미암아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그림이다. (하지만 실제 이 그림의 배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낮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주인공이 된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들은 대장은 귀족, 그리고 부대원들은 부과금을 감당할 재력을 지닌 상인들로 구성된 부대로, 총을 지니고 발포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자위권을 가진 부대였었다. 즉 17세기 당시 자본주의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던 암스테르담의 자본가 그룹의 상징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그림 앞에 자리한 이동휘를 비롯한 네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은 98년 당시 국가 부도 위기에 줄어든 국방 예산을 빌미로 양진리 사태를 일으킨 주범들이다. 그들은 국가 부도 사태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각자 다국적 기업인 팔콘의 이익을 위해, 혹은 그 자신이 주인인 재신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삭감된 국방 예산을 되찾기 위해, 화해 국면으로 변화되는 정국의 경색을 위해 등 각자의 이익을 위해 북한 강성 지도부를 접촉하여 양진리 사건을 도모한다. 팔콘의 개라고 지칭된 이동휘가 당당하게 그러면 당신들은 누구의 개냐고 되물었듯이, 그들은 대의적 명분으로 내걸은 것과 달리, 이동휘가 지적하듯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탐하기 위해 무고한 양진리의 사람들과 군인들을 희생시킨 사람들인 것이다.  

기세도 등등한 그림 속 자본가 그룹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총도 쏠 수 있는 자위권을 획득했다. 그들의 이해와, 그 그림 앞에 앉아 각자 자신의 주판알을 튕기는 네 사람은 다르지 않다. 더구나, 17세기의 자본주의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의 다른 이름이 식민주의라는 것을 안다. 자신들의 무한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해, 신대륙을 강탈하고, 무고한 사람들은 죽인 무한 이기주의 자본가 그룹의 초상, 그것은 바로 [쓰리데이즈] 속 네 사람의 실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김은희 작가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나서는,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자랑스레 집단 초상으로 남겼던 17세기 부르조아지들의 모습을 통해,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이는 일도 불사할 그룹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4. 3. 25. 18:09

믹키 유천은 아이돌 시절부터 감성이 남달랐다. 그 또래 소년, 혹은 청년들에게, 그 아버지 세대처럼 일생에 세번 울어야 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울음이 남들 앞에 쉽게 드러내놓기엔 어쩐지 나약해 보이는 감정 기제로 받아들여 지는 것과 달리, 그는 쉽게 잘 울곤 했다. 음악 프로그램에서 1등을 했을 때도, 그룹이 위기에 빠졌을 때도, 길고 힘들었던 일본 활동 후에 도쿄돔에 섰을 때도, 그는 자신의 소감을 맑은 눈물로 대신했고, 그의 눈물을 소녀팬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리고 이제, 배우가 된 박유천은 울지 않는다. 대신 그의 눈물은 tv속 그가 연기하는 주인공들이 대신 흘려주고, 소녀팬들 대신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린다. 


박유천의 전작 <보고싶다>에서도 그랬다. 흔히 드라마에서 눈물은 여주인공의 몫이거늘, 드라마 <보고싶다>에서 눈물로 화제를 끈 것은 한정우 역의 박유천이었다. 14년 만에 처음 수연이인 듯한 여자를 보고 빗속에서 흘리던 눈물, 그녀가 자기라면 너부터 죽이겠다는 말을 듣고 그녀의 엄마가 싸다 준 도시락을 먹으며 토해내던 눈물이 화제가 되었었다. 마치 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이 그가 아이돌 시절부터 박유천의 감성이 무엇인지를 조사하기로 한 것처럼 그의 눈물을 적재적소에 써먹고 있다. <쓰리데이즈>도 다르지 않다. 

(사진; 시사 포커스)

1회, 드라마가 시작되자 마자 한태경이 된 박유천은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대통령 경호관으로써의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대통령의 시장 방문 수행에 나섰던 한태경은 VIP의 포인트를 놓치는, 즉 대통령을 몸으로 막아야 하는 경호관의 기본도 놓치고,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뒤로 미루고 경위서를 작성하고 나오던 한태경은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눈물을 흘린다. 그저 하늘을 바라보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 하지만 한태경은 씁쓸한 미소를 지을 듯 말듯하며 그 눈물을 닦아낸다. 

그리고 5회, 다시 한태경이 눈물을 흘린다. 
이번엔 흑흑거리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절규한다. 아니라고 말해달라며 보호를 받으며 가는 대통령을 쫓으려 한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경호실장을 경호관이라는 신념에 따라 쏘고, 대통령에게 던진 질문에 대통령이 양진리 사건과 관련된 특검의 수사가 틀리지 않다는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1회 한태경이 흘린 눈물은 담백한 슬픔이다. 아버지를 여의 아들의 슬픔, 그리고 아버지로 인한 걱정 때문에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그럼에도 아버지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회한의 눈물이다. 정류장에 앉아, 한 방울 흘러내리기도 전에 닦아내는, 하지만 보는 사람은 저 사람이 지금 얼마나 침통해 하는 가를 공감하기에 충분한 눈물이었다. 엄밀하게 1회의 눈물은 그저 슬픔이다. 직무를 다하지 못했지만, 대통령은 그저 밀가루 세례를 받았을 뿐이고, 자신은 경위서만 작성하면 되는 정도의 실수이고, 아버지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에게 아버지는 존경스러운 분이었다. 

하지만 5회 그는 자신의 손으로 경호실장을 쏘았다. 한태경이 행동을 할 때마다 함께 오버랩되는 경호실장의 지시 사항에서도 알수 있듯이, 경호실장은 그의 또 다른 아버지다. 경호관이라는 직무에 들어선 그를 보살펴 주고, 방향을 제시해준 정신적 아버지 같은 존재다. 그런 사람을, 한태경은 스스로 쏘았다. 그는 이미 그 전에 알았다. 자신의 아버지와 대통령이 양진리 학살 사건에 주모자임을 하지만 경호관으로 훈련된 그는 대통령이 누군인지 상관없이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경호실장이 가르쳐 준 메뉴얼에 충실했다. 하지만, 그 다음 대통령에게 들은 대답은 그에게 안그래도 자기 스스로 정신적 아버지 같았던 사람을 스스로 쏘았다는 충격에 빠진 한태경을 또 한번 흔든다. 자신이 존경했던 친아버지의 세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태경은 통곡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그의 세계는 온전히 남아 한태경을 지켜주던 1회와 달리, 5회 한태경에게는 친아버지의 정신적 유산도, 그리고 신념을 만들어 준 경호실장도 이젠 그에겐 혼돈의 그것일 뿐이다. 자신이 의지해 왔던, 자신을 떠받치던 세상이 무너진 것이다. 

장르물이라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쓰리데이즈>의 한 축은 지탱하고 있는 것은, 눈물어린 한태경의 정서이다. 대뜸 1회부터 눈물을 흘리며 시청자들을 한태경의 시선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5회에 이르러, 그의 통곡을 통해 어찌보면 억울한 경호실장 함봉수의 죽음을 애도한다. 드라마는 한 축에서 대통령과 그의 정적들 사이에 피튀기는 두뇌 싸움이 벌어지는 한편, 다른 한편에서 한태경의 슬픔과 고뇌의 흐름을 병존하여 가고, 여타 장르 드라마와 달리 감정적 공감대를 진하게 불러들인다. 슬픔과 고뇌가 현실태로 드러나는 액션씬은 액션을 위한 액션을 넘어 하나의 감정씬처럼 시청자들에게 전율을 일으킨다. 말간 눈물을 흘리던 믹키 유천은 이제 그저 배우 박유천이 되어, 한태경으로 깊은 감성 연기를 보인다. 

(사진; 무비조이)

신화 속 영웅 들은 아버지가 없다고 한다.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떠난 주인공들은 결국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때로는 아버지를 죽이곤 한다. 신화학에서, 이런 살부의 메시지를, 성장으로 해석한다. 아버지의 세계에 발목이 붙들려서는 아들은 성장할 수 없다는 뜻이며 아버지의 세계를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준비하고 만들어 간다. 

그런 신화 속 주인공들 처럼, <쓰리데이즈>의 한태경의 아버지들은 죽었다.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는 죽고, 그가 만들어놓은 세계는 파괴되었으며, 경호관으로서 정신적 아버지였던 경호실장은 경호관으로서 그가 신념처럼 믿었던 세계를 뒤흔들고 그의 손에 죽어갔다. 하지만 아직 그에게는 상징적 아버지가 한 사람 더 남았다. 대통령, 그가 지켜야 하는 대통령, 세대적 상징인 아버지이다. 결국 그 아버지를 뛰어넘어 자신의 세계를 만들며 성장하는 이야기, 그것이  <쓰리데이즈>가 될 것이다.


by meditator 2014. 3. 21. 01:35

드라마의 재방송이란 어떤 의미일까?

주말 혹은 일요일 한 나절 무료하게 거실을 뒹굴다 손에 잡힌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돌리다 어쩌다 눈을 맞추게 되는 그래서 시간 때우기 식으로 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닐까. 아니 그 조차도 이젠 자기가 보고 싶은 시간에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젊은 층들에게는 별 의미가 닿지 않는 시간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주말과 일요일, 약속을 차치하고라도 자리를 지키며 텔레비젼 앞을 사수해야 할 이유가 생길 지도 모른다. 본방 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재방송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바로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의 재방송이 그것이다. 

<쓰리데이즈>는 5,6일 본방에 이어 9일 1시 5분부터 시작된 재방송을 회 별로 종결 없이, 광고도 없이, 1,2회를 연달아 방송하는 연방을 했다. 본방 방영 당시, 1회가 드라마의 도입부라 친절한 설명을 위해 극의 흐름이 늘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2회는 그에 비해 장르극으로서의 박진감이 살아났다는 평가를 받았던 <쓰리데이즈>는 일반적으로 드라마들이 재방 시간을 위해 편의적으로 그래서 때로는 흐름이 끊길 정도로 장면을 들어내는 성의없는 편집을 하는 것과 달리, 연방을 위한 1,2회의 톤을 맞춘 편집을 해냄으로써, 재방 그 자체로 마치 한 편의 완결된 스토리를 가진 영화와도 같았다는 호의적 평가를 얻었다.

(사진; 쓰리데이즈의 한태경; 스포츠 월드)

그런 성의를 다한 재방송 덕분인지 그 다음 주 상승세를 이어간 쓰리데이즈는 결국 13일에 동시간대 시청률 1위의 쾌거를 달성했다. 그런 <쓰리데이즈>를 벤치마킹이라도 하듯이 같은 장르물임에도 불구하고, <쓰리데이즈>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낮은,  10%에 못미치는 시청률에 고전하고 있던 <신의 선물>도 15일 3,4회를 연방으로 방송하기에 이른다.

물론 연방이 모든 드라마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다. 중간에 광고도 없이 한 호흡으로 드라마를 끌고 간다는 것은 자칫 드라마가 별 내용이 없거나, 지루해질 경우 오히려 이어진 다음 회까지 시청자들을 끌고가기는 커녕, 중간에 이탈하는 숫자를 배가시키는 위험성을 가지기도 한다. 즉,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의 '연방'이란 일정 정도 제작진의 입장에서 드라마의 내용 자체로 시청자들을 설득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반영이기도 하다. 실제로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의 경우, 장르물을 좋아하거나, 드라마를 즐기는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방영이 되기도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기대작들이었으며, 매회, 드라마의 수준과 퍼즐같은 내용을 두고 수많은 리뷰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던, 단지 그에 비해 대중적 관심만이 부족한 그런 드라마들이었기에 연방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구나 장르물의 경우, 추리에 추리를 거듭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중간 유입이 어려운 난점을 가지고 있는데, <쓰리데이즈>의 경우, 재방송 연방을 통해 극을 사건 중심으로 보다 명확하게 편집해 냄으로써, 중간 유입층의 증대를 가져왔다. 또한 지금까지 지난 회의 설명이나, 앞으로의 사건 전개를 위한 포석으로 상대적으로 늘어진 홀수 차와, 그에 반해, 사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상대적으로 스릴 넘치는 짝수 회차를 함께 이어붙여, 한 편의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가짐으로써, 본방을 본 사람들 조차 재방이 본 것을 또 본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맛을 가진 작품으로 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여, 보고 또 봐도 재미있는 드라마란 입소문을 만드는데 일조하게 되는 것이다. 

(사진; 신의 선물; 한겨레 신문)

또한, <쓰리데이즈>나, <신의 선물>의 경우, 장르물의 특성상 남여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급박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와중에, 섣부른 감정 양산을 오히려 드라마의 독이 되는 상황에서 본방에서 어설프게 끼어든 남녀 주인공 사이의 발라드 ost가 재방에서는 가차없이 삭제된 처럼, 이미 본방을 통해 방영되었지만, 다양한 사이트를 통해 올라왔던 시청자들의 요구 사항을 수용, 노력하는 제작진의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그저 보는 시청자층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시청자층으로 시청자들을 적극적으로 견인해 내는 자세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본방을 통해 드러난 문제점들이 해결되어짐을 보임으로써 드라마적 완성도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줘 시청자들의 호의적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렇게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의 재편집된 연방으로써의 재방은, 방송 트렌드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시도이다. 그저 시간 때우기 용 재방이 아니라, 재방이 그 자체로 새로운 재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등장한 것은, 방송가에서는 보기 드문 시도이다.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본방 시간조차 맞추기 빠듯한 제작 환경에서, 그리고 안이하게 대중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트렌디한 작품들이 반복 제작되고 있는 상황에서, 용기있게 장르극을 편성하고, 또 그 장르극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본방에 이은, 재편집된 연방이라는 시도는 장르극의 발전을 위해 노력의 일환으로 고맙기 까지 하다. 부디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가 좋은 성과를 거둬서, 그에 뒤이은 야심찬 시도를 하는 드라마들이 많이 제작되기 바란다. 


by meditator 2014. 3. 16. 16:25

대통령 이동휘 역을 맡은 손현주 씨가 인터뷰에서 당부했었다. 4회까지 봐달라고. 

손현주라는 배우가 결코 식언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드라마 <쓰리데이즈>는 4회에 이르러 증명한다. 4회에 이르러 이 드라마는 그간 3회 까지 진행되어진 이야기들이, 그저 본 게임에 앞선 에필로그였음을, 진짜 이야기는 이제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의 장엄한 팡파레가 울려퍼지듯이 웅장하게 펼쳐보인다. 

그렇다고  <쓰리데이즈>가 3회까지 펼쳐놓은 이야기들이 결코 소박하지는 않았다. 1회 서민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시장으로 나섰던 대통령이 다짜고짜 밀가루 세례를 맞는가 싶더니, 세 발의 총성과 함께 대통령이 사라졌다. 대통령 암살 음모를 파헤치는 이야긴가 싶더니, 불현듯 암살범이 전면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시 다른 각도로 펼쳐진다. 암살 위험을 피해 도망간 것으로 여겨졌던 대통령은 음어의 비밀과 함께 피치못할 이유로 단 한 명의 수행원을 대동한 채 청주역에서 특별 검사를 만나려 했단다. 

그리고 드디어 4회, 3회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장황하게, 때로는 번잡스럽게 진행되었던 이야기들은 응집력을 가지고 한 곳으로 모아진다. emp탄의 무차별 공격으로 사고를 만난 대통령은 의도하던 만남을 이루지 못했고, 특별 검사는 주식 조작 과정에 개입한 대통령의 비리를 조사하던 과정에서 발견한 탄핵감의 과오를 만천하에 밝힌다. 3회까지 몰두했던 대통령의 암살은 또 다른 거대한 음모 혹은 사건의 발화점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다. 


3회 까지의 과정에서 절대악은 경호실장이었다. 사실을 밝힌 한태경에게 대뜸 총구를 들이밀은, 당당하게 자신의 거쳐였던 경호관저 2층에서 대통령을 겨누었던 그의 존재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4회에 들어, 그가 대통령을 죽이려 했던 98년의 사건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한태경의 아버지를 비롯한 자신의 측근들에게 진실을 가릴까 두렵다는 토로를 했던, 정신이 혼돈한 과정에서도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되뇌이는 대통령의 말에서, 우리가 그간 알아왔던 드라마적 진실이 시험대에 오른다. 

대통령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밝히고자 하는 사실이 진짜 진실이라면, 사명감을 가지고 폭로에 앞장선 특검의 진실은 무엇이며, 지켜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며 암살에 앞장선 경호실장의 진실은 또 어떤 것인가 의문을 남긴다. 만약 순조롭게 암살이 진행되어다면, 특검의 발표대로 모든 혐의를 뒤집어 쓴 당사자가 되어버린 대통령을 만드는 거대한 세력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진다. 한 개인의 사명감에서 시작된 암살 시도가 대통령조차도 필요에 따라 제거해 버리려 하는 거대한 국가 전복 음모로 변모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국가적 음모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기에 드라마 <쓰리데이즈>가 그저 여느 블록버스터 급 장르물과 다르게 전율을 느끼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 스포츠 한국)

하지만 <쓰리데이즈>의 매력은 단지 회를 거듭하며 스케일을 키워가는 블록버스터급 이야기의 스케일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안에서 놓치지 않는 고뇌하고, 고민하고, 그리고 싸워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있다. 3회의 단 한 장면 등장했던 대통령이 기차 안에서 신참 경호원 한태경과 만들어 내는 훈훈한 장면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듯이, 거창한 이데올로기와, 막연한 불의가 아닌, 진실을 향해 순수하게 나아가는 인간의 본성,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며 빚어내는 인간미가 거대한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힘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심어준다. 결코 자기 자신 대신 누군가를 총알받이로 만들 대통령이 아니란 비서실장의 단언처럼, 긴박했던 사건들 속에서, 오래 뇌리에 남는 것은, 유언처럼 되새기게 되는 대통령의 나직한 하지만 단호한 진실을 밝히겠다는 선언이다. <싸인>, <유령>을 이어, <쓰리데이즈>까지 이어지는 이제는 '갓은희'라 칭송받는 작가 김은희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쓰리데이즈>는 또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아버지 세대의 과오로 인해 펼쳐진 사태에 휘말려 들어간 우직한 경호관 한태경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고군분투기다. 아버지 세대의 과오를 알고, 그것을 시정하려는 누군가와 그것을 막으려는 세력 사이에 던져진 아들 세대의 고뇌와 결정은, 곧,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실천적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재미는 있지만, 결국 보고 나면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괴로운 드라마가 될 것이다. 하지만, 단 4회 만에 기꺼이 <쓰리데이즈>가 요구하는 고행을 기꺼이 감내하게 만드는 드라마, 그것이 이제 비로소 시작된 <쓰리데이즈>의 힘이다. 


by meditator 2014. 3. 14. 02:07

장르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요즘 처럼 행복한 시절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장르극이라고 한다면 미드(미국 드라마)나 일드(일본 드라마)를 다운받아보거나, 그게 아니라면 케이블을 찾아 헤매야 하는 처지일 터인데, 요즘은 당당하게 월화수목 장르극을 공중파에서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3월 들어 새로이 시작한 sbs의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가 그것이다. 보통 한 방송사에서, 그것도 월화 수목 드라마를 연달아 장르물을 편성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용감하게 sbs는 <신의 선물>에 이어, <쓰리데이즈>를 편성했다. 두 드라마는 비록 아직 시청률 면에서는 발군의 성과를 거두고 있지 못하지만, 젊은 시청자 층을 중심으로 웰메이드라는 이른 평가를 받으며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선전 중이다. 


하지만 같은 장르물이라고 해도 두 드라마의 궤적은 다르다.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 두 드라마의 장르물로서 따로 또 같은 묘미를 찾아보자.



1. 사건의 단초- 내 피붙이의 죽음을 파헤치는 주인공들
<신의 선물>에서 수현의 하나 밖에 없는 딸 샛별이가 연쇄 살인범에게 납치 되어 죽음에 이르렀다. <쓰리데이즈>의 경호관 한태경의 아버지는 정체을 알 수 없는 트럭에 쫓기다 교통사고가 나서 죽음에 이르렀다.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의 두 주인공들은 누군가의 엄마로, 누군가의 아들로, 자신들의 피붙이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사건에 뛰어든다.
하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두 드라마의 방식은 다르다.

<신의 선물>의 엄마 수현은 자신이 세심하게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딸이 죽은 강가에 몸을 던지지만, 그건 엄마에게 딸이 죽음에 이르른 2주 전으로 시간을 거스르는 '타임 슬립'의 계기가 된다. 엄마 수현은 딸이 죽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딸이 죽지 않을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반면 <쓰리데이즈>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한태경의 아버지 한기준이 사고를 당한 날로부터 3일 간의 사건을 그려낸다. 사건이 일어나기 3일 전, 사건이 일어나고 3일, 그리고 그 후의 3일 까지의 3일 단위의 날짜들이 전쟁의 서막, 결전, 심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긴박하게 전개된다. 

딸을 잃을 지도 모를 엄마의 절박함, 순식간에 아버지를 잃은 경호관의 슬픔이, 장르극이라는 특정 분야를 넘어, 보편적 감성으로서의 공감을 호소하며 시청자들을 유인한다. 

2. 사건의 확산- 피붙이의 죽음을 넘어선 미궁 속으로 
하지만 내 혈육의 죽음을 파헤치고자 시작한 두 주인공들의 행보는 개인적 해원을 넘어 더 큰 범죄의 도가니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된다. 

과거로 돌아 온 수현은 주변 사람들에게 미래에서 일어날 일을 이야기해 보지만 마이동풍이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엄마 수현이 선택한 방법은 샛별이을 데리고 도망치는 일이다. 하지만, 샛별이와의 도망도, 엄마가 버린 아이의 물건이 돌아오듯 결국 다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다. 결국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범인이 샛별이를 제물로 삼기 전에 앞장서 연쇄 살인범을 잡는 것이다. 

<쓰리데이즈>의 한태경은 아버지의 죽음이 경찰의 조사대로 그저 졸음 운전에 의한 우연한 교통 사고로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 발견한 흐트러진 집, 방금 누군가 빼내 간 듯한 기밀 문서, 그리고 자신의 집을 다녀간 대령의 죽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대령이 바로 시장에서 대통령에게 밀가루를 던지라 지시했던 인물로 밝혀지며, 필연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의심하게 되고, 죽어가던 대령이 암시한 대통령의 암살 음모에 끼어들게 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암살 음모를 밝히려 뛰어든 태경은 암살자의 신분을 알게 되는 바람에 오히려 암살 음모의 조력자로 쫒기는 처지에 까지 놓이게 된다. 

딸이 죽기 까지 2주라는 시간에 쫓기는 엄마, 대통령의 암살범으로 쫓기는 경호관, 두 주인공들이 시간과, 사람 들에 쫓기면 쫓길 수록 장르극으로서의 두 드라마의 재미는 배가된다. 


3. 장르극의 묘미-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가는 사건들
두 시간 짜리 영화라면 몰라도 16부작 정도의 긴 호흡의 드라마를 장르극으로 끌고 간다는 건 상당한 모험이다. 그래서 케이블 등에서 방영되는 장르극 들은 대부분 전체적인 긴 호흡의 중심이 되는 줄거리에, 각 회차 별 해결이 되는 짤막한 사건들을 얹어서 감으로써, 그 문제점을 해결한다.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는 그런 장르극의 호흡에서 오는 문제점을 각각 자신만의 드라마적 묘미를 통해 해결해 나가고자 한다.

<신의 선물>에서 엄마 수현은 적극적으로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에 개입한 결과 범인을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추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다, 건물에서 떨어지는 범인의 손을 맞잡게 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4회 마지막 엄마 수현은 그가 죽어야 자신의 딸이 살아난다는 것을 깨닫고 범인의 손을 놓는다. 그렇다면, 이미 4회를 통해 엄마가 그토록 애닳아 하던 사건이 해결되는 것일까? 하지만 4회에 이르러 오히려 드라마는 복잡해 진다. 엄마 수현이 개입한 사건들에게 제 아무리 엄마가 애를 써도 결국 피해자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결국 어쩌면 샛별이의 죽음도 막을 수 없지 않을까 라는 불길한 복선이 드리우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타임 슬립 하기 전 굴뚝같이 믿었던 범인이 사실은 범인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오히려 엄마 수현이 사건에 개입하면서, 샛별이의 납치 사건은 그 이전에 알려진 사건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그려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전혀 다른 얼굴이 비춰지기 시작하며 드라마는 다른 궤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쓰리데이즈>는 전체적으로 한태경의 아버지의 죽음과 대통령의 암살 음모라는 두개의 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2회 만에, 대통령의 암살범을 밝히는 배짱을 보인다.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꼬이고 돌아서 범인을 밝히는 것과 달리, 범인이 누군지를 밝히고, 오히려 주인공이 암살범의 조력자로 몰리며 쫓고 쫒기는 역할의 방향이 역전된다. 뿐만 아니라, 단 2회에 불과했는데도, 2회 동안 시청자들이 보았던 것을 의심하고 다시 돌이켜 복습하게 만드는 집중력을 발휘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미 2회에서 시장통 밀가루 해프닝의 목적이었던 대령의 음어 쪽지 전달이, 사실은 다른 메시지였다는 것을 3회에 드러냄으로써 드라마는 또 다른 행선지를 밝힌다. 대통령은 사라지고 없는데, 대통령이 나타날 지도 모를 청주역에 암살범과, 경호관들과, 그리고 한태경이 모이는 기막힌 퍼즐의 한 조각이 맞춰진다. 하지만, 겨우 몇 회지만 시청자들은 안다. 이것이 또 다른 퍼즐의 시작이라는 것을. 이렇게 한 회, 한 회 친절하게도 공개되는 퍼즐들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아 <쓰리데이즈>의 충실한 '닥본' 시청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4. 장르극의 재미 그 이상의 주제 의식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가 대단한 것은 우리나라 공중파 드라마에서 보기 드물게 장르극을 뚝심있게 밀어붙인 것만이 아니다. 

1회에서 양심적 변호사로 나오는 아버지와 그 못지 않게 의협심이 강한 어머니로 등장한 주인공 부부의 이율배잔적인 삶의 행태와, 대통령의 사형제도를 내세운 강성 정치적 공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드라마가 그저 엄마가 살해된 딸의 죽음을 막는 단순한 사건에 머물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 사회 엘리트 지식인이자, 중산층인 엄마가, 딸의 사건을 파헤지면서 조우하게 된 진실의 영역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신의 선물>의 잠재력이다. 

<쓰리데이즈>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경호실장은 그것을 밝힌 경호관에게 선언한다. 대통령은 지켜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 나라의 수반의 존재를 부정하고 들어가는, 그렇게 부정을 당하는 대통령이 주변 사람들 몰래 자신의 임기 마지막에 목숨을 걸고 하려던 일은 또 무엇이었는지,  이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지점이 어디인지 그것 역시 백척간두의 그것 마냥 아득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복선은 3회 대통령 이동휘가 집어든 책 [높고 푸른 사다리]라는 공지영의 책이 대신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지킬 것은 무엇인가? 인간으로서의 삶에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는 책의 소개문이 어쩌면 이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는 드라마의 형식적 측면에서도 근자에 우리 나라 드라마가 해왔던 시도를 한 발 더 뛰어넘은 용기를 낸 작품들일 뿐만 아니라, 그 주제 의식에 있어서도 공중파 드라마로서는 보기 드물게 묵직한 정치 사회적, 심지어는 철학적 수준의 질문들을 던지는 좋은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분명 이 드라마를 편성하는 측에서도, 이 드라마들이 그간 sbs를 끌어왔던 트렌디한 드라마들에 시청률로 버금가리란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처럼, 이 두 드라마는 여느 통속적 드라마들이 받는 시청률 운운의 평가만으로는 아쉽다.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이 보아주면 감사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게 미흡하더라도, 2014년 대한민국 드라마 사의 한 획을 그을 소중한 드라마들임에는 분명할 것이라 지레 설레발을 떨어본다. 




by meditator 2014. 3. 13. 02:12

과연 동일한 드라마가 맞을까 싶게 2회를 연 <쓰리데이즈>는 그 내용만큼이나 진행에 있어서도 반전이었다. 

마치 프롤로그라도 되는 양 세 번의 총성이 울리기 까지 등장인물들의 처한 상황을 느슨하게 1회가 보여준 것과 달리(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두 명의 인물이 살해되며 사건의 복선이 깔리지만), 2회는 세 발의 총성과 함께 대통령의 실종에서 암살을 시도한 인물까지 밝혀내며 한 코스를 단숨에 달려 버린다. 16부라는 드라마 동안, 대통령의 암살 시도가 굵직한 미스터리로 갈 거라는 시청자의 안이한 기대를 단숨에 짓밟아 버리며. 

(사진; 스타 투데이)

제작 발표회에서 함봉수 실장 역을 맡은 장현성은 우스개 소리로 친구인 하지만 늘 드라마에서 몸을 쓰는 역에 익숙한 비서실장 역의 윤제문을 두고, 헷갈리지 말라고 자신이 경호실장임을 밝혔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헷갈리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을 통해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온 경호실장 역의 장현성이 가장 먼저 실체를 밝히는 악역이 될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1회에서도 경호실을 찾아와 위협적으로 책임을 묻는 윤제문이나, 심지어 2회에서 경호실장 옆에서 연신 눈을 돌리며 의심가는 표정을 짓는 경호 본부장 역의 안길강을 의심할 지언정, 1회부터 충실히 대통령의 경호에 여념이 없는 경호실장 함봉수를 의심할 순 없었다. 심지어 드라마 공홈의 인물 관계도에서 조력자로 표시되는 함봉수가 단 2회만에 대통령 암살범으로 등극(?)함으로써 이제 <쓰리데이즈>에서는 주인공 한태경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믿을 사람이 없어져 버린다. 

하지만 믿을 사람이 없어지는 것만이 아니다. 대통령을 저격한 범인이 함봉수 임이 밝혀진 순간, 한태경에게 총을 겨누며 함봉수는 말한다. 대통령은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사실 2회의 드러난 반전이 대통령을 지키는 핵심인 경호실장이 암살범이었다는 사실이라면, 내적 반전은, 한 나라의 수장인 대통령이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함봉수의 선언이다. 그의 단언으로 드라마는 대통령의 암살을 밝히는 단순 미스터리에서 한 발 더 깊게 들어간다. 

김은희 작가의 전작 <싸인>에서부터 작가는 정의로워야 하지만 정의로울 수 없는 사회적 존재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싸인>에서는 법의학이라는 수단을 권력으로 이용하는 이명한(전광렬 분)과 법의학을 수호하는 윤지훈(박신양 분)의 대립을 내세웠다. <유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적 영역이 되어야 할 정보를 사적 이익을 위해 휘두르는 조현민(엄기준 분)과 그에 대항하는 사이버 수사대의 김우현(소지섭)이 등장한다. 

<쓰리데이즈>는 보다 더 직설적이다. 단 2회 만에 대통령을 지켜야 하는 것을 목숨과도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경호실장이 대통령을 저격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를 그저 나쁜 놈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의 말인즉슨, 대통령이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놈이란다. 그 순간, 그의 방식은 부적절했지만, 그의 선택은 또 다른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문제가 된 '기밀 문서 98'의 내용이건, 혹은 함봉수가 피력한 바의 논리이건, 대통령이 정말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인물이라면 모든 비극의 시작은 표피적인 암살 사건이 아니라, 대통령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쓰리데이즈>란 드라마는 보여지는 암살 사건을 넘어 또 다른 궤도를 가진 드라마로 재시동을 걸게 된다. 

김은희 작가가 느끼는 우리 사회의 문제는 어떤 직위, 그 중에서도 특히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직업적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채 그것을 사적 이해로 농단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이 법의학을 농락하는 그 누구든, 정보를 전횡하는 그 누구든, 심지어 국가를 농단하는 그 누구든, 결국 본질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직위와 역량을 들고 타인을 농락하려 드른 사람들은 우리 사회 처음부터 아래까지 너무도 익숙한 현상이다. 그런 그들에 맞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며  자신이 맡은 바 직업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싸인>에서 윤지훈의 죽음이 놀랍고 감동스러웠던 것은 법의학적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죽음조차 불사했다는 그 지점이다. 개인적 원한이나, 집단적 복수가 아니라, 순수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그 직업적 헌신이다. 그리고 그 죽음이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그것이 죽음을 걸고서야 가까스로 얻어지는 어려운 난제라는 자각때문일 것이다. 

(사진; 해럴드 경제)

그런 윤지훈에 못지 않게  '애국가만 들어도' 눈물이 차오르는 순혈의 정의남 한태경은 이제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의 딜레마는 김은희 작가 작품의 전작들 주인공들 보다 더 어렵다. 그의 직업인 경호관과,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어떤 사람 혹은 세력, 그리고 앞으로 밝혀지게 될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대통령 사이에서 직업적 윤리와, 사적 원한, 그리고 그를 앞서는 역사적, 혹은 그 이상의 도덕적 윤리 앞에서 고뇌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켜야 할 사람이 지킬 가치가 없다면, 그를 지켜야 하는 한태경의 선택은? 함봉수와 같은 길을 걸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지켜야 하는가? 아버지의 임종을 앞에 두고서도, 그리고 장례식을 미뤄두고라도,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한태경에게 던져진 선택은 곧 이 드라마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질문이다. 시청자들은 고뇌하는 한태경과 함께,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의 소용돌이에 함께 휘말리게 될 것이다.



by meditator 2014. 3. 7.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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